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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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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화(1376년 ~ 1433년)는 조선 시대의 승려이다. 21세에 승려가 되어 전국을 순례하며 수행했고, 봉암사 중수를 마치고 58세에 열반했다. 그는 《현정론》을 통해 숭유억불 정책을 비판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옹호했고, 유교와 불교의 윤리적 조화를 시도했다.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근본이 같다고 보며 상호 보완과 화합을 강조했다. 저서로는 《현정론》, 《원각경소》 등이 있다. 가평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과 함허대사부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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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화
기화
이름기화
출생1376년
사망1433년
국적한국
종교불교
종파한국 선종
스승무학

2. 생애

21세 때 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3][2] 이듬해 회암사의 자초대사로부터 법요(불교 의식)를 배운 뒤,[3][2] 전국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에 힘썼다.[3] 이후 공덕산 대승사, 천마산 관음굴, 가평 현등사 등 여러 사찰에 머물며 강설하고 수도하였다.[3] 세종 대에는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기도 했으며, 회양산 봉암사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58세로 열반하였다.[3]

2. 1. 수행과 편력

21세 때 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3][2] 이듬해 회암사의 자초대사로부터 법요(불교 의식)를 배운 뒤,[3][2] 전국명산을 두루 돌아다니고 돌아와 수도에 전념하였다.[3]

이때부터 공덕산의 대승사, 천마산의 관음굴, 불회사 등지에서 강설하였고, 모산의 연봉사 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3]

세종 2년(1420년) 45세 때에는 오대산에 들어가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월정사에 머물렀다.[3] 이때 왕명에 따라 대자어찰에 머물기도 했으나, 4년 뒤 이를 사양하고 물러나 길상산, 공덕산 등 여러 산을 두루 다녔다.[3]

세종 9년(1427년)에는 가평의 운악사와 현등사에 머물렀는데, 현등사에서는 3년간 머물렀다.[3] 이후 세종 13년(1431년)에 회양산으로 가 봉암사를 중수하였고,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3]

2. 2. 가평 현등사

세종 9년(1427년)에 가평 운악산현등사에 머물렀다.[3] 그는 현등사에서 3년간 머물다가 세종 13년(1431년)에 회양산으로 가서 봉암사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3]

2. 3. 봉암사 중수와 열반

세종 9년(1427) 가평 현등사에 머물며 3년간 지내다가, 세종 13년(1431)에 회양산으로 가 봉암사를 중수하였다. 이후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3]

3. 사상

기화는 여러 오도송(悟道頌)을 통해 자신의 (禪) 사상을 드러냈다. 그는 "그 자리에 가 눈을 드니 10방(十方)에 푸른 하늘이요, 무(無) 속에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臨行擧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라고 읊었으며, 또 다른 시에서는 "감연공적(湛然空寂)하니 본래는 한 물건도 없고, 신령한 빛이 빛나니 10방을 환히 꿰뚫는다. 다시 몸과 마음이 있어 저 생사(生死)를 받을 리 없으니, 가고 오고 왕복함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도다(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之 洞撤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心無墨)"라고 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했다.[3]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책에 맞서 불교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불교가 사람들의 불필요한 감정(情)을 버리고 본래의 맑은 심성(性)을 밝히도록 이끄는 가르침임을 강조하며, 이를 맑은 바람(淸風)이 구름을 걷어내는 것에 비유했다. 또한 당시의 억불 정책을 비판했다.[3]

나아가 기화는 불교유교의 윤리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아 조화를 시도했으며, 유교, 불교, 도교 삼교(三敎)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라고 보아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상호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

3. 1. 불교의 가르침 옹호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책에 맞서 불교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저술한 《현정론(顯正論)》에서 기화는 불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3] 그는 이 책에서 불교의 목표가 사람들이 불필요한 감정(情)을 버리고 본래의 맑은 심성(性)을 밝히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정이 성품에서 나오는 것을 마치 구름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에 비유하고, 감정을 버리고 성품을 밝히는 것은 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불교가 마치 맑은 바람(淸風)처럼 감정의 구름을 걷어내고 청명한 마음의 하늘을 드러나게 한다고 역설했다.[3]

또한 당시의 억불책을 비판하며, "불교는 비유컨대 청풍이 뜬 구름을 쓸어 버리는 것과 같다. 또렷하게 보기를 소망하면서도 청풍을 싫어함은 이상한 일이다"라고 지적하며 불교 탄압 정책의 부당함을 꼬집었다.[3]

기화는 나아가 불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며 두 사상의 조화를 시도했다. 그는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5상(五常)이 불교의 5계(五戒)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았다. 또한 유교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불교의 수행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유교 학자들이 비판하는 불교의 윤회전생설에 대해서도 기화는 그 교화적 가치를 들어 옹호했다. 그는 설령 천당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천당 이야기를 듣고 (善)을 행하기를 사모하고 지옥 이야기를 듣고 을 저지르기를 두려워한다면, 이는 백성을 교화하는 데 큰 이익이 된다고 설명했다.[3]

결론적으로 기화는 유교, 불교, 도교 세 가르침이 근본적으로는 하나이며 서로 통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들 사상이 서로 배척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상호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교·불교·도교 세 가르침이 말하는 바는 은연중에 서로 들어맞아 하나가 되니, 마치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말했다.[3]

3. 2. 유교와 불교의 윤리적 조화

기화는 불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를 조화시키려 하였다. 그는 유가(儒家)에서 중요시하는 오상(五常)이 불가(佛家)의 오계(五戒)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유교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불교의 수행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3]

또한, 유가에서 불교의 윤회전생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설령 천당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善)을 행하고 (惡)을 멀리하게 된다면, 이는 백성을 교화하는 데 큰 이익이 된다고 반박하였다.[3]

나아가 기화는 유교, 불교, 도교 삼교(三敎)의 근본은 같다고 보았다. 그는 세 종교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상호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 삼가의 말한 바는 은연중에 서로 맞춰져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으니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하였다.[3]

3. 3. 유불선 삼교 통합

기화는 유교, 불교, 도교 세 종교의 근본이 같다고 보았으며, 이들이 서로 배척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상호 보완하고 종합되어 화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3] 그는 "유 · 불 · 선 삼가의 말한 바는 은연중에 서로 맞춰져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으니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표현하며 삼교의 조화를 강조했다.[3]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화는 불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유가(儒家)에서 중요시하는 5상(五常)이 불가(佛家)의 5계(五戒)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설명했다.[3] 나아가 유교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 수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또한 기화는 당시 유교 학자들이 비판하던 불교의 윤회전생설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설령 천당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천당을 바라며 (善)을 행하고 지옥을 두려워하여 (惡)을 멀리하게 된다면, 이는 백성을 교화하는 데 큰 이익이 된다고 설명했다.[3] 이러한 기화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책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변호하고 다른 사상과의 조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4. 저서

저서에 《유석질의론》, 《현정론》, 《원각경소》, 《금강경오가 설의》, 《함허당어록》,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3], 《금강경오가해설의》 등이 있다.

5.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Buddhist Syncretic Philosophy http://www.acmuller.[...] Bulletin of Toyo Gakuen University 1995-03
[2]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조선전기의 사상 > 조선전기의 종교사상 > 기화 https://ko.wikisourc[...]
[3]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조선전기의 사상 > 조선전기의 종교사상 > 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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