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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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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두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이다. 1949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소년 시절부터 절도 등 범죄에 연루되었다. 1975년 8월부터 10월까지 광주, 무안, 서울, 평택, 구리, 군포, 수원 등지에서 노부부, 부부, 아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강도 행각을 벌였다. 체포 후 사형을 선고받고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범죄는 영화와 팟캐스트 등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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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두
기본 정보
체포 후 촬영된 김대두의 사진 (날짜 미상)
이름김대두
원어 이름金大斗
출생일1949년 11월 17일
출생지영암군, 전라남도, 대한민국
사망일1976년 12월 28일
사망지서대문형무소, 서울, 대한민국
사망 원인교수형
신장160 cm
체중50 kg
혈액형B형
종교무종교 → 개신교
범죄 정보
죄명연쇄살인, 연속살인
형량사형
유죄 선고1976년 12월
공범김회운 (제한적)
현황사형 집행 완료
피해자 수17
부상자 수1
범행 시작1975년 8월 13일
범행 종료1975년 10월 7일
사용한 흉기
체포 일자1975년 10월 5일
수감처서대문형무소
유죄 판결살인 x17, 강간 x3, 강도, 강도 미수
범행 장소
지역전라남도, 서울, 경기도
기타
사건 발생 기간1975년 8월 ~ 1975년 10월

2. 범행 이전

김대두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형제 중 맏이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넷이 있었다.[3] 부모의 기대와 달리 명문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기술도 얻지 못해 열등감에 휩싸였다. 소액 절도 등 범죄를 저질러 투옥되었고, 출소 후에는 전과자라는 꼬리표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다.[3]

2. 1.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김대두는 1949년 11월 17일 전라남도 영암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제 중 맏이였으며,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넷이 있었다.[3] 김대두의 부모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대도시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켜 해외 유학까지 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시험에 낙방했고, 고소득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그 결과, 김대두는 열등감에 휩싸여 소액 절도 등의 범죄에 손을 대게 되었고, 결국 폭행 및 증거인멸 혐의로 투옥되었다.[3] 출소 후, 김대두는 공장 노동자로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고, 자신을 억울하게 대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다.[3]

2. 2. 범죄 경력

김대두는 1949년 11월 17일 전라남도 영암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제 중 맏이였으며, 아래로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네 명이 있었다.[3] 김대두의 부모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대도시의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켜 해외 유학까지 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시험에 낙방했고, 고소득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3] 그 결과, 김대두는 열등감에 휩싸여 소액 절도 등의 범죄에 손을 대게 되었고, 결국 폭행 및 증거인멸 혐의로 투옥되었다.[3] 출소 후, 김대두는 공장 노동자로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고, 자신을 억울하게 대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다.[3]

3. 범행 과정

김대두는 1975년 8월부터 10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전라남도경기도 일대에서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범행은 광주에서 시작되어 무안군, 서울, 평택, 구리, 군포, 수원 등 여러 지역에서 이어졌다.[1]

3. 1. 범행 시작 (1975년 8월)

1975년 8월 13일, 김대두는 광주에서 노부부의 집에 침입하여 절도를 시도했다.[1] 그 과정에서 김대두는 남편을 살해하고 아내에게 중상을 입힌 후 밤에 도주했다.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김대두는 27세의 전과자 김회운을 만났고, 김회운은 그의 다음 범행에 가담하는 데 동의했다.

6일 후, 두 사람은 무안군 몽탄의 한 상점에 들어가 상점 주인인 노부부와 7살 손자를 살해했다.[1] 살인 후, 그들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현금으로 가득 찬 집을 털 계획이었지만, 서울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헤어졌고, 김대두는 혼자서 강도 살인을 계속했다.

3. 2. 서울 및 수도권 일대 범행 (1975년 9월 ~ 10월)

1975년 9월 7일, 김대두는 서울 중랑구의 한 가정집에 침입하여 60세 남성을 살해했다.[1] 9월 25일에는 평택 근처 외딴 시골로 가서 노부인과 세 명의 손주가 사는 집에 침입했다. 김대두는 노부인과 5살, 7살 두 명의 손자의 얼굴을 육절도끼로 마구 내리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켰고, 결국 도끼 자루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런 다음 11살 손녀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강간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근처 나무에 風呂敷|후로시키일본어로 얼굴을 묶어 질식사시켰다.[1]

9월 27일, 김대두는 구리에서 또 다른 가족을 공격하여 젊은 부부와 3살 아이를 살해하고 다른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1] 사흘 후, 그는 군포의 한 가정집에 침입하여 어머니를 강간하고 살해한 후 3개월 된 아기를 때려 죽였다.[1]

10월 2일, 김대두는 수원에서 젊은 부부를 공격하여 두 사람 모두를 살해했다.[1] 다음 날, 그는 수원의 골프장에서 캐디를 살해하려 했지만 피해자는 살아남았다.[1] 김대두는 서울로 도주하여 도봉구에서 만났던 다른 전과자를 공범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김대두의 소지품을 훔쳐 도망치려 했고, 김대두는 그를 잡아 죽이고 그의 청바지를 훔쳤다.[1]

4. 체포 및 수사

체포 이틀 후, 김대두는 현장 검증을 위해 살인 현장을 재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검증 과정에서 을 씹으며 큰 소리로 웃는 등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3] 수사 결과, 김대두는 의도적으로 돈이 적은 외딴 가난한 집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는 경찰이 중산층이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강도 사건에 더 집중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김대두의 총 피해 금액은 26800KRW이었다.[3]

4. 1. 체포 경위

김대두는 피살자의 혈흔이 묻은 청바지를 입은 채 청량리역 근처의 빨래방에 가서 세탁하려 했다.[2] 세탁소 주인 하근배(당시 26세)는 혈흔이 너무 많은 이유를 묻자, 김대두는 친구와 싸우다 코피가 났다고 주장했다.[1]

하근배는 코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혈흔에 의심을 품고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두는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1] 경찰서에서 그는 처음에는 친구와 싸움으로 인한 혈흔이라고 주장했지만, 이후에는 지역 조폭들에게 폭행당했다고 진술을 바꿨다. 경찰은 그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지역 조폭들을 조사했지만, 모두 김대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경찰은 김대두가 살인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혈흔의 진짜 원인을 밝히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김대두는 범행을 자백하고 공범 김회운을 지목했고, 김회운도 곧 체포되었다.[2]

4. 2. 수사 과정

김대두는 피살자의 혈흔이 묻은 청바지를 입은 채 청량리역 근처의 빨래방에 가서 세탁하려 했다.[2] 26세의 세탁소 주인 하근배가 혈흔이 너무 많은 이유를 묻자, 김대두는 친구와 싸우다 코피가 났다고 주장했다.[1]

하근배는 코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혈흔에 의심을 품고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두는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1] 경찰서에서 그는 처음에는 친구와의 싸움으로 인한 혈흔이라고 주장했지만, 이후에는 지역 조폭들에게 폭행당했다고 진술을 바꿨다. 그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은 여러 지역 조폭들을 조사했지만, 모두 김대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경찰은 김대두가 살인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혈흔의 진짜 원인을 밝히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김대두는 범행을 자백하고 공범인 김회운을 지목했고, 김회운도 곧 체포되었다.[2]

체포 이틀 후, 김대두는 현장 검증을 위해 살인 현장을 재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검증 과정에서 을 씹으며 큰 소리로 웃는 등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3] 수사 결과, 그는 주로 돈이 적은 외딴 가난한 집을 표적으로 삼았는데, 경찰이 중산층이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강도 사건에 더 집중했던 것과는 달리 김대두는 의도적으로 가난한 집을 노린 것으로 보였다. 총 피해 금액은 26800KRW이었다.[3]

5. 재판 및 처벌

김대두는 재판에서 살인, 강간, 강도 및 강도미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4]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하여 자신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회개했다.[5] 이후 1976년 12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1]

5. 1. 재판 과정

초심에서 김대두와 해운은 모두 살인, 강간, 강도 및 강도미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4] 이후 재판에서 해운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 재판부는 그가 한 건에만 관여했고 김대두에게 강요당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김대두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회개했다고 한다.[5]

5. 2. 김대두 사형 집행

김대두는 살인, 강간, 강도 및 강도미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4]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했고,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회개했다고 한다.[5]

1976년 12월 28일, 변호사 이상혁의 형량 감형 청구 및 유사 사건 예방을 위한 사건 재검토 요청에도 불구하고 김대두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 사형 집행 직전, 김대두는 유언장을 남겨 사법 제도가 소액범과 위험한 상습범을 분리하여 초범들이 추가 범죄를 배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5]

6. 사회적 영향 및 평가

김대두 연쇄 살인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여러 대중 매체에서 재조명되었다. 2017년에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보통 사람''이 개봉되었고, 2019년에는 팟캐스트에서 이 사건을 40회 방송으로 다루었다.[2]

6. 1. 대중 매체에서의 재조명

2017년,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보통 사람''이 개봉되었다. 김봉한 감독은 영화 개봉 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많은 모순이 있으며 김대두가 무죄일 가능성을 시사했다.[2]

2019년, 한국의 살인 사건들을 다루는 팟캐스트에서 40회 방송으로 김대두 사건을 다루었다.

6. 2. 비판적 시각

2017년,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보통 사람》이 개봉되었다. 김봉한 감독은 영화 개봉 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많은 모순이 있으며 김대두가 무죄일 가능성을 시사했다.[2]

2019년, 한국의 살인 사건들을 다루는 팟캐스트에서 40회 방송으로 김대두 사건을 다루었다.

7.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사건 분석 (별도 항목)

김대두 사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 분석한 별도의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조

[1]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연쇄살인범 김대두 사형집형 https://www.donga.co[...] 2007-12-28
[2] 뉴스 김대두, 그는 정말 연쇄살인범이었을까 https://www.hani.co.[...] 2017-04-08
[3] 뉴스 [그때의 사회면] 사건(6) 김대두 연쇄살인 https://www.seoul.co[...] 2017-09-25
[4] 뉴스 김대두에 사형구형 https://news.joins.c[...] 1975-11-17
[5] 뉴스 '비뚤어진 질주'의 끝, 함께한 가정주부 http://www.ohmynews.[...]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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