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근
1. 개요
김문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헌종 시대에 선공감 가감역을 시작으로 현감을 역임했다. 철종 즉위 후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영은부원군에 봉해지고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철종의 상담역을 맡아 군사 요직을 겸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경평군 이호의 유배와 이하전의 사형을 주도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1863년 사망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묘비명을 직접 짓기도 했다.
| hangeul: 칭호:영은부원군 hanja: 称号:永恩府院君 hiragana: しょうごう:えいおんふいんくん katakana: シンホ:ヨンウンブウォングン | |
| hangeul: 호:충순 hanja: 号:忠純 hiragana: ごう:ちゅうじゅん katakana: ホ:チュンスン | |
| hangeul: 자:노부 hanja: 字:魯夫 hiragana: あざな:ろふ katakana: アザナ:ロフ | |
| 본명 (한글) | 김문근 |
|---|---|
| 본명 (한자) | 金汶根 |
| 본명 (히라가나) | きん・ぶんこん |
| 본명 (카타카나) | キム・ムングン |
| 추가 정보 | 포물부원군 |
| 다른 사람 | 국상, 충청북도 단양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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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출생 -
윌리엄 H. 수어드
윌리엄 H. 수어드는 뉴욕 주지사,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알래스카 매입에 기여한 미국의 정치인이다. -
1801년 출생 -
존 헨리 뉴먼
존 헨리 뉴먼은 19세기에 활동하며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고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여 추기경이 되었으며, 종교, 교육, 철학 분야에 기여하고 1991년 존경받는 인물로, 2019년 시성되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병사한 사람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병사한 사람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2. 생애
김문근은 1841년(헌종 7) 음보로 선공감 가감역에 부임한 후 현감을 역임했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붕어했을 때, 후계자가 없어 풍양 조씨와 격렬하게 논쟁했고, 안동 김씨 일족은 밀담으로 이하전, 흥선군 이하응, 이원범 (후일 철종)을 최종 후보로 내세웠다. 김문근은 이원범을 추대했는데, 강화도에서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 김씨는 이원범을 덕완군에 봉작하고, 곧바로 국왕으로 책봉했다.
1851년(철종 2) 딸이 왕후로 책봉되자, 김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작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벼슬과 영돈녕부사 작위를 받았다. 이때부터 국구로서 제2차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의 정치 기반을 강화했다. 철종의 상담역이 되어, 호위를 위해 금위대장·총융사·훈련도감대장 등도 역임했다. 1860년 대사헌 서대순은 상소를 올려, 철종과 친교가 있고 후계자로 주목받던 경평군이 안동 김씨를 비판했다며 처벌을 주장했다. 김문근은 철종에게 압력을 가해, 경평군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종정부 속적 및 경평군의 작호를 삭제했다. 또한 돈녕부 도정 이하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다.
1849년 섭정이 된 김문근은 왕족을 역적으로 몰아 세도 정치의 기반을 강화했고, 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863년 철종 말년에 사망하자, 철종은 부의 일부를 하사하고, 성복일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냈으며, 3년간 녹봉을 지급하고, 예장을 치르게 한 뒤 영의정에 추증했다.
2.1. 어린 시절 및 가계
1801년 11월 25일에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장악원정 김이장(金履長)이다. 생부는 부사 김인순이고 생모는 신일식(申日式)의 딸 평산 신씨인데,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목사 김이순에게 입양되어 문곡 김수항 가문의 봉사손이 되었다. 친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김수근이고, 김병학, 김병국 형제의 삼촌이 된다. 김수항의 6대손으로, 5대조는 김창집, 고조부는 김제겸이다. 증조부 김성행은 경종 때 연잉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형조판서를 지낸 이용수의 딸 연안 이씨와 결혼했으나 일찍 사망하여, 증 연양부부인에 추증된다. 이후 민번현의 딸 여흥 민씨와 재혼하여 흥양부부인에 봉작된다. 흥양부부인 여흥 민씨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철인왕후 김씨이다.
2.2. 관직 생활
金汶根중국어은 1841년(헌종 7) 음보로 선공감 가감역에 부임한 후 현감을 역임했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붕어했을 때, 후계자가 없었기에 풍양 조씨와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안동 김씨 일족의 밀담으로 세 명의 최종 후보가 나타났다. 최종 후보는 이하전, 흥선군 이하응, 이원범(후일 철종)이었다. 김문근은 이원범을 추대했는데, 그 이유는 강화도에서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 김씨 내부에서는 좋은 조건이라 하여 이원범을 덕완군에 봉작했고, 직후 국왕으로 책봉했다.
1851년(철종 2)에 딸이 왕후로 책봉되면서, 김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작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 석고와 영돈녕부사의 작위를 얻었다. 이 무렵부터 국구로서 제2차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의 정치 기반을 강화했다. 또한 철종의 상담역이 되어, 호위하기 위해 금위대장·총융사·훈련도감대장 등도 역임했다. 호위에 만전을 기했으나, 철종의 사촌인 경평군 이호를 세자로 책봉하는 등의 상담은 전혀 무시했다. 1860년 대사헌 서대순이 상소를 제출하여, 철종과 친교가 있고, 후계자로 주목받던 경평군은 안동 김씨를 비판했다고 처벌을 주장했다. 이 일로 김문근이 철종에게 압력을 가해, 어쩔 수 없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종정부의 속적 및 경평군의 작호를 삭제했다. 이 외에 돈녕부 도정 이하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다.
1849년 김문근은 섭정이 되어, 왕족을 역적으로 배제해 나가면서 세도 정치의 기반을 강화했고, 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철종 말년에 해당하는 1863년에 사망했고, 철종은 부기 일부를 하사하고, 성복일에는 승지를 보내 제사를 치르고 3년간 녹봉을 지급하면서, 예장을 치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3. 철종의 국구
1851년(철종 2년) 딸 철인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자, 순원왕후에 의해 국구(國舅)로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그 뒤 상의원제조, 금위대장, 단사대장(舟師大將), 총융사, 훈련대장 등의 군사 요직을 맡아 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김좌근, 김수근 등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의 새로운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며, 영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이때 안동 김씨 세력은 조야에 크게 떨쳤다.
이 무렵부터 국구로서 제2차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의 정치 기반을 강화했다. 또한 철종의 상담역이 되어, 호위하기 위해 금위대장, 총융사, 훈련도감대장 등도 역임했다.
1860년 철종의 친삼촌이자 족보상 5촌인 풍계군 이당의 양자 경평군 이호가 판중추부사 김좌근 등과 그를 비판했다. 이때 그와 김좌근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경평군 이호는 사헌부대사헌 서대순의 탄핵, 처벌 상소를 받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뒤 군호를 박탈당하고 풍계군의 양자 자리에서 파양되었다.
2.4. 생애 후반
1862년 비변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병석에 누운 사위 철종이 죽기 한 달 전인 1863년 11월 6일 사망했다. 그는 실력과 능력, 재주 없이 집안의 힘으로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서예에 능하여 철종의 생조모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과 생부 전계대원군의 묘비문의 글을 직접 짓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그의 조카인 김병국과 김병학 형제와 밀계를 맺고, 김병학의 딸을 왕비로 앉힌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집권한 뒤 안동 김씨와의 간택 약속을 파기했다.
1862년 돈녕부 도정 이하전이 세도가를 비판했다가 역모로 몰리자, 상소를 올려 이하전을 빨리 처분하라고 청하였다.
2.5. 사후
그가 죽자 철종은 왕명을 내려 그의 장사에 쓸 부의(賻儀) 일부를 보내고, 성복일에는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예장(禮葬) 등속은 전례대로 하게 했다. 또한 특별히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게 했다. 11월 7일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春秋館成均館觀象監事)에 추증되었다. 몸이 비대하여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묘비문은 김병국이 썼고 1864년(고종 1) 1월 비석이 세워졌다. 후일 1873년(고종 10) 조카 김병학이 추가 사항을 새로 새겼다.
처음에 경기도 과천군 갈현에 안장했다가 뒤에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167-1, 아랫새재 마을 입구 우측 야산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소 근처에는 고조부 김제겸의 묘소가 있다.
4. 가계
5. 작품
김문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김포 통진에 있는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명
* 전계대원군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