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 (1821년)
1. 개요
김병학(1821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5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사간 등 언관직을 거쳐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지냈으며, 철종실록과 대전회통 편찬에 참여했다. 척화론자로서 천주교 금지를 주장하는 한편,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를 주도하기도 했다. 고종 즉위 후 영돈녕부사를 역임하며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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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안동 김씨 |
|---|---|
| 자 | 성오(聖오) |
| 호 | 하정(霞亭) |
| 출생 | 1821년 |
|---|---|
| 사망 | 1899년 |
| 아버지 | 김이재 |
|---|---|
| 어머니 | 정부인 평산 신씨 |
| 배우자 | 정부인 남양 홍씨 |
| 자녀 | 2남 3녀 |
| 형제 | 김병시 김병국 김병기 김병필 김병덕 |
| 주요 관직 |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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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사망 -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1831년 노예제 즉각 폐지를 주장하는 주간지 《리베레이터》를 창간하고, 미국 반노예제 협회를 설립하여 노예제 폐지 운동을 이끌었다. -
1879년 사망 -
아이작 버트
아일랜드 교회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적인 법조 경력을 쌓은 연합주의자 정치인 아이작 버트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겪으며 아일랜드 자치 정부 협회와 자치 연맹을 설립하여 아일랜드 자치 운동을 이끌고 영국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치를 위해 노력했으며, 아일랜드 연방제에 대한 견해를 담은 저서를 남겼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생애
김병학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 시기부터 흥선대원군 집권기, 그리고 고종 친정 시기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1853년 과거에 급제한 후, 안동 김씨 세도 정치 하에서 요직을 역임하였다. 흥선군과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고종 즉위 후 취소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일족이 대거 축출되었지만, 김병학은 흥선대원군과의 인연으로 중용되었다. 1864년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승진했다.
철종실록, 대전회통 편찬에 참여하였고,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금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1875년 영돈녕부사에 올랐다. 그는 일본의 의도를 경계하여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2.1. 관직 생활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 사간 등 삼사(三司)의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에서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흥선군은 그의 딸과 그의 일족 김병문의 딸 등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고종 즉위 후 세도가문 출현을 우려하여 김문과의 혼약을 모두 취소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불우한 처지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극진히 대우하여, 고종 즉위 이후에도 계속 요직에 등용되어 1864년(고종 1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뒤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김좌근 등과 함께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원왕의 명을 받아 찬집소(纂集所) 총재관으로 조두순, 이유원과 함께 대전회통 편찬에 참여하여 《대전회통》 간행을 지휘하였다.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흥선대원군이 가톨릭을 이용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를 공동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이 인심을 잃고 실각한 이후, 의정부영의정을 거쳐, 1875년(고종 12년)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한일수호조약 체결을 극력 반대하였다.
2.2.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흥선군은 김병학의 딸과 그의 일족 김병문의 딸 등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고종 즉위 후 세도가문 출현을 우려하여 이들과의 혼약을 모두 취소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으로 안동 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김병학은 불우한 처지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극진히 대우하였기에 고종 즉위 이후에도 요직에 등용되어 1864년 이조판서, 이후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흥선대원군이 가톨릭을 이용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를 공동 주도하기도 하였다.
2.3. 주요 정책 활동
18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사간 등 삼사의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에서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으로 안동 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을 극진히 대우하여 고종 즉위 이후에도 계속 요직에 등용되어 1864년 이조판서, 뒤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김좌근 등과 함께 실록총재관으로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원왕의 명을 받아 찬집소(纂集所) 총재관으로 조두순, 이유원과 함께 《대전회통》 편찬 및 간행을 지휘하였다.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흥선대원군이 가톨릭을 이용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야합하여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를 공동 주도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의정부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한일수호조약 체결을 극력 반대하였다.
3. 가계
김병학은 안동 김씨 가문으로, 고조부는 증이조판서 김원행이다. 증조부는 김이직, 할아버지는 목사 김인순이다. 양아버지는 백부 김준근이고, 친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이다. 동생은 영의정 김병국이며, 작은아버지는 영의정 김문근(9촌숙 김이순에게 출계)이다. 사촌으로는 김병필이 있다.
3.1. 가족 관계
4. 평가
김병학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 가톨릭을 이용하려는 정책에 반대하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을 주도하고, 1875년에는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한일수호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한 척화론자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도 정치에 참여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한 점은 비판받기도 한다.
4.1. 긍정적 평가
흥선대원군 집권 시 가톨릭을 이용하려는 정책에 반대하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금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을 주도하였다. 1875년에는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한일수호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