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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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위영은 1682년 숙종 때 설치된 조선의 오군영 중 하나로, 수도 방어와 국왕 호위를 주요 임무로 수행했다. 효종의 북벌론 이후 군대 규모와 재정 부족, 수도 방위 강화 등의 배경으로 설치되었으며, 훈련도감의 기병대와 정초군을 통합하여 편성되었다. 금위영은 삼군문의 하나로,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수도 방어를 담당했으며,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 따라 도성과 궁성의 수비, 순찰, 경비, 맹수 포획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754년 금위대장 임명 이후 병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중앙 군영으로 운영되었으며, 1881년 장어영에 흡수, 1895년 군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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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위영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국가 | 조선 |
소속 | 조선군 |
종류 | 수도군 |
역할 | 수비군 왕실 경호 |
규모 | 14,098명 |
지휘 구조 | 오군영 |
주둔지 | 한양 |
해산 | 1881년 |
역사 | |
창설 | 1682년 (숙종) |
관련 전투 | 해당사항 없음 |
부대 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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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 조선은 사회 재건 과정에서 군사 제도에 큰 변화를 겪었다. 기존의 오위(五衛)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군영들이 설치되었다.[1] 숙종 초, 조선은 효종 대의 북벌론 추진으로 인한 군사력 강화와 재정난에 직면했다. 특히 상비군인 훈련도감 운영 비용은 큰 부담이었다.[14][15] 이러한 상황에서 훈련도감 일부와 현종 때 설치된 정초영을 통합, 번상군(番上軍)으로 운영되는 금위영이 설치되어 군비 절감과 수도 방위 강화를 꾀했다.[16] 노론 김석주는 병조판서로서 중앙군 장악을 위해 금위영을 자신의 영향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했다.[16]
2. 1. 설치 과정
1682년(조선 숙종 8년) 영의정 김수항의 제안으로 금위영 설치 논의가 시작되었다.[13][2] 당시 조선 중앙군 운영의 가장 큰 문제는 효종의 북벌론 이후 비대해진 규모에 비해 재정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14] 훈련도감은 장기 복무하는 상비군인 장번군(長番軍)으로 운영되어 지속적인 급료 지급이 필요했고,[15] 삼수미 등의 별도 재원을 조달했으나 재정 압박이 컸다. 이에 훈련도감을 번상군(番上軍)으로 운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중앙 상비군 유지 명분 때문에 훈련도감 인원 일부와 정초영을 통합하여 번상군으로 운영하는 금위영을 설치하게 되었다.[16]훈련대장을 겸하고 있던 병조판서 김석주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2] 군제변통절목(軍制變通節目)에 따라 훈련도감의 기병대인 훈련별대와 정초영의 군사인 정초군을 통합하였다.[17] 이로써 훈련도감의 정원은 5천 명으로 고정되었고, 금위영은 번을 서는 정군(正軍) 14,098명과 이들의 여비 등을 충당하기 위한 보인(保人) 78,000명 규모로 설립되었다.[17][2]
금위영 설치에는 군비 감축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효종 때부터 숙종 초까지 심각한 재난이 이어져 중앙 재정이 부족했고, 효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북벌 준비 강화로 군사비 지출도 증가하였다. 또한, 수도 방위 강화의 필요성과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석주의 정치적 영향력도 작용하였다. 김석주는 병조가 조직된 군사를 직접 통제하기를 원했고, 금위영은 그 감독을 가능하게 하였다.[1]
금위영은 숙종 8년(1682년) 병조 소속으로 설치되었으나,[1] 1754년(조선 영조 30년) 금위대장이 임명되면서 병조와 분리된 독립 중앙 군영이 되었다.[18]
3. 역할
《육전조례》에 따르면, 금위영은 도성과 궁궐의 경비, 순라, 군포(軍鋪) 호위, 척후 및 복병, 금송(禁松), 준천(濬川), 착호(捉虎)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16] 이 외에도 왕의 행차 호위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정찰 및 매복 임무도 수행했다. 왕이 도성 밖에 머물 경우,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하고, 예비 병력을 배치하기도 했다.[1]
금위영의 임무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 군사적 임무: 도성과 궁궐 방어, 궁궐 경비, 순찰, 팔군창(八軍倉) 보호, 정찰 및 매복 등이 있다.
- 경찰 임무: 출입 제한 지역 단속 등이 있다.
- 기타 임무: 금표(禁標) 단속, 하천 준설, 호랑이 포획 등이 있으며, 필요에 따라 임시로 수행했다.[1]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삼군문 체제를 이루어 수도 방어를 분담했으며, 이들은 왕을 호위하는 근위대 역할도 수행했다.[20] 금위영 군사들의 임무는 계급과 역할에 따라 다양했으며, 급여를 결정하기 위한 근무일수 계산도 포함되었다.[3]
3. 1. 도성 방어 분담
삼군영은 도성의 성곽과 문루를 셋으로 나누어 방어했는데, 금위영은 서대문인 돈의문부터 남대문인 숭례문을 지나 남소문인 광희문까지 맡았다.[16] 궁궐 역시 셋으로 나누어 방어했는데, 금위영은 주로 창덕궁과 창경궁(동궐)의 서쪽 구역을 담당했다.[1]
4. 조직
금위영은 중앙 관료 조직과 군사 조직의 두 가지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앙 정부 기관이자 군영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훈련도감 소속 병조(兵曹)의 정초군과 훈련원 소속 경번군(京番軍)을 하나의 군영으로 통합하여 1영(營), 5부(部), 20사(司), 105초(哨)의 편제를 갖추었다. 순환 근무를 위해 10개의 그룹으로 나누었고, 그 운영을 위한 “금위(金衛)”라는 호위부대를 설치하였다.[3] 이후 금위영은 규모가 확장되어 별좌수(별좌수) 10개 분대와 별정초(별정초) 1개 분대 등이 추가되어 총 135개 분대로 구성되었다.[3]
금위영은 한양의 방위와 성곽 및 궁궐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계층적인 조직과 군사적 구조는 임무의 효율적인 조정과 실행을 가능하게 했다. 왕을 호위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주요 군영 중 하나였던 금위영은, 훈련원과 훈련도감과 함께, 전쟁을 담당하는 병조판서가 지휘관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금군(금위군) 기병과 보병이 한 쌍을 이루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1] 군사력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에 집중되었다.[3]
4. 1. 지휘부
1704년 군제 개혁으로 1영-5부-25사-125초로 편제되어 규모가 증가한 금위영의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1][3]직책 | 품계 | 정원 | 비고 |
---|---|---|---|
도제조(都提調) | 정1품 | 1명 | 다른 관원이 겸직[1] |
제조(提調) | 정2품 | 1명 | 주로 병조판서가 겸임[1] |
금위영 대장(大將) | 종2품 | 1명 | 등단 장신(將臣) 중에서 임명[1] |
중군(中軍) | 종2품 | 1명 | 금위영 아장(亞將)[1] |
별장(別將) | 정3품 | 1명 | [1] |
천총(千摠) | 정3품 | 4명 | [1] |
기사장(騎士將) | 정3품 | 3명 | [1] |
파총(把摠) | 종4품 | 5명 | [1] |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 종3품 | 12명 | [1] |
종사관(從事官) | 종6품 | 2명 | 문관 1명, 무관 1명[1] |
초관(哨官) | 종9품 | 41명 | [1] |
교령관(敎令官) | 12명 | 군사 훈련과 교육 담당[1] | |
기패관(旗牌官) | 10명 | [1] |
4. 2. 병력 구성
금위영의 주력 부대는 전국에서 번상하는 번상군이었다. 이들은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어, 2개월씩 교대로 근무했다.[22] 금위영은 훈련도감 등의 장번군을 줄여 재정 압박을 피하는 것이 설치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전국에서 번을 서기 위해 상경하는 번상군들로 운영되었다.금위영의 초기 편제는 1영(營), 5부(部), 20사(司), 105초(哨)였으나,[23] 1704년 군제 개혁으로 어영청과 규모를 같이하여 1영, 5부, 25사, 125초로 확대되었다.[23] 조선 시대 군사 편제는 최상위 집단인 영(營) 밑으로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순의 예하 단위가 있었고 대 밑으로는 오(伍)가 편제되었다.[24] 각 편제 단위의 인원은 병사 다섯 명이 1 오, 5 오가 1 대 순으로 늘어나 초의 경우 125명, 파총이 관할하는 사의 경우 최대 편제는 625 명이 된다.
금위영은 5개의 부로 구성된 중앙 군영으로 125초가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속한 정병의 최대 편제 인원은 15,625 명이었다. 이와 별도로 다음과 같은 다양한 병종이 소속되어 있었다.
위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대략 17,000 여 명이 편제되어 있었다.[16]
125초는 각각 25개 초씩 나누어 5초씩 번상하여 한 번에 2개월을 근무하였다.[25] 모든 초가 최대 편제라고 가정하면 상시 병력은 625명 가량이 된다. 금위영 군사는 주로 향군(지방군)과 경기사(경기의 포병) 및 6개 도(평안도, 함경도 제외)의 별파진(별도의 포병) 부대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25개 총 단위로 순환 근무하였다.[1] 즉, 125총에서 25총씩 순환 근무하였으므로, 한 번에 출동하는 향군은 5총에 불과하였다. 한 총에 약 127명이므로, 한 번에 약 635명이 근무에 나섰다.[1] 그러나 이는 향군에만 해당하는 것이며, 향군 외에도 향기사(지방 기병), 별파진(별도의 진압대), 공장아병(기술병) 등 다양한 병과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운영되었다.[1] 경기사(경기의 기병)와 같이 예비대로 활동하는 부대도 있었다.[1] 따라서 한양(수도)에 상주하는 금위영 군사의 수와 특징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1][3]
4. 3. 병과
금위영은 보병, 기병, 포병 등 다양한 병과로 구성되었다. 정병의 최대 편제 인원은 15,625 명이었고, 이와 별도로 여러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들이 있었다.[25]부대 | 역할 | 인원 |
---|---|---|
경기사(京騎士) | 마병 부대 | 150명[25] |
별파진(別破陣) | 화포 부대 | 160명[25] |
공장아병(工匠牙兵) | 무기 등 제조 | 50명[25] |
수문군(守門軍) | 궁궐과 도성의 문 경비 | 12명[25] |
금송군(禁松軍) | 불법 벌채 단속 | 15명[25] |
기타 | 군병 훈련 담당 교사, 군수 물자 운송 담당 치중복마군(輜重卜馬軍), 장교 신부름 담당 소년병 아기수(兒旗手), 예비군 대년군(待年軍), 군포 납부 수포군(守鋪軍) 해서향기사(海西鄕騎士), 잡역 동원 표하군(標下軍) 등 | 교사 10명, 치중복마군 17명, 아기수 48명, 대년군 470명, 해서향기사 700명, 표하군 56명[25] |
5. 청사
금위영 본영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다. 창덕궁의 금호문 밖에 있어 신영(新營)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은사수산장, 이왕직아악부 건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건물 이름 | 위치 | 규모 |
---|---|---|
남영(南營) | 창덕궁 개양문(開陽門) 인근 | 12칸 |
서영(西營) |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서쪽 건너 | 11칸 반 |
남별영 |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동(墨洞) | 139칸 |
남창 | 남별영 남쪽 | 101칸 |
하남창(下南倉) | 남별영 북쪽 | 104칸 |
화약고(火藥庫) | 남창 서쪽 건너 | 17칸 |
직방(直房) | 경희궁 인근 | 8칸 |
6. 재정
금위영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장번군(長番軍) 중심으로 운영되었다.[8] 금위영의 재정은 관보주(官保主), 자보주(自保主), 별파진보(別破陣保) 등 다양한 기금을 통해 관리되었다. 총인원은 약 9만 명에 달했다. 금위영 설치는 국가 재정으로 운영되던 훈련도감을 축소하여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고,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군대와 장교가 증가하면서 재정 부족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납세자에게 부담을 증가시켰다. 후기에는 향군 부대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차 운영 중단되었고,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수포주(세금징수부대)로 대체되었다.[3]
7. 해체
고종 18년(1881년) 군제 개혁으로 장어영에 흡수되었다.[1]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금위영의 군사력이 강화되기도 했으나, 근대적인 군사 제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종 32년(1895년) 군제 개혁으로 영(營)의 개념이 폐지되고 새로운 군제가 수립되면서 금위영은 완전히 폐지되었다.[3]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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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금위영 창설로 오군영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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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지켜라’ 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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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지켜라_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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