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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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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총융청은 조선 인조 때인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수도 외곽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다. 초기에는 도성 외곽 경비를 담당했으나, 병자호란 이후 궁궐 경비와 북한산성 관리까지 업무가 확대되었다. 1747년 북한산성 경비를 전담하면서 병력이 증가했고, 정조 때 장용외영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환원되었다. 헌종 때 총위영으로 개칭되기도 했지만, 1884년 폐지될 때까지 북한산성에 주둔하며 수도 방어 역할을 수행했다.

2. 배경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으로 인조공주까지 피난가야 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 외곽 방어 태세 정비 필요성이 커졌다.[8]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성을 비우고 산성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방어 대책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혔고, 수도 방어 체계 정비가 더욱 큰 과제가 되었다.[9] 후금의 팔기군이 산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진격하자, 인조는 한강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포위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10] 이후 조선은 임금이 도성을 버리는 것보다 북한산성과 같이 서울과 인접한 방어 기지를 세우고 대비하는 전략을 세웠다.[9]

2. 1. 이괄의 난과 도성 방어 체계의 취약성

인조반정 이후 이괄이 공신 배정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인조공주까지 피난가야 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 외곽의 방어 체계 정비 필요성이 커졌다.[8] 이후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산성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외적 방어 방식이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자, 수도 방어 체계 정비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9] 후금의 팔기군이 산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진격하는 전술을 사용하자, 인조는 간신히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포위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10] 이후 조선은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가는 것보다 북한산성과 같이 서울과 인접한 방어 기지를 건설하고 대비하는 전략을 세웠다.[9] 총융청은 창설 당시 도성 외곽 경계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궁궐 경비도 업무에 포함되었고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는 북한산성 관리도 책임지게 되었다.[6]

총융청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이후 수도 외곽 방어의 필요성과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설치되었다. 이듬해 반란군이 경기도 외곽 방어선을 쉽게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하면서 방어 체계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총융청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군영은 사직동의 북이영(北二營)에 설치되었다.[1]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국내외적인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취약성은 후금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조가 이괄의 추격을 피해 공주로 피신해야 했던 상황에서 왕권의 약화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 수호에 초점을 맞춘 총융청이 설치되었으며, 기존의 어영군을 강화하고 경기도에 있는 속오군을 중심으로 총융청을 조직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서는 책임자로 임명되어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라는 직함을 받았다. 2년 6월, 그의 직함은 총융청 기보총융사로 변경되었고, 그의 관할 지역인 경기도는 처음으로 총융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그러나 1669년(현종 10년) 삼청동으로 이전되었고, 1747년(영조 23년)에는 북한산성 관리를 위해 연융대로 다시 이전되어 경기도 수도 북쪽 외곽 방어를 담당했다.[3]

2. 2.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 여파로 인조공주까지 몽진하여야 하였다. 이 일로 서울 외곽의 방어 태세 정비 필요성이 부각되었다.[8] 이후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읍을 비우고 산성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외적 방어 대책이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자 수도 방어 체계 정비가 더욱 큰 과제로 다가왔다.[9] 후금의 팔기군이 산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진격해 오는 전법을 사용하자 인조는 간신히 한강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었고 결국 포위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여야 하였다.[10]

2. 3. 총융청 설치와 방어 전략의 변화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으로 인조공주까지 피난가야 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 외곽 방어의 필요성이 커졌다.[8]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을 떠나 산성에 의지하는 기존 방어 전략은 한계에 부딪혔다. 후금의 팔기군이 산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진격해 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포위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10] 이후 조선은 북한산성과 같이 서울과 가까운 곳에 방어 기지를 만들어 대비하는 전략을 세웠다.[9]

총융청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설치되었다. 이듬해 반란군이 경기도 외곽 방어선을 쉽게 뚫고 서울을 점령하면서 방어 체계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총융청은 처음 설치될 때 사직동의 북이영(北二營)에 설치되었다.[1]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신하면서 왕권의 약점이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왕권 수호에 초점을 맞춘 총융청이 설치되었고, 기존 어영군을 강화하고 경기도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서는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라는 직함을 받고 책임자가 되었다. 2년 뒤 그의 직함은 총융청 기보총융사로 바뀌었고, 경기도는 처음으로 총융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1669년(현종 10년) 총융청은 삼청동으로 이전되었고, 1747년(영조 23년)에는 북한산성 관리를 위해 연융대로 다시 이전되어 수도 북쪽 외곽 방어를 담당했다.[3] 총융청의 주요 임무는 수도를 직접 방어하고 국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후금에 대한 방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도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총융청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농민들을 각 진영의 마을로 유치하여 정착시키고,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개간했다. 부대는 자체적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자급자족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군 계급에 따라 보인(保人) 증서로 급여를 받았다.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재건하고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여 점차 경기 지역 방어를 남한산성과 수어청으로 분담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징병은 주로 서인 세력을 겨냥했다.[1]

인조 4년에 수원 화성이 축조되면서 경기도 남부 방어는 점차 수원 화성으로 이전되었다. 효종 재위 기간 동안 수원 화성은 군영이 되었으며, 수도 북부는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총융청이, 남부는 수원 화성이 관할하게 되었다.[2]

3. 조직

총융청의 군사는 중앙군인 정군과 지방군인 속오군, 그리고 기병대인 별마대군으로 구성되었다.[12] 초기에는 경기 지역의 수원, 양주, 남양, 광주, 장단 등에 예하 군영을 두었으나, 1626년(인조 4년) 경기 남부의 방어는 수어청으로 이관되었다.[8] 설치 초기에는 5영(營)을 두었으나 설치 직후 7영 체계로 재편되었고, 당시 병력 수는 대략 2만여 명이었다.[8] 7영 12부 25사 123초로 재편된 총융청은 각 사의 중초마다 기병인 마군을 두었다.[12]

1646년(인조 24년) 총융청은 궁궐 및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내영과 경기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는 외영으로 나뉘었다. 내영은 다시 좌우 2부로 나뉘어 각각 13개 초를 거느렸다.[8] 초(哨)는 조선군의 기본 편제로, 대략 120-125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2] 외영은 수어청 설립 후 수원, 장단, 양주의 3영제로 운영되었다.[12]

조선은 군역 대상자를 선정하고 번을 돌며 군역을 지게 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유지하였다. 군역을 지는 정병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성이었고,[13] 여덟 개로 나뉜 번이 번갈아 가며 소집되어 한 번 소집되면 2개월을 근무하는 8번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었다.[14] 총융청을 비롯한 오군영도 징집된 병사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번 체계로 운영되었지만,[8]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근위대 역할이 보다 중요한 임무였던 군영은 번을 서는 상번군보다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장번군이 주를 이루었다.[18]

1747년(영조 23년) 여러 조직으로 나뉘어 있던 북한산성의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일원화되면서 최대 1만 9천 1백여 명까지 병력이 늘었다. 본영은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바뀐 탕춘대로 옮겨졌다.

총융청 초기 병력은 향군, 방어군, 별도 기병을 포함하여 약 2만 명이었다. 내부 조직은 2부(6사, 26초)로, 장초 10초, 아병 10초, 둔아병 3초, 둔장초아병 3초로 구성되었고, 각 초에 장교 1명, 중앙군 장교 1명, 천총 2명, 파총 6명, 초관 26명이 배치되었다. 다른 군영에 없는 둔총과 둔아병은 총융사(중앙 군사 본부 후위 부대)일 가능성이 있다.[2]

대한민국 서울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의 문

3. 1. 재정

훈련도감의 재정으로 사용되던 경기지역의 삼수미가 총융청으로 이전되어 재원의 기반이 되었다.[6] 총융청의 책임자인 총융사는 종2품 무관이었으며 창의문 밖에 청사가 있었다. 총융사는 예하 군영을 관리하고, 병조에서 중앙군의 급료 지급을 담당하던 일군색의 관리도 겸임하였다.[11]

총융청의 군사들은 급료와 식비, 그리고 기타 비용을 《총융청사례》(摠戎廳事例)에 따라 지급받았다.[15] 1704년(숙종 30년)에는 내영과 외영을 합쳐 총 1만 3천여 명의 군사가 있었고,[9] 1747년(영조 23년) 북한산성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통합되면서 최대 1만 9천1백여 명까지 증가하였다. 총융청은 자체 조달 비용으로 운영되었으며, 군량은 농지 개간을 통해 확보하고 군 계급에 따라 보인 증서로 급여를 지급받는 자급자족 체제로 운영되었다.

1747년(영조 23년) 본영을 탕춘대(현재의 연융대)로 이전하면서, 총융청의 체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9]

총융청의 편제 (1747년)
진영책임자편제인원
본영총융사 (종2품)장교 및 원역600여 명
각색 표하군852 명
군수보6,500 명
취철아병80명
승영350명
중군관성장 (정3품)아병1사 5초 635 명
수첩군관266 명
별파진200 명
내영진영장 (정3품)아병1부 3사 13초 1,625 명
장초군1부 3사 13초 1,625 명
장단 외영진영장 (정3품)속읍장단, 파주, 교하, 고양, 식녕, 마전, 적성, 연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남양 외영진영장 (정3품)속읍남양, 안산, 과천, 금천, 양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 군수보: 군포를 납부하여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로,[21] 이들의 군포는 총융청 운영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 취철아병: 철광석 채취를 위해 모집된 인원으로,[23] 상평통보 발행 권한을 가진 오군영의 재정 확보에 기여하였다.[22]
  • 승영: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한 승병으로, 숙종 때는 전국 승려가 번을 섰으나 영조 때 징번이 폐지되고 비용 부담으로 대체되었다.[20]

3. 2. 지휘부

총융청의 지휘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4]

  • 총융사 (종2품): 총융청의 최고 책임자로, 창의문 밖에 직청이 있었다. 총융사는 예하 군영을 관할하고 병조에서 중앙군의 급료 수취를 담당하던 일군색의 관리도 담당하였다.[11]
  • 관성장 (정3품): 북한산성 관리를 위해 관성소가 총융청에 편입되면서, 관성장은 총융청의 중군(中軍)을 겸하였다.[16]
  • 진영장 (정3품): 예하 각 진영의 책임자로, 내영은 궁궐 경비를, 외영은 속읍의 행정도 담당하였다.
  • 장교와 원역: 장교는 대부분 양반 출신으로 무과 급제자였고, 원역(員役)은 중인이 맡아 실무를 담당했으며, 각 군영이 자체 선발하였다.[17]


1747년(영조 23년) 당시 총융청의 편제는 아래 표와 같다.[9]

진영책임자편제인원
본영총융사
(종2품)
장교 및 원역600여 명
각색 표하군852 명
군수보6,500 명
취철아병80명
승영350명
중군관성장
(정3품)
아병1사 5초 635 명
수첩군관266 명
별파진200 명
내영진영장
(정3품)
아병1부 3사 13초 1,625 명
장초군1부 3사 13초 1,625 명
장단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장단, 파주, 교하, 고양, 식녕, 마전, 적성, 연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남양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남양, 안산, 과천, 금천, 양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총융청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병종이 있었다.


  • 정군과 표하군: 하급 군인으로, 정군은 실제 전투병력(포수, 사수, 살수 등)이고, 표하군은 잡역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으로 충원되었다.[17]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이 급료를 받는 장번군 중심이었던 반면, 총융청과 수어청은 징병되어 번을 서는 번상군이 주를 이루었다.[18]
  • 아병: 부대 지휘관의 깃발을 들고 호위하는 군사이다.[19]
  • 승병: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한 승려들로, 치영(緇營)이라고도 불렸다.[20]
  • 군수보: 군포를 내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로, 총융청 운영 기금 마련에 기여했다.[21]
  • 취철아병: 철광석 채취 인원으로, 상평통보 발행을 위한 사철 채취가 주 업무였다.[23]
  • 수첩군관: 군보에 등록되어 유사시 동원되는 군관으로, 평소에는 신미(身米)만 납부했다.[24]
  • 별파진: 군사 요충지에 배치된 화기 부대였다.[25]
  • 장초군: 경기 속오군 중 선발된 병력으로, 총융청 내영의 핵심 병력이었다.
  • 치중군: 각 군영의 물자 수송 부대였다.[26]

3. 3. 병력 구성

총융청의 군사는 중앙군인 정군과 지방군인 속오군, 그리고 기병대인 별마대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2] 초기에는 경기지역의 수원, 양주, 남양, 광주, 장단 등에 예하 군영을 두었으나 1626년(인조 4년) 수어청으로 경기남부의 방어가 이관되었다.[8] 설치 초기 예하에 5 영(營)을 두었으나 설치 직후 7 영 체계로 재편하였다. 설치 당시 병력 수는 대략 2만여 명이었다.[8] 7영 12부 25사 123초로 재편된 총융청은 각 사의 중초 마다 기병인 마군을 두었다.[12]

조선은 군역 대상자를 선정하고 번을 돌며 군역을 지게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유지하였다. 군역을 지는 정병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성이었고[13] 여덟 개로 나뉜 번이 번갈아 가며 소집되어 한 번 소집되면 2 개월을 근무하는 8번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었다.[14] 총융청을 비롯한 오군영도 징집된 병사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번 체계로 운영되었지만[8]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근위대 역할이 보다 중요한 임무였던 군영은 번을 서는 상번군 보다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장번군이 주를 이루었다.[18]

1646년(인조 24년) 총융청은 궁궐 및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내영과 경기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는 외영으로 나뉘어졌다. 내영은 다시 좌우 2부로 나뉘어 각각 13개 초를 거느렸다.[8] 초는 조선군의 기본 편제로 대략 120-125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2]

외영은 수어청 설립 후 수원, 장단, 양주의 3영제로 운영되었다.[12] 1704년(숙종 30년) 총융청의 군사 규모는 내영과 외영을 합쳐 1만 3천여 명이었고[9] 여러 조직으로 나뉘어 있던 북한산성의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일원화 된 1747년(영조 23년) 총융청의 최대 편재는 1만 9천1백여명까지 늘었다. 1747년 본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개명하였다. 당시 총융청의 체계는 아래와 같다.[9]

총융청의 편제
진영책임자편제인원
본영총융사
(종2품)
장교 및 원역600여 명
각색 표하군852 명
군수보6,500 명
취철아병80명
승영350명
중군관성장
(정3품)
아병1사 5초 635 명
수첩군관266 명
별파진200 명
내영진영장
(정3품)
아병1부 3사 13초 1,625 명
장초군1부 3사 13초 1,625 명
장단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장단, 파주, 교하, 고양, 식녕, 마전, 적성, 연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남양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남양, 안산, 과천, 금천, 양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 총융사: 총융청의 최고 책임자이자 본영의 수장인 총융사는 종2품이었다.
  • 관성장: 총융청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북한산성의 관리였으며 이를 위해 관성소가 총융청에 편입되었다. 별도의 조직이었던 관성소가 총융청으로 흡수 된 이후 총융청의 중군(中軍)을 겸하였다. 관성장은 정3품의 무관이었다.[16]
  • 진영장: 총융청 예하의 각 진영장은 정3품의 품계로 내영의 경우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였고 외영은 속읍의 행정도 함께 담당하였다.
  • 장교와 원역: 조선 후기 오군영의 장교는 대부분 양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무과에 급제하여 임명되었다. 각종 사무를 맡아보는 실무담당자인 원역(員役)은 중인이 주로 맡았고 품계 외의 직책으로 각 군영이 자체적으로 선발하였다.[17]
  • 정군과 표하군: 하급 군인은 실제 전투병력인 포수, 사수 및 살수 등의 정군(正軍)과 각종 잡역에 배속된 표하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역을 부담하여 징발된 양인들로 충원되었다.[17] 정군은 총융청의 내영과 외영에 배속되었고 본영에는 표하군이 배속되어 행군시 깃발을 들거나 각종 명령의 전달 등을 맡았다. 서울 방어의 핵심이었던 훈련도감어영청, 국왕의 친위대였던 금위영 등에 속한 군사들이 주로 급료를 받는 장번군(長番軍)이었던 것과 달리 총융청과 수어청의 병사들은 징병되어 번을 서는 번상군(番上軍)이 주를 이루었다.[18] 총융청 외영의 보군과 마병은 정군과 함께 속오군이 혼성 배치되었다.[8]
  • 아병: 아병은 부대 지휘관의 깃발을 들고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군사이다.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시작되어 오군영과 각 감영에 배치되었다.[19]
  • 승병: 북한산성 방어의 일부는 승병을 동원하여 담당하게 하였고 승려가 입는 옷의 색에서 유래한 이름인 치영(緇營)으로 불린 이들은 총융사가 직접 관리하였다. 숙종 때에는 전국의 승려가 돌아가며 번을 서도록 하였으나 영조 대에 들어 징번을 폐지하고 대신 비용을 부담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대역하도록 하였다.[20]
  • 군수보: 군수보는 군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이었다.[21] 총융청은 이들의 군포를 수취하여 운영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취철아병: 오군영은 운영 경비와 무기제작 등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마련하여야 하였다. 이를 위해 오군영에는 상평통보의 발행 권한이 주어졌다.[22] 취철아병(吹鐵牙兵)은 철광석을 채취하기 위해 모집된 인원으로 이들의 주 업무는 장연군 등지에서 사철을 모으는 일이었다.[23]
  • 수첩군관: 조선 시대 군역의 다수는 군역 대상을 기록한 군보에 등록되었으나 쌀이나 군포를 세금으로 내고 군역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첩군관 역시 군보제에 등록되어 있으나 평소에는 신미(身米)만 납부하다가 유사시에 동원되는 군관이었다. 숙종 시기 수어청에 먼저 도입된 후 각 군영 모두로 확산되었다. 평소 번을 서지 않기 때문에 봄 가을로 활쏘기 등을 시험하는 도시(都試)를 보아 전력을 점검하였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과거 무과 본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어 자기 훈련의 동기를 부여하였다.[24]
  • 별파진: 별파진은 군사적 요충지에 따로 배치된 화기 부대였다.[25]
  • 장초군: 장초군은 경기 속오군 중에서 가려 뽑은 병력으로 총융청 소속 둔전에서 모집된 아병과 함께 총융청의 내영을 구성하는 핵심 병력이었다.
  • 치중군: 치중군은 각 군영의 물자 수송을 위한 부대였다.[26]


초창기 총융청 병력은 향군, 방어군, 별도 기병을 포함하여 약 2만 명에 달했다. 총융군은 경기도에 정군(正軍), 속오군(束伍軍), 별대마군(別隊馬軍) 등 다양한 병력으로 구성되었다.[2]

내부 조직은 2부(divisions) = 6사(brigades) = 26초(regiments)(장초(壯抄) 10초, 아병(牙兵) 10초, 둔아병(屯牙兵) 3초, 둔장초아병(屯壯抄牙兵) 3초)로 구성되었으며, 각 초에 1명의 장교, 중앙군에 1명의 장교, 천총(千摠)에 2명의 장교, 파총(把摠)에 6명의 장교, 초관(哨官)에 26명의 장교가 배치되어 기본 구성을 이루었다. 특히 다른 군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둔총(屯摠)과 둔아병(屯牙兵)이 존재하는데, 이는 총융사(總戎使), 즉 중앙 군사 본부의 후위 부대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4사(파총 4명) = 20초(초관 20명)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2]

내군들은 10월 15일부터 다음 해 10월 15일까지 3개 군으로 나뉘어 각 군이 4초마다 교대했다. 하지만 근무하지 않을 때는 평민 군사는 6두를, 노예 군사는 3두를 납부해야 했다. 또한, 초총과 같은 배정된 이름을 보면 징집병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군사 임무를 맡으면 제번미를 바쳐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영은 기본적인 조직 구조 외에도 다른 군영과 마찬가지로 훈련관, 군관, 감찰관을 두었다. 여가 활동을 위한 관직(간령궁관, 재자궁관)도 있었으며 잡무를 담당하는 995명의 평민 군사가 있었다.[2]

게다가 "良軍需保"(양군수보)와 "奴軍需保"(노군수보)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6두의 공납을 냈다. 또한 많은 "吹鐵牙兵"(취철아병)과 다수의 "둔전"(둔)이 총융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총융사는 국고가 아닌 자체 조달 비용으로 운영되었다. 군대의 대부분은 지역의 향군 또는 사병으로 구성되어 서울을 내외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했다.[2]

3. 4. 부대 편제

총융청의 군사는 중앙군인 정군과 지방군인 속오군, 그리고 기병대인 별마대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2] 초기에는 경기지역의 수원, 양주, 남양, 광주, 장단 등에 예하 군영을 두었으나, 1626년(인조 4년) 경기남부의 방어는 수어청으로 이관되었다.[8] 설치 초기에는 5영(營)을 두었으나 설치 직후 7영 체계로 재편되었고, 당시 병력 수는 대략 2만여 명이었다.[8] 7영 12부 25사 123초로 재편된 총융청은 각 사의 중초마다 기병인 마군을 두었다.[12]

1646년(인조 24년) 총융청은 궁궐 및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내영과 경기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는 외영으로 나뉘었다. 내영은 다시 좌우 2부로 나뉘어 각각 13개 초를 거느렸다.[8] 초(哨)는 조선군의 기본 편제로, 대략 120-125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2] 외영은 수어청 설립 후 수원, 장단, 양주의 3영제로 운영되었다.[12]

1704년(숙종 30년) 총융청의 군사 규모는 내영과 외영을 합쳐 1만 3천여 명이었고,[9] 여러 조직으로 나뉘어 있던 북한산성의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일원화된 1747년(영조 23년)에는 최대 1만 9천 1백여 명까지 늘었다. 같은 해 본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개명하였다. 당시 총융청의 체계는 아래와 같다.[9]

총융청의 편제 (1747년)
진영책임자편제인원
본영총융사
(종2품)
장교 및 원역600여 명
각색 표하군852명
군수보6,500명
취철아병80명
승영350명
중군관성장
(정3품)
아병1사 5초 635명
수첩군관266명
별파진200명
내영진영장
(정3품)
아병1부 3사 13초 1,625명
장초군1부 3사 13초 1,625명
장단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장단, 파주, 교하, 고양, 식녕, 마전, 적성, 연천
표하군398명
보군20초 2,500명
마병2초 250명
치중군54명
남양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남양, 안산, 과천, 금천, 양천
표하군398명
보군20초 2,500명
마병2초 250명
치중군54명


  • 총융사: 총융청의 최고 책임자이자 본영 수장(종2품).
  • 관성장: 북한산성 관리를 위해 관성소가 총융청에 편입된 후 총융청 중군(中軍) 겸임(정3품 무관).[16]
  • 진영장: 정3품. 내영은 궁궐 경비, 외영은 속읍 행정 담당.
  • 장교와 원역: 장교는 무과 출신 양반, 원역(員役)은 중인 출신으로 군영 자체 선발.[17]
  • 정군과 표하군: 정군(正軍)은 실제 전투병력, 표하군은 잡역 담당(양인 징발).[17] 본영에는 표하군이 배속되어 깃발, 명령 전달 등을 맡았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은 급료를 받는 장번군(長番軍) 중심이었으나, 총융청과 수어청은 징병된 번상군(番上軍)이 주를 이루었다.[18] 외영의 보군과 마병은 속오군 혼성 배치.[8]
  • 아병: 부대 지휘관의 깃발을 들고 호위.[19]
  • 승병: 북한산성 방어 담당(치영(緇營)으로 불림). 총융사 직접 관리. 숙종 때 징번, 영조 때 비용 부담으로 대체.[20]
  • 군수보: 군포를 내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21] 총융청은 이들의 군포로 운영 기금 마련.
  • 취철아병: 상평통보 발행 권한을 가진 오군영은 재원 마련을 위해 철광석 채취 인원(취철아병(吹鐵牙兵)) 모집. 장연군 등지에서 사철 채취.[23]
  • 수첩군관: 군보제에 등록, 평소 신미(身米) 납부, 유사시 동원. 봄, 가을 도시(都試)로 전력 점검, 우수자는 무과 전시(殿試) 응시 자격 부여.[24]
  • 별파진: 군사 요충지 배치 화기 부대.[25]
  • 장초군: 경기 속오군 출신, 총융청 내영 구성 핵심 병력.
  • 치중군: 물자 수송 부대.[26]


초창기 총융청 병력은 향군, 방어군, 별도 기병 포함 약 2만 명이었다. 총융군은 경기도에 정군, 속오군, 별대마군 등 다양한 병력으로 구성되었다.[2] 내부 조직은 2부 = 6사 = 26초(장초 10초, 아병 10초, 둔아병 3초, 둔장초아병 3초)로 구성되었고, 각 초에 장교 1명, 중앙군 장교 1명, 천총(千摠) 2명, 파총(把摠) 6명, 초관(哨官) 26명을 배치하였다. 둔총(屯摠)과 둔아병(屯牙兵)은 중앙 군사 본부 후위 부대일 가능성이 있다.[2]

내영(內營) 체제 정비 전 초기 외영은 7영제 또는 5영제로 운영되었고, 내외영 체제 정비 후 내영은 좌·우 양부제, 외영은 3영제를 따랐다. 수원, 양주를 포함한 경기 외곽 지역 군관 관할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숙종 13년(1687) 무렵 3영제가 확립되었다. 『만기요람』에는 숙종 15년 양주파주로 개칭되었고, 숙종 30년 군제 개편 때 장단으로 바뀌면서 파주 대정(坡州大正)이 등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

숙종 30년(1704) 2영(內營) 체제와 3영(外營) 체제가 3영 체제로 재편되고 내영은 폐지되었다. 중앙영은 3영, 좌·우영은 각각 2영으로 편성되었고, 각 영은 2개 대(隊), 각 대는 5개 초(秒)를 두어 정군(正軍)은 총 15,181명이었다. 군인 및 신입 군인은 군수(軍需)로 지정되었으며, 양인(良人)은 12두(균역법 실시 이후 6두), 노군(奴軍)은 6두를 납부해야 했다. 총 병력은 23,157명으로 군영 체제가 완성되었고, 내영 체제가 3영 체제로 통합되었다. 총융사(總戎使) 군제 안에는 내영 체제 조직이 그대로 존재하여, 총융사 자체가 개념적으로 2영과 3영 형태의 내영 체제(本廳)와 외영 체제(屬營)를 유지하였다.[2]

총융청 군사 조직은 처음 수원, 광주, 양주, 창품, 남양 등 5개 division으로 구성되었고, 각 영(營)에 3개 대(隊), 각 대에 3개 초(哨), 각 초에 3개 패(牌)로 구성되어 총 2만 명에 달했다. 인조 2년(1624년) 11월, 척계광의 "연병실기" 점수제에 따라 7개 영, 12개 대, 25개 초, 123개 패로 개편되어 수도 외곽을 방어했다.[2][1]

청나라의 조선 침략 이후 청나라에 의한 징병이 어영군에서 실시되어 방어 능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강화하기 위해 북도사령부는 내외영 체제로 전환되었고, 인조 24년 총융사 귀련은 북도사령부에서 군사를 선발하여 장초군(壯抄軍), 둔장초(屯壯抄)로 편성, 겨울철 3개월 동안 수도에 주둔시키며 궁궐 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1644년 총융사 구인기는 장초군 10개 대, 둔장초 3개 대를 선발하여 겨울철 3개월 동안 수도에 주둔시키고 궁궐 경계 임무를 맡겼다.[1]

숙종 재위 기간에는 야병(牙兵) 10명이 삼청동 본청(本廳)에 주둔하고, 지역 주민 중에서 선발된 군사 3명이 추가되어 총융청 내에 내영(內營)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 시점부터 총융청은 2개의 내영과 3개의 외영으로 구성되었다.[2] 1674년(숙종 즉위년) 아영(牙營) 10개 대와 둔아영(屯牙營) 3개 대가 총융사에 배속되어 부대 병력이 추가되었고, 내외 군사 체제(內營制)가 확립되었다. 총융군은 내군과 외군, 2개 division으로 편성되었으며, 각 division과 대대에는 훈련 담당관(지곡관(知穀官), 기패관(旗牌官))이 있었다.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중앙군은 파주로 이전되었다.

1750년(영조 26년) 재정적 제약으로 북도사령부는 경기 군과 통합되었고, 본부는 북한산성(북한산성)에 군사 원정 형태로 설치되었다.[1] 1757년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이 총융청으로 이관되어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북부 외곽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2] 영조 26년(1780년) 총융사는 재정난으로 경기병사(京畿兵使)와 임시로 통합되어 북한산성으로 파견되었으나, 36년에는 이전 체제로 복귀했고, 40년에는 잠시 5 division 체제로 변경되었다.[2]

정조 11년(1787년)에는 3 division 체제로 환원되었다. 83개 대대였던 "마(騎兵)"와 "보(步兵)" division은 총 43개 대대로 축소되었으며, division별로 2개 대대씩 편성된 12개 대대의 보병(束伍步軍), 이전 체제에서 기병으로 개칭된 6개 대대의 "별기사", 그리고 중앙 division에 배속된 1개 대대의 "란후군(欄後軍)"으로 구성되었다( "만기요람" ).[2] 총융 체제는 잠시 2 division 3 지구 체제로 복귀했으나, 1792년(정조 16년) 이후 내군 체제를 피하면서 내외 군사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총융군은 영조 재위 기간에는 83개 대대였지만, 정조 재위 기간에는 43개 대대로 크게 축소되었다. 1793년 이후,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화성을 중심으로 한 장용외영이 설치되었고, 모든 총융군은 이에 편입되었다.[5]

3. 5. 1747년(영조 23년) 총융청의 편제

1747년(영조 23년) 북한산성의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일원화되면서 최대 1만 9천1백여 명까지 병력이 늘었다. 본영은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바뀐 탕춘대로 옮겨졌다. 당시 총융청의 체계는 아래 표와 같다.[9]

총융청의 편제
진영책임자편제인원
본영총융사
(종2품)
장교 및 원역600여 명
각색 표하군852 명
군수보6,500 명
취철아병80명
승영350명
중군관성장
(정3품)
아병1사 5초 635 명
수첩군관266 명
별파진200 명
내영진영장
(정3품)
아병1부 3사 13초 1,625 명
장초군1부 3사 13초 1,625 명
장단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장단, 파주, 교하, 고양, 식녕, 마전, 적성, 연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남양 외영진영장
(정3품)
속읍남양, 안산, 과천, 금천, 양천
표하군398 명
보군20 초 2,500 명
마병2 초 250 명
치중군54 명


  • 총융사: 총융청의 최고 책임자이자 본영의 수장이었다.
  • 관성장: 북한산성 관리를 담당했으며, 관성소가 총융청에 흡수된 후 총융청의 중군(中軍)을 겸하였다.[16]
  • 진영장: 총융청 예하 각 진영의 책임자로, 내영은 궁궐 경비를, 외영은 속읍의 행정도 담당하였다.
  • 장교와 원역: 장교는 무과 출신 양반, 원역(員役)은 중인 출신으로 군영 자체 선발이었다.[17]
  • 정군과 표하군: 하급 군인으로 정군(正軍)은 전투병력, 표하군은 잡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징발된 양인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과 달리 급료를 받는 장번군(長番軍)이 아닌 번상군(番上軍)이 주를 이루었다.[18] 외영의 보군과 마병은 속오군과 혼성 배치되었다.[8]
  • 아병: 부대 지휘관의 깃발을 들고 호위하는 군사였다.[19]
  • 승병: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했으며, 징번 대신 비용을 부담하여 다른 사람이 대역하게 하였다.[20]
  • 군수보: 군포를 내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들로, 총융청 운영 기금 마련에 기여했다.[21]
  • 취철아병: 철광석 채취 인원으로, 상평통보 발행을 위한 사철 채취가 주 업무였다.[23]
  • 수첩군관: 군보에 등록되어 유사시 동원되는 군관으로, 평소 신미(身米)만 납부했다. 봄가을 도시(都試)를 통해 전력을 점검하고, 우수자는 무과 본시험인 전시(殿試) 응시 자격을 얻었다.[24]
  • 별파진: 군사 요충지에 배치된 화기 부대였다.[25]
  • 장초군: 경기 속오군 출신으로, 총융청 내영의 핵심 병력이었다.
  • 치중군: 각 군영의 물자 수송 부대였다.[26]


3. 6. 기타 병력

총융청의 군사는 중앙군인 정군과 지방군인 속오군, 그리고 기병대인 별마대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2] 1626년(인조 4년) 경기 남부 방어는 수어청으로 이관되었고, 설치 당시 2만여 명이었던 병력은[8] 7영 12부 25사 123초 체계로 재편되면서 각 사의 중초마다 기병인 마군을 두었다.[12]

1646년(인조 24년) 총융청은 내영과 외영으로 나뉘었다. 내영은 궁궐 및 도성 수비를, 외영은 경기 일대 수비를 담당했다. 내영은 다시 좌우 2부로 나뉘어 각각 13개 초를 거느렸다.[8] 초는 조선군의 기본 편제로 대략 120-125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12] 외영은 수어청 설립 후 수원, 장단, 양주의 3영제로 운영되었다.[12] 1704년(숙종 30년) 내영과 외영을 합쳐 1만 3천여 명이었고,[9] 1747년(영조 23년) 북한산성 경비 책임이 총융청으로 일원화되면서 최대 1만 9천1백여 명까지 늘었다.

총융청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총융사: 총융청의 최고 책임자로 종2품이었다.
  • 관성장: 북한산성 관리 업무를 담당했으며, 관성소 흡수 후 총융청 중군(中軍)을 겸한 정3품 무관이었다.[16]
  • 진영장: 각 진영 책임자로 정3품. 내영은 궁궐 경비, 외영은 속읍 행정도 담당했다.
  • 장교와 원역: 장교는 무과 급제 양반, 원역(員役)은 군영 자체 선발 중인이었다.[17]
  • 정군과 표하군: 하급 군인으로 정군(正軍)은 전투병력, 표하군은 잡역에 배속, 양인 징발로 충원.[17]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은 장번군(長番軍) 중심, 총융청과 수어청은 번상군(番上軍)이 주를 이루었다.[18] 외영 보군과 마병은 정군과 속오군 혼성 배치.[8]
  • 아병: 부대 지휘관 깃발을 들고 호위하는 군사. 오군영, 각 감영에 배치.[19]
  • 승병: 북한산성 방어 담당. 숙종 때 징번 대신 비용 부담으로 대역.[20]
  • 군수보: 군포로 군역 대신. 총융청 운영 기금 마련에 기여.[21]
  • 취철아병: 철광석 채취 인원. 상평통보 발행 권한 가진 오군영 재원 마련 담당.[23]
  • 수첩군관: 군보제 등록, 유사시 동원 군관. 신미(身米) 납부, 도시(都試)로 전력 점검.[24]
  • 별파진: 군사 요충지 배치 화기 부대.[25]
  • 장초군: 경기 속오군 중 선발, 총융청 내영 핵심 병력.
  • 치중군: 각 군영 물자 수송 부대.[26]


총융청 초기 병력은 향군, 방어군, 별도 기병 포함 약 2만 명이었다. 총융군은 경기도에 정군, 속오군, 별대마군 등 다양한 병력으로 구성되었다.[2]

내부 조직은 2부(6사, 26초)로, 장초 10초, 아병 10초, 둔아병 3초, 둔장초아병 3초로 구성되었다. 각 초에 장교 1명, 중앙군 장교 1명, 천총 2명, 파총 6명, 초관 26명이 배치되었다. 다른 군영에 없는 둔총과 둔아병은 총융사(중앙 군사 본부 후위 부대)일 가능성이 있다. "속대전"에는 4사(파총 4명), 20초(초관 20명)로 묘사되기도 한다.[2]

4. 역사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은 수도 방위 강화를 위해 도성과 경기 지역을 관할하는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1624년(인조 2년)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에 임명하여 총융청이 설치되었다.[7] 당시 본영은 사직동 북이영(北二營)이었다.[18]

1626년(인조 4년) 수어청이 분리되면서 총융청의 주요 업무는 도성과 경기 북부 방비로 조정되었다. 1669년(현종 10년) 본청을 삼청동으로 옮겼고, 1747년(영조 23년) 북한산성 경비를 총괄하게 되면서 본청 역시 북한산성 내 연융대(鍊戎臺)로 이전하였다.[18]

정조 시기 총융청과 수어영오군영의 다른 군영과 달리 군사적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정조 17년) 신설된 장용외영(壯勇外營)으로 이속되었다가 순조 시기 장용영이 혁파되며 다시 환원되었다.[18] 헌종은 총융영을 총위영으로 개명하고 국왕 근위대 역할에 중점을 두었으나, 헌종 사망 이후 다시 총융영으로 환원되었다.[27] 이후 북한산성에 계속 주둔하던 총융영은 1884년(고종 21년) 폐지되었다.[18]

4. 1. 창설과 변천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은 수도 방위 강화를 위해 도성과 경기 지역을 관할하는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1624년(인조 2년) 당시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에 임명하여 총융청이 설치되었다.[7] 당시 본영은 사직동 북이영(北二營)이었다.[18]

1626년(인조 4년) 수어청이 분리되면서 총융청의 주요 업무는 도성과 경기 북부 방비로 조정되었다. 설치 초기부터 관할과 편제가 계속 개편되어 1669년(현종 10년) 본청을 삼청동으로 옮겼고, 1747년(영조 23년) 북한산성 경비를 총괄하게 되면서 본청 역시 북한산성 내 연융대(鍊戎臺)로 이전하였다.[18]

정조 시기 총융청과 수어영은 오군영의 다른 군영과 달리 군사적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정조 17년) 신설된 장용외영(壯勇外營)으로 이속되었다가 순조 시기 장용영이 혁파되며 다시 환원되기도 하였다.[18] 헌종은 총융영을 총위영으로 개명하고 국왕 근위대 역할에 중점을 두었으나, 헌종 사망 이후 다시 총융영으로 환원되었다.[27] 이후 북한산성에 계속 주둔하던 총융영은 1884년(고종 21년) 폐지되었다.[18]

총융청의 군사 조직은 처음 수원, 광주, 양주, 창품, 남양 등 5개 영(營)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에는 3개 대(隊), 각 대에는 3개 초(哨), 각 초에는 3개 패(牌)가 있어 총 2만 명에 달했다. 인조 2년(1624년) 11월, 척계광의 "연병실기"에 묘사된 점수제에 따라 7개 영, 12개 대, 25개 초, 123개 패로 개편되어 수도 외곽을 방어했다.[2][1]

숙종 재위 기간에는 야병(牙兵) 10명이 삼청동 본청(本廳)에 주둔하고, 지역 주민 중 선발된 3명의 군사가 추가되어 총융청 내에 내영(內營)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때부터 총융청은 두 개의 내영(內營)과 세 개의 외영(外營)으로 구성되었다.[2]

1757년,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이 총융청으로 이관되어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북부 외곽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2]

총융 체제는 잠시 2 division 3 지구 체제로 복귀했으나, 1792년(정조 16년) 이후 내군 체제를 피하면서 내외 군사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총융군은 영조 재위 기간 83개 대대였지만, 정조 재위 기간에는 43개 대대로 크게 축소되었다. 1793년 이후,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 화성을 중심으로 한 장용외영이 설치되었고, 모든 총융군은 이에 편입되었다.[5]

4. 2. 정조 대의 변화와 이후

정조 시기에 총융청과 수어영오군영의 다른 군영과 달리 군사적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정조 17년) 신설된 장용외영(壯勇外營)으로 이속되었다가 순조 시기 장용영이 혁파되며 다시 환원되었다.[18] 헌종은 총융영을 총위영으로 개명하고 국왕 근위대 역할에 중점을 두었으나 헌종 사망 이후 다시 총융영으로 환원되었다.[27] 이후 북한산성에 계속 주둔하던 총융영은 1884년(고종 21년) 폐지되었다.[18]

북도지휘부는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46년(헌종 12년) 총위영으로 개칭되었지만, 1849년(철종)에 원래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친군영제가 도입되어 총융청, 어영청, 금위영장어영으로 통합되었지만, 이후 다시 오군영 체제로 환원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친군영 체제가 수립되면서 일시적으로 기능을 회복했지만 해산되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총융청 (摠戎廳)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1-05
[2] 웹사이트 총융청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5
[3] 웹사이트 임란의 경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체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4] 웹사이트 총융사 ()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1-05
[5] 웹사이트 총융청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5
[6] 웹사이트 총융청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7] 웹사이트 총융청 http://dh.aks.ac.kr/[...] 실록위키
[8] 웹사이트 총융청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
[9] 간행물 18세기 총융청의 도성 외곽 방어체제 정비와 북한산성의 위상 변화 https://www.kci.go.k[...] 서울과 역사 2023
[10] 웹사이트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1637년 그날의 이야기 https://mediahub.seo[...] 서울특별시
[11] 웹사이트 총융사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웹사이트 군제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웹사이트 누가 노인인가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14] 웹사이트 정병 http://dh.aks.ac.kr/[...] 실록위키
[15] 웹사이트 총융청사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웹사이트 관성장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웹사이트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18] 웹사이트 오군영 http://contents.hist[...] 한국사연대기
[19] 웹사이트 아병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웹사이트 치영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 웹사이트 보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 웹사이트 상평통보 http://dh.aks.ac.kr/[...] 실록위키
[23] 웹사이트 광업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웹사이트 수첩군관 http://dh.aks.ac.kr/[...] 실록위키
[25] 웹사이트 별파진 http://dh.aks.ac.kr/[...] 실록위키
[26] 웹사이트 치중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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