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현 (1826년)
1. 개요
김보현은 1826년에 태어나 1882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4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조참의,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등을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다.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다시 복직하여 형조, 이조, 병조, 예조, 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당상,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관세율 적용을 위한 전권대관을 지냈다. 임오군란 당시 살해되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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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살해된 사람 -
이기붕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몰락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한국의 살해된 사람 -
방응모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광산업과 장학 사업, 간척 사업을 추진하고 잡지 창간 등의 활동을 했으나, 친일 행위와 납북 행적으로 논란이 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정치인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정치인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2. 생애
김보현은 1848년(헌종 14년)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대교(待敎)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859년(철종 10) 이조참의·부제학을 지내고 1860년 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곧이어 예방승지(禮房承旨)를 거쳐 외직인 개성부유수로 부임했으나, 안동 김씨 세도가의 고관이라는 이유로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에서 축출되었다.
흥선대원군과 갈등하던 중 척족 민씨의 일파가 되어 활동했으며,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일가가 집권하자 다시 복직하여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과 선혜청 당상 등을 두루 지냈다. 선혜청 당상 재임 중에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가 심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이후 민씨 정권의 고관으로 육조의 판서를 지낸 뒤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당상에 임명되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체결된 관세율을 일본에도 적용시키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협상하게 되었다. 임오군란 직전 군영의 군인들에게 녹봉미(祿俸米)가 지급되지 못하자,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이던 민겸호와 당시 경기도 관찰사이던 그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고 소식을 듣고 급히 승정원으로 갔다. 마침 조카 김영덕이 승지로 입직 중이었는데, 김보현은 그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김영덕이 "오늘의 사변을 알지 못하고 들어가시렵니까?"라고 묻자, 김보현은 옷자락을 걷어붙이며 "내가 재상 자리에 있고 직책까지 맡고 있는데, 국가에 변이 생기면 죽더라도 피할 수 있겠느냐?"라고 답했다. 이후 김보현은 입궐하려다 돌층계에서 맞아 죽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외면했다. 김보현은 향년 56세였다. 사망 당일, 김보현은 경기도 관찰사에서 해임되고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2.1. 관료 생활 초반
1848년(헌종 14년)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대교(待敎)가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859년(철종 10) 이조참의·부제학을 거쳐 1860년 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곧 이어 예방승지(禮房承旨)를 거쳐 외직인 개성부유수로 부임했으나 안동 김씨 세도가의 고관이라는 이유로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에서 축출되었다.
2.2.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민씨 일파와의 결탁
흥선대원군과 갈등하던 중 척족 민씨의 일파가 되어 활동했으며,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축출당하고 민씨 일가가 집권하자 다시 복직,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지낸 뒤 선혜청당상 등을 두루 지냈다. 선혜청당상 재임 중에는 모리행위가 심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이후 민씨 정권의 고관으로 육조의 판서를 지낸 뒤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당상에 임명되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체결된 관세율을 일본에도 적용시키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협상하게 되었다.
또한, 임오군란 직전 군영의 군인들에게 녹봉미(祿俸米)가 지급되지 못하자, 군인들은 선혜청당상이던 민겸호(閔謙鎬)와 당시 경기도관찰사이던 그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2.3. 민씨 정권의 핵심 관료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축출당하고 민씨 일가가 집권하자 다시 복직,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지낸 뒤 선혜청당상 등을 두루 지냈다. 선혜청당상 재임 중에는 모리행위가 심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이후 민씨 정권의 고관으로 육조의 판서를 지낸 뒤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당상에 임명되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체결된 관세율을 일본에도 적용시키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협상하게 되었다.
임오군란 직전 군영의 군인들에게 녹봉미(祿俸米)가 지급되지 못하자, 군인들은 선혜청당상이던 민겸호(閔謙鎬)와 당시 경기도관찰사이던 그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2.4. 임오군란과 비참한 최후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고 소식을 듣고 급히 승정원으로 갔다. 마침 조카 김영덕이 승지로 입직 중이었는데, 김보현은 그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김영덕이 "오늘의 사변을 알지 못하고 들어가시렵니까?"라고 묻자, 김보현은 옷자락을 걷어붙이며 "내가 재상 자리에 있고 직책까지 맡고 있는데, 국가에 변이 생기면 죽더라도 피할 수 있겠느냐?"라고 답했다.
이후 김보현은 입궐하려다 돌층계에서 맞아 죽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외면했다. 김보현은 향년 56세였다.
사망 당일, 김보현은 경기도관찰사에서 해임되고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3. 사후
그때 난병들은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고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마구 쑤셔 넣자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민겸호의 시체와 함께 한성부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 그때 큰 비가 내려 개천이 가득 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져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시신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시신은 한참 뒤에 수습되었다.
1883년 6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으로 추서되었다가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정되었다.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고조부 | 김무택(金茂澤) |
| 증조부 | 김상의(金相儀) |
| 조부 | 김기은(金箕殷) |
| 부친 | 김재성(金在成) |
| 모친 | 조덕윤(趙德潤)의 딸 |
| 부인 | 홍종원(洪鍾源)의 딸 |
| 아들 | 김영철(金永哲) |
| 손자 | 김영수(金英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