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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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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겸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판돈녕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명성황후를 지지하며 흥선대원군 축출에 기여했으며,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통리기무아문 당상을 역임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의 봉기로 인해 살해되었으며, 사후 충숙공의 시호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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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겸호
기본 정보
한글 이름민겸호
한자 이름閔謙鎬
가타카나 이름ミン・ギョモ
로마자 표기Min Gyeom-ho

2. 생애

민치구의 셋째 아들이자 민승호의 친동생이다. 1867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고, 1872년 종이품 예조 참판이 되었다. 187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부모를 잇달아 여의고, 1877년 상복이 끝나자 도승지, 이조 참판, 의정부 유사당상, 형조·병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며 정이품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는 종일품으로 승진했다. 1879년에는 이조·예조의 각 판서, 선혜청 당상, 금위 대장, 총융사 등을 역임하며 정일품으로 승진했다.

개화 정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통리기무아문 당상을 역임하며 근대적인 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창덕궁에 난입한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4]

2. 1. 생애 초기

민치구와 정경부인 전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민승호의 친동생이며, 누이 여흥부대부인은 종실 흥선군과 결혼했는데, 외조카 이명복(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군은 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865년 2월 음보로 동몽교관[1]에 올랐다가 1866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867년 4월 고종에 의해 특별히 부수찬에 제수되었고, 이후 응교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72년 이조참의가 되고 그해 말 가선대부로 승진, 예조참판에 발탁되었다. 1873년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이때 명성황후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려 하자 그는 명성황후의 편에 서서 도왔다.

2. 2. 대원군 축출과 민씨 척족의 수령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민승호가 일가족과 함께 폭탄 테러로 사망하자, 민겸호는 민규호 등과 함께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후원과 고종의 신임 아래 6조의 여러 판서를 거쳐 한성부좌윤, 홍문관부제학, 세자시강원 좌부빈객 등을 지내고 판의금부사로 승진했다. 그 뒤 지중추부사, 금위대장, 지삼군부사,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무위소제조(武衛所提調), 어영대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880년 12월 새로운 정치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자 통리기무아문의 당상을 지냈고, 군무(軍務)·변정(邊政)·기연(譏沿)의 당상을 겸하였다.

1880년 12월말 군무사 경리당상(軍務司經理堂上)이 되어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토 레조(堀本禮造|호리모토 레조일본어)를 연군교사(練軍敎師)로 초빙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훈련을 주관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했고 선혜청 당상 겸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때 선혜청에서 군인들의 녹봉으로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 등이 섞여서 파문이 되었고,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의 군료 지급 담당자였다. 그러나 사과나 책임자 처벌이 없자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사태는 확산되어 1882년 6월 임오군란 이 발생하자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였던 그는 주동자인 김춘영(金春永)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넘겨 가혹하게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집을 습격당했으며, 난의 진상이 밝혀지자 파직되었다.[2] 민겸호 외에도 그의 하인이 선혜청의 창고지기가 되어 횡령한 재물들도 있었고, 이것은 병사들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

2. 3. 별기군 창설과 임오군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않은 지 6개월이 지난 때였다. 마침 호남에서 세금으로 받은 양곡을 실은 배가 경창에 도착하여,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3] 그러나 혜청 당상이었던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자 혜청 창고지기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고자 쌀에 겨를 섞어 지급하였고,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구타하였다.[3]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죽이겠다고 하자, 여러 군인들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했다.[3]

이들은 날을 정해 민겸호의 집을 점령했다. 그의 집 창고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폭도로 변신한 군인들은 빼앗은 재물들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4] 기름을 끼얹자 재물들은 활활 타올랐고, 민겸호는 담을 넘어 창덕궁으로 도망쳐 숨었다.[4] 황현은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4]

민겸호는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통리기무아문 당상을 역임하며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창덕궁에 난입한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2. 4. 최후

민겸호는 다시 복직, 강압적으로 진압시키려다 실패하고 피신하던 중 한성부 도심에서 난병에게 붙잡혔다. 6월 10일 전임 선혜청 당상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보현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가 중희당(重熙堂) 아래에서 난병에게 칼로 살해되었다.[5]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민겸호는 당황했고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5] 흥선대원군의 말이 끝난 직후 민겸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고,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민겸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5]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2. 5. 사후

그의 시체는 김보현의 시체와 함께 한성부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6]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 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6] 매천 황현에 의하면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서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6]'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시신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시신은 한참 뒤에 수습되었다.

그해 8월 충숙공(忠肅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이듬해 6월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민백술(閔百述)
조부민단현(閔端顯)
부친민치구(閔致久, 1795년~1874년)
모친정경부인 전주 이씨(? ~ 1873년 11월 17일)
누나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매형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생질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생질고종 이희(高宗 李熙)
형 1민태호(閔泰鎬)
형 2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여동생여흥 민씨
매제심응택(沈應澤)
부인서경순(徐庚淳)의 딸
아들민영환(閔泳煥, 1861년 ~ 1905년)
자부김명진(金明鎭, 안동 김씨)의 딸, 박용훈(朴龍勳)의 딸
차남민영찬(閔泳瓚, 1874년 ~ 1948년)
자부한국인 강씨(姜氏), 중국인 호씨(胡氏)


4. 평가

민승호의 친동생으로, 개화 정책 추진과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창덕궁에 난입한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5. 대중 매체

참조

[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1-04-12
[2] 웹사이트 http://enc.daum.net/[...]
[3]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4]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5]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6]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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