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복 (1714년)
1. 개요
김상복은 1714년에 태어나 1782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영조 시대에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한림, 검열, 정언 등을 역임하며 언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당상관, 재상,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며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영의정에 다섯 번이나 올랐다.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며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나, 정조 즉위 후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사후 신원이 복구되고 문헌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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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우의정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우의정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14년 출생 -
사카이 다다요시 (1714년)
사카이 다다요시는 데와 마쓰야마 번의 3대 번주로, 번정 개혁 시도 실패, 막부의 재정 지원 및 영향력 행사, 영지 확장, 장기 명인으로 알려졌으며, 74세에 사망하여 차남이 뒤를 이었다. -
1714년 출생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는 히타치국 후츄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한 후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으며, 로쥬 수좌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 쇼군을 섬기며 타누마 오키쓰구와 협력 관계를 맺고 유력한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2. 생애
김상복은 1714년 조선 후기 노론 명문가인 광산 김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성부판윤 김원택이며, 정치적으로 노론과 가까웠다. 그는 또한 훈구대신이던 좌의정 김국광의 후손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성균관에 진사로 급제하고, 1740년 문과에 급제했다. 한림, 검열,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하며 언관으로 활약하였고, 시독관으로서 사도세자와 영조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수찬, 헌납, 부교리, 지평, 사간, 부수찬, 부응교, 시강관, 부사과 등을 역임하며 노론의 핵심 언관으로 활동하였고,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후 당상관에 올라 영조의 입직 승지로 활동하다가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지냈다. 수원부사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으며, 홍봉한, 이천보, 한익모, 김상로, 신만 등 영조의 측근으로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재상에 올라서는 대사헌,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조판서, 약방제조, 호조판서,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예조판서를 거치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으며, 김상로, 홍봉한, 신만, 김치인, 정존겸, 홍인한, 한익모, 김상철, 신회, 김양택 등과 정조를 지지하였다. 탕평책을 배제한 김귀주와 등을 돌려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는 영조의 노론 측근이 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치며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노론이면서도 홍봉한, 김치인, 한익모, 정존겸, 김상철, 신회, 이사관 등과 함께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였다. 좌의정을 두 번 역임하였다. 영의정에 오른 직후, 영조 말기의 혼란스러웠던 국정 상황을 지키며 영조의 정책을 잘 보좌했으며, 세손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지냈다. 그러나 1775년 당시 세손의 편을 들지 않고 모호한 답변을 하여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 유배된다.
생애 후반에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충청도 결성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다 1782년 세상을 떠났다. 1800년 정조는 김상복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1. 유년기
김상복은 1714년에 조선 후기 노론 명문가 광산 김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성부판윤 김원택이며, 정치적으로 노론과 가까웠다. 그는 또한 훈구대신이던 좌의정 김국광의 후손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성균관에 진사로 급제하고, 1740년 문과에 급제했다.
2.2. 관료 생활 초창기
1740년 문과에 급제한 김상복은 한림, 검열,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하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시독관으로서 사도세자와 영조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으며, 수찬, 헌납, 부교리, 지평, 사간, 부수찬을 거치며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에도 수찬, 부응교, 사간, 시강관, 부사과 등을 역임하며 노론의 핵심 언관으로 활동하였고,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2.3. 당상관 시절
이후 당상관에 올라 영조의 입직 승지로 활동하다가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지냈다. 수원부사를 한 뒤 이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다. 이 시기에 김상복은 영조의 측근으로 홍봉한, 이천보, 한익모, 김상로, 신만 등과 가깝게 지내며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2.4. 재상 및 판서 시절
이후 영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져 재상에 올라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며 대사헌,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판서급에 오른 직후에는 이조판서, 약방제조, 호조판서,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예조판서를 거치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으며, 김상로, 홍봉한, 신만, 김치인, 정존겸, 홍인한, 한익모, 김상철, 신회, 김양택 등과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서 맹활약했다. 탕평책을 배제한 김귀주와 등을 돌려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는 영조의 노론 측근이 되었다.
2.5. 정승 및 영의정 시절
김상복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치며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노론이면서도 홍봉한, 김치인, 한익모, 정존겸, 김상철, 신회, 이사관 등과 함께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였다. 좌의정을 두 번 역임하였다.
영의정에 오른 직후, 김상복은 영조 말기의 혼란스러웠던 국정 상황을 지키며 영조의 정책을 잘 보좌했으며, 세손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지냈다. 그러나 1775년 당시 세손의 편을 들지 않고 모호한 답변을 하여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 유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