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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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승은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뤄양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맹혈단 활동을 했다. 1936년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암살 계획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가석방되었다. 해방 후 경기도 경찰청 특별수사대에 관여했으나, 1945년 암살당했다. 사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승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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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본명김혁
다른 이름김승은
로마자 표기Gim Hyeok
출생일1915년 10월 17일
출생지평양, 평안북도, 일본 제국
사망일1945년 11월 24일
사망지서울, 미군정
사망 원인살해
안장 장소장충단공원
활동 정보
주요 활동한국 독립운동가
염동진에 의한 살해설
개인 정보
학력숭실학교
한국어 이름
한글김혁
한자金革
로마자 표기Gim Hyeok
개명 전 이름 (한국어)
한글김승은
한자金勝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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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 시절 및 교육

김승은은 1915년 10월 17일,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현재의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찬두, 어머니는 박성두였으며, 두 명의 형과 일곱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부동산 임대업과 상점 운영을 통해 수입을 얻었다. 집안에는 두 명의 가사 도우미가 있을 정도로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니다가 봉천중학으로 전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3. 독립운동

김승은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1932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1934년에는 뤄양의 군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김구지청천 사이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후 상하이로 이동하여 1936년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맹혈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3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암살을 시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가석방된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이했으며, 1945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뤄양 시절의 동지들과 연락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3.1.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합류와 뤄양 군관학교

1932년,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일제강점기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4년 2월, 그는 뤄양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KMT)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저항군 훈련 과정에 참여했다.

이 훈련 과정의 한국인 강사였던 지청천김구는 수업 운영 권한과 자금 문제를 두고 자주 충돌했다. 학생들 역시 이념적으로 나뉘어 지청천과 김구를 지지하는 파벌로 갈라졌다. 김승은은 처음에는 김구의 편에 섰으나, 스캔들 이후 염동진을 포함한 여러 학생들과 함께 지청천의 파벌로 옮겨갔다. 이후 김승은과 염동진은 지청천 계열의 신한독립당 (新韓獨立黨)에 합류했다.

그는 훈련소를 탈출한 뒤 상하이로 이동했다.

3.2. 맹혈단(猛血團) 활동

1936년 1월, 김승은은 오면직 및 김구 지지 성향의 다른 학원 동문들과 함께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맹혈단(猛血團)을 창설했다. 맹혈단 단원 중 일부는 아나키스트였으나, 김승은을 포함한 다른 일부 단원들은 우익 성향을 보였다.

3.3. 체포와 투옥

김승은은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암살을 계획했으나, 안타깝게도 1936년 3월 6일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1937년 4월 해주 지방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일부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승은은 감옥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듯한 심정을 밝혔다고 전해지나, 이는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나온 발언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1939년 9월 26일 가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김승은은 중국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광복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베이징을 떠나 10월 1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김승은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던 여러 단체에 합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45년 10월 중순, 그는 뤄양(洛陽) 시절의 옛 동지들을 찾기 위한 광고를 냈고, 김구를 지지했던 몇몇 인사들과 다시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해방 이후 활동과 암살

(내용 없음)

4.1. 경기도 경찰청 특별수사대

김혁은 이후 경기도 경찰청의 특별수사대에 관여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말경, 이 부대는 일본인 경찰관 10명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김혁은 11월 2일 사이가 시치로 경부 암살에 연루되었다.

4.2. 암살과 의혹

1945년 11월 24일 오후 5시경, 김혁은 서울에서 암살당했다. 여러 동시대 신문 보도에 따르면, 자전거를 탄 사람을 포함하여 세 명의 범인이 있었다. 30세 정도로 보이는 한 범인은 양복을 입고 권총으로 김혁의 심장을 관통하는 총알을 발사하여 즉사시켰다. 다른 범인은 김혁이 소지하고 있던 붉은색 가죽 가방을 빼앗아 도주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널리 추정되었지만, 김혁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 동시대 및 후대 보고서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특별수사반 반장이었던 나병덕과의 인터뷰에서 암살 배후가 김혁과 불화를 겪고 있던 염동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병덕을 포함한 몇몇은 진실을 알게 된 후 염동진과 만나 추가적인 폭력을 중단하고 사건 수사를 방해하기로 합의했다.

나병덕 등은 장충단공원에서 김혁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5. 평가

1995년, 그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