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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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동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우익 계열의 정치 활동가로, 1902년 또는 1909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했으며, 중국 국민당의 훈련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시력을 잃었으며, 1943년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 대동단을 결성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백의사를 결성, 반공주의 활동을 펼치며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고, 여운형 암살에 관여했다. 그는 김구 암살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에게 붙잡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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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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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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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염응택 |
별칭 | 맹인 장군 |
출생일 | 1909년 2월 14일 |
출생지 | 평양, 평안남도, 대한제국 |
사망일 | 1950년 6월 24일 이후 (추정) |
사망 장소 | 서울, 대한민국 (추정) |
국적 | 대한제국 중화민국 (1912-1949) 대한민국 |
소속 | |
소속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1912-1949) |
알려진 활동 | 백의사 지도자 한국 정치인 암살 |
교육 | |
모교 | 선린상업학교 쑨원 대학 (중퇴) 중국 육군군관학교 (중퇴) |
가족 | |
친척 | 김종진 (조카, 여동생의 아들) |
2. 생애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본명 염응택(廉應澤)으로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났다.[2][5][1] 선린상업학교를 1931년 졸업한 후[8]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했으며,[8] 낙양군관학교를 1935년 4월 졸업했다.[6][3] 상하이에서는 지청천과 연대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2. 1. 생애 초기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본명 염응택(廉應澤)으로 태어났다. 일부 기록에는 1902년 출생으로 나오기도 하나,[2] 한국 주재 일본 식민지 정부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1909년생으로 확인된다.[2] 그는 대한제국 평안남도 중화군 초현리 82번지에서 아버지 염도열(廉道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5][1][6] 누나도 있었다.[6] 본관은 파주 염씨이다.[7]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4월 1일 서울에 있는 선린상업학교 정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22세의 나이로 졸업했다.[8] 졸업 후 잠시 파주시 문산 지역에서 시간을 보낸 뒤[8]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4년 2월 25일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여 1935년 4월에 졸업하였다.[6]
2. 2.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1931년 3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염동진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8]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8] 특히 임시 정부의 무장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활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 염동진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임시 정부에 합류한 지청천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사건 이후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야 했고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6]
1933년 10월, 염동진은 잠시 쑨원 대학 법학원 경제학과 1학년으로 재학했다. 당시 그는 본명 '염응택'(廉應澤)을 중국식으로 표기하여 등록했으며, 독립운동가이자 해당 대학의 조교수였던 구익균의 추천을 받았다.[9] 그의 대학 성적표는 2021년에 발견되었다.
1934년 2월, 염동진은 뤄양 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에 입학했다. 입학 과정은 김구, 김원봉, 지청천 중 한 사람의 승인이 필요할 정도로 엄격했다. 염동진의 추천인과 승인자에 대해서는 신익희 추천-지청천 승인 설[1]과 박찬익 추천-김구 승인 설[9]이 존재한다. 정병준 교수는 염동진이 이 시기 한인애국단에도 가입했다고 주장하며, 이념적으로는 김구보다 지청천과 더 가까웠다고 보았다.
뤄양 군관학교 내에서는 김구와 지청천 사이에 학교 운영 권한과 자금 지원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1] 김구가 자신의 계파 학생들을 다른 학교로 옮기자 남은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염동진, 김혁, 박진양(朴震陽) 등 9명의 학생은 지청천을 지지하며 김구를 비판했다. 1935년 1월 1일, 이들은 지청천 계열의 신한독립당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당원은 약 30명이었다. 염동진은 1935년 4월 9일, 62명의 졸업생 중 한 명으로 뤄양 군관학교를 졸업했다.[6][3]
이후 염동진은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난징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중립적 인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1935년 겨울, 민족혁명당의 조직에 반대하여 화북 방면으로 향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의 공식적인 행적은 한동안 불분명해진다. 그의 조카인 김종진에 따르면, 염동진은 조직의 파벌 싸움에 실망하여 동포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난징에서 만주 화북 지방으로 향했다고 한다.
1936년 2월 산성진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때 고문으로 인해 실명했다. 이후 그는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조카 김종진은 독립운동가들과는 관계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목포대학교 정병준 교수는 관동군에 협력한 것이 그의 약점인 동시에 출발점이라고 말했지만, 관동군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어 그가 친일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언론인 홍찬식 수석논설위원은 1937년 일본군에 붙잡힌 후 일본 첩보원이 됐다는 일부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구체적 근거는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체포된 뒤 고문을 당해 시력을 잃은 탓에 일본이 그를 써먹지 못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1940년대 초 그가 평양의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서 활동한 것도 ‘밀정설(說)’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홍찬식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그의 활동 공백만으로 장기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를 민족 배신자로 모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평했다.[21] 진보성향의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기준은 선 친일 후 항일은 항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22]
1940년경, 관동군으로부터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1943년 평양에서 만공의 제자인 박고봉과 함께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2. 3. 일본 첩보원 활동 의혹
염동진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1936년 또는 1937년경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는 점에는 여러 자료에서 일치하지만, 체포 주체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주된 설은 염동진이 1936년 3월 (혹은 2월)[1][6] 지린성 메이허커우 시 산청진山城镇 (梅河口市)|중국어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고문으로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고, 고문의 압박 속에서 일본을 위한 첩보원 활동에 동의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6]
반면 염동진 본인은 미군 방첩대(CIC)의 킬리 보고서에서 김구의 배신으로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1]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 학계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1] 정운현 등은 염동진이 일본의 첩자로 활동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김구를 모함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정운현은 염동진이 1936년 3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약 8년간 일본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40년까지 통화현의 한 문화 단체에서 일했는데, 이는 헌병대의 첩보 활동을 위한 위장 단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염동진의 가족은 쿠로사키(黒崎|일본어)라는 일본 장교가 염동진의 중국어 능력을 이용해 반공 활동을 시켰다고 증언했으며, 활동 내용이 직접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운현은 염동진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위험한 정보를 일본 측에 넘겼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염동진은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중국 동북 지역 지하당과 항일 연군의 조직, 연락망, 물자 보급 상황 및 민심 동향 등을 정탐했으며, 34차례에 걸쳐 총 2481JPY을 수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월 평균 약 73JPY으로, 당시 현 지사의 월급과 비슷한 수준의 상당한 금액이었다.
염동진이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는 부족하다. 그의 조카 김정진은 염동진의 활동이 독립운동가들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정병준 박사는 염동진이 관동군에 협력한 전력이 그의 약점인 동시에 해방 후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활동 내용의 부재로 인해 친일 행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음을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염동진의 일본 관련 활동이 1945년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으며, 1946년 중반에 일본군 하사관 출신 아라카와 타케조(荒川武藏|일본어)와 접촉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6]
2. 4. 해방 정국과 백의사 결성
해방 후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에 반발하여,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지구 책임자였던 현준혁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1] 2002년에 공개된 1986년 녹음 자료에서 염동진 스스로 암살을 결정했다고 언급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이 암살 연루 혐의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그의 아내가 소련군 장군 안드레이 로마넨코에게 선처를 호소한 끝에 석방되었다.[1]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황해도 재령군에 있는 누이의 집에 잠시 숨어 지내다가,[1] 1945년 11월경 대동단 동지였던 박고봉의 권유로 삼팔선을 넘어 월남했다.[1]서울로 월남한 염동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일제강점기 말 평양에서 조직했던 대동단을 '백의민족'의 정신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백의사로 개칭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12][1] 백의사라는 명칭은 염동진이 청년당 시절부터 선호했던 이름으로, 한국 민족의 상징인 흰 옷과 관련이 있다.[1] 그는 효자동, 궁정동 등 서울 여러 곳으로 아지트를 확장하고 단원들을 포섭했으며, 단원들끼리도 서로의 정체를 모를 정도로 철저한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을 운영했다. 염동진의 카리스마와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력은 단원 모집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과거 대한광복회 등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백의사의 극우적 활동을 대중적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포장했다.
월남 직후인 1945년 11월 24일, 만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혁이 서울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 나병덕은 1977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염동진에 의한 보복 살인이었다고 증언했다. 해방 후 김혁과 염동진은 서로 다른 노선을 걸으며 갈등을 빚었고, 나병덕은 염동진이 배후임을 밝혀냈지만 더 이상의 보복 중단과 사건 수사 무마를 조건으로 타협했다고 밝혔다.[15] 역사학자 정병준은 염동진이 김혁과 함께 경기도 경찰의 비밀 특무반에 있었을 가능성과, 김혁이 염동진의 과거 관동군 협력 행적을 알고 있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백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과 연계하여 김일성 등 북한 요인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며, 단원들을 경찰, 미군정 하의 국방경비대, 노동계 등 각계각층에 침투시켜 반공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46년 2월 15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김두한 등 단원들을 동원하여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을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사건 당시, 암살범에게 권총을 제공하는 등 사건에 연루되었다.
염동진은 좌익 세력, 특히 노동운동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1947년 미국의 앨버트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미군정의 좌우 합작 노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같은 서신에서 그는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 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파시스트적인 국가 건설을 지향했음을 드러냈다. 미 육군 정보국(G-2)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도 염동진이 이승만 정부보다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정부 형태를 선호했으며, 김구가 지도자가 되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 명의 군대를 갖기를 원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서울과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고 1만 5천 명 규모의 '백의군'을 창설하여 만주의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당시 만주가 이미 공산당 세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2.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히 쇠퇴하여, 일부 핵심 단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흩어졌다.한편, 미 육군 CIC 요원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 작성한 보고서(일명 '실리 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다.[1]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이러한 연관성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단원이자 백관옥의 형제인 백찬옥은 김구 암살 소식에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역시 염동진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과 김구의 관계가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실리 보고서에는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암살을 지시했다는 내용이 없고 이는 명백한 오보라고 반박했다.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염동진은 말년에 조현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는 설[15]과 단순히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기록[1][8]이 공존하여,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3. 백의사 (白衣社)
탈북 후 염동진은 잠시 평양으로 돌아가 남은 대동단 구성원들을 소집했다. 그는 그들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개편될 조직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1] 이후 서울에서 염동진은 자신이 일제강점기 청년당 시절부터 선호했던 이름이자 한민족의 상징인 흰 옷과 연관 지어, 개편될 단체의 이름으로 '백의사(白衣社)'를 제안했고 단원들은 이에 동의했다.[1]
대부분의 자료에 따르면 백의사는 1945년 11월에 결성된 것으로 본다.[12][1] 염동진은 과거 대동단에서처럼 백의사의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카리스마와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은 단원 모집의 핵심 요소였다. 그는 자신의 과거 활동을 이야기하며 대한광복회와 같은 이전 독립운동 단체의 헌신적인 민족주의 정신과 자신을 연결시켰다. 역사학자 정병준은 이러한 방식이 신입 단원들의 인식 속에서 대중적인 독립운동과 백의사의 극우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3. 1. 주요 활동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여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반발하여 현준혁을 암살하였다.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였다.서울로 월남한 염동진은 낙원동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기존의 대동단을 백의민족이라는 뜻을 담아 백의사로 개칭했다. 효자동과 궁정동 등 서울 여러 곳으로 아지트를 확장하며 단원들을 포섭하였고, 단원들끼리도 서로의 정체를 알기 어려운 비밀결사 형태로 운영하며 맹렬한 반공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김일성 등 북한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 국방경비대, 노동계 등 각계각층에 침투시켜 반공 운동을 펼치도록 했다.
1946년 2월 15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김두한과 백의사 단원들을 동원하여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 납치를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47년 7월에는 여운형 암살 사건에 사용된 권총을 제공하기도 했다.
염동진은 특히 좌익 노동운동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1947년 웨더마이어 미 육군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는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서울(G-2 본부)과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고 1만 5천 명 규모의 백의군을 창설하여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당시 만주 지역이 이미 중국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염동진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파시스트적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라고 적었다. 미 육군 방첩대(CIC)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라고 언급했다.
이 시기 염동진은 극도로 비밀스럽게 활동하여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조차 자신의 일정을 알리지 않았으며, 면담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단독으로 만나야 했다. 그는 조직원들에게 다른 조직원의 신상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았다.[1]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1948년까지 백의사 단원이 3만 명이 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1] 실리 소령은 염동진 주변에는 항상 60여 명의 청년 경호원들이 있었으며, 염동진이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염동진은 공포스러운 평판을 얻어 '맹인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기록했다.[3]
3. 2. 김구 암살 연관 의혹
염동진과 김구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는 지속적인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염동진은 루오양 군관학교 시절, 김구와 한국광복군이 학생 자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하는 학생 파벌에 속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 씨에 따르면, 이 일로 김구는 염동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해방 후 한국에서 재회했을 때 눈물로 인사하는 염동진에게 냉담하게 반응했다고 한다.[1] 미국 방첩대 (CIC) 요원 조지 E. 실리(George E. Cilley)는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고 보고했는데, 김구의 활동에 대한 칭찬과 혹독한 비판을 번갈아 했다는 것이다.[3]김구 암살 사건과 염동진의 연관성은 2001년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에 의해 기밀 해제된 실리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3] 이 보고서는 1949년 6월 29일 김구 암살 직후 작성되어 7월 1일에 제출된 것으로[1], 염동진과 백의사, 암살범 안두희, 그리고 이들과 김구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1] 이 문서는 염동진 연구에 있어 중요한 동시대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4], 그 내용의 해석을 둘러싸고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1]
실리 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이 김구 암살의 배후라고 지목하고 있다.[1] 또한 해석에 따라서는 염동진이 단독으로, 혹은 김구와 함께 이승만을 몰아내고 김구를 군사력을 갖춘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주장도 담고 있어 논란을 일으켰다.[3][1] 실리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가 지도자가 되면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있는 200만 명의 군대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
그러나 염동진의 배후설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백의사 단원들은 염동진이나 조직이 김구 암살과 어떠한 관련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은 김구 암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1]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역시 염동진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1]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였으며, 실리 보고서 어디에도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암살을 지시했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고 지적하며 이는 명백한 오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1] 안 씨 역시 염동진이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을 부정했다.[1]
결론적으로 염동진이 김구 암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며, 실리 보고서의 내용을 둘러싼 해석과 반론이 엇갈리고 있어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4. 논란과 의혹
염동진의 삶에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불확실한 부분이 많으며, 이름과 출생 연도조차 논란의 대상이다.[6]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나 일부 기밀 해제된 정부 기록에 의존하며, 이 기록들 중 일부는 서로 모순되어 학문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6] 염동진 연구는 이영신, 안기석, 정병준 등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특히 정병준은 염동진에 대한 비판적인 동시대 기록들을 다수 발견했다.
주요 논란 중 하나는 염동진이 일본 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양측을 오가는 이중 간첩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1993년 이영신의 저서에서 처음 제기되었고[6], 정병준은 여러 정보 문서와 증언을 통해 이 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염동진은 민족혁명당 활동 중 1936년 관동군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실명했으며, 이후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불분명하며 친일 행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첩보원 활동 진위 여부 참조)
해방 후에는 평양에서 소련군의 만행에 반발하여 현준혁 암살을 주도하고 월남했다. 서울에서 백의사를 조직하여 극단적인 반공주의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김일성 등 요인 암살을 시도했으며, 단원들을 경찰, 군대, 노동계에 침투시켜 반공 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에는 김두한과 단원들을 동원해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장에서 박헌영 납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947년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권총을 제공하며 개입했다.
염동진은 앨버트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했고, "새로운 한국의 국가 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여야 한다"며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파시스트적 국가 건설을 지향했음을 드러냈다. 미군 방첩대(CIC) 실리 소령의 보고서 역시 염동진이 이승만 정부보다 더 강력한 군사 정부를 선호했으며, 김구가 지도자가 될 경우 200만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김구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실리 보고서는 암살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배후로 지목했지만, 백의사 단원들과 김구 측근들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연구자 도진순 교수 역시 당시 정황상 염동진의 지시 가능성은 없다고 반박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구와의 관계 참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백의사는 쇠퇴했으며, 염동진은 점차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으나, 이후 행적과 생사는 불분명하다.
4. 1. 일본 첩보원 활동 진위 여부
1936년 2월 산성진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때 고문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염동진이 관동군에 협력하여 일본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자료는 부족하여, 그의 실제 행적과 친일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염동진의 생질 김종진은 그가 독립운동가들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증언했다.목포대학교 정병준 교수는 염동진이 관동군에 협력한 것을 그의 약점이자 출발점이라고 평가하며, 1936년 3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약 8년간 일본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염동진은 1940년까지 통화현의 한 문화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일본 헌병대의 첩보 활동을 위한 위장 조직일 수 있다. 근거로 당시 일본 정부가 운영하던 매일신보(현 서울신문)에 염동진이 해당 단체 명의로 친일 성향 한국 단체의 설립을 축하하는 기사를 보낸 점을 든다. 또한 정 교수는 중국 측 자료를 인용하여, 염동진이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중국 동북 지역의 지하 조직과 항일 단체의 동향, 연락망, 물자 공급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34차례의 비밀 활동을 통해 총 2481JPY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는 월 평균 약 73엔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당시 현 지사의 월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정 교수는 염동진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한국 독립 운동가들을 겨냥하지는 않았을 수 있으며, 그의 가족 증언처럼 일본 장교 黒崎|구로사키일본어의 지시로 반공 활동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위험한 정보를 누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염동진의 첩보원 활동설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언론인 홍찬식은 첩보원설이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한 일부 증언에 기반하며, 오히려 고문으로 인한 실명 때문에 일본이 그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반대 증언도 있다고 지적했다.[21] 또한, 1940년대 초 염동진이 평양에서 만공의 제자 박고봉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대동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사실은 '밀정설'에 의문을 더한다. 홍찬식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약 3년간의 활동 공백만으로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을 민족 배신자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평가했다.[21] 진보 성향의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인물 선정 기준과 관련하여 '먼저 친일 행위를 했더라도 나중에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면 항일 운동가로 본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22]
한편, 염동진이 실제로는 일본과 독립운동 진영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간첩'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1993년 이영신의 저서에서 처음 나왔으며[6], 정병준 교수는 이후 관련 정보 문서, 동기생 및 가족, 지인들의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이 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염동진의 생애, 특히 관동군 체포 이후의 행적은 자료 부족과 상반된 기록들로 인해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이름과 출생 연도조차 논란이 있을 정도이며[6], 그의 삶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나 일부 기밀 해제된 정부 기록에 의존하고 있어[1][6] 지속적인 연구와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4. 2. 김구와의 관계
염동진과 김구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는 지속적인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염동진은 루오양 군관학교 시절, 김구와 한국광복군(KPG)이 학생들을 위한 자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하는 학생 파벌에 속해 있었다. 안 씨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김구는 염동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재회했을 때, 김구는 눈물로 인사를 하는 염동진에게 냉담하게 반응했다.[1] 미국 방첩대(CIC) 요원 조지 E. 실리(George E. Cilley)는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고 언급했는데, 그는 김구의 과격한 활동에 대한 칭찬과 혹독한 비판을 번갈아 했다.[3]실리의 보고서는 해석에 따라 염동진 단독으로, 또는 염동진과 김구가 함께 이승만을 몰아내고 김구를 군사적인 파시스트 지도자로 남한에 옹립하려는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어 논란을 일으켰다.[3][1] 실리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가 남한의 지도자가 된다면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있는 2백만 명의 군대를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3]
김구의 암살은 염동진과 널리 연관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실리 보고서는 암살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으며, 단원 백찬옥은 김구 암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다고 전해진다.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염동진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는 명백한 오보라고 반론하였다. 도 교수는 또한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았다. 안 씨 역시 염동진이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을 부정했다.[1]
4. 3. 김두한과의 관계
염동진은 "정치 깡패" 김두한과의 연관성으로도 기억된다. 안씨에 따르면, 염동진이 남한으로 귀순한 후, 그는 당시 조선공산당과 관련된 무장 좌익 청년 단체였던 조선청년전위대의 지도자였던 김두한을 납치하여 서울의 오동진의 집으로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오동진의 집에서 염동진은 김두한에게 우익에 가담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김두한의 아버지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호소했다. 김두한은 이에 동의하여 남한에서 우익 대의를 폭력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을 납치 시도했으나 미수로 그친 사건에 김두한과 단원들이 동원되었다. 안씨는 염동진이 미국 정부와의 연계를 통해 테러 혐의로 체포된 후 김두한을 감옥에서 석방시킬 수 있었다는 설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1]5. 인물평
동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염동진은 카리스마 넘치고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졌다. 다른 많은 귀환 저항군처럼 그의 게릴라 활동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았다. 키는 171.2cm였으며,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전에 유도 유단자가 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시력을 잃은 후에는 항상 검은색 안경을 착용했다.[1]
미국 육군 소령 조지 실리는 염동진을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이자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 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한국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염동진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다른 외국인과는 통역을 썼지만 실리 소령 자신과는 통역 없이 대화했고, 때로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가라고 회고했다.[23][3]
그러나 염동진이 실제로 완전히 맹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1946년 김일성 암살 작전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이성렬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2]
1945년 9월 처음 염동진을 만났을 때, 그는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맹인은 아니었다 [...] [모두] 염 사령이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해 맹인인 척한다고 생각했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염동진을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라 칭하며, "하루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만 생각한 냉혈인간"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해방 정국의 혼돈 속에서 염동진은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테러는 백주의 콜레라(호열자)처럼 퍼져나갔다고 덧붙였다.[24]
염동진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정치 사상은 앨버트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드러난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각국의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 당국은 너무나 작은 그릇인 남조선에서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 형태는 국가사회주의여야 합니다.
이는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파시즘적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실리 소령의 보고서 역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염동진은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정부를 선호했다.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된다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 명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다……
6. 대중 매체
- 2002년 SBS 텔레비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배우 이대로가 염동진을 연기했다.
- 2002년 1월 20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시리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번째 에피소드에서 염동진과 백의사를 다루었다.[4]
- 2015년 영화 《암살》에서는 염동진을 모델로 한 인물 '염석진'이 등장하며, 배우 이정재가 연기했다.[17][15][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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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日成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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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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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살다 안개처럼 사라져간 韓·中의 反共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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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sun Ilbo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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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 관련 배경정보' 전문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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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ng-a Ilbo|Shin Dong-a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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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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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Li and the Liu Geping Affair: Heroism in the Chinese Secret Service During the War of Resi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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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and peace in liberated North Korea: Soviet military administration and the creation of North Korean police force in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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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기, 통합적 리더십은 정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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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KOEN: History Befor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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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테러단체 '백의사' 사령 염동진, 고급 밀정으로 8년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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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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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정치깡패의 역사'…50년대 이정재부터 87년 '용팔이'까지
https://www.yna.co.k[...]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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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 VS. HISTORY] 'Assassination' director sprinkles fiction over the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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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미군정보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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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 영화 ‘암살’의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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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에게 명예까지 갖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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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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