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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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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동인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소설가로,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나 1951년 사망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사실주의 소설 《감자》를 통해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았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사후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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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동인 작가
김동인 작가
필명금동, 춘사, 김시어딤
본명김동인
출생일1900년 10월 2일
사망일1951년 1월 5일
사망 장소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국적대한제국대한민국
민족한국인
직업소설가, 문학 평론가, 시인, 언론인
활동 기간1919년~1951년
언어한국어
종교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개인 정보
일본식 이름히가시 후미히토(東 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金東 文仁)
배우자김경애 (재혼), 김혜인 (이혼)
자녀1남 3녀
부모김대윤(부)
형제김동원(이복 형)
학력
최종 학력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경력
주요 경력조선일보 학예부 부장
작품 활동
장르소설, 시, 평론
주요 작품〈배따라기〉
〈운현궁의 봄〉
한국어 이름
한글김동인
한자金東仁
로마자 표기Kim Dongin
매큔-라이샤워 표기Kim Tong-in
일본어 이름
히라가나きんとうじん
가타카나キム・ドンイン
관련 웹사이트
두피디아김동인

2. 생애

김동인(金東仁,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평양 상수리에서 태어났다.[13]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이다.[2]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13]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13]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2]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2]

191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2]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5]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를 일본에서 창간하였다.[3]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1919년 주요한, 전영택, 최승만, 김환 등과 함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문예지 《창조》를 일본에서 창간하여 큰 영향을 미쳤지만, 짧은 기간 활동하였다.[3] 《창조》는 이광수가 주장한 교훈적인 문학(국민문학)에 맞섰다.[4] 1925년에는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광수와의 문학적 논쟁을 더욱 심화시킨 대표작 「감자」를 발표했다.[6]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17]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김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다.[18]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1934년에는 문학관에 대한 견해가 달랐던 이광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서인 「춘원연구」를 발표했고, 1935년에는 월간지 《야담》을 창간했다.[3]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1918년 12월부터 이광수, 최팔용, 신익희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만세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체포,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상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이 내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2]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1939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박용희, 임학수 등과 함께 북지나 주둔 일본군의 후원으로 만주(滿洲)를 방문했다. 이는 명백한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3] 그러나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죄로 투옥되었다.[3]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동인은 친일 성향으로 돌아섰다. 1939년 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 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3월 위문사(문단사절)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뽑혔다. 김동인은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며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왔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3]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 지시로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 등 4단체가 통합되어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연재하며 학병권유를 했다. 김동인은 이 외에도 친일 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 편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김동인은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김동인의 이복형 김동원은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변절하여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인물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2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의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의 아들은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했었다.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는 판정 중에 친일 행위의 사실성을 인정하였다.[23]

해방 후인 1946년, 김동인은 반(反)프롤레타리아 문학 단체들을 견제하는 전국 작가회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

이후 「배역자」(敗役者, 1946), 「망국인(亡國人, 1947)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친일 작가였던 이광수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3]

1945년 8월 17일 임화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20] 한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9월한국민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20]

1945년 12월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 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지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김동인은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21] 만년의 김동인은 약국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그 중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그는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 갔고, 수면제에 관한 한 박사가 됐다.[21]

1949년 7월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중풍을 앓게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려 했으나, 몸이 불편하여 얼마 못 가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에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조선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4 후퇴 무렵인 1951년 1월 5일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동네 이웃 사람들이 그가 죽고 며칠 후에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해서 묻어 주었다.

1955년, 잡지 《사상계》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여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3]

2. 1. 초기 생애 (1900년 ~ 1919년)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평양 상수리에서 태어났다.[13]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이다.[2]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13]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13]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2]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2]

191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2]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5]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를 일본에서 창간하였다.[3]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평양 상수리에서 태어났다.[13]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이다.[2]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13]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13]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2]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2]

2. 1. 2.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김동인은 평양에서 개신교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의 아들로 태어났다.[2]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13] 1912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13]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13]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를 일본에서 창간하였다.[3]

2. 1. 3. 일본 유학과 문학 활동 시작

191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2]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5]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16]

2. 2. 문학 활동과 사회 참여 (1919년 ~ 1937년)

1919년 주요한, 전영택, 최승만, 김환 등과 함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문예지 《창조》를 일본에서 창간하여 큰 영향을 미쳤지만, 짧은 기간 활동하였다.[3]창조》는 이광수가 주장한 교훈적인 문학(국민문학)에 맞섰다.[4]창조》에 그의 데뷔작인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5] 1925년에는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광수와의 문학적 논쟁을 더욱 심화시킨 대표작 「감자」를 발표했다.[6]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17]

한편 신여성의 자유 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했다.[17]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그는 풍자와 조롱을 잘 하였고, 동료 문인이나 언론인들, 취재 기자들과도 종종 시비를 붙기도 했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김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다.[18]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김동인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1930년까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나, 이후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울증과 약물 남용에 시달렸다.[3] 그 전까지 구어체와 사실적인 표현을 고수했던 그는[4] 이때부터 이전까지는 천시했던 대중적인 연재소설, 특히 여러 편의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문학관에 대한 견해가 달랐던 이광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서인 「춘원연구」를 발표했고, 1935년에는 월간지 《야담》을 창간했다.[3]

초반에 그는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23년 이광수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19]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선일보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이후 월간잡지 '야담'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그의 형 김동원안창호의 측근으로 흥사단의 측면지원조직이던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는데, 그 역시 흥사단에 가입하고 동우구락부에 가입했다. 그 뒤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자 수양동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1939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박용희, 임학수 등과 함께 북지나 주둔 일본군의 후원으로 만주(滿洲)를 방문했다. 이는 명백한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3] 그러나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죄로 투옥되었다.[3]

2. 2. 1.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 참여

2·8 독립 선언이 낭독된 도쿄 히비야 공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1918년 12월부터 이광수, 최팔용, 신익희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만세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체포,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상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이 내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2]

2. 2. 2. 본격적인 문학 활동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17]

한편 신여성의 자유 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했다.[17]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그는 풍자와 조롱을 잘 하였고, 동료 문인이나 언론인들, 취재 기자들과도 종종 시비를 붙기도 했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김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다.[18]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2. 2. 3. 사회 활동과 논란

초반에 그는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23년 이광수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19]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선일보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이후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그의 형 김동원안창호의 측근으로 흥사단의 측면지원조직이던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는데, 그 역시 흥사단에 가입하고 동우구락부에 가입했다. 그 뒤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자 수양동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1939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박용희, 임학수 등과 함께 북지나 주둔 일본군의 후원으로 만주(滿洲)를 방문했다. 이는 명백한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3] 그러나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죄로 투옥되었다.[3]

2. 3. 친일 논란과 해방 이후 (1937년 ~ 1951년)

1939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김동인은 박영희, 임학수 등과 함께 북지나 주둔 일본군의 후원으로 만주를 방문했다. 이는 명백한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3] 그러나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죄로 투옥되었다.[3]

해방 후인 1946년, 김동인은 반(反)프롤레타리아 문학 단체들을 견제하는 전국 작가회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

이후 「배역자」(敗役者, 1946), 「망국인(亡國人, 1947)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친일 작가였던 이광수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3] 1951년 1월 5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했다.

1955년, 잡지 《사상계》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여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3]

2. 3. 1. 친일 행적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동인은 친일 성향으로 돌아섰다. 1939년 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 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3월 위문사(문단사절)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뽑혔다. 김동인은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며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왔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3]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했고, 같은 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 지시로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 등 4단체가 통합되어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연재하며 학병권유를 했다. 김동인은 이 외에도 친일 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 편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김동인은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김동인의 이복형 김동원은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변절하여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인물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2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의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의 아들은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했었다.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는 판정 중에 친일 행위의 사실성을 인정하였다.[23]

2. 3. 2. 해방 이후의 활동과 죽음

1945년 8월 17일 임화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20] 한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9월한국민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20]

1945년 12월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 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지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김동인은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21] 만년의 김동인은 약국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그 중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그는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 갔고, 수면제에 관한 한 박사가 됐다.[21]

1949년 7월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중풍을 앓게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려 했으나, 몸이 불편하여 얼마 못 가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에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조선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4 후퇴 무렵인 1951년 1월 5일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동네 이웃 사람들이 그가 죽고 며칠 후에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해서 묻어 주었다.

3. 사후

6.25 전쟁 직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이후 박종화, 염상섭, 장준하 등에 의해 그의 작품성에 대한 조명 및 추모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5년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4. 문학 세계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문'(1924), '시골 황씨'(1925), '감자'(1921)와 같은 자연주의적 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7]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다 점차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로, 작가의 사실주의와 결정론적 관점을 통해 이광수의 계몽 운동이 주장했던 전통적인 도덕과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7]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 즉 예술이 이념적 논쟁과 사회 변혁을 위해 이용되던 시기에 김동인은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비전을 고수했다.[7] 이러한 관점은 예술적 완성을 추구하는 광적인 예술가들을 등장시킨 그의 미학주의적 소설 '광염 소나타'(1930)와 '광화사'(1930)에 잘 반영되어 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다.[8] 동료 작가인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는 고성의 감독의 '젊은이들'(1985), 김수용 감독의 '똑같은 발가락'(1976), 고영남 감독의 '광염 소나타'(1979), 주동진 감독의 '광화사'(1974), 이규환 감독의 '배따라기'(1973) 등이 있다.

4. 1. 주요 작품 경향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문'(1924), '시골 황씨'(1925), '감자'(1921)와 같은 자연주의적 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7]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다 점차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로, 이광수의 계몽 운동이 주장했던 전통적인 도덕과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7]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 즉 예술이 이념적 논쟁과 사회 변혁을 위해 이용되던 시기에 김동인은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비전을 고수했다.[7] 이러한 관점은 예술적 완성을 추구하는 광적인 예술가들을 등장시킨 그의 미학주의적 소설 '광염 소나타'(1930)와 '광화사'(1930)에 잘 반영되어 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다.[8] 동료 작가인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는 고성의 감독의 '젊은이들'(1985), 김수용 감독의 '똑같은 발가락'(1976), 고영남 감독의 '광염 소나타'(1979), 주동진 감독의 '광화사'(1974), 이규환 감독의 '배따라기'(1973) 등이 있다.

4. 2. 문학사적 의의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문'(1924), '시골 황씨'(1925), '감자'(1921)와 같은 자연주의적 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7]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다 점차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로, 작가의 사실주의와 결정론적 관점을 통해 이광수의 계몽 운동이 주장했던 전통적인 도덕과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7]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 즉 예술이 이념적 논쟁과 사회 변혁을 위해 이용되던 시기에 김동인은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비전을 고수했다.[7] 이러한 관점은 예술적 완성을 추구하는 광적인 예술가들을 등장시킨 그의 미학주의적 소설 '광염 소나타'(1930)와 '광화사'(1930)에 잘 반영되어 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다.[8] 동료 작가인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는 고성의 감독의 '젊은이들'(1985), 김수용 감독의 '똑같은 발가락'(1976), 고영남 감독의 '광염 소나타'(1979), 주동진 감독의 '광화사'(1974), 이규환 감독의 '배따라기'(1973) 등이 있다.

5. 작품 목록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7]배따라기〉, 〈감자〉,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대장부로 묘사한 역사소설),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최선생〉[24]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저항한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7] 김동인은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에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을 추구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었다.[8]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젊은이들'(1985), '똑같은 발가락'(1976), '광염 소나타'(1979), '광화사'(1974), '배따라기'(1973) 등이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단편 및 중편소설'''


  • 약한 자의 슬픔 (1910)
  • 마음이 옅은 자여 (1920)
  • 배따라기 (1921)
  • 유성기 (1921)
  • 딸의 업을 이으려 (1921)
  • 전제자 (1921)
  • 눈을 겨우 뜰 때 (1923)
  • 이 잔을 (1923)
  • 태형 (1923)
  • 유서 (1924)
  • 거츠른 터 (1924)
  • 시골 황 서방 (1925)
  • 명문 (1925)
  • 감자 (1925)
  • 눈보래 (1925)
  • 정희 (1925)
  • 여인 (1929)
  • 송동이 (1929)
  • 포플라 (1930)
  • 광염 소나타 (1930)
  • 신앙으로 (1930)
  • 광화사 (1930)
  • 발가락이 닮았다 (1931)
  • 대양지 아주머니 (1938)
  • 거인은 움직인다 (1935)
  • 김연실전 (1939)


'''장편소설'''

  • 운현궁의 봄 (1933)
  • 제성대 (1938)
  • 벌번반년
  • 촌가의 용
  • 남의 마누라
  • 대수양
  • 월산 따른 지녀
  • 해지는 지평선
  • 젊은 그들
  • 견훤
  • 백마강
  • 안 돌아오는 사자


'''평론'''

  • 근대소설고 (1929)
  • 춘원연구 (1938)

5. 1. 단편 소설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7]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화사〉, 〈붉은 산〉, 〈광염 소나타〉(1930), 〈발가락이 닮았다〉 등의 단편 소설과 〈운현궁의 봄〉과 같은 역사 소설을 발표하였다.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저항한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7] 김동인은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에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을 추구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었다.[8]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젊은이들'(1985), '똑같은 발가락'(1976), '광염 소나타'(1979), '광화사'(1974), '배따라기'(1973) 등이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단편 및 중편소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약한 자의 슬픔 (1910)
  • 마음이 옅은 자여 (1920)
  • 배따라기 (1921)
  • 유성기 (1921)
  • 딸의 업을 이으려 (1921)
  • 전제자 (1921)
  • 눈을 겨우 뜰 때 (1923)
  • 이 잔을 (1923)
  • 태형 (1923)
  • 유서 (1924)
  • 거츠른 터 (1924)
  • 시골 황 서방 (1925)
  • 명문 (1925)
  • 감자 (1925)
  • 눈보래 (1925)
  • 정희 (1925)
  • 여인 (1929)
  • 송동이 (1929)
  • 포플라 (1930)
  • 광염 소나타 (1930)
  • 신앙으로 (1930)
  • 광화사 (1930)
  • 발가락이 닮았다 (1931)
  • 대양지 아주머니 (1938)
  • 거인은 움직인다 (1935)
  • 김연실전 (1939)

5. 2. 장편 소설

김동인은 역사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여,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대장부로 묘사한 《운현궁의 봄》(1933)을 발표했다. 이 외에도 《젊은 그들》(1930–1931), 《왕조의 몰락》(1935), 《대 수양》(1941) 등의 장편 소설을 집필하였다.[7]

5. 3. 평론

김동인은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간결한 산문체, 객관적인 시점을 결합한 단편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문'(1924), '시골 황씨'(1925), '감자'(1921)와 같은 자연주의적 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7] 특히 '감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다 점차 도덕성을 잃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여인의 이야기로, 작가의 사실주의와 결정론적 관점을 통해 이광수의 계몽 운동이 주장했던 전통적인 도덕과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7]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신경향파 사조가 지배하던 시대, 즉 예술이 이념적 논쟁과 사회 변혁을 위해 이용되던 시기에 김동인은 순수 예술주의와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비전을 고수했다.[7] 이러한 관점은 예술적 완성을 추구하는 광적인 예술가들을 등장시킨 그의 미학주의적 소설 '광염 소나타'(1930)와 '광화사'(1930)에 잘 반영되어 있다.[7]

김동인의 많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다.[8] 동료 작가인 김승옥은 1968년에 개봉된 '감자'의 첫 번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9] 1987년에는 변장호 감독이 다시 한번 '감자'를 영화화했다. 그 외에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는 고성의 감독의 '젊은이들'(1985), 김수용 감독의 '똑같은 발가락'(1976), 고영남 감독의 '광염 소나타'(1979), 주동진 감독의 '광화사'(1974), 이규환 감독의 '배따라기(1973) 등이 있다.

김동인은 1929년에 '근대소설고'를 썼고, 1938년에는 춘원 이광수에 대한 평론인 '춘원연구'를 발표했다.

6. 수상

김동인은 동인문학상 제정의 계기가 된 인물이다.

7. 가족 관계

8. 같이 보기

참조

[1] 웹아카이브 Kim Dong-ini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2] 서적 The Rainy Spell and Other Korean Stories M. E. Sharpe
[3] 웹사이트 한국문학번역원 http://www.klti.or.k[...] 2010-08-24
[4] 서적 Modern Korean Fiction: An Anthology
[5] 논문 Creating New Paradigms of Womanhood in Modern Korean Literature: Na Hye-Sok's "Kyonghui" University of Hawaii Press
[6] 간행물 Kim Tong-in /World of Naturalism
[7] 웹아카이브 Kim Don-in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8] 웹사이트 김동인 http://movie.naver.c[...]
[9] 웹사이트 감자 http://movie.naver.c[...]
[10] 웹사이트 Sweet Potato http://www.honfordst[...]
[11] 웹사이트 The Mad Painter https://library.ltik[...] 2023-10-24
[12] 웹사이트 (125)전주 김씨(全州金氏)-57,979명 http://www.seoulecon[...] 2015-02-19
[13] 서적 Kankoku bungaku o tabisuru 60shō https://www.worldcat[...] 2020-12
[14] 뉴스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15] 법률
[16] 웹인용 서울 六百年史 http://seoul600.visi[...] 서울특별시 2007-09-16
[17] 서적 역사에 사랑을 묻다 이숲 2011
[18] 뉴스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2-25
[19] 뉴스 日帝치하 조선일보는 한국文壇의 산실이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12-22
[20] 정보
[21] 뉴스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4-02-25
[22]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www.artnstudy[...] 2007-09-03
[23] 뉴스 법원 “소설가 김동인 친일행위 인정된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0-11-26
[24] 웹인용 김동인 최선생 https://ridibooks.co[...]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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