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선
1. 개요
김응선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청일 전쟁 당시 일본 육군 장교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띄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거쳐 친일 행위로 훈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이후 일본군에서 복무하며 소장으로 진급했고, 만주사변 관련 단체 위원을 지내다 사망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이름 | 김응선 |
|---|---|
| 한글 | 김응선 |
| 한자 | 金應善 |
| 로마자 표기 | Gim Eung-seon |
| 출생 | 1881년 음력 5월 26일 |
|---|---|
| 사망 | 1932년 양력 8월 2일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복무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
| 복무 기간 | 1903년 ~ 1931년 |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령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러일 전쟁 |
-
일본 육군 소장 -
사토 슌지
-
일본 육군 소장 -
이희두
이희두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소장으로 복무하며 일진회에 가담, 친일 행적을 보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훈6등 단광욱일장 수훈자 -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
훈6등 단광욱일장 수훈자 -
가토 도모사부로
가토 도모사부로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쓰시마 해전 승리에 기여한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해군 대신과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서 군축 협상을 주도하고, 총리 재임 중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이행, 산둥반도 일본군 철수, 시베리아 출병 종결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장교 -
윤태일 (1918년)
윤태일은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기업인이며, 박정희 정권에서 서울특별시장과 대한주택공사 총재,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장교 -
김동하 (1918년)
김동하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이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참여한 군인, 정치인으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나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고,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김응선은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으로, 청일 전쟁 때 참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띄어 18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5기로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05년 특파대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 육군 보병 참령이었으며, 군대 해산 직후 황태자궁 배종무관에 임명될 정도로 일본에게 신뢰를 받았다. 러일 전쟁 공로로 훈5등 쌍광욱일장 및 은사금 500JPY을 받았고, 그해 11월 황태자 이은의 일본 유학을 수행하고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구 한국군 장교 중 우수장교로 평가받아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으로 이은의 왕세자궁 무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1920년 "조선 군인을 육군 장교 동 상당관으로 임용 등에 관한 건"(다이쇼 9년 칙령 제118호)에 의해, 조선군인인 육군 보병 부령에서 육군 보병 중좌로 전관되었다. 1923년 일본 제국 육군 보병 대좌,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09년 황태자도한기념장,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20년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았다. 1931년 소장 예편 시 특별상여액 2970JPY과 퇴직특별사금 및 수당액 8925JPY을 받았다. 은퇴 직후 만주사변 관련 관제 단체인 만몽재주동포협의회 위원을 지냈으나, 1932년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일본 유학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으로, 집안 배경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 전쟁 때 참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띄어, 16세였던 18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되었다. 3·1 운동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는 이후 '김응선의 아버지'로 불렸다는 일화가 있다. 김응선은 20세 연상의 우쓰노미야에게 형제처럼 귀여움을 받았고, 보호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우쓰노미야 긴고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였다.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11월 30일에 제15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근위보병 제1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했으며, 곧 러일 전쟁 (1904년~1905년)이 발발하여 김응선도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 1904년 3월에 진남포에 상륙하면서 처음에는 정찰 활동을 맡았고, 5월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2.2.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러일 전쟁 참전
청일 전쟁 때 참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띄어 1896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되었다.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제15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근위보병 제1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했으며, 곧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김응선도 참전했다. 1904년 3월 진남포에 상륙하면서 처음에는 정찰 활동을 맡았고, 5월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2.3. 대한제국 군 복무와 친일 행적
김응선은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으로, 청일 전쟁 때 참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띄어 189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되었다. 1902년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5기로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05년 특파대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훈6등 단광욱일장을 수여받는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에는 육군 보병 참령이었으며, 군대 해산 직후 황태자궁 배종무관에 임명될 정도로 일본에게 신뢰를 받았다. 러일 전쟁 때의 공로로 훈5등 쌍광욱일장 및 은사금 500JPY을 받았고, 그해 11월 황태자 이은의 일본 유학을 수행하고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구 한국군 장교 중 우수장교로 평가받아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으로 이은의 왕세자궁 무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1923년 일본 제국 육군 보병 대좌,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09년 황태자도한기념장,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20년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았다. 1931년 소장으로 예편할 때는 특별상여액 2970JPY과 퇴직특별사금 및 수당액 8925JPY이 주어졌다. 은퇴 직후 만주사변 관련 관제 단체인 만몽재주동포협의회 위원을 지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2.4. 한일 병합 이후 일본군 복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구 한국군 장교 중 우수장교로 평가되어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을 명 받았다. 김응선은 왕세자로 격하된 이은의 왕세자궁 무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1923년에 일본 제국 육군 보병 대좌,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09년 황태자도한기념장,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20년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은 바 있다. 1931년 소장으로 예편할 때는 공이 특별히 크다면서 특별상여액 2970JPY과 퇴직특별사금 및 수당액 8925JPY이 주어졌다.
3. 사후 평가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응선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3.1.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