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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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익경은 조선 현종 때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서얼 출신이었으나, 아버지 김반이 이괄의 난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이복형 김익겸이 병자호란에서 순국한 공로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예조참판 재직 시 인선왕후의 복상 문제로 발생한 예송 논쟁에서 9개월복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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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익경 |
한자 이름 | 金益炅 |
출생일 | 1629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675년 (향년 47세)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직산군 |
국적 | 조선 |
본관 | 광산(光山)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분야 | 성리학 |
자 | 계명(啓明) |
묘소 | 계명 김익경 선생 부부 합장 가묘(1996년 3월 1일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소재)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서인 세력 |
직책 | 조선의 호조참의 |
경력 | 형조참의 |
재임 기간 | 1670년 춘삼월 초순 ~ 1673년 동짓달 중순 |
임금 | 조선 현종 이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반 |
어머니 | 부여 김씨 측실(생모) 안동 김씨 부인(적모) 연산 서씨 부인(계적모) 함양 여씨 측실(서모) |
형제 | 김익렬(이복 적형) 김익희(이복 적형) 김익겸(이복 적형) 김익훈(동복 형) 김익후(이복 서형) |
배우자 | 파평 윤씨 부인 |
자녀 | 4남 1녀 |
친척 | 윤제(빙부) 심정규(사위) 김장생(친조부) 김재용(외조부) 김집(동복 둘째 큰아버지) 김만기(배다른 적출 조카) 김만중(배다른 적출 조카) |
2. 생애
김익경은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김반이 인조를 호종하여 공을 세우고, 이복 형 김익겸이 강화산성에서 순국한 덕분에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1646년(인조 23) 식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대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선혜청 당상 등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 재직 중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김익경은 스승 송시열, 서인 세력의 김수항 등과 함께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으나, 허목 등의 만 1년 복상이 채택되었다. 결국 경기도 양성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충청도 직산군으로 이배되었으며, 1년 후 직산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김반이 인조를 호종하여 공을 세우고, 이복 형 김익겸이 강화산성에서 순국한 덕분에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1] 1646년(인조 23) 식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대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1]2. 2. 관직 생활과 예송 논쟁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김반이 김장생과 함께 인조를 난중에 공주로 모신 공과 이복형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강화산성에서 순국한 공을 인정받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1646년(인조 23) 식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사헌부 집의를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선혜청 당상 등을 역임했다. 이후 형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후 호조참의에까지 올랐다.1674년(현종 15)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김익경은 스승 송시열, 서인 세력의 중진이었던 김수항 등과 함께 《주자가례》에 의한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으나, 허목 등의 만 1년 복상이 채택되자, 1674년(현종 15) 3월 25일 경기도 양성현으로 유배되었다. 1674년(숙종 원년) 9월 10일, 충청도 직산군으로 이배되었으며, 1년 후 1675년, 직산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2. 3. 유배와 죽음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김익경은 스승 송시열, 서인 세력의 중진이었던 김수항 등과 함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대공설(大功設)〉을 근거로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으나, 허목 등의 〈기년설(朞年說)〉, 즉 만 1년설이 채택되었다. 결국 1674년(현종 15) 3월 25일, 경기도 양성현(陽城縣)으로 유배되었고,[1] 1674년(숙종 원년) 9월 10일, 충청도 직산군(稷山郡)으로 이배되었으며, 1년 후 1675년, 직산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1]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김장생 | 1548년 ~ 1631년 |
아버지 | 김반 | 1580년 ~ 1640년 |
적모(의모) | 구 안동 김씨 | 1585년 ~ 1611년, 김진려(金進礪)의 딸 |
배다른 적출 형님 | 김익렬(金益烈) | 1602년 10월 ~ 1630년 6월 |
배다른 적출 형님 | 김익희 | 1610년 3월 ~ 1656년 5월 |
계적모(의모) | 연산 서씨 | 1596년 ~ 1637년, 증 참판 서주(徐澍)의 딸 |
배다른 적출 형님 | 김익겸 | 1614년 12월 ~ 1637년 2월 |
생모 | 부여 김씨 (측실) | 김재용(金渽溶)의 딸[1] (1576년 ~ 1634년) |
동복 형님 | 김익훈 | 1619년 ~ 1689년 |
본인 | 김익경 | 1629년 ~ 1675년, 생모(부여 김씨)는 아버지(김반)의 첫번째 첩실. |
아내 | 파평 윤씨 부인 | |
장남 | 김만재(金萬裁) | |
손자 | 김진동(金鎭東) | |
차남 | 김만견(金萬堅) | |
손자 | 김진악(金鎭岳) | |
손자 | 김진성(金鎭成) | 김만길(金萬吉, 1645~1673, 이복 서얼 조카)에게 양자로 감 |
삼남 | 김만지(金萬至) | |
손자 | 김진조(金鎭朝) | |
손자 | 김진세(金鎭世) | |
사남 | 김만근(金萬謹) | |
손자 | 김진륜(金鎭倫) | |
손자 | 김진중(金鎭中) | |
손자 | 김진대(金鎭大) | |
딸 | 광산 김씨 부인 | 심지원의 손자 심정규(沈廷揆)에게 출가 |
서모 | 함양 여씨 (측실) | 여해천(呂海天)의 딸[2] (1575년 ~ 1638년) |
배다른 서얼 형님 | 김익후(金益煦) | 1624년 ~ 1648년 |
배다른 서얼 조카 | 김만길(金萬吉) | 1645년 ~ 1673년 |
4. 대중문화 속 김익경
참조
[1]
문서
1519년 진사 출신의 김열(金烈(김렬), 1491년 ~ ?)의 친서손자 김재용(金渽溶, 1576년 ~ 1634년)
[2]
문서
1555년 진사 출신의 여세윤(呂世潤, 1520년 ~ ?)의 친서손자 여해천(呂海天, 1575년 ~ 1638년)
[3]
문서
1644년 당시 35세의 김익희 선생의 친가 배다른 서제(이복 서얼 동생)으로, 1644년 당시 16세의 김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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