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첩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에서 정실 외에 둔 여자를 의미하며,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한국에서는 고대부터 가부장제 하에 첩제가 관행으로 인정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 사회적 인식 변화와 법적 제재로 인해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무가 사회에서 첩의 개념이 나타났으며, 첩의 지위와 역할은 시대와 신분에 따라 달랐다. 중국에서는 축첩제가 존재했으며, 첩은 자손 번영을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첩이라는 용어 대신 내연녀 또는 불륜녀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혼인 - 결혼식
    결혼식은 사랑과 헌신을 바탕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의식 또는 행위로, 문화, 종교, 사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최근에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관련 산업 발달에 기여한다.
  • 혼인 - 기독교 평등주의
    기독교 평등주의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신자가 동등한 은사와 사역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 성경적 관점으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같은 구절을 근거로 남녀의 동등한 봉사를 주장하며, 퀘이커교, 감리교회 등 다양한 교파와 "남성, 여성,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단체들의 지지를 받는다.
  • 일본의 역사 - 에도 시대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멸망한 1868년까지의 일본 역사 시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아래 평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으나 엄격한 신분제도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막번체제, 산킨코타이 제도 등 독특한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통해 일본 근세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역사 - 연호
    연호는 군주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며, 군주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칭호로,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는 일본, 중화민국, 북한 등에서 사용된다.
  • 한국의 역사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지속된 시기로, 강제 병합, 경제적 착취, 정치적 억압, 문화적 동화 정책 등이 특징이며, 3·1 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위안부 문제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한국의 역사 - 국가재건최고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군사 정권 기구로, 헌법 일부 조항 효력 정지, 국회 해산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며 경제 개발을 추진했으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해산되었다.
정의
의미일부다처제 사회에서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
법적 지위대부분의 사회에서 법적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함.
사회적 인식과거에는 첩 제도가 합법이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첩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임.
역사
동양중국: 고대부터 첩 제도가 존재했으며, 황제의 첩은 지위가 높았음.
한국: 조선시대에 첩 제도가 일반적이었으며, 양반 가문에서 첩을 두는 것이 흔했음.
일본: 에도시대에 첩 제도가 존재했으며, 첩은 법적 배우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음.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첩 제도가 존재했음.
서양로마 제국: 일부 부유층 남성이 첩을 두었음.
유럽: 중세 시대에는 일부 귀족들이 첩을 두었음.
역할 및 지위
자녀 양육첩의 자녀는 법적 배우자의 자녀와 차별을 받았음.
가정 내 역할첩은 남편의 가사를 돕고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음.
경제적 지위첩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으며, 재산 상속권이 제한적이었음.
사회적 지위사회적 지위는 법적 배우자에 비해 낮았음.
현대의 첩
현대 사회첩 제도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법화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존재함.
현대 사회에서의 첩일부일처제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됨.
관련 용어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
측실법적 배우자 외의 여성 배우자를 이르는 말.
애첩특별히 사랑하는 첩.
후궁황제의 첩.
같이 보기
관련 주제간통
일부다처제
축첩
정부
혼인

2. 역사

한국은 고대부터 일부일처제를 부부 관계의 기본으로 하였는데, 일제강점기까지 가부장제에 따라 첩제(妾制)가 관행으로 인정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1부 2처 다첩의 관행까지 용인되었지만, 조선 태종이 서얼 금고령을 강제함에 따라 건국 초인 1415년 이후 1부 1처제와 처첩제가 확립되었다.

2. 1. 한국

한국은 고대로부터 일부일처제를 부부관계의 기본으로 하였는데, 일제강점기까지 가부장제에 따라 첩제(妾制)가 관행으로 인정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1부2처다첩의 관행까지 용인되었지만, 조선 태종이 서얼 금고령을 강제함에 따라 건국 초인 1415년 이후 1부1처제와 처첩제가 확립되었다.

대한민국제헌 헌법에 '남녀동권과 혼인의 순결'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첩 계약은 무효가 되었으나,[9] 축첩(蓄妾)의 행태는 1950년대까지도 버젓이 이루어졌다. 이에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축첩반대운동이 벌어져, 그 영향으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축첩 공무원, 군인, 경찰 등에 대한 사정(査定)과 해임(解任)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축첩이 불륜(不倫, 윤리에 어긋난다)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정착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첩이 관행적으로도 인정되지 않으므로, 첩을 가리킬 때에는 첩이라는 말보다 내연녀(內緣女)나 불륜녀(不倫女)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2. 2. 일본

1615년 무가제법도에 의해 다이묘의 혼인이 장군의 허가제로 되고, 다이묘의 공식적인 아내(정실)를 1명으로 하는 일부일처제가 명확해지면서 오늘날 알려진 “측실” 개념이 등장하였다고 역사학자 후쿠다 치즈루는 설명한다. 그 이후에도 법적으로 아내로서의 신분이 주어지지 않는 첩은 여러 명 가질 수 있었지만, 아이를 낳는 등의 사정에 의해 법적으로는 첩이면서도 내밀하게 아내로 대우받은 것이 “측실”의 시작이라고 한다.[3]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는 정실인 황후가 사망하거나 어떤 이유로 정실의 신분을 박탈당해 정실이 없어지면, 계실로서 새롭게 황후를 세웠지만, 이때 새롭게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 많은 측실 중에서 사실상의 격상으로서 새롭게 선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예는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새롭게 맞이하거나 그대로 정실을 두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처럼 정실과 측실의 신분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며, 또 측실이 아이를 낳았을 경우 측실 본인의 대우도 시대와 신분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측실 출신의 아이가 후계자가 될 때에는 명목상으로는 정실의 양자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에도 시대의 황실에서는, 측실은 출산 후, 자신의 아이를 안은 채 바로 아이와 떨어지고, 본인의 신분은 낮은 채로 두어지고, 임무 해제되어 추방되는 일조차 있었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아이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 한편, 에도 시대의 쇼군가의 오오쿠에서는 완전히 반대로, 남자아이를 출산한 측실은 “고헤야사마”, 여자아이를 출산한 경우는 “고하라사마”로서 주인 대접을 받았다.[2] 그러나, 측실이 낳은 남자아이가 계승자가 된 경우, 생모인 측실은 중히 여겨지고, 때로는 정실의 힘을 능가하여 오쿠무키의 권력 구조뿐만 아니라, 가중 그 자체의 권력 지배 구조를 좌우하기도 했다. 도쿠가와가에서는 쇼군에게는 30명, 다이묘에게는 10명, 하타모토에게는 5명의 첩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측실은 알려진 것만 해도 30명을 넘었다.[5]

메이지 시대에 들어, 다이쇼 천황·정명황후 부부는 유럽 여러 외국을 본보기로 한 근대화 속에서 그때까지의 측실의 모습에도 변화가 생겨, 일부일처제의 유럽 여러 외국 왕실과 마찬가지로 측실을 두지 않고 정실인 황후만이 되었다.

쇼와 천황섭정 취임 후 1922년(다이쇼 11년) 1월 22일, 궁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를 불러들여, 여관의 통근제로 시작되는 후궁 개혁을 제안했다.[6] 이 의견에 근거하여, 여관은 기혼(미망인)으로 통근이 허용되게 되고, 쇼와 시대에도 유지되었다.[7] 즉위한 쇼와 천황·고준황후 부부에게는 연달아 4명의 황녀가 태어났기 때문에, 전 궁내대신·타나카 미츠아키는 측실 제도의 부활을 꾀했지만 천황에게 그 의사가 없어, 계획은 중단되었다.[8]

2. 3. 중국

유교에서는 직계 남자가 조상의 제사를 잇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혼인 제도에서도 자손 번영과 남계 상속자의 존재가 중요시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정실이 낳은 장남을 “백(伯)”이라고 했지만, 측실이 낳은 남자아이가 더 나이가 많은 경우 그 장남을 “맹(孟)”이라고 했다.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 수는 제한적이다. 또한, 아내의 건강 상태, 불임, 부부 불화 문제로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남계 남자의 자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 문제를 막기 위해 과거에는 측실을 두어 남계 남자의 자손을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3. 첩의 지위와 역할

한국은 고대로부터 일부일처제를 부부관계의 기본으로 하였으나, 일제강점기까지 가부장제에 따라 첩제(妾制)가 관행으로 인정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1부 2처 다첩의 관행까지 용인되었지만, 조선 태종이 서얼 금고령을 강제하면서 1415년 이후 1부 1처제와 처첩제가 확립되었다.

대한민국제헌 헌법에 '남녀동권과 혼인의 순결'을 규정하여 첩 계약을 무효로 하였다.[9] 그러나 1950년대까지도 축첩(蓄妾) 행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축첩반대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축첩 공무원, 군인, 경찰 등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査定)과 해임(解任)이 이루어지면서 축첩이 불륜(不倫, 윤리에 어긋남)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정착되었다.

1960년대 이후 첩은 관행적으로도 인정되지 않으므로, '첩'보다는 내연녀(內緣女)나 불륜녀(不倫女)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된다. 정실은 “가족 구성원”인 반면, 측실은 “사용인”의 위치였다.[2]

남녀 간의 정, 동거인의 친밀감, 집안의 방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위와 같은 구분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와 신분에 따라 정실과 측실의 관계는 다양하여, 군주와 하인처럼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경우부터 친자매처럼 대우받는 경우까지 있었다. 유교 윤리에서는 “정실 한 명, 측실 여러 명”이 원칙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측실을 여러 명 또는 한 명만 두면서 정실을 두지 않거나, 정실만 두고 측실을 두지 않거나, 여러 명의 정실을 두고 측실을 두지 않는 등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황후가 사망하거나 폐위되어 정실이 없어지면, 많은 측실 중에서 격상시켜 계실(繼室) 황후를 세웠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예가 거의 없었고, 새로 황후를 맞이하거나 정실을 두지 않았다. 이처럼 정실과 측실의 신분 차이는 컸으며, 측실 출신 아이가 후계자가 될 때는 명목상 정실의 양자로 삼았다.

메이지 시대다이쇼 천황·정명황후 부부는 유럽을 본받아 일부일처제를 따랐고, 황자가 4명이나 되어 측실을 둘 필요가 없었다.

3. 1. 정실과 측실의 관계

한국은 고대로부터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일제강점기까지 가부장제에 따라 첩제(妾制)가 관행으로 인정되었다.[9] 조선 태종이 서얼 금고령을 강제함에 따라 1415년 이후 1부1처제와 처첩제가 확립되었다.

정실과 측실의 관계는 시대와 신분에 따라 다양했다. 유교 윤리에 따르면 “정실이 한 명이고 측실이 여러 명”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역사학자 후쿠다 치즈루는 1615년에 제정된 무가제법도에 의해 다이묘의 공식적인 아내(정실)를 1명으로 하는 일부일처제가 명확해지면서 "측실"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무사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허용되었고, 두 번째 이후의 아내는 “차처”, “별처”라고 불렸다.[3] 쿠로다 모토키는 다케다 신겐의 측실로 알려진 네츠 고료닌이 정실인 산죠노 카타가 있음에도 축연을 올렸다는 기록을 들어, 그녀와 스와 고료닌이 신겐의 “별처”였다고 주장한다.[4]

에도 시대 황실에서는 측실은 출산 후 아이와 떨어져 낮은 신분으로 지내야 했고, 쇼군가의 오오쿠에서는 남자아이를 출산한 측실은 “고헤야사마”로 주인 대접을 받았다.[2] 그러나 측실이 낳은 남자아이가 계승자가 된 경우, 생모인 측실은 때로는 정실의 힘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기도 했다. 도쿠가와가에서는 쇼군에게는 30명, 다이묘에게는 10명, 하타모토에게는 5명의 첩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측실은 30명을 넘었다.[5] 측실은 아이를 낳아도 사용인 신분은 변함없었고, 아이와는 주인과 가신의 관계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등의 규칙이 있었다.[5]

메이지 시대에 들어 다이쇼 천황·정명황후 부부는 일부일처제를 따랐고, 쇼와 천황1922년 궁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에게 후궁 개혁을 제안하여 여관의 통근제를 시작했다.[6] 쇼와 천황·고준황후 부부에게는 황녀만 4명이 태어나 측실 제도가 부활하지 않았다.[8]

3. 2. 첩의 역할

한국은 고대로부터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일제강점기까지 가부장제에 따라 첩제(妾制)가 관행으로 인정되었다. 대한민국제헌 헌법에 '남녀동권과 혼인의 순결'을 규정하여 첩 계약은 무효가 되었으나,[9] 1950년대까지 축첩(蓄妾) 행태가 이어졌다. 이후 여성단체의 축첩반대운동과 축첩 공무원, 군인, 경찰 등에 대한 사정(査定) 및 해임(解任)이 이루어지면서 축첩이 불륜(不倫)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정착되었다.

유교에서는 직계 남자가 조상의 제사를 잇는 것을 중시했고, 혼인 제도에서도 자손 번영과 남계 상속자의 존재가 중요시되었다.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여성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 수가 제한적이고, 아내의 건강, 불임, 부부 불화 등의 문제로 자녀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거에는 측실을 두어 남계 남자의 자손을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3. 3. 첩의 자녀

유교에서는 직계 남자가 조상의 제사를 잇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혼인 제도에서도 자손 번영과 남계 상속자의 존재가 중요시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정실이 낳은 장남을 “백(伯)”이라고 했지만, 측실이 낳은 남자아이가 더 나이가 많은 경우 그 장남을 “맹(孟)”이라고 했다.

일부일처제 하에서는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 수는 제한적이다. 또한, 아내의 건강 상태, 불임, 부부 불화 문제로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남계 남자의 자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 문제를 막기 위해 과거에는 측실을 두어 남계 남자의 자손을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4. 현대 사회에서의 첩

대한민국제헌 헌법에 '남녀동권과 혼인의 순결'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첩 계약은 무효가 되었으나,[9] 1950년대까지도 축첩(蓄妾)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축첩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그 영향으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축첩을 한 공무원, 군인, 경찰 등에 대한 사정(査定)과 해임(解任)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축첩이 불륜(不倫, 윤리에 어긋난다)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정착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첩이 관행적으로도 인정되지 않으므로, 첩을 가리킬 때 첩이라는 말보다 내연녀(內緣女)나 불륜녀(不倫女)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5. 첩을 소재로 한 작품

다음은 첩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5. 1. 중국

홍등장이머우 감독의 1991년 영화로, 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의 첩이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5. 2. 베트남

흐엉장의 첩 역할[1]

참조

[1] 서적 대사전 (출판사 정보 없음)
[2] 서적 側室 小学館
[3] 서적 大奥を創った女たち 吉川弘文館 2022-06-01
[4] 서적 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2022-07
[5] 서적 大名華族 三笠書房 1957
[6] 간행물 # 또는 논문, 추가 정보 필요 (추가 정보 필요) 2001
[7] 간행물 # 또는 논문, 추가 정보 필요 (추가 정보 필요) 2001
[8] 간행물 # 또는 논문, 추가 정보 필요 (추가 정보 필요) 2001
[9] 판례 첩 계약은 부수적 약정도 공서양속에 위반한 무효한 행위이다. http://glaw.scourt.g[...] 대법원 1955-07-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