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찬
1. 개요
김인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1336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 135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북청천호로 선정을 베풀고 해동청을 고려에 헌상했으며, 이성계의 부하가 되어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 공양왕 옹립 공신 및 위화도 회군 공신에 책봉되었고, 조선 개국 후에는 개국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익화군에 봉해졌으나 곧 사망했다. 사후 문하시랑 찬성사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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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년 출생 -
티무르
티무르는 14세기에 활동한 군사 지도자로서,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고 정복 전쟁을 통해 티무르 왕조를 세웠으며, 군사적 재능과 잔혹함으로 평가받는다. -
1336년 출생 -
고계
고계는 명나라의 시인으로, 다양한 주제를 평이하고 담백하게 표현한 약 2000수의 시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도 널리 애창되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1392년 사망 -
호소카와 요리유키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 시대에 관령으로서 막부를 통치하며 시코쿠 평정에 공헌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가네요키의 정변으로 실각 후 복귀했으나 메이토쿠의 난 이후 병사했다. -
1392년 사망 -
지용기
지용기는 고려 말 문신으로, 왜구 토벌 공헌과 위화도 회군 가담으로 정치적 변동에 기여했으나, 공양왕 옹립 후 중흥공신에 책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 후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외증손녀는 조선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이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생애
김인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무신이다. 1336년(충숙왕 후 5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 1357년(공민왕 5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1376년(우왕 2년) 북청천호로 선정을 펼쳤다.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으며,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공양왕 옹립 및 위화도 회군공신에 책봉되었고, 1392년(공양왕 4) 동지밀직사사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곧 죽었다. 사후 개국일등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랑 찬성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2.1. 고려 시대 활동
1336년(충숙왕 후 5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 1357년(공민왕 5년)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하였고, 1376년(우왕 2년)에 북청천호(北靑千戶)로 선정을 펼치면서 해동청을 고려 조정에 헌상하였다.
1383년(우왕 9)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안변으로 오던 중 밭 한가운데 뽕나무 위의 비둘기 두 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자, 길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김인찬(金仁贊)과 한충(韓忠)이 이를 보고 감탄하여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의 직위로 공양왕 옹립공신에 책봉되었고, 같은 해 4월에는 위화도 회군공신에 녹훈되었으며, 1392년(공양왕 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2.2. 조선 건국과 사망
1383년(우왕 9)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안변으로 오던 중 밭 한가운데 뽕나무 위의 비둘기 두 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자, 길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김인찬과 한충(韓忠)이 이를 보고 감탄하여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의 직위로 공양왕 옹립공신에 책봉되었고, 1390년 4월에는 위화도 회군공신에 녹훈되었으며, 1392년(공양왕 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2년 조선 개국의 공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 중추원사(中樞院使),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 同知節制使),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져 태조 이성계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곧 죽었다. 사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인찬이 사망하자, 임금이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를 증직(贈職)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김인찬은 본관(本貫)이 양근(楊根)인데, 무재(武才)가 있었다. 임금을 잠저(潛邸) 때부터 따라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었으며, 개국(開國)할 때에 당하여 임금을 추대하는 데 참여하였다.
3. 평가
김인찬은 양근을 본관으로 하는 무재(武才)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태조를 잠저 때부터 호위하여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었으며, 조선 개국 당시 태조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였다.
태조는 김인찬이 졸(卒)하자,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문하시랑 찬성사를 증직하였으며, 유사를 통해 예장(禮葬)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