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기
1. 개요
지용기는 고려 공민왕 때 삼사우윤을 역임하고, 우왕 때 밀직부사, 전라도 도순문사 등을 거치며 왜구를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요동 정벌 당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공양왕 옹립에 기여하여 문하찬성사에 발탁되고 중흥공신에 봉해졌다. 이후 역모 관련 혐의로 유배되었으나 사면되어 충청도 목천으로 이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곽자의, 이광필에 비견될 정도로 평가받았으며, 묘는 당진시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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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부원군 -
최영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국방을 굳건히 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으나, 우왕의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한 후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다. -
고려의 부원군 -
염제신
염제신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원나라 관료 생활 후 고려로 돌아와 기철 일파 숙청과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공민왕의 후궁 신비 염씨의 아버지로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
1330년 출생 -
완풍대군
완풍대군 이원계는 고려 말 무신이자 이성계의 이복 형으로,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다 사망 후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완산군에 봉해졌고 조선 개국 후 완산백에 추봉, 여러 사당에 배향되었다. -
1330년 출생 -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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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사망 -
호소카와 요리유키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 시대에 관령으로서 막부를 통치하며 시코쿠 평정에 공헌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가네요키의 정변으로 실각 후 복귀했으나 메이토쿠의 난 이후 병사했다. -
1392년 사망 -
정몽주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을 보급하고 이성계와 함께 왜구 및 여진족을 토벌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이방원에게 암살당한 고려의 문신이다.
2. 생애
지용기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건국 초까지 활동한 문신이자 무신이다. 공민왕 때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역임하였다.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에는 왜구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여러 차례 전라도 지역에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1388년 요동 정벌 당시에는 이성계의 편에 서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오르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양왕 때 윤이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삼척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391년에는 부인의 친척 왕익부가 일으킨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되었고, 1392년 충청도 목천의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
2.1. 고려 말 관직 생활
고려 공민왕 때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역임하였다.
고려 우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됐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재직했을 때 왜적이 장흥부(長興府)를 침입하자 탁사청(卓思淸)을 보내 회령현(會寧縣)에서 왜구와 교전하여 승전하였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했다가 1381년 전라도 원수(全羅道 元帥)로 재직했을 때 사근내역(沙斤乃驛)까지 쳐들어온 왜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382년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전라도 반남현(潘南縣)에 들어온 왜구와 싸워 격퇴하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를 겸하였으며,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구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388년 요동(遼東) 정벌 당시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 회군을 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윤이(尹彛)·이초(李初) 등의 이성계 일파 제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윤이 이초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윤이 이초의 옥사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黨人)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강원도 삼척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헌부대사헌이 된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한 공로를 정상참작하여 죄를 경감하고 공신호와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하였으나 얼마 뒤 석방되어 풀려났다.
1391년 부인 이천 서씨의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스스로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가 이를 입수하고는 지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꾸몄다고 고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충청도 목천으로 이배되었다.
2.2. 왜구 토벌과 파직
고려 우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재직했을 때 왜적이 장흥부(長興府)를 침입하자 탁사청(卓思淸)을 보내 회령현(會寧縣)에서 왜구와 교전하여 승전하였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했다가 1381년 전라도 원수(全羅道 元帥)로 재직했을 때 사근내역(沙斤乃驛)까지 쳐들어온 왜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2.3. 복직과 왜구 격퇴
1382년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전라도 반남현(潘南縣)에 들어온 왜구를 격퇴하였다.
2.4.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우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88년 요동 정벌 당시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 회군을 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2.5. 역모 연루와 유배, 사망
1382년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전라도 반남현(潘南縣)에 들어온 왜구와 싸워 격퇴하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를 겸하였으며,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구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388년 요동(遼東) 정벌 당시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윤이(尹彛)·이초(李初) 등의 이성계 일파 제거가 실패로 돌아가 윤이 이초의 옥사가 드러났다. 이때 윤이 이초의 옥사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黨人)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강원도 삼척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헌부대사헌이 된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한 공로를 정상참작하여 죄를 경감하고 공신호와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하였으나 얼마 뒤 석방되어 풀려났다.
1391년 부인 이천 서씨의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스스로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가 이를 입수하고는 지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꾸몄다고 고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충청도 목천으로 이배되었다. 1392년 충청도 목천의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