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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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좌명은 조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청풍 김씨 출신으로, 자는 일정, 호는 귀계 또는 귀천이며, 명성왕후의 백부이자 김석주의 아버지이다. 그는 대동법 시행에 기여하려 노력했고, 군율을 바로잡고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서인 내 갈등과 예송 논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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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6년 출생 - 나베시마 나오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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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김육 - 김집 (1574년)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조선 중기 문신이자 예학자인 김집은 율곡 이이,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계승하고 인조반정 공신을 비판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으며, 『신독재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조선 후기 예학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 18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김좌명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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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 김씨 |
자 | 사우(士友) |
호 | 송음(松陰) |
시호 | 문정(文貞) |
생애 | |
출생 | 1616년 |
사망 | 1671년 |
묘소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오포 안동 김씨 묘역 |
가족 | |
아버지 | 김상헌 |
어머니 | 안동 권씨 |
배우자 | 파평 윤씨 |
자녀 | 김도연, 김창집, 김우집, 김수집 |
관력 | |
주요 경력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 대제학 |
기타 | |
관련 인물 | 현종 |
2. 이력
김좌명은 본관이 청풍이며,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부수찬, 검토관, 교리, 시독관, 겸문학, 문사낭청, 사간, 응교, 집의 등을 지냈다. 이후 좌승지, 대사간, 대사성, 우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아버지 김육이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려 했던 대동법 시행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호남관찰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척신임에도 특혜를 받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명망이 높았다.
1662년(현종 3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병기와 군량을 충실히 하고 군사훈련을 엄격히 했다. 부정부패는 가리지 않고 모두 없애 서리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같은 해 공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좌참찬, 지의금부사,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호조판서 재직 시에는 서리들의 부정을 줄이고 국비를 절약하여 재정을 넉넉하게 했다.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필치에 힘이 넘쳤다. 명성왕후의 백부이자 김석주의 아버지이다.
2. 1. 주요 관직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병조좌랑을 두 번 역임했고, 홍문관수찬, 이조좌랑,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승정원도승지,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1]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현종 때는 수어사를 겸하였다.[2]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도 역임하였다.[3]관직명 | 역임 시기 |
---|---|
병조좌랑 | 1646년(인조 24년) |
홍문관수찬 | 1648년(인조 26년) |
이조좌랑 | 1649년(인조 27년) |
대사헌 | |
경기도관찰사 | |
승정원도승지 | |
이조참판 | |
병조판서 | |
수어사 | 현종 때 |
호조판서 | 1662년(현종 3년) |
공조판서 | 1662년(현종 3년) |
예조판서 | 1662년(현종 3년) |
이조판서 | 1662년(현종 3년) |
2. 2. 서인 내 갈등과 예송 논쟁
그는 조정에 출사할 때마다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는 서인 일부 당론파들의 공격 빌미가 되었다. 또한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서인을 편들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 점 역시 산당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1차 예송 논쟁에 참관한 그는 윤선도와 허목의 3년상 주장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서인 측에게 크게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당론에 어긋나는 자신의 의를 굽힌 적이 없었다.그 밖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수선 묘도(隨羨墓道)의 제도를 썼으므로 대관 민유중(閔維重)에게 탄핵을 받았다.
3. 생애
김좌명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아버지 김육의 대동법 시행을 계승하고자 노력했으나, 호남 관찰사로 임명되지는 못했다.[1]
현종 때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군사 훈련을 엄격히 하고 부정부패를 없앴으며, 1668년에는 노량에서 대열병(大閱兵)을 실시하였다. 척신임에도 혜택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명망이 높았다.[1]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명성왕후의 백부이자 김석주의 아버지이다.[1]
3. 1. 생애 초기
기묘사화 때 사형된 김식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비(金力)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아버지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김육이고, 어머니는 윤급(尹汲)의 딸이다.[1] 김육은 대동법 시행과 민생 구휼 등의 제안을 하여 김좌명에게 사상적인 감화와 영향을 주었다.[1]3. 2. 관료 생활
김좌명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부수찬, 검토관, 교리, 시독관, 겸문학, 문사낭청, 사간, 응교, 집의, 좌승지, 대사간, 대사성, 우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1]1662년(현종 3) 공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같은 해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군사 훈련을 엄격히 하고 부정부패를 없앴다. 좌참찬, 지의금부사, 판의금부사도 역임했다. 척신임에도 혜택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명망이 높았다.[1]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4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후 홍문관 등 여러 요직을 거쳐 1646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병조좌랑으로 재직 중 문과 중시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 1648년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 중 안변으로 귀양갔다. 1649년 풀려나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중시에 급제한 일로 당상관으로 승진,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승정원 도승지,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1]
여러 관직을 겸임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끝에 과로로 사망하였다.[1]
3. 2. 1. 대동법 시행 노력
인조 때인 164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다. 효종이 호남 연해와 산골까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책임을 맡았고, 현종 때는 군율을 바로잡아 수어사를 겸했다. 호조판서 때에는 서리들의 부정을 줄이고 국비를 절약하여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1]현종 즉위 초 공조참판을 사양하고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기를 자원하였다. 아버지 김육이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게 한 대동법의 시행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호남관찰사로 임명되지는 못했다. 1662년(현종 3)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고, 송시열의 제안으로 실시되던 전라도 산군의 대동법이 중단된 것을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1663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전라도대동사목 全羅道大同事目≫을 발표하였다.[1]
3. 3. 생애 후반
청풍 김씨로 본관은 청풍이며,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이다. 아버지 김육이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게 한 대동법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펴기 위해 호남관찰사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척신임에도 혜택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명망이 높았다.[1]두 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 필치가 힘이 넘쳤다. 명성왕후의 백부이고 김석주의 아버지이다.[1]
3. 3. 1. 군사력 강화와 재정 안정
현종 때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면서 군율(軍律)을 바로잡고 병기(兵器)를 정비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탁지(度支)를 맡아 재정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호조판서로서 국비를 절감하여 재정을 윤택하게 하였다.[1]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용모가 단정하였다. 호조판서 재직 시 서리(胥吏)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규찰, 단속하여 예외 없이 처리함으로써 부정부패를 줄였다.[1] 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노량에서 대열병(大閱兵)을 실시,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고 병기와 군량을 충실히 하였다.[1] 병조판서 재직 중에는 무사들이 존경하며 따를 정도로 군율이 엄격하고 공정했으며, 모든 업무에 과단성이 있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1]3. 3. 2. 병조판서와 노량 대열병
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을 시행해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았고, 병기와 군량을 충실히 하였다.[1] 병조판서로 재직 중에는 무사들이 존경하여 따를 정도로 군율이 엄격하고 공정했으며, 모든 업무에 과단성이 있고 공정하였다.[1]3. 3. 3. 다양한 관직 역임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부수찬, 검토관, 교리, 시독관, 겸문학, 문사낭청, 사간, 응교, 집의 등을 지냈다. 이후 좌승지, 대사간, 대사성, 우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1] 현종 3년 (1662년) 공조판서ㆍ예조판서ㆍ호조판서 • 형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 같은 해 병조판서 겸 수어사(守禦使)가 되었다.[1] 현종 9년(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을 시행했다.[1] 이후 이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지의금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1]3. 4. 사후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현종 묘정(廟庭)에 종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2]현종 묘정에 배향된 것은 대례(大禮)가 정해진 뒤에 그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4. 평가와 비판
김좌명은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잦았고, 귀족적인 태도와 사치스러운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3]
반면,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수려한 외모와 성실한 태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2]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중시에도 합격했으며, 호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며 직무를 훌륭히 수행했다.[3]
4. 1. 긍정적 평가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용모가 아름다웠다.[2]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서 중시(重試)에도 발탁되었으며, 가정에서는 훌륭한 행실을 보였고 직무에는 부지런히 종사하였다.[3] 분명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호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며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3]4. 2. 부정적 평가
성질이 거만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귀공자의 버릇을 털어버리지 못하여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2] 지나치게 간소하고 고집스러워 논의가 편협하였고 사류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비판과,[3] 사치스러운 습성을 벗어버리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있다.[3]5. 저서 및 작품
김좌명의 저서 및 작품으로는 다음이 있다.
- 《귀계유고》
- 《유점사 춘파당대사비》
- 《영상 김육비》
- 《충주 이수일 신도비》
- 《사계 김장생 묘표》
- 《대사성 김식비》
5. 1. 저서
- 《귀계유고(歸溪遺稿)》
- 《유점사 춘파당대사비(楡岾寺春坡堂大師碑:高城)》
- 《영상 김육비(領相金堉碑)》
- 《충주 이수일 신도비》
- 《사계김장생묘표(沙溪金長生墓表)》
- 《대사성 김식비(大司成金湜碑:楊州)》
5. 2. 작품
- 귀계유고(歸溪遺稿)
- 유점사 춘파당대사비(楡岾寺春坡堂大師碑:高城)
- 영상 김육비(領相金堉碑)
- 충주 이수일 신도비
- 사계 김장생 묘표
- 대사성 김식비(大司成金湜碑:楊州)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김육 | 1580 ~ 1658 |
어머니 | 파평 윤씨 | 진사 윤급(尹汲)의 딸 |
남동생 | 김우명 | 1619 ~ 1675, 청풍부원군 |
여동생 | 황도명의 처 | |
장인 | 신익성 | 1588 ~ 1644 |
장모 | 정숙옹주 | 1587 ~ 1627 |
부인 | 신지강 | 1617 ~ 1667 |
딸 | 김계희 | 1632 ~ ? |
사위 | 임천 조씨 조현기 | 1634 ~ 1685 |
외손녀 | 조만월 | 1648 ~ ? |
외손녀 | 조계만 | 1654 ~ ? |
외손녀 | 조소만 | 1656 ~ ? |
외손자 | 조정위 | 1659 ~ 1703 |
외손자 | 조정신 | 1660 ~ ? |
외손녀 | 조금만 | 1661 ~ ? |
외손자 | 조정서 | 1664 ~ ? |
외손자 | 조정강 | 1666 ~ ? |
외손녀 | 조혜만 | 1667 ~ ? |
외손자 | 조정경 | 1669 ~ ? |
외손녀 | 조효만 | 1673 ~ ? |
외손자 | 조준석 | 1676 ~ ? |
외손녀 | 조필만 | 1678 ~ ? |
아들 | 김석주 | 1634 ~ 1684, 청성부원군 |
며느리 | 이수강 | 1634 ~ ?, 이후원의 장녀 |
며느리 | 창원 황씨 | 황일호의 딸 |
손자 | 김도연 | 1664 ~ ? |
참조
[1]
문서
김좌명이 죽기 직전 조정은 [[영의정]]은 전임 영의정은 [[정태화]]가 사직하면서 [[허적]]이 영의정에 오르기 전까지 공석이었고 [[좌의정]]에 [[허적]], [[우의정]]에 [[홍중보]]가 앉아있었으며 [[이조판서]]에는 [[김수항]]이, [[호조판서]]에는 [[권대운]]이, [[예조판서]]에는 [[이경억]]이, [[병조판서]]에는 [[김좌명]]이, [[형조판서]]에는 [[서필원]]이, [[공조판서]]에는 [[박장원]]이 앉아있었다.
[2]
문서
현종 019 12/03/08(기미) / 겸 병조 판서 김좌명의 졸기
[3]
문서
현개 023 12/03/08(기미) / 병조 판서 김좌명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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