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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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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정원은 조선 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을 전달하고 신하의 상소를 검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중추원에서 시작되어, 여러 차례 개편을 거쳐 1433년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갑오개혁 이후 승선원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 시종원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승정원은 왕의 자문에 대한 의견 제시, 중국 사신 접대, 지방 민정 관찰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승정원은 6승지를 중심으로 6방으로 구성되었으며, 궐내각사로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 안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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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명칭
한글승정원
한자承政院
로마자 표기Seungjeongwon
다른 명칭
한글정원
후원
은대
대언사
한자政院
喉院
銀臺
代言司
로마자 표기Jeongwon
Huwon
Eundae
Daeeonsa
기본 정보
설립일1400년 4월
설립 근거왕명 출납
전신중추원
상급 기관
역할왕명 출납 기관
그림
동궐도에 그려진 승정원
추가 정보
관련 서적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참고 자료승정원 (承政院) (Empas / EncyKorea)
승정원 (承政院) (Empas / Britannica)

2. 역사

조선 초기 왕명의 출납은 중추원이 맡았으나, 정종중추원의 권한을 나누어 승정원을 설치하였다.[1] 승정원은 왕명을 검토하여 재가를 받은 후 전달하고, 신하의 상소도 검열하여 왕에게 전달했다.

승정원은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고, 왕에게 자문하며, 중국 사신 접대, 지방 민정 관찰, 왕에게 진언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국가 기밀기관이자 왕의 비서였다.

그러나 승정원은 왕의 비서라는 지위를 이용해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세도정치를 행한 홍국영 등이 그 예이다.

2. 1. 초기 역사

조선 초기에는 중추원이 왕명의 출납을 맡았는데, 정3품의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 각 1명을 두었다.[1] 정종 2년, 정종태조와 개국공신의 원탁회의에 가까웠던 중추원을 혁파하고, 개국공신 관련 부분은 의흥삼군부에 넘기고 국왕 직속으로 승정원(承政院)을 설치하였다.[1]

태종 1년, 태종은 의흥삼군부를 다시 인용(引用)해 승정원에 흡수시켜 승정원을 승추부(承樞府)로 확대 개편하였다.[1] 태종 5년, 태종은 승추부를 분할하여 관리가 맡아볼 부분은 병조에 넘기고 국왕 직속이 필요한 부분은 남겨 다시 승정원이라 칭하였다.[1] 이때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를 지신사,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으로 고쳐 시행하고 동부대언과 당후관을 새로 두었다.[1]

1433년(세종 15년)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고쳐 승정원 제도를 완비하여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였다.[1]

2. 2. 태종 대의 개편

태종 원년, 태종은 의흥삼군부를 승정원에 흡수시켜 승정원을 승추부(承樞府)로 확대 개편하였다. 태종 5년에는 승추부를 분할하여 관리가 맡아볼 부분은 병조에 넘기고 국왕 직속이 필요한 부분은 남겨 다시 승정원이라 칭하였다. 태종 원년에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를 지신사,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으로 고쳐 시행하고 동부대언과 당후관을 새로 두었다.[1]

2. 3. 세종 대의 정비

정종 2년 (정종 재위), 정종태조와 개국공신 간 원탁회의와 유사했던 중추원을 혁파하였다. 개국공신 관련 업무는 의흥삼군부로 이관하고, 국왕 직속 기관으로 승정원(承政院)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태종 원년 (태종 재위), 태종은 의흥삼군부를 다시 활용하여 승정원에 흡수, 승정원을 승추부(承樞府)로 확대 개편하였다. 태종 5년 (태종 재위), 태종은 승추부를 분할하여 관리 담당 부분은 병조로 이관하고 국왕 직속 기능만 남겨 다시 승정원으로 칭하였다. 당초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를 지신사,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으로 변경 시행하고 동부대언과 당후관을 신설했다.

1433년(세종 15년), 세종은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고쳐 승정원 제도를 완비, 육조의 업무를 분담시켰다.

2. 4. 갑오개혁 이후

갑오개혁 이후 '''승선원'''(承宣院)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에는 궁내부 산하에 신설된 시종원이 업무를 이어받았다.

3. 역할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으로서, 도승지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보게 하고 각 업무에 관해 국왕의 자문 역할도 하였다.[1] 왕이 내리는 교서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가 거치는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그 역할이 중대하였으며,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나,[2] 국왕과 백관민서(百官民庶)와의 중간 매개 역할뿐만 아니라, 승지(承旨)는 입시(入侍)·등연(登筵)하여 국정에 관한 스스로의 의견을 상달(上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2] 경우에 따라서는 승사(承史:承旨注書)가 직접 왕명을 받아 이것을 봉행(奉行)하며, 때로는 왕을 배행(陪行)하는 일도 있었다.[2] 특히 6승지는 모두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고 도승지(都承旨)는 그 위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하는 등 국정을 위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밖에 승사는 일기를 기록하고 조보(朝報)를 기재·반포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2] 이러한 사항은 행정적·사무적인 일도 있고 단순히 의례적·형식적인 일도 있는 것이다.[2]

중추원의 권한을 나누어 새로 설치되었으며, 전달되는 왕명을 검토하여 재차 허락을 받은 후에 통달했다.[3] 또한 신하의 상소도 승정원의 검열을 거쳐 왕의 눈에 들어갔다.[3]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고, 왕의 자문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며, 중국 사신의 접대, 지방 민정의 관찰, 왕에게의 진언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 국가의 기밀기관이자 왕의 비서인 셈이다.[3]

그러나 때로는 왕의 비서로서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3] 그 예로는 세도정치를 행한 홍국영 등이 있다.[3]

4. 구성

승정원은 정3품 당상 6명의 승지를 두어 각기 6조에 대응하는 6방(房)이 사무를 분담하는 구조였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으며 이를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의 6방이라 하였다.[1]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25인(《대전회통》 기준, 《경국대전》에는 28인), 사령(使令) 35인, 인배(引陪) 6명, 수공(水工) 2명, 군사(軍士) 3명, 대루청군사(待漏廳軍士) 2명이 있었다.[1]

4. 1. 관직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각 1명정7품주서(注書)2명정7품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1명속대전에서 추가된 관직


4. 2. 조직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각 1명정7품주서(注書)2명정7품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1명속대전에서 추가된 관직


4. 3. 이속

승정원의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25인(《대전회통》 기준, 《경국대전》에는 28인), 사령(使令) 35인, 인배(引陪) 6명, 수공(水工) 2명, 군사(軍士) 3명, 대루청군사(待漏廳軍士) 2명이 있었다.[1]

5. 청사

승정원은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해야 했기 때문에 경복궁, 창덕궁과 같은 궐 안에 있었다. 이처럼 궐 안에 있던 관청을 궐내각사라고 한다. 경복궁에서는 근정전의 서쪽, 창덕궁에서는 인정전의 동남쪽, 경희궁에서는 숭정문 남쪽의 내의원 옆에 있었으며, 왕이 어느 궁궐에 거처하는지에 따라 청사 위치가 변동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승정원 (承政院)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3] 웹사이트 승정원 (承政院) http://100.empas.com[...] Empas / Britannica
[4] 간행물 A Bibliographic Guide to Traditional Korean Sources Asiatic Research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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