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육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임진왜란을 겪으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이괄의 난을 겪고 충청도 음성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충청도에서 처음 시행되었고, 전국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김육은 또한 화폐 유통을 장려하고,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도입하는 등 실용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으며, 금속활자 주조를 통해 서적 간행에도 힘썼다. 김육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실학의 선구자로서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조각가 - 나혜석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신여성, 작가,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자유로운 삶을 주장하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으나, 진보적인 사상과 예술적 업적은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 한국의 조각가 - 유길준
    유길준은 조선 후기 개화 사상가이자 정치가, 언론인으로, 서구 문물을 접한 후 갑신정변 연루, 갑오개혁 참여, 아관파천 이후 망명, 애국계몽운동 전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근대화에 기여했음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도 있는 인물이다.
  • 경제학자 -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필리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98년 부통령에 당선되어 2001년 에드사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 경제학자 - 쑹쯔원
    쑹쯔원은 중화민국 시대 정치가이자 경제학자로, 국민정부 재정부장과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하며 중국 경제에 기여하고 중일전쟁 시 미국 지원을 확보했으나, 관료 자본주의 논란 속에 국공내전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 가평군 출신 - 최재성 (정치인)
    최재성은 1965년생으로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3선 국회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사무총장,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가평군 출신 - 윤호중
    윤호중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 김대중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5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김육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김육 영정
직위영의정
임기 시작1655년 8월 15일
임기 종료1655년 8월 25일
이전이시백
이후이시백
임기 시작1651년 1월 1일
임기 종료1652년 1월 17일
이전이경여
이후정태화
직위좌의정
임기 시작1652년 1월 17일
임기 종료1654년 7월 23일
이전이시백
이후이시백
직위우의정
임기 시작1649년 10월 6일
임기 종료1650년 2월 25일
이전조익
이후조익
출생일1580년 8월 23일
사망일1658년 10월 1일
국가조선
한글 이름김육
한자 이름金堉
백후
잠곡, 회정당
생애 및 경력
출생지조선 경기도 가평군 잠곡
사망지조선 한성부 회현방 회현동
직책조선 충청도 관찰사
임기1638년 ~ 1643년
군주조선 인조
당파서인 잔존 세력
분야성리학
배우자파평 윤씨
자녀김좌명(아들), 김우명(아들)
부모김흥우(부)
친인척김석주(손자), 명성왕후(손녀), 김석연(손자)
시호
시호문정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Gim Yuk
매큔-라이샤워 표기Kim Yuk

2. 생애

김육은 1580년 한성부 마포(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이었다. 호는 처음에는 회정당이었으나, 나중에는 성장한 마을 이름을 따서 잠곡이라 하였다. 그는 기묘사화 때 희생된 김식의 4대손으로, 서인이었지만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했다. 성혼윤근수, 윤두수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이는 훗날 그가 실학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모두 외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588년 할아버지 김비가 평안도 강동군수로 부임하면서 가족과 함께 강동으로 이주하여 조호익에게 배웠다.[2] 12세에는 이미 학자들의 수필과 전기문을 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소학을 읽고 정호의 말에 감명받아 벼슬을 통해 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다.[2]

1594년 임진왜란을 겪으며 피난 중에도 학업을 이어갔고, 아버지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누이에게 의지해 살았다.[2]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10년 광해군에게 성혼의 복권 등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1611년 정인홍을 청금록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주도하다 성균관에서 쫓겨났다.[2] 이후 가평군 잠곡리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10여 년간 농민들의 어려운 삶을 직접 경험했다.[2]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관직에 복귀했고, 1624년 이괄의 난인조를 호위하여 공주로 피난했다. 이후 음성군 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며 조세 감면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3]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호구 조사를 중단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1]

1638년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된 후 대동법 시행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1644년 성균관대사성으로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레와 동전 사용을 건의했다.[16] 1646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시헌력 사용법을 배워와 시행을 건의했다.[16] 1650년에는 중국의 화폐 사용을 보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1]

그러나 김육의 개혁 정책은 김집을 비롯한 산림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대동법 시행 문제는 당파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큰 갈등을 빚었다. 이는 결국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으로 이어졌다.[7]

1651년 실록청 총재관으로 《인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간행에 참여, 감독, 지도 하였고, 금속활자를 다시 제조할 것을 건의하여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22]

1658년 서필원전라도감사로 추천하여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해안 연안의 군읍으로도 확대되었다.[22]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가 1658년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22] 그는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되었다.[22]

2. 1. 생애 초기

김육은 어린 시절 천자문을 다섯 살 때 이미 전부 외울 정도로 신동으로 여겨졌다.[2] 1588년 할아버지 김비가 평안도 강동군수로 부임하자 가족이 함께 강동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이황의 제자이자 당시 강동에 유배 중이던 조호익|조호익한국어에게 배웠다.[2]

12세에 이미 유명 학자들의 수필과 전기문을 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소학을 읽고 정호의 "벼슬을 시작하는 자는 물건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백성을 도울 수 있다"는 말에 감명받아 벼슬을 통해 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다.[2]

13세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피난 중에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쟁 중 31세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열심히 공부해 가문을 빛내고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육은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집안이 쇠퇴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누이에게 의지해 살았다.[2]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2] 1610년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광해군에게 세 차례 상소를 올려 스승 성혼의 복권과 축출된 오현의 복위를 청했다. 1611년 정인홍이황을 비판하자 청금록에서 정인홍을 축출하려는 운동을 주도하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2] 이후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고, 1613년부터 1623년까지 왕의 사면을 거부하며 농촌에서 농민들의 삶을 직접 경험했다.[2]

2. 1. 1. 출생과 가계

1580년 7월 14일, 외조부모가 살던 한성부 서부 마포면(麻浦面) 마포리(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이었으므로 경기도 출신으로도 본다. 처음 호는 회정당이라 했다가, 뒤에 어려서 나고 자란 마을에서 호를 따서 잠곡이라 하였다. 그는 조광조의 동지로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당 김식(友堂 金湜)의 4대손이었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1594년(선조 27) 일찍이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우고,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윤근수윤두수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동인이었던 첫 스승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다른 스승들인 윤근수윤두수는 비록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성혼 등의 성리학적 전통을 후대의 실학으로 넘기는 과도기적 위치로, 서인 성리학과 중상주의 실학과 북학파를 잇는 중간고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증조부 김식(金湜, 1482–1520)은 당시 권력자들을 비판하며 조광조성균관에서 지지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희생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아버지 김흥우를 포함한 가족들은 중앙 정부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김육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 덕분에 명망 있는 학자 성혼이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몇 십 년 후 신유학의 지도자이자 권력 엘리트의 일원이 된 김상용|김상용 (1561년)한국어과 김상헌|김상헌한국어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실제로 김육의 어머니는 조광조의 형제의 손녀였다.[1]

2. 1. 2. 유년 시절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 전체를 암송할 정도로 신동으로 여겨졌다. 1588년, 할아버지 김비(金棐)가 평안도 강동군수로 임명되자, 가족들과 함께 강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황의 제자였으며, 당시 강동에 유배 중이던 조호익|曺好益한국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2]

김육은 12세 때 유명한 학자들의 수필과 전기문을 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그는 ''소학''을 읽으면서 정호의 "누구든지 벼슬을 시작하는 자는 물건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백성을 도울 수 있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벼슬을 해야만 백성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2]

13세 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난을 위해 시골로 이주하는 동안에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쟁 중 아버지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임종 직전 아버지는 그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가문을 빛내고 술은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당부했다. 김육은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집안이 매우 쇠퇴하고 어머니 또한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아야 했다.[2]

청소년기에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1598년 성혼이 죽자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 김장생의 아들 김집은 훗날 그의 논적이 된다. 160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2. 1. 3. 청년기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12]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율곡 이이를 승려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방이라며 변호하였다. 그는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에 모시는 문묘 오현종사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 5현에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이 빠진 것에 분개한 북인측에서 반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선현을 헐뜯는다며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서서 가담했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광해군이 양보해 다음해에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 다른 관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 고향으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농촌에 파묻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김육은 신동으로 여겨졌는데,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 전체를 암송했기 때문이다. 1588년, 그의 할아버지 김비(金棐)가 평안도 강동군수로 임명되자,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강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김육은 이황의 제자였으며, 당시 강동에 유배 중이던 조호익|趙好益한국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김육은 문학소년이었다. 12세 때 그는 유명한 학자들의 수필과 전기문을 썼다. 그는 ''소학''을 읽으면서 정호의 "누구든지 벼슬을 시작하는 자는 물건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백성을 도울 수 있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오직 벼슬을 해야만 백성이 잘 살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겼다.[2]

13세 때, 김육은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다. 피난을 위해 시골로 이주하는 동안에도 그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쟁 중 그의 아버지는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가문을 빛내고 술은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당부했다. 김육은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그의 집안은 매우 쇠퇴했고, 어머니 또한 돌아가셨다. 그는 아버지의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아야 했다.[2]

김육은 1605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그의 증조부처럼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610년 ''성균관'' 학생으로서 그는 광해군에게 세 차례나 상소를 올려 앙심을 품었던 스승 성혼을 용서하고 복권시키고, 이전 사림의 숙청으로 축출된 오현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했다. 이듬해 그는 정인홍이 이황을 비판한 것을 이유로 ''청금록''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성균관''에서 시작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오히려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그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로 이주하여 농부가 되어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자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1613년부터 1623년까지의 기간 동안, 김육은 왕의 사면을 거부하고 농촌에서 실제 농민들의 삶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2. 2. 정치 활동과 전후복구 사업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김육은 관직에 복귀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위하여 공주로 피난하기도 했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군 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과중한 세금과 부과 과정의 부정을 지적하며 조정에 조세 감면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3]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김육은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호구 조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평안도황해도 주민들의 생계를 지원하고, 이들에게 부과되는 노동력을 농업과 군역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북방의 적에 대비하기 위해 유휴지에 군사 농장을 경작할 것을 주장했다.

1632년 인목대비의 장례를 주관하기도 한 김육은, 1638년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충청도의 재정 상황을 조사한 후 대동법 시행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대동법은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제도로, 1608년부터 경기도에서 시행되고 있었다.[3] 김육은 대동법이 농민들의 부담을 덜고, 지방 관리와 상인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믿었다.[4]

김육은 청나라와의 관계, 과도한 공물 요구, 북벌 정책으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 그리고 잦은 자연재해 등 당시 조선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세금을 줄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심 이반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인조와 효종에게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달했다.

김육은 1644년 성균관대사성으로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레와 동전 사용을 건의했고, 1646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베이징에 다녀와 시헌력 사용법을 배워왔다.[16] 귀국 후 시헌력 사용을 적극 건의하며 기후 변화 예측과 시간 활용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1650년에는 중국의 화폐 사용을 보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후 청나라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1]

하지만 김육의 개혁 정책은 김집을 비롯한 산림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대동법 시행 문제는 당파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큰 갈등을 빚었다. 김육은 대동법이 백성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양반과 지방 관리들에게는 불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으로 이어졌다.[7]

2. 2. 1. 이괄의 난과 개혁안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김육은 유일(遺逸)로 추천받아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13]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다.[13] 그 후 1624년 2월 충북 음성 현감(陰城縣監)으로 부임하였다.[13]

음성현감 재직 시절, 김육은 백성들의 피폐한 상황을 직접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조정에 부세 재촉 중단과 요역 및 조세 감면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토지의 많고 적음을 고려하지 않은 과중한 세금과 부과 과정의 부정을 지적하며 개혁을 주장했다. 이후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다시 음성현감으로 부임했는데, 이때 백성들이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625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같은 해 10월사간원정언에 임명됐다가 사헌부와 호패청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인조에게 전후 복구책이 우선임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26년 조정에서 국방예산 확충을 위해 각지에 호패어사 파견을 논의할 때, 김육은 시간 낭비와 실효성 부족, 백성들의 접대비 부담 등을 이유로 반대하며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14] 이후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인한 서인남인 간의 갈등 때문에 묻혔다.

1627년(인조 5)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 중지를 통해 민심 안정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사헌부 지평 재직 중 평안도·황해도의 민폐 개혁을 위한 양서사의(兩西事宜)를 올렸다. 그해 청나라선전포고를 해오자 호패법 중지와 과도한 단속 완화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2. 2. 2. 정묘호란과 호패법 중단

1623년 서인 세력의 군사 반란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김육은 은둔 생활을 접고 가장 먼저 복귀했다. 1624년 문과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과 지방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공주로 호위하기도 했다. 이후 충청도 음성군 등에서 근무하며 선정을 베풀어, 그가 음성을 떠날 때 주민들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1]

1627년 1월, 후금(훗날 청나라)이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자, 김육은 호구 조사를 중단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2. 2. 3. 수레 사용과 시헌력

1644년 성균관대사성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레와 동전(銅錢)의 사용을 건의하였다.[16] 김육은 운송의 편의를 위해 큰 바퀴가 달린 수레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8]

1646년 청나라사은사가 파견될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베이징에 다녀왔으며, 이때 베이징에 당도한 서양인 과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시헌력 사용법을 배워왔다.[16] 시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 달력이었는데, 그는 이를 확인하고자 직접 해의 변화를 관측한 자료를 입수하기도 했다.[16] 귀국 후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면서 직접 달의 변화와 해와 날의 길이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후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여 농업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6]

중국의 명대에 와서 마테오 리치,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서양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아니라 주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한 천문수치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케플러가 편찬한 루돌프 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17] 이 서양 선교사들과 주로 서광계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는 ‘숭정역서(崇禎曆書)’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이 역서를 공포하지 못하고 죽었고, 대신 명을 멸망시킨 청조가 이 역법을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라는 이름으로 공포했다. 조선 효종 때 김육의 건의로 시행한 시헌력(時憲曆)은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17] 그러나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문물을 모두 의심하던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듯 그 역시 의심하였으나,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산림 측에서도 별다른 반발이 없어 조선조정은 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게 된다.

2. 2. 4. 대동법 시행

1638년,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충청도의 재정 상황과 세금 징수 결과를 조사한 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1608년부터 경기도에서 시행된 대동법은, 특산물과 같은 현물 세금을 일정량의 쌀로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

김육은 충청도 음성군에서 농민, 그리고 일선 공무원으로 근무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대동법이 농민들의 부담을 덜고, 지방 관리와 상인, 중간 상인(방납인)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굳게 믿었다. 당시 재정 수입의 절반은 해당 지역의 특산물(공물)로 충당해야 했다. 문제는 지방 관리와 상인, 중간 상인들의 의도적인 착취였다. 그들은 홍수, 가뭄 또는 해충으로 인해 구하기 어려운 지역 특산물을 요구하거나, 물품의 결함이나 품질을 이유로 농민들의 직접적인 공급을 거부하기도 했다.[4]

김육은 1결당 12의 쌀을 세금으로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현대적 측정으로는 8,000평 또는 26450m2 당 5말 정도였다.[5]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김육은 토지에서 생산된 쌀을 비례적으로 분담하는 대동법으로 특산물 공납제를 시급히 대체해야 한다고 인식했다.[6]

그러나 대동법 시행에는 당파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 농민과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되었지만, 유생들과 부유한 양반들은 새로운 제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거의 없었다. 지방 관리들은 부수적인 이익의 원천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법은 경기도를 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반대론자들은 전국적인 시행이 재정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을 채택하도록 설득했다. 마침내 1651년, 효종은 충청도에서 대동법 시행을 지지했다. 김육은 김집, 송시열과 같은 주류 관료들과 결별하게 되었고, 이는 반김산당(山黨)과 친김한강당(漢黨)의 분열을 초래했다.[7] 김육은 극도로 완고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임종 직전에도 그는 대동법이 전라도로 확대되기를 바랐고, 이는 그의 후임 전라도 관찰사 서필원에 의해 1657년에 마침내 완료되었다.

2. 2. 5. 화폐 유통 확산

1650년(효종 1) 김육은 중국 사행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 문(十五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시켰다.[1]

이후에도 청나라의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해 정확한 액수로 거래하고, 물물교환으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1]

2. 2. 6. 산림, 향촌 지주세력과의 갈등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집과 논쟁하였다. 이때 김집의 문하생인 산림은 그가 축재와 사사로운 목적을 품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 뒤 산림의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여 사직했으며,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과의 불화로 1651년 1월에 중추부영사로 물러났다.[18]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는 그의 주장은 지역 유지들과 산당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 등과는 정치적 갈등이 생겼고, 이른바 산당(山黨)·한당(漢黨)의 대립을 낳기도 하였다. 이들의 대립은 김집의 문하생인 송시열, 송준길과 그의 아들인 김우명, 김좌명에게로 이어진다.[18]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 관료, 지역 유지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반발을 부추기는 장사꾼들의 계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만약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면, 농민과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되었겠지만, 국내 유생들과 부유한 양반들은 새로운 제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거의 없었다. 지방 관리들은 부수적인 이익을 잃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대동법경기도를 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반대론자들은 전국적인 시행이 재정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 채택을 설득하려 했다. 1651년, 효종은 충청도에서 대동법 시행을 지지했다. 불가피하게 김육은 김집송시열로 대표되는 주류 관료들과 결별하게 되었고, 반김산당(山黨)과 친김한강당(漢黨)의 분열을 초래했다.[7] 김육은 극도로 완고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2. 3. 생애 후반

1651년(효종 2) 조선에서도 옆전을 주조할 것을 건의하고, 그해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베이징에 다녀왔다. 또한, 실록청 총재관으로 《인조실록》 50책을 완성시키고, 《선조수정실록》8책도 교열, 영인하였다.[22]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를 다시 제조할 것을 건의하여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교서관의 기능이 마비되고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전란 후 경제적인 궁핍으로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22]

금속 활자.


1651년 실록청 총재관이 된 그는 금속활자를 재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과 《선조수정실록》 8책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렸다. 의서(醫書)들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활자 인쇄술에 의존하였는데, 자신의 저술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의 활자 인쇄술 주조 사업은 아들 김좌명김우명이 이어받았고, 자손들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었다.[22]

1658년(효종 9) 서필원전라도감사로 추천하여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해안 연안의 군읍으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전라감사 서필원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22]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1658년 말 효종은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냈으나,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22]

樂正子春중국어은 한낱 필부였지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樂正子春중국어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이다...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될까 염려해서이다.[22]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되었다. 효종은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며 탄식하였다. 효종은 그가 사망하자 5일간 조회를 파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78세였다.[22]

2. 3. 1. 실록 간행과 금속활자

1651년 효종에게 조선에서도 옆전을 주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1651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베이징에 다녀왔다. 또한, 실록청 총재관으로도 실록 편찬에 직접 참여, 감독, 지도하여 2년만에 《인조실록》 50책을 완성시키고, 이어 《선조수정실록》8책도 교열, 영인하였다.

그는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를 다시 제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전란 후 중단되고 있던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서적의 인쇄를 맡고 있던 교서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새 주조해 놓았던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했다. 전란 후에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전란 전에 나온 책들을 본떠서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

1651년에 실록청 총재관이 된 그는 금속활자를 재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과 《선조수정실록》 8책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로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도감 시설을 빌려 쓰던 것에서 벗어나 정식 주무 관청인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의서(醫書)들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활자 인쇄술에 의존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의 활자 인쇄술 주조 사업은 아들 김좌명김우명이 이어받았고, 그의 자손들의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이어졌다. 이는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 책 간행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2. 3. 2. 은퇴와 영의정 복귀

1658년(효종 9) 서필원전라감사로 추천하여, 그를 통해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해안 연안의 군읍으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22]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22]

樂正子春중국어은 한낱 필부였지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樂正子春중국어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이다...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될까 염려해서이다.[22]

그는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되었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며 탄식하였다. 효종은 그가 사망하자 슬퍼하며 5일간 조회를 파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78세였다.[22]

2. 3. 3. 영의정 재임과 사망

1658년(효종 9) 서필원전라감사로 추천하여, 그를 통해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해안 연안의 군읍으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22]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22]

臨終上疏曰, 臣病日篤, 餘息幾何. 恐不復瞻望天顏, 望闕涕泣. 帝王之學, 莫貴於存心集義, 不使外馳. 殿下自講筵, 果能不失此道乎? 樂正子春一介匹夫, 措足不敢忘父母, 而殿下今日所傷, 至於如此, 豈不愧哉! 鐵杖木馬, 於立志復讐, 何所裨益, 與朱熹同時, 不能使之留數十日, 誠可惜也. 殿下今日所當用力於心學者, 惟衛武公抑戒之詩, 是宜玩索. 孟子曰, 保民而王, 莫之能禦. 民安樂業, 何患無兵. 荒年民散, 陞戶之擧, 又生於是, 臺諫爭之不得, 此何等時也. 殿下其亦有悔乎? 雖十改何害? 培養邦本, 今日急務, 而贊善莫如宋時烈, 宋浚吉. 願殿下始終以敬禮, 待之至誠, 無有遐心. 湖南事, 臣已薦徐必遠, 臣恐一旦溘然, 則無人贊助, 中道而廢. 其謝恩還發, 殿下敦諭勤飭, 以卒臣志. 臣所欲陳, 不止此, 而病革神亂, 略陳萬一, 不勝惶悚云。|임종상소왈, 신병일독, 여식기하. 공불복첨망천안, 망궐체읍. 제왕지학, 막귀어존심집의, 불사외치. 전하자강연, 과능불실차도호? 악정자춘일개필부, 조족불감망부모, 이전하금일소상, 지어여차, 기불괴재! 철장목마, 어입지복수, 하소비익, 여주희동시, 불능사지류수십일, 성가석야. 전하금일소당용력어심학자, 유위무공억계지시, 시의완색. 맹자왈, 보민이왕, 막지능어. 민안락업, 하환무병. 황년민산, 승호지거, 우생어시, 대간쟁지불득, 차하등시야. 전하긔역유회호? 수십개하해? 배양방본, 금일급무, 이찬선막여송시열, 송준길. 원전하시종이경례, 대지지성, 무유하심. 호남사, 신이천서필원, 신공일단합연, 즉무인찬조, 중도이폐. 기사은환발, 전하돈유근칙, 이졸신지. 신소욕진, 불지차, 이병혁신란, 약진만일, 불승황송운.중국어

公沒, 上震悼罷朝五日。|공몰, 상진도파조오일.중국어

그는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된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효종은 슬퍼하여 5일간 조회를 파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78세였다.[22]

사후 10년 뒤인 1668년(현종 9) 현종의 특명으로 <잠곡집>을 간행하였다.

김육에서 그의 아들 김좌명으로 정책이 전수되는 것은 그들이 선조인 중종 때의 사림 명신 김식의 개혁 정신을 충실히 이었음을 뜻한다.

3. 외교 활동

김육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조선과 명, 청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육의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 등은 가업인 인쇄술을 계승하였다.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되었다. 영조대동법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문집들을 다시 재간행하였고, 1636년 명나라의 화가 호병이 그린 그의 초상화 겸 풍경화인 송하한유도에 헌시를 남기기도 했다.

3. 1. 명나라 사행

김육은 공직 생활 동안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방문하는 외교 사절단에 세 번 파견되었다.

1636년 겨울, 그는 계절에 따른 예방을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聖節使|성절사중국어). 북경에서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북경에서 밤낮으로 울었다고 전해진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그는 외교 사절의 일기인 ''조천일기''(朝天日記|조천일기중국어)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문명화된 외국, 명나라 관료들의 부패, 그리고 명나라 사회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다.

1643년 겨울, 소현세자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을 때, 김육은 청나라 조정에서 세자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元孫輔養官|원손보양관중국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북방 지역의 외교 사절단을 돌보기 위한 악습을 없애려 노력했다.

3. 2. 청나라 사행

2000년 2월, '3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되었다.[24]

김육은 공직 생활 동안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방문하는 외교 사절단에 세 번 파견되었다.

1636년 겨울, 계절에 따른 예방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聖節使|성절사중국어). 베이징에서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밤낮으로 울었다고 전해진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그는 외교 사절의 일기인 ''조천일기''(朝天日記|조천일기중국어)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문명화된 외국, 명나라 관료들의 부패, 그리고 명나라 사회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다.

1643년 겨울,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을 때, 김육은 청나라 조정에서 세자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元孫輔養官|원손보양관중국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북방 지역의 외교 사절단을 돌보기 위한 악습을 없애려 노력했다.

4. 사상과 신념

김육은 당시 조선이 안팎으로 큰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 위기의 원인은 전쟁 방어를 소홀히 하고 국력을 낭비한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안민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공직 생활은 개혁적인 정책 수립으로 대표된다. 1627년 후금(청)의 정묘호란 직후, 김육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평안도황해도 주민들의 생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노동력을 일반 농업과 군역(兵農分離|병농분리중국어)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북쪽의 적과의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유휴 토지에 군사 농장(屯田|둔전중국어)을 경작할 것을 주장했다.

전국적인 대동법 시행은 김육의 한결같은 노력이었다. 그는 "내 주변 동료들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만 말한다고 비웃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대동법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김육은 청나라가 조선에 정치적,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청나라 관리들이 공물을 더 많이 요구하며, 북부 지역 주민들이 북벌정책으로 세금과 노동에 부담을 느끼고, 전국이 매년 자연 재해로 고통받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김육은 세금을 줄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심 이반을 막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인조와 효종에게도 전달했다.

1638년,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충청도의 재정 기반과 세금 징수 결과를 조사한 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대동법(대동법|大同法한국어)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1608년부터 경기도에서 시행된 대동법은 토산물과 같은 현물 세금을 일정량의 쌀로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4. 1. 재난 구호

1644년에는 명나라청나라 사신이 다녀갈 때 공녀와 인삼, 비단 등을 요구하는 폐단을 폐지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고, 1627년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일시적으로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으로 흉년과 기근, 인명 피해, 재산 피해 등으로 유랑자가 다수 발생하자 세금 감면과 농작물 지원, 도망치거나 이주하는 주민에 대한 오가작통이나 족징 등의 단속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기근과 질병, 부상과 각종 재난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 치료할 목적에서 선조, 광해군 대에 편찬된 각종 의학 서적을 인쇄, 복사, 배포하였으며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瘟方)》 등을 편찬하였다.

4. 2. 경제활성화 정책

김육은 화폐 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엽전 발행을 장려하였다.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만을 유통 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에서 문제점을 찾았다.[25]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25] 1651년 상평통보 주조를 건의하였다.[21]

이 밖에도 농업 장려와 작물 생산 확산을 위해 수로 건설, 수차(水車) 사용 등 농사 기술 개선, 수레 사용, 시헌력을 통한 기후 예측 등을 추진하였다.[25] 또한 가뭄 등의 재난을 예방하는 방도로서 전국 각 지역에 빙고와 비슷한 물 저장고를 만들고, 한성에는 각 개천을 준설하자는 견해를 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주장이었다.[25] 세곡선의 침몰이 잦았던 안흥량의 바닷길을 피해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하고 육로를 일부 이용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25]

5. 평가와 비판

김육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지만, 당시 권력층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송시열이 권력을 잡으면서 김육의 실용적인 정책 아이디어는 국가 통치에서 배제되었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조선 왕조와 백성이 르네상스를 누린 것처럼 보였으나, 정조가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왕실 외척들이 지속적으로 정책 결정과 행정에 간섭했고, 조선 왕조는 쇠퇴에 가까워졌다.[9]

5. 1. 긍정적 평가

김육은 공직 생활 동안 개혁 지향적인 정책을 펼친 것으로 대표된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안도황해도 주민들의 생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노동력을 일반 농업과 군역(병농분리|兵農分離한국어)으로 분리하고, 유휴 토지에 군사 농장(둔전|屯田한국어)을 경작할 것을 제안했다.[9]

전국적인 대동법 시행은 김육의 일관된 노력이었다. 그는 "내 주변 동료들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만 말한다고 비웃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대동법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동법 외에도 김육은 새롭게 부상하는 청나라의 압력, 과도한 공물 요구, 북벌 정책으로 인한 세금 및 노동 부담, 자연재해 등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과세 감면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심 이반을 막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인조와 효종에게도 전달했다.[9]

김육은 조선 왕조 최고의 개혁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주류 성리학과 관계없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방법에 주목했으며, 이는 명망 높은 김효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점과 실용주의에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성혼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서인에 속했지만, 다음 세기에 실학(실학파|實學派한국어)으로의 전환을 위한 다리를 놓는 데 성공했다.[9]

때때로 그는 비판자들과 반대자들에 의해 조선의 왕안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육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선견지명과 실천력을 갖춘 전례 없는 정치가였다.[9]

  • 외적의 침략 이후의 상황을 국가의 위기적 순간으로 인식
  • 위기가 백성들의 소외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
  • 백성들의 세금 부담 경감 주장
  • 전국적인 대동법 시행과 화폐 사용이 백성들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
  • 물레방아, 큰 바퀴 수레, 태양력 기반의 새로운 달력 시스템과 같은 단순한 것들이 백성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제안


김육의 사상과 정책은 18세기 실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10] 김육의 개혁 덕분에 가난했던 국가는 부활했고 재정 수입은 증가했다. 그는 서인이었지만 남인 조호익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남인의 김세렴, 조경 등 다른 정치인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5. 2. 부정적 평가

김육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나, 성리학 주류와 권력층의 반대로 그의 실용적인 정책은 국가 운영에서 제외되었다. 송시열 집권 후 류성룡과 김육의 제안은 배척되었고, 영조와 정조 시대 이후 왕실 외척의 개입으로 조선은 쇠퇴했다.[9]

6. 저서


  • 《잠곡필담》
  • 《유원총보》
  • 《송도지》
  • 《팔현전》
  • 《해동명신록》
  • 《황명기략》
  • 《종덕신편》
  • 《잠곡유고》: 김육 사후 그의 후손들이 18세기에 편집하여 간행한 문집으로, 한시, 왕에게 올린 상소, 관료/사적인 편지, 문장 등을 모았다.
  • 《기묘팔현전》: 1639년 간행. 김육이 기묘사화(1519) 때 희생된 그의 고조부 김식을 포함한 8명의 학자와 관리들의 생애, 경력, 업적 등을 기록한 책이다.
  • 《잠곡필담》: 김육이 학문, 생활, 공직 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에 대한 수필이다.
  • 《유원총보》: 김육이 편집한 백과사전. 원래 중국에서 간행된 171권의 오래된 백과사전(고금사문류취)이었으나, 조선의 학자들과 선비들이 참고하던 중 두 차례의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김육은 학자들과 학생들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원본을 47권으로 압축, 편집하였다.
  • 《송도지》: 김육이 편찬하고 저술한 송도(고려의 옛 수도, 현대의 개성)의 역사, 지리, 궁궐, 성곽, 인구, 경제, 산업 및 행정에 대한 기록이다.
  • 《해동명신록》: 1651년 저술. 주자의 《송명신언행록》을 본떠 김육이 저술한 책으로, 신라, 고려, 조선의 300명이 넘는 훌륭한 학자 및 관리들의 전기이다.
  • 《황명기략》: 김육이 1642년에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 《종덕신편》: 1644년 저술. 《소학》을 본떠 김육이 저술한 책으로, 유교 윤리에 기반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도덕적 덕목을 교육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7. 기타

(섹션의 내용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습니다.)

7. 1. 금속활자 주조

1656년(효종 7) 효종에게 금속화폐를 사용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다.[21]

금속활자 주조에 대한 의욕과 서적 간행에 대한 정열은 그의 자손에까지 전해졌다. 김육은 일찍부터 전화(錢貨)를 주조하기 위해 동과 철의 합금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는데, 훗날 이 지식을 토대로 현종 9년에 병조판서가 된 아들 김좌명이 금속 합금 기술을 이용해 왜란 후 처음으로 구리를 재료로 한 활자인 삼주갑인자(三鑄甲寅字)를 만들었다.

그의 손자 김석주는 숙종 초년에 구리를 재료로 소활자체인 한구자(韓構字)를 주조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7. 2. 가계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외조부모가 살던 한양 마포(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김식(金湜, 1482–1520)은 당시 권력자들을 비판하며 조광조성균관에서 지지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희생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아버지 김흥우를 포함한 가족들은 중앙 정부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김육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 덕분에 명망 있는 학자 성혼이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몇 십 년 후 신유학의 지도자이자 권력 엘리트의 일원이 된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실제로 김육의 어머니는 조광조의 형제의 손녀였다.

8. 관련 인물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외조부모가 살던 한양 마포(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김식(金湜, 1482–1520)은 조광조성균관에서 지지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희생된 인물로, 당시 권력자들을 비판하였다. 김육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 덕분에 명망 있는 학자 성혼이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몇 십 년 후 신유학의 지도자이자 권력 엘리트의 일원이 된 김상용, 김상헌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김육의 어머니는 조광조 형제의 손녀였다.

9. 관련 사건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외조부모가 살던 한양 마포(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김식(金湜, 1482–1520)은 당시 권력자들을 비판하며 조광조성균관에서 지지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희생되었다.[1] 이 사건 이후, 김육의 아버지 김흥우를 포함한 가족들은 중앙 정부에서 배제되었다.[1]

그러나 김육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 덕분에 명망 있는 학자 성혼이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몇 십 년 후 신유학의 지도자이자 권력 엘리트의 일원이 된 김상용김상헌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1] 김육의 어머니는 조광조의 형제의 손녀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Kim Yuk:Nate https://web.archive.[...] 2012-02-05
[2] 뉴스 Kim Yuk (김육) - The Great Statesman of Joseon who devoted his life to ''Daedongbeop'' https://terms.naver.[...] NAVER Encyclopedia
[3] 문서 Literary meaning of ''Seonhye'' is to distribute benefits, while ''Daedong'' means almost same in than the conventional indigenous products are same as a certain quantity of rice or cotton cloth.
[4] 서적 Critical Biography of Kim Yuk (김육 평전) Minumsa
[5] 뉴스 Interview with Prof. Lee Heon-chang: Preference of Song Si-yeol to Kim Yuk caused Joseon to deteriorate http://news.chosun.c[...] Kim Ki-cheol, Chosun 2020-03-13
[6] 문서 Upon implementation of ''Daedongbeop'', the peasants in the Chungcheong region were largely relieved of burdensome indigenous products. It was said that they were dancing at their farm land as they paid to the local government officials only a smaller amount of rice or cotton cloth.
[7] 문서 Lee Heon-chang, ''op. cit''., pp. 231, 260.
[8] 문서 ''Ibid''., pp. 438ˆ439.
[9] 문서 Lee Heong-chang, ''op.cit''., p.544, pp.550-553.
[10] 웹사이트 김육 https://terms.naver.[...] 2024-03-25
[11] 뉴스 격동의 조선후기를 지켜낸 힘 ‘대동법’ http://www.hani.co.k[...]
[12] 문서 임진왜란 때 몽양가는 선조의 어가를 호위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
[13] 웹사이트 김육 http://myhome.hanafo[...]
[14] 뉴스 [백승종의 역설] 피혐(避嫌) 한겨레 http://www.hani.co.k[...] 2009-02-06
[15] 문서 임진왜란 직후 평민과 노비 중에는 고향을 등지고 도망가는 사례가 빈번하였으므로 족징과 오가작통으로 한 통리에 살던 주민들에게 대신 세금을 부과하였다.
[16] 문서 그러나 인조의 심중은 세자빈 강씨와 그 일족을 제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7] 뉴스 [임경순의 과학세상] 우리나라 전통 역법(曆法) http://weekly1.chosu[...] 2016-03-05
[18] 문서 남인과의 제1차, 2차 예송논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서인의 내부 갈등은 격화되었다.
[19] 문서 그가 평안도에 청나라, 명나라 옆전을 보급한 이래 옆전의 사용이 확산되었고, 현금이 부족하자 종이 문서로 된 어음 차용증도 출현하였다. 숙종 때의 상평통보 발행으로 이어졌다.
[20] 문서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7월 27일(임인) 1번째기사 "김우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 것에 대해 하문하다"
[21] 웹인용 청풍김씨 https://web.archive.[...] 2009-01-08
[22] 문서 효종실록 020 09/09/05(기해) /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의 상소와 졸기"
[23] 문서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24] 뉴스 ‘3월 문화인물’에 김육 선생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0-02-27
[25] 뉴스 조선시대 태안반도에 물길공사 왜?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8-02-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