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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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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학순은 1924년 만주 지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1991년 대한민국 거주자 중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증언했으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 1997년 폐질환으로 사망했으며, 이후 증언의 신뢰성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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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여성운동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한글김학순
한자김학순(金學順)
로마자 표기Gim Haksun
출생1924년
사망1997년
출생지길림성, 중국
직업위안부 피해 사실 증언자, 여성운동가
활동 기간해당 정보 없음
웹사이트해당 정보 없음
배우자해당 정보 없음
기타 정보
참고 자료True stories of the Korean comfort women : testimonies
참고 자료Coalition building and mobilization: case studies of the comfort women memorials in the United States
참고 자료The Korean "Comfort Women": Movement for Redress
참고 자료The 'comfort women' issue and the embedded culture of sexual violence in contemporary Japan
참고 자료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2. 생애

김학순은 1924년 만주 지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평양으로 이주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기생 권번의 양녀로 보내졌다가, 1941년 양부의 꾐에 빠져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이후 조선인 남성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1946년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한국 전쟁 등으로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힘겨운 삶을 살았다.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고, 1991년 12월 6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사건)을 제기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발행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밝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97년 12월 16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국립망향의동산에 안장되었다.

한국 유족회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사건)에서 법원에 제출된 이력에는 “김진원의 양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6][17] (본인이 40원에 팔렸다고 증언했으므로, 매매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18])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19]

연도내용
1945년 (21세)둘째를 출산하고, 마쓰이 양행이라는 전당포를 경영했다.
1946년 6월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1년 8월위안부였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991년 12월일본국을 제소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사건)
1997년 12월 16일사망했다. 향년 73세.



1991년 12월 6일,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여 소송 제기. 1차 원고 35명 중 위안부는 3명, 나머지는 전 일본군인, 2차 원고는 전 위안부 6명.

2001년 3월 26일, 도쿄 지방법원은 청구를 기각. 이 시점에 김학순은 사망, 전 위안부 1명은 탈퇴하여 원고는 40명(위안부 8명 포함).

2003년 7월 22일 도쿄 고등법원 기각. 원고는 상고.

2004년 11월 29일 최고재판소도 기각.

2. 1. 어린 시절

1924년 만주 지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원래 평양에 거주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등쌀에 중국으로 피신했다.[1] 아버지는 한국 독립운동가로 독립군을 지원하며 생활했다.[1] 김학순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어린 김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1]

어렸을 적 김학순은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녔고 11살 무렵까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1] 14세 때 어머니가 재혼했고, 재혼한 남편은 김학순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있었다.[1]

어머니의 재혼 이후 김학순은 재혼한 남편의 자녀들과는 잘 어울렸지만, 재혼한 남편에게는 정을 붙이지 못했다. 자연스레 어머니와의 사이도 멀어졌고, 15세 때 어머니는 40원을 받고 김학순을 평양에 있는 기생집 수양딸로 보냈다.[1][18]

거기서 김학순은 기생 수업을 받았다. 2년 정도 권번에 다니면서 춤,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1] 기생 수업을 마치고 영업을 하려 했지만 나이가 17세에 불과해 허가를 받지 못했다.[1] 김학순의 양부는 중국에 가면 영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학순과 먼저 수양딸로 온 언니를 데리고 1941년 중국으로 떠났다.[1]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19]

연도내용
1924년중국 지린성(당시 만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망했다.
1926년 (2세)어머니와 함께 평양(현재 북한)으로 이주했다.
1935년 (11세)모자 가정의 빈곤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1938년 (14세)어머니가 재혼했고, 계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9년 (15세)40원에 팔려 기생 권번의 양녀가 되어 기생 양성학교에 다녔다.
1941년 (17세)졸업했지만 나이가 부족하여 기생이 될 수 없었고, 양부에게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양부에게 이끌려 평양에서 중국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2. 2. '위안부' 강제 동원

김학순은 1939년 15세에 40원에 팔려 기생 권번의 양녀가 되었고, 기생 양성 학교에 다녔다.[19] 1941년 17세에 졸업했지만 나이가 어려 기생이 될 수 없었다. 양부는 김학순에게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고, 김학순은 양부에게 이끌려 평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19]

기차는 평양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산해관을 지나 베이징으로 갔다.[1] 베이징에서 일본군 장교는 김학순을 불러 “조선인이지? 스파이가 아니냐?”고 질문했고, 김학순은 언니와 함께 트럭에 태워졌다.[19] 그날 일본군 장교는 김학순을 강간했다.[1] 다음 날 김학순은 자신의 언니도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는 것과 그곳에 조선말을 하는 여성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

김학순을 비롯한 5명의 조선 여성들은 빨간 벽돌집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1] 일본군은 보통 오후에 몰려들었고, 많은 날에는 하루에도 7~8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1] 김학순은 '아이코(Aiko)'라는 일본 이름을 받았다.[1]

1991년 한국 유족회 소송 소장[17]에서는 김학순이 베이징에서 군인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철벽진까지 양부에게 데려가졌고, 양부와는 거기서 헤어졌다고 다르게 증언한다.[19]

김학순은 2개월 정도 철벽진에 머무른 뒤 일본군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군인의 수는 줄었지만, 술을 마시고 오는 군인들이 많아 사는 게 더 비참했다.[1] 그러던 중 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을 찾았고, 김학순은 그에게 사정하여 위안소를 탈출했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지 4달 만이었다.[1]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에서 김학순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9]

  • 군의관은 1주일에 한 번 후방에서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지만, 바쁠 때는 오지 않는 주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노란색으로 빛나는 606호 주사를 맞았다.
  • 병사들은 1원 50전, 장교들이 숙박할 때는 8원을 내야 했다. 하지만 김학순은 위안부 생활 동안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


같은 해 12월 6일 제기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소장[17]에서는 “열네 살부터 기생학교에 3년간 다녔다”며, “‘거기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설득되어, 김학순의 동료이자 한 살 위의 여성(에미코)과 함께 양아버지에게 이끌려 중국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김학순의 증언 기록과 소장을 비교하며 “중요한 부분에서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고, 전전 일본에서도 팔려간 딸은 업자의 양녀라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녀의 경우도 전형적인 매매 사례”라고 말했다.

2. 3. '위안부' 생활과 탈출

김학순은 양아버지와 함께 평양을 떠나 산해관을 거쳐 베이징으로 갔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양부는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김학순은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당했다. 이후 김학순과 양언니는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1] 빨간 벽돌집에서 김학순을 비롯한 5명의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은 보통 오후에 몰려들었고, 많은 날에는 하루에도 7~8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1]

2달 정도 철벽진에 머무른 뒤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군인의 수는 줄었지만 술을 마시고 오는 군인들이 많아 사는 게 더 비참했다. 김학순은 양언니와 함께 탈출 기회를 엿보던 중, 조선인 남자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지 4달 만이었다.[1]

이후 김학순은 탈출을 도운 평양 출신의 조선인 상인의 아내가 되어 딸과 아들을 낳고, 한동안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생활했다.[1]

김학순의 양아버지가 김학순을 위안부 시설 주인에게 팔려고 했다는 상반된 이야기[5]와 남편이 탈출을 돕기 전에 그녀를 강간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19]

연도내용
1941년 (17세)기생이 될 수 없었고, 양부에게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조선인이지? 스파이가 아니냐?”는 말을 듣고 누나와 함께 트럭에 태워졌다. 밤중에 도착한 빈집에서 장교에게 강간당했다. 다음 날, 누나와 함께 위안부 시설에 끌려갔다. 그곳은 철벽진(?) 마을 안의 위안소였고, 조선인 5명이 운영했으며 경영자는 없었지만 보초병이 옆 방에 있었다.
(2개월 후)근처 더 전선에 가까운 위안소로 이동했다.
(1개월 후)보초병의 눈을 피해 온 조선인 남자가 찾아왔고, 간청하여 밤중에 탈출했다. 그 남자와 중국에서 살았다.
1942년 (18세)임신을 계기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정착했다.
1943년 (19세)출산했다.



김학순은 1991년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 4. 광복 이후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들마저 초등학교 4학년 때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자, 김학순은 서울 종로구의 한 판잣집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51] 1990년 6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분노하여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기로 결심하고, 1년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51][52]

1945년 한국의 해방 직후, 김학순과 그의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서울의 난민촌에서 세 달 동안 살았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딸은 콜레라로 사망했다. 1953년 이후 언젠가, 그녀의 남편은 일하던 건물의 지붕이 무너지면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1] 남편의 죽음을 회상하며 김학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남자, 내 남편이라고 불렸던 남자와 함께 살면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 공격적일 때, 그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찢는 말로 나를 모욕했습니다 (...) 그는 나를 정신적으로 너무 고문했기 때문에 그를 많이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1] 그녀의 아들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증언했고, 우에무라 다카시가 이 증언을 기사화했다.[51][52] 1991년 12월 6일에는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51]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에서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직접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서 자신의 참혹했던 위안부 생활을 상세히 공개하여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김학순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항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며,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1995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 8일에는 평생 모은 약 2000만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증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폐질환으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51][53] 국립망향의동산에 안장되었다.

1946년 6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19]

한국 유족회 소송(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사건 )에서 법원에 제출된 이력에는 “김진원의 양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6][17] (본인이 40원에 팔렸다고 증언했으므로, 매매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18])

다음은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 결과이다.[19]

연도사건
1946년 6월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1년 8월위안부였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991년 12월일본국을 제소했다.
1997년 12월 16일사망했다. 향년 73세.


3. 증언과 활동

한국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김학순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대한민국 최초로 실명 증언하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51][52]

김학순의 증언은 초기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보도에서 “여성근로정신대(女子挺身隊)로 끌려가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묘사되었으나,[39] 이후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해당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했다.[39] 한겨레신문(ハンギョレ新聞)은 김학순이 14세에 기생 검방에 팔려갔다가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고 보도했다.[22] 1993년 정대협 조사에서 김학순은 어머니가 자신을 기생 양성 집에 양녀로 보냈다고 진술했다.[41]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김학순의 증언에 차이가 있으며, 전형적인 매매 사례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학순은 수요집회와 일본 의회 앞 시위에 참여하고, 1995년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출연하는 등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3. 1. 최초 증언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해 폭로할 것을 결심했고, 1년 후 실행에 옮겼다.[7]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고, 우에무라 다카시가 증언을 기사에 싣었다.[51][52] 김학순은 "일본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뉴스를 보고 결심했습니다. 누구의 부탁도 받지 않았습니다. 제 의지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70세이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해야 할 말을 하겠습니다."라고 증언했다.[8]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51]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에서 참담했던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대한민국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초 증언 당시 김학순의 나이는 67세였다.[9] 그는 17세의 나이에 일본군 장교에 의해 중국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시설로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9]

김학순의 증언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최초 보도된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1991년 8월 11일자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기사에서는 “여성근로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설명되었다.[39] 그러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후에 “이 여성이 여성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간 사실은 없다”고 정정 기사를 게재했다.[39]

같은 해 8월 15일 한겨레신문(ハンギョレ新聞)은 김학순이 “생활이 어려워진 어머니에 의해 14세 때 평양의 기생 검방(일본의 ‘오키야’(置屋)에 해당)에 팔려갔다. 3년간의 검방 생활을 마친 후 첫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검방 의붓아버지에게 데려가진 곳이 화북의 일본군 300여 명이 있는 부대 앞이었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22]

1991년 12월 25일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 게재된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김학순 인터뷰 기사에서는 “가난해서 학교는 보통학교 4년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거기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어, 기생학교나 위안소가 있는 마을로 데려간 양아버지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39]

1993년 발행된 「증언 강제 연행된 조선인 군 위안부들(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에 따르면, 정대협의 조사에 대해 김학순은 “어머니는 저를 기생을 양성하는 집의 양녀로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양아버지에게 40JPY을 받고, 몇 년 계약으로 저를 그 집에 두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증언했다.[41]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김학순의 증언 기록과 소장을 비교하며 “중요한 부분에서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고, “그녀의 경우도 전형적인 매매 사례”라고 말했다.

3. 2. 일본 정부 상대 소송

1991년 12월 6일, 김학순은 도쿄 지방 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태평양 전쟁 중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51][10][7] 원고 측에는 "일본군에 종군했던 전직 군인과 민간인 13명, 교도소 간수 1명, 미망인 3명, 생존자 15명"도 포함되었다. 소장에서 그들은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부 시설 운영과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피해에 책임이 있으며, 피해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10][7]

1991년 12월 6일 KBS 뉴스[27]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 유족회의 기자회견을 보도했다. 김학순은 "단지 일생을 눈물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은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 원래대로 17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여 회견장이 침묵했다고 한다.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학순을 포함한 다른 피해자들은 일본의 사죄와 법적 보상을 요구하며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을 거부했다. 1996년 8월 15일 한겨레 신문[35]과의 인터뷰에서 김학순은 "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위로의 돈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입니다. 저는 정부로부터 제공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매달 25만의 지원금을 받고 있습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992년 4월 13일, 전 위안부 6명이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에 추가되어 총 9명이 되었다.[34]

3. 3. 국제 연대 활동

김학순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연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51]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에서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법정에서 직접 증언했다. 1993년에는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발간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참여하여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공개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3]

김학순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수요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공론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5년 일본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민간 기금을 통한 보상을 제공하려 했으나, 김학순을 비롯한 많은 피해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했다.[11] 이들은 아시아여성기금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했다.[12]

3. 4. 말년과 사망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해 폭로할 것을 결심했고, 1년 후에 실행에 옮겼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고 우에무라 다카시가 증언을 기사에 실었다.[51][52]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51]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에서 참담했던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대한민국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항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했으며,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 문제로 확대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000만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증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51][53] 향년 73세. 충남 천안시 국립망향의동산에 묻혔다.

1997년 김학순은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의견을 밝혔다. 김학순은 자신이 강제로 끌려가 생활했던 비인간적인 환경을 생각하며 분노했다. 위안소에서 일본군에 의해 많은 여성들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고,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김학순은 위안소에서 살아서 탈출했지만, 다른 많은 희생자들은 살해당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평생 슬픔 속에서 살았다. 피해자이자 정신적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수치심이 김학순을 짓눌렀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은 지원받기는커녕, 자국에서조차 비난받고 천박한 존재로 취급당했다. 김학순은 망가진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애도하며 밤낮으로 슬픔에 잠겨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학순은 일본의 사죄금에 대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옳지 않습니다. 여성단체 지도자 중 한 명인 우스키 게이코는 우리에게 약 200만 엔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공정합니다. 일본은 속죄해야 합니다. 제 소망은 간단합니다. 일본이 사과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라며 분노를 표출했다.[14]

4. 논란과 평가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증언 내용에 변화가 있어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증언의 신뢰성 논란:


시기언론/기관주요 내용
1991년 8월 11일아사히 신문(朝日新聞) (우에무라 타카시(植村隆) 기자)김학순이 “여성근로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당했다”라고 보도. 이후 아사히 신문은 정정 보도.[39]
1991년 8월 15일한겨레신문(ハンギョレ新聞)김학순이 “생활이 어려워진 어머니에 의해 14세 때 평양의 기생 검방(일본의 ‘오키야’(置屋)에 해당)에 팔려갔다”라고 증언.[22]
1991년 12월 6일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アジア太平洋戦争韓国人犠牲者補償請求事件) 소장김학순은 “열네 살부터 기생학교에 3년간 다녔다”라고 진술.[17]
1993년정대협(挺隊協) 조사김학순은 “어머니는 저를 기생을 양성하는 집의 양녀로 보냈습니다”라고 하며, 군인에게 납치·강제 연행되었다고 기존과 다른 증언.[41]
기타하타 이쿠히코(秦郁彦)김학순의 증언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녀의 경우도 전형적인 매매 사례”라고 주장.[39]
기타분춘 온라인(週刊文春)김학순 본인이 일본군에 연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철벽진(鉄壁鎮)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도.[48][49]
기타김학순은 재혼한 의붓아버지와 불화하여 가출, 자신의 의지로 키센(キーセン) 학교에 입학했고, 일자리를 찾으러 양부(일의 알선자)와 중국으로 가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주장.[48][49]
기타김학순이 위안부로 자처한 것은, 원폭 피폭자 이 멘히(피폭자로 자처하여 많은 지원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았다)가 “위안부로 자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 데 기인한다고 주장.[48][49]


  • 아사히 신문 보도 논란: 1991년 8월 아사히 신문은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의 기사를 통해 김학순의 증언을 보도했다.[20] 그러나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는 김학순이 "강제 연행되었다"고 보도했지만, 한겨레신문은 김학순이 14세 때 평양의 기생 검번에 팔려갔다고 보도했다.[22][23] 아사히 신문은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가 김학순이 "14세(세는 나이)부터 3년간 기생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몰랐으며, 숨긴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24]

  • 한국 사회의 평가: 김학순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문제 해결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 1991년 12월,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단지 일생을 눈물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은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 원래대로 17세 때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절규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27]
  • 1996년 8월,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며 "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위로의 돈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입니다."라고 말했다.[35]
  • 1997년 12월 16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한국 사회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녀는 유언으로 2000만을 기부하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생전에 모은 약 2000만을 기증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실천했다.[36][37]

4. 1. 증언의 신뢰성 논란

김학순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에 변화가 있어, 증언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 1991년 8월 11일,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우에무라 타카시(植村隆) 기자는 김학순이 “여성근로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당했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후 아사히 신문은 “이 여성이 여성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간 사실은 없다”라고 정정했다.[39]
  • 1991년 8월 15일, 한겨레신문(ハンギョレ新聞)은 김학순이 “생활이 어려워진 어머니에 의해 14세 때 평양의 기생 검방(일본의 ‘오키야’(置屋)에 해당)에 팔려갔다”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22]
  • 1991년 12월 6일,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アジア太平洋戦争韓国人犠牲者補償請求事件) 소장에서 김학순은 “열네 살부터 기생학교에 3년간 다녔다”라고 진술했다.[17]
  • 1991년 12월 25일, 아사히 신문 기사에서 김학순은 기생학교나 양아버지에 대한 언급 없이, 평범한 소녀가 끌려간 것처럼 묘사했다. 아사히 신문은 “기생학교에 대해 쓰지 않은 것 때문에 사건의 전체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검증했다.[39]
  • 1993년, 정대협(挺隊協) 조사에서 김학순은 “어머니는 저를 기생을 양성하는 집의 양녀로 보냈습니다”라고 하며, 군인에게 납치·강제 연행되었다고 기존과 다른 증언을 했다.[41]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김학순의 증언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녀의 경우도 전형적인 매매 사례”라고 말했다.[39]
  • 윤명숙(尹明淑)은 김학순의 사례를 강제 연행의 일종으로 분류했다.[43]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김학순이 기생으로 팔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강제” 사례로 정의했다.[44]
  • 이케다 신푸(池田信夫)는 김학순이 증언 내용을 바꾼 이유에 대해, 변호사가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강제 연행 이야기를 덧붙였을 것이라고 말했다.[45]
  • 안병직은 1993년 조사 결과 김학순의 증언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했으나,[19] 2006년에는 “강제 동원되었다고 하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모두 객관적 자료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46]
  • 서오카 츠토무(西岡力)는 강제 연행을 주장하는 증언자는 4명이며 그중 2명은 일본에서의 재판에서는 인신매매라고 증언을 바꾸었다고 한다.[47]
  •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안병직 교수에 의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의한 조사 결과가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44]
  • 분춘 온라인(週刊文春)에 의하면, 김학순 본인이 일본군에 연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철벽진(鉄壁鎮)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48][49]
  • 김학순은 재혼한 의붓아버지와 불화하여 가출을 하고, 자신의 의지로 키센(キーセン) 학교에 입학했고, 일자리를 찾으러 양부(일의 알선자)와 중국으로 가서 위안부가 되었다.[48][49]
  • 김학순이 위안부로 자처한 것은, 원폭 피폭자 이 멘히(피폭자로 자처하여 많은 지원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았다)가 “위안부로 자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 데 기인한다.[48][49]

4. 2. 아사히 신문 보도 논란

1991년 8월 1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제공한 증언 녹음테이프(당시 익명)를 바탕으로 아사히 신문의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가 작성한 기사가 보도되었다.[20] 1991년 8월 14일에는 홋카이도 신문 서울 특파원이었던 기타 요시노리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었다.[21]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는 "강제 연행되었다"고 보도했지만, 1991년 8월 15일 한겨레신문은 "생활이 어려워진 어머니에 의해 14세 때 평양의 기생 검번(일본의 '오키야'에 해당)에 팔려갔다. 3년간의 검번 생활을 마친 김 씨가 첫 취직이라고 생각하고 검번의 의붓아버지에게 데려가진 곳이 화북의 일본군 300명 이상이 있는 부대였다"는 그녀의 증언을 보도했다.[22][23]

아사히 신문은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가 김학순 씨가 "14세(세는 나이)부터 3년간 기생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몰랐으며, 숨긴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24]

4. 3. 한국 사회의 평가

김학순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문제 해결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1991년 8월, 아사히 신문의 우에무라 타카시 기자가 김학순의 증언을 처음 보도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5] 같은 해 10월에는 MBC에서 '위안부'를 주제로 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26]

김학순은 1991년 12월,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단지 일생을 눈물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은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 원래대로 17세 때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절규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27]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부' 문제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발견하고 아사히 신문이 이를 보도하면서, 한국 사회는 일본에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28] 가토 고이치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사과와 반성"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29]

1992년 1월, KBS 뉴스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시로다 스즈코의 인터뷰를 통해, '위안부' 강제 연행이 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목적이 민족의 모체가 되는 여성을 짓밟는 데 있었다고 김일면의 저서를 인용하며 비판했다.[32]

1996년 8월, 아시아 여성 기금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 사업을 설명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김학순은 "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위로의 돈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입니다. 저는 정부로부터 제공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매달 25만 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습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라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35]

1997년 12월 16일, 김학순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한국 사회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36] 그녀는 유언으로 2000만을 기부하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생전에 모은 약 2000만을 기증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실천했다.[36][37]

김학순의 증언은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을 촉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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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웹사이트 教科書フォーラムの安秉直、「慰安婦は自発的」妄言で波紋 https://web.archive.[...] デイリー・サプライズ 200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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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웹사이트 https://bunshun.j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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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 1997년 일본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별세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8-12-16
[52] 뉴스 14일 위안부 기림일… 세계 156만명 지지 서명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4-08-14
[53] 뉴스 한겨레신문, 위안부 최초 증언 김학순씨 별세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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