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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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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생은 한국사에서 노래와 춤으로 유흥을 돋우는 여성으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신분은 천민이었으나, 뛰어난 예술적 기량으로 존경받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관청에 소속된 관기가 존재했고, 정치·외교적 역할도 수행했으며,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을 통해 기생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1945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기생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일부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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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기본 정보
유운홍이 그린 기생
유운홍이 그린 기생
한글기생
한자妓生
로마자 표기Gisaeng, Kisaeng
직업 정보
분류예술
활동 분야, 노래, 풍류

2. 역사

기생의 역사는 시대별로 그 역할과 위상이 변화해왔다.

고려 초기에는 팔관회연등회 등의 행사에 필요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해 고려여악이 제정되었는데, 가와무라 미나토 등의 기생 연구가들은 이 고려여악이 기생의 원조라고 주장한다.[45] 고려 시대 초기 삼국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포로 중 가무와 예악에 뛰어난 여성들을 '기'로 삼아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왕실 주요 행사인 팔관회연등회에는 항상 '여악'이 뒤따랐는데, 이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비로서 각 마다 10 - 20명, 에 30 - 40명, 에 70 - 80명 정도가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71]

한국의 공식 역사에서는 기생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45]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가끔 등장하며, 의궤라고 불리는 ''왕실 의궤''에는 중요한 궁정 의례를 준비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 기생은 바느질 담당자로 등재되어 있다.[46] 기생에 대한 언급은 후기 조선의 ''야담'' 또는 "일화집"과 이익,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에게서 광범위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 고찰했다. 기생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기록으로는 ''조선해어화사'', ''녹파잡기'', ''조선미인보감'' 등이 있는데, 마지막 책은 일제강점기에 쓰여졌다.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에는 기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기생(1910년)

2. 1. 신라의 원화

신라 화랑 제도의 전신인 원화는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여성 두 명을 대표로 뽑았다. 그러나 원화 대표였던 남모와 준정이 서로 시기하였고, 결국 준정이 남모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원화는 폐지되고, 남성 중심의 풍월주를 대표로 하는 화랑도로 대체되었다.[47]

원화와 기생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역사 자료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원화 제도가 기생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48] 하지만 원화는 귀족 출신이었던 반면, 기생은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이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2. 2. 고려 시대

고려여악은 고려팔관회연등회 등의 행사에 필요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가와무라 미나토 등의 기생 연구가들은 이 고려여악이 기생의 원조라고 주장한다.[23]

고려 초기, 삼국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고려 정권은 남자 포로를 '노', 여자 포로를 '비'로 관리하였다. 이 '비' 중에서 가무와 예악에 뛰어난 여성들은 따로 골라내어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후백제의 후예로 고려에 반항적이었던 양수척 중에서도 예악이 뛰어난 여성들을 뽑아 '기'로 삼았다. 왕실 주요 행사인 팔관회연등회에는 항상 '여악'이 뒤따랐는데, 이 여성들이 동원되었다.[23]

기생은 처음부터 숙련된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올바른 교육을 보장하는 데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이는 고려 시대 궁궐 기생을 위한 훈련 기관인 교방의 설립과 함께 처음 나타났다.

2.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국가가 기생 제도를 통해 기생들을 직접 관리하고 감독했다. 기생은 관청에 등록된 '관기'였으며, '기적'에 등록되어야만 활동할 수 있었다.[115] 기적에 오르면 천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고, 자식을 낳아도 신분이 대물림되었다.[116]

기생은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서 노래, , 악기 연주뿐만 아니라 학문, , 서화(글과 그림)에도 능통해야 했다. 장악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은퇴한 기생들이 후배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선배 퇴기로부터 춤, 노래, 시조관리를 대하는 예의를 배웠다.

기생은 궁궐이나 관청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했고, 민간의 풍류에도 참여했다. 뛰어난 기생은 세도가의 이 되기도 했지만, 여성들만의 잔치인 내연(內宴)에도 참여했다. 당시 악, 가, 무는 전문 분야였기 때문이다.[116] 지방 관기들은 궁중 잔치 일정에 따라 서울에 올라갔다가 행사가 끝나면 돌아왔는데, 이때 대궐 안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지방 예술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16]

조선 시대 기생은 법적으로 양민이었지만(관노로서 기생이 된 자는 천민), 직업 특성상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누렸고, 사회적으로는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이들은 가무, 시, 서, 화의 재능과 지조, 지략, 의협의 덕목을 갖춘 교양인이었다.

기방에는 원칙적으로 양반 출입이 금지되었지만,[117] 풍류를 위해 양반이 노는 곳에 기생을 부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양반과 왕족들은 기생집에 자유롭게 출입했고, 조선 후기에는 중인과 평민 상인들도 기방에 출입했다.

조선 말기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었다. 일패 기생은 관기로서 양반기생이라고도 불렸으며, 예의범절에 밝고 학문과 시조에 능했다. 송도황진이, 부안이매창선비들과 교류한 일패 기생이다. 이패 기생은 '은근짜'로 불리며 암암리에 매춘을 하기도 했다. 삼패 기생은 주로 매춘을 하는 유녀였다.[118]

2. 4.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관기 제도도 함께 사라졌지만,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 계속 활동했다.[116] 1908년 일제는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여 춤과 노래를 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를 구분했다. 기생은 영업을 위해 경무청에 신고하고 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경무청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했다.[116]

기생조합은 요릿집과 계약을 맺고 기생의 놀음을 중개하며 수수료를 받는 상업적 조직이었다.[116]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통해 도시 요리관 등에서 영업하고 시간당 화대를 받았다.[116] 1913년 경성에는 지방 출신 기생을 모은 다동조합(茶洞組合)과 경성 출신 기생을 모은 광교조합(廣橋組合)이 설립되었다.

1915년부터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券番)으로 불렸다.[119] 다동조합은 '조선권번',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개칭되었고, 낙원동에 종로권번이 신설되어 경쟁하며 명창들을 배출했다. 1942년에는 세 권번이 합쳐져 삼화권번이 되었다.[119] 광주, 남원, 달성, 경주, 개성, 함흥 등 지방에도 권번이 설립되었고, 평양의 기성권번이 유명했다.[119]

일제강점기일본인들은 기생을 '사라져가는 조선의 전통문화'로 여겼다. 유명 기생들의 화보집, 엽서가 발행되었고, 잡지에 기생의 하루를 담은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에도 이러한 모습이 묘사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말살정책으로 권번이 강제로 폐지되면서 전통 예악을 하는 기생 제도는 사라지고, 성매매를 하는 유녀만 남게 되었다.

2. 5. 현대

1945년 해방 이후 조선 시대의 '기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명기로 이름을 날렸던 몇몇 기생만이 해방 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통 예술을 계승하기도 했다.[119]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기생을 유지하던 권번 제도는 사라졌다. 해방 이후 일부 요정(고급 음식점)에서 특권층을 상대로 기생과 비슷한 방식의 성매매를 하기도 했고, 1970년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기생 관광을 오기도 했다.[45] 현재 성매매 산업은 대부분 성매매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전 기생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이 경제 부흥을 이루고 해외여행이 재개되자,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기생 관광'이 성행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여행은 곧 풍속 여행과 동일시될 정도로 '기생 관광'은 옛 풍습의 잔재였다. 일본교통공사(현 JTB)나 킨키 일본 투어리스트 등 여행사들은 하네다 출발 2박 3일 일정에 35000JPY 정도의 기생 관광 상품을 판매했다. 이 상품에는 '기생'과의 만남,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의 동침 등이 포함되었으며, 다음 날 아침 '기생'에게 30000JPY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서울 밤거리를 혼자 나가면 건장한 남성(경찰관으로 추정)이 미행하여, 관광객들은 비교적 안심하고 뒷골목 포장마차 등을 즐길 수 있었다. 호텔에서는 '보이'들이 새벽 2시가 넘도록 여러 번 방문하여 '기생'(업자들은 '공주님'이라고 불렀다)과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이들에게도 수수료가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기적으로 1980년대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국영 기생 지원자는 감소했다.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민간 기생 업소에서는 필리핀, 인도네시아동남아시아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인 여성들을 유치했다. 그러나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불법 행위가 빈번해지면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결국 2004년 한국 국회는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모든 매춘 시설을 폐쇄하는 법 개정을 단행, 기생은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서울에는 "청운각", "대원각", "삼청각"의 "3각"이 유명한 기생집이었다. 유일하게 남았던 전통 기생집 "오진암"(오진암한국어)도 2010년에 문을 닫았다.[101]

3. 사회적 위치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기생은 천민 신분이었다.[4] 이들은 다른 예능인, 백정, 노비와 같은 신분으로, 사회 최하층 계급에 속했다.[4] 신분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기생의 자녀 또한 천민이었고, 딸은 자동적으로 기생이 되었다.[4] 고려 시대부터 각 지방 관청은 기생 명부를 유지하여 철저히 감시했으며, 이는 징집된 노비에게도 적용된 관행이었다.[5] 기생은 정부에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는데, 이는 대개 고위 관료인 부유한 후원자만이 가능했다.[6]

많은 기생들은 에 능숙했으며, 이들이 지은 수많은 시조가 전해진다. 이 시들은 유배된 선비들이 지은 시와 비슷하게 애절함과 이별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7] 또한, 일부 기생들은 저명한 학자들을 설득하여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시를 짓기도 했다.[8] 시조 형식은 기생 여성들과 연관되었고, 양반 신분 여성들은 가사 형식에 집중했다.[9]

지방 관청에 소속된 기생은 관기로 불렸으며, 일반 노비와는 구별되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호적에 별도로 기재되었으며, 기술적으로 천민이었지만 노비보다는 높은 지위로 여겨졌다.[10]

4. 기생의 역할과 생활

기생은 노래, , 악기, 학문, , 서화(글과 그림) 등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115] 이들은 말씨나 행동이 고상해야 했으며, 주로 궁궐이나 관청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하고 민간의 풍류에도 참여했다. 뛰어난 기예를 가진 여악은 세도가의 이 되기도 했으나, 여성들만의 잔치인 내연(內宴)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이는 악, 가, 무 능력이 쉽게 대체될 수 없는 전문 분야였기 때문이다. 지방 관기들은 궁중 잔치 일정에 따라 서울에 갔다가 행사가 끝나면 돌아왔는데, 이때 대궐 안에서 배운 춤과 노래를 지방 예술 문화에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116]

조선 시대 기생은 법적으로 양민이었지만(관노로서 기생이 된 자는 천민),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렸고, 사회적으로는 천민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가무, 시, 서, 화의 재능과 지조, 지략, 의협 등의 덕목을 갖춘 교양인이었다. 기생이 머무는 기방에는 원칙적으로 양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117] 풍류를 위해 양반이 노는 곳에 불려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양반과 왕족들은 기생집에 자유롭게 출입했고, 조선 후기에는 중인과 평민 상인들도 기방에 출입했다.

조선 말기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의 세 부류로 나뉘었다.

구분설명
일패 기생관에 소속된 관기로 양반기생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말 옥당기생과 임금 앞에서 노래을 하는 기생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일부는 남편이 있어 몸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황진이(송도 출신), 이매창(부안 출신)은 일패 기생으로, 주로 선비들과 학문시조를 나누며 교분을 쌓았다.
이패 기생은근짜(隱君子)로 불렸으며, 관아나 재상집에 출입하며 암암리에 몸을 파는 밀매음을 하기도 했다.
삼패 기생몸을 파는 유녀(遊女)였다.[118]



대부분 기생의 경력은 짧아, 16~17세에 정점을 찍고 22세에 끝났다.[13] 이후에도 오랫동안 활동한 기생은 극소수였다. 기생 양성소에서 8세부터 입학을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14] 모든 기생은 법적으로 50세에 은퇴해야 했다. 기생이 장기간 생계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후원자의 이 되는 것이었으나, 후원자가 국가로부터 기생을 사들여야 했기에 조선 시대에는 드물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직 기생들은 지역 술집에서 일하거나 관리했다.[15]

조선 후기에는 세 계층 제도가 발달했다.[16] 최상위 계층은 상류층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일패였다.[3][17] 일패 기생은 30세 이후 유흥을 제공할 수 없었지만,[18] 재봉, 의술 등 다른 업무는 50세까지 가능했다.[19] 이들은 선택에 따라 손님을 맞이했다. 각 지역의 행수(기생의 우두머리)가 새로운 기생의 규율과 훈련을 담당했다.

최하위 계층은 삼패라 불렸으며,[3] 일패의 노래와 춤을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20] 이 3계층 제도는 조선 시대 계급 사회의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에 무너졌다.[21]

일부 기생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기생은 음식, 의복, 화장품 등 자신의 경비를 개인 자금으로 충당해야 했다.[22]

음악 수업을 받는 어린 기생 (1910년경)


여성들은 다양한 경로로 기생이 되었다. 어머니의 신분을 물려받은 기생의 딸, 생계 유지가 어려운 가족에 의해 팔려간 경우,[23] 천민 신분 외에도 가난한 양반 가족이 자녀를 팔거나, 양반 귀족 출신 여성이 조선 시대의 엄격한 성적 윤리를 위반하여 기생이 되기도 했다.[23]

기생은 숙련된 기술자였기에 정부는 교방을 설립하여 교육을 보장했다. 조선 시대에는 음악과 춤에 중점을 둔 교육이 제도화되었다. 후기 조선에는 제1계층 기생을 위한 전문 훈련 학교가 설립되어 3년간 시, 춤, 음악, 미술 교육을 했다.[24] 가장 발전된 학교는 평양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 권번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기생의 삶은 호장의 감독을 받는 등 엄격하게 규제되었다.[25] 호장은 기생 명부를 관리하고 기생의 도주를 막았으며, 기생은 호장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는 손님의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25] 기생들은 한 달에 두 번 검사를 받고, 새 관리가 부임할 때도 출석해야 했으며,[25] 계속 교육(주로 음악과 춤)을 받아야 했다. 훈련 빈도와 내용은 지역마다 달랐다.[26]

기생의 세부 업무는 국가가 직접 감독하지 않았고, 각 교방 내에서 수십 명의 기생을 포함할 수 있는 질서는 최고 등급 행수 기생들이 관리했다.[27] 기생과 고객 사이에 문제 발생 시, 또는 기생에게 형사상 혐의가 제기될 경우 행수 기생이 주도적으로 해결했다.[28]

대부분의 기생은 보호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기생 남편인 "기부"를 두었다. 기부는 기생에게 귀중품을 사주거나 유흥을 제공받는 대가로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29] 기부는 주로 전직 군인, 정부 집행관, 왕실 하인이었다.[30] 고객 지망생과 소유욕 강한 기부 사이에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기부는 기생의 남편이 아니었고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20] 기부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처음에는 정부 소속 기생 중 많은 수가 후원자가 없었으나,[31] 조선 후기에는 기부 제도가 보편화되었다.[32]

조선 시대 기생집은 대개 마을 중심부, 시장 근처에 위치하여[33] 환영하는 효과를 냈다. 훌륭한 전망을 가진 장소를 선택하고,[34] 집 주변에 장식용 연못과 식물을 심어 조경했다.[33]

5. 정치·외교적 역할

기생은 국가의 종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온 외국 귀빈을 접대하고, 한국을 여행할 때 동행하는 데 고용되었다. 기생들은 마을의 술집과 객사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지역 사정에 밝았고, 때로는 핵심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 때, 기생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반군이 정주 요새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35]

임진왜란 당시, 기생들은 일본군 장군들을 즐겁게 하거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진주논개는 일본 장군을 죽이려 한 용맹함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20세기 초, 일부 기생들은 대한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대구의 기생 앵무는 국채 보상 운동에 주요 기부자였으며, 진주의 기생 약 50명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36]

조선 시대에는 성종이 기생 제도를 폐지하려 했으나, 신하들은 중국 사신을 위한 외교적 유용성을 들어 반대했고, 성종은 이를 수용하여 기생 제도를 공인했다. 이는 일본인(왜인)에게도 행해졌으며, 1507년 『권발일기』에는 왜의 "야인"에게도 아름다운 기생을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조선의 대중국 외교는 항상 사대주의를 관철했으며, 사신에게 여색을 제공하는 것은 우호 외교를 위한 "저렴한 대가(제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6. 지역별 차이

기생의 수와 특징은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은 기생이 있던 도시는 서울(당시 한성)이었으며, 약 1000명 정도였다.[38] 이들 중 다수는 궁궐에서 일했으며, 대규모 축제에 필요한 훈련된 연예인을 채웠다.[39] 아름답거나 재능 있는 기생들은 종종 지방에서 서울로 데려왔으며, 서울의 기생에게 필요한 훈련은 매우 엄격했다.[40]

개성과 평양에도 많은 수의 기생이 있었다. 평양의 기생들은 높은 수준의 기량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41] 평양의 기생 학교는 이 나라에서 가장 발전된 학교 중 하나였으며, 일제강점기 말까지 운영되었다.[14] 평양의 기생들은 18세기 작곡가 신광수의 노래인 ''관산융마''를 읊는 능력으로도 유명했다.[40]

평양의 기생학교


다른 대규모 기생 집단은 특히 북부 국경을 따라 있는 군영 주변에 존재했다. 예를 들어, 15세기 세종대왕 시대에는 영변군의 육군 기지에 약 60명의 기생이 소속되어 있었다.[42] 이러한 지역에서 기생은 군대의 아내 역할을 했으며, 연예보다는 가정적인 일에 더 집중했다.

다른 지역의 기생들도 독특한 지역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진주의 기생들은 전통적인 칼춤인 검무에 특히 능숙했다.[40]

검무를 전문으로 하는 진주 기생


제주도의 기생들은 말 타는 솜씨로 유명했다.[43] 금강산을 비롯한 많은 유명한 명승지가 있는 동해안의 관동 지역의 기생들은 이 지역의 풍경을 묘사한 시인 ''관동별곡''을 암송했다.[43] 남서부의 호남 지역의 기생들은 ''판소리''를 훈련받았고,[40] ''선비''의 도시 안동의 기생들은 ''대학''을 암송할 수 있었다.[44]

7. 기생 관련 논란

기생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71]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는 신라 진흥왕 때 원화를 기생의 시초로 보았으나,[73][74] 현대 학자들은 원화와 기생 사이의 연관성이 부족하고 원화는 귀족 출신인 반면 기생은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이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48] 정약용고려 시대 백제 유민 양수척을 기생의 기원으로 보기도 했다.[80]

조선 시대에는 기생 제도의 존폐 논쟁이 있었다. 1410년세종 때 기생 폐지론이 제기되었으나, 기생 제도를 폐지하면 관리들이 일반 가정의 여자를 강간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103] 신하들은 기생을 폐지하면 봉사(관리)가 유부녀를 범할 것이라며 반대했고, 세종은 이를 인정하여 기생 제도를 공인했다.[86]

일제강점기에는 기생 제도가 일본의 공창 제도에 편입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1908년 일제는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여 기생과 창기를 구분하고, 기생에게 경무청 신고와 조합 설립을 의무화했다.[116] 기생조합은 권번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119] 이는 전통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 역할도 했다.[63] 식민지 시대 동안 기생의 계층 구조는 사라지고 매춘과의 관련성이 더 커졌다.[63][64][6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민족말살정책으로 권번이 강제 폐지되면서 전통 예악을 하는 기생은 사라지고 성매매를 하는 유녀만 남게 되었다.

대한민국 성립 후,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 미군과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키센 관광'을 통해 외화 획득을 도모했다. 이는 기생이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07]

기생 제도가 일본의 공창 제도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03] 김량기 등은 기생이 매춘과는 무관하며 문화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107] 가와무라 미나토는 기생 제도와 공창 제도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배-종속 구조를 가진다고 비판한다.[108]

8. 예술

기생은 문학과 예술 작품의 주요 소재였다. 어우동, 황진이, 장녹수(연산군의 측실), 정난정(윤원형의 계실), 논개 등은 시나 그림으로 이름을 알렸다.

조선시대에는 춘화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신윤복의 "전훈원"이나 김홍도의 "사계춘화첩" 등 성적인 장면을 그린 춘화도 다수 존재했다. 조선 춘화에는 대부분 기생과 손님이 등장했는데,[110]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를 조선 춘화의 특징으로 꼽았다. 그는 조선 유교의 영향으로 "허구의 그림 속에서라도 음란한 짓을 하고, 성을 드러내는 것은 기생만이" 가능했으며, 일반 여인들이 등장하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춘화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권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111]

기생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춘향전(판소리, 영화), 어우동(1985년), 황진이(2006년), 황진이 (영화)(2007년), 신기생뎐(2011년), 어우동: 주인 없는 꽃(2014년), 해어화 (영화)(2016년) 등이 있다.

8. 1. 기생 문학

황진이, 홍랑, 매창 등은 뛰어난 시조 작품을 남겼다. 기녀들의 시조는 "동짓날, 기나긴 밤을 베어다가 이불에 넣고 임과 기나긴 사랑을 하고 싶어요.", "이화우 곧 배꽃이 비처럼 내리는 날에 헤어진 님이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나를 기억할 것인가?"(매창의 시조), 헤어지는 님(최경창)에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버드나무가지를 꺾어주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시조(홍랑의 시조)처럼 임을 향한 사랑을 노래한, 감성적이고 자유로운 문체와 내용이 특징이다. 판소리계 세태풍자소설 배비장전, 세태소설 이춘풍전에도 기녀인 애랑과 추월이 등장한다.

8. 2. 기생이 등장하는 문학

조선의 소설 춘향전에서 주인공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기생이다.[68] 기생은 조선 중기 이후 한국 대중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소설과 판소리 등 대중 문학이 등장하면서 기생은 종종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사회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독특한 역할 때문이었다. 기생은 춘향가와 같은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다른 많은 조선 시대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사또 앞에 있는 모습, 익명의 조선 시대 그림

8. 3. 춘화

춘화는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민속화의 일종으로, 남녀간의 정사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춘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기생으로, 춘화를 통해 당시 기생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110]

신윤복김홍도는 조선 시대의 유명한 화가로, 기생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이들이 그린 춘화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린 기생은 춘화를 보며 성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에는 춘화가 없다는 이야기도 일부에서 나왔지만, 풍속 화가 신윤복의 "전훈원"이나 김홍도의 "사계춘화첩" 등 성교나 성희 장면을 그린 춘화도 다수 존재한다. 조선 춘화의 등장인물은 거의 모두 기생과 손님이었다.[110]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러한 에로틱 아트에서 기생만이 등장인물이 된 점을 조선 춘화의 특징으로 꼽았다. 그 배경에는 조선 유교가 있어 "가령 허구의 그림 속에서라도 음란한 짓을 하고, 성을 드러내며, 노골적인 치태를 보이는 것은 기생만이" 가능했으며, 인처나 마을 처녀, 대갓집 여인들이 등장하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춘화는 질서도 억제도 한계도 없는, 방종하고 비도덕적인 불륜 행위를 권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도덕적인 춘화. 이것이 조선의 춘화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말일지도 모른다"라고 그는 지적했다.[111]

8. 4. 기생 화보, 기생 엽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서울, 평양 등에서 인기가 높았던 기생들의 화보집과 엽서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 화보와 엽서에 등장하는 기생들은 한결같이 조선의 전통 복장을 입은 소녀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기생 연구가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를 도상학적으로 분석하여 점령국 남성이 식민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시선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했다.[60]

9. 유명한 기생


  • 두향: 퇴계 이황의 연인으로, 퇴계 사후 단양의 강에 투신 자결했다.
  • 상춘림: 중종 때 서울의 기생으로 여러 학자들과 교류했다.
  • 강아: 선조 때 전라도 기생으로 정철의 연인이었다.
  • 죽향: 순조 때의 기생이자 화가로, 김정희의 연인이었다.
  • 추향: 심육의 연인이자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었다.
  • 이매창: 부안 출신의 시인이다.
  • 홍랑
  • 설매: 재치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 황진이: 개성 출신의 음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 논개: 진주 전투에서 일본 장군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 계월향: 평양에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를 암살하려 했다.
  • 만향: 함흥 출신이다.
  • 유지: 황주 출신이다.
  • 김자야: 대한민국 마지막 기생으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 이화정선: 1923년 3월호 ''개벽''에 인터뷰를 실었던 기생이다.
  • 왕수복: 1935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다.
  • 어우동
  • 진홍
  • 장녹수: 국왕 연산군의 측실이었다.
  • 정난정: 윤원형의 계실이었다.
  • 정칠성
  • 유감동

10. 작품 속 기생



기생은 조선 중기 이후 한국 대중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소설과 판소리 등 대중 문학이 등장하면서 기생은 종종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사회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독특한 역할 때문이었다. 기생은 ''춘향가''와 같은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다른 많은 조선 시대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기생은 또한 조선 후기의 민속 미술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초 유명한 화가 혜원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은 기생을 포함한 ''천민''의 삶과 에로틱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기생은 일본과 한국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대상이었으며, 한국 기생의 사진이 담긴 엽서가 일본에서 유통되었다.[68][69]

기생은 현대 남한북한에서 조선 문화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의 중심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취화선''의 여주인공은 화가 오원의 동반자였던 기생이었다. 허구의 춘향과 역사적 인물인 황진이를 포함한 인기 있는 기생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대중 소설과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TV 드라마 ''신기생뎐''에서는 기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다음은 기생이 등장하는 주요 작품 목록이다.

제목장르제작 연도비고
춘향전소설조선 시대판소리, 영화로도 제작됨
어우동영화1985년한국 영화
황진이드라마2006년한국 드라마
황진이 (영화)영화2007년한국 영화
신기생뎐드라마2011년한국 드라마, 기생이 현재까지 존재한다는 설정
어우동: 주인 없는 꽃영화2014년한국 영화
해어화 (영화)영화2016년한국 영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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