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무라 다카시 (언론인)
1. 개요
우에무라 다카시는 1982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며,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증언을 보도했다. 이후 위안부 관련 보도와 관련하여 논란에 휩싸였으며, 일부 우익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2014년 아사히 신문을 퇴사한 후 대학교 강사, 객원교수 등으로 활동했으며, 2018년에는 주식회사 금요일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일본신문협회상,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 이름 | 우에무라 다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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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명 | 植村隆 |
| 로마자 표기 | Uemura Takashi |
| 출생일 | 1958년 4월 28일 |
| 국적 | 일본 |
| 직업 | 언론인, 학자 |
| 소속 | 고베가쿠인대학, 고려대학교 |
| 언론인 | 아사히 신문 기자 (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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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정보 | (구체적인 학력 정보는 문서에서 찾을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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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보도 관련 소송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보도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에 연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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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최초 증언' 관련 기사 | '위안부 최초 증언' 기사에 대한 아사히 신문의 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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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보도 관련 검증 | 아사히 신문 위안부 보도 제3자 검증위원회 보고서 |
| 1991년 위안부 관련 기사 | 명예훼손 소송 관련 아사히 신문 기사 아사히 신문 1991년 8월 11일자 기사: “조선인 종군위안부의 눈물” 아사히 신문 1991년 12월 25일자 기사: “돌아오지 않는 청춘, 한맺힌 인생: 일본 정부를 제소한 종군위안부 김학순씨” |
| 웹사이트 | 植村隆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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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현 출신 -
고토쿠 슈스이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사상가로서 사회민주당 창당 참여, 러일전쟁 반대 운동 주도, 언론 활동, 무정부주의 전향, 직접행동론 주장 등의 활동을 펼치다 대역사건으로 사형당했으며, 그의 사상은 일본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운동, 문학계, 한국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고치현 출신 -
아리카와 히로
아리카와 히로는 2003년 《소금의 마을》로 데뷔한 일본의 소설가로, 자위대를 소재로 한 작품과 《도서관 전쟁》 시리즈 등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작품이 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다. -
일본의 언론인 -
구로다 가쓰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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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언론인 -
오선화
오선화는 대한민국 출신으로 일본으로 귀화한 평론가이자 작가, 대학교수로, 호스티스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 데뷔 후 한일 관계와 한국 사회,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했다. -
1958년 출생 -
추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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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출생 -
이재갑 (공무원)
이재갑은 행정고시 합격 후 노동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고용노동부 장관을 역임하고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 정책을 추진한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2. 생애
우에무라 다카시는 1958년(쇼와 33년) 4월 28일 고치현 스사키시에서 태어나, 도사 고등학교와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결혼 후 이혼했으며, 현재 아내는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족회에서 근무하는 양순임(양순임한국어) 씨이다. 1991년(헤이세이 3년)에 결혼했다.
1982년(쇼와 57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4년(헤이세이 26년) 아사히 신문을 조기 퇴직한 후, 연변과학기술대 연구원과 와세다대학교 현대 한국 연구소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2014년부터 북성학원대학교에서 비정규 강사로 강의했고, 2016년 3월부터는 한국 가톨릭대학교 객원교수로 한일 교류 역사에 대해 강의했다.
2018년 5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공로로 제24회 김용근 민족교육상을 수상했고, 9월 26일 주식회사 금요일(주간 금요일 발행원)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19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에 출연했고, 12월 4일 제7회 이영희상을 수상했다.
2.2.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1982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센다이 지부, 지바 지부, 오사카 지부, 도쿄 본사 등에서 근무했다. 1987년 연세대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1988년 돌아왔다. 1989년부터 오사카 지부에서 2년 5개월간 근무한 후, 도쿄 본사를 거쳐 1993년 테헤란, 베이징, 서울 특파원을 역임했다. 서울 특파원 시절 위안부 관련 기사를 19건 작성했다.
1991년 8월 11일, 오사카 사회부 시절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 전후 반세기 무거운 입을 연다”라는 제목으로 김학순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최초로 증언한 녹음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작성했다. 12월 25일에는 김학순을 직접 취재한 기사를 보도했다.
2008년 11월, 2007년 4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연재된 “신문과 전쟁” 취재팀의 일원으로 제8회 이시바시 탐산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을 수상했다. 2014년 3월 아사히 신문을 퇴직했다.
2.3. 퇴직 후 활동
2014년 3월 아사히 신문을 퇴직한 우에무라 다카시는 대학교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퇴직 후, 연변과학기술대 연구원과 와세다 대학 현대 한국 연구소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2014년 4월 고베 쇼인 여자학원 대학 교수로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취임 전 고용 계약이 해지되었다. 이는 일본 우익 단체들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부터 북성학원대학(Hokusei Gakuen University)에서 비정규 강사로 국제 교류 과목을 한국어로 강의했다. 아사히 신문이 위안부 보도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서 우에무라도 공격 대상이 되었고, 북성학원대학은 그를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재팬타임스(The Japan Times)는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많은 일본어 사용자들이 아사히 신문을 비난하며 일본의 명성을 훼손했다고 비난했다"라고 보도했다. 극단주의자들은 협박을 하기도 했고,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홋카이도 캠퍼스 폭탄 위협도 있었다. 우에무라의 십대 딸을 자살로 몰아넣으려는 시도 또한 극우 세력의 소행으로 지목되었다.
2015년 11월 26일, 우에무라 다카시는 2016년 3월부터 대한민국 가톨릭대학교 객원교수로 취임하여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한일 교류 역사에 대해 강의하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2018년 5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4회 김용근 민족교육상을 수상했다. 2018년 9월 26일에는 주식회사 금요일(주간 금요일 발행원)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19년에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에 출연했다. 같은 해 12월 4일 제7회 이영희상을 수상했다.
3. 김학순 관련 보도와 논란
우에무라 다카시는 1991년 8월 11일 아사히 신문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우에무라는 여성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후 그 여성이 김학순임이 밝혀졌다. 김학순은 이 기사가 나간 지 3일 후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공개했다.
우에무라의 기사에서 사용된 표현은 "그녀는 '여자 挺身隊일본어'라는 이름으로 끌려갔고" "일본군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당한 한국인 위안부였다"이다. 1991년 12월 25일에는 김학순 인터뷰를 바탕으로 후속 기사를 보도했다.
2014년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위안부 관련 기사 일부를 취소했으나, 우에무라는 요시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에무라의 기사는 비판을 받았고, 아사히 신문의 "정정" 기사에서 일부 수정되었다. 비판 내용은 "위안부"들이 "명목상 여성 자원봉사단"으로 모집되었다는 표현과 김학순이 기생 훈련생이었다는 배경을 생략한 점이다.
산케이 신문과 요미우리 신문 등은 우에무라가 "위안부"를 "女子挺身隊일본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을 비판했다. 산케이 신문은 "사실 왜곡"이라고 비난했지만, 아사히 신문은 "왜곡"이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정신대"라는 용어가 "위안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사례는 우에무라의 기사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에서도 1973년 책, 1946년 신문 기사, 위안부 지원 단체 이름 등에서 사용되었다. 우에무라가 사용한 김학순의 녹음 테이프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에서 제공받았다.
우에무라는 김학순의 증언 테이프 사본을 보관하지 않아, "女子挺身隊일본어"라는 용어가 실제 테이프에 나왔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학순은 중앙일보 등에서 "나는 정신대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은 홋카이도 신문과 한국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14세부터 3년간 기생 학교에 다녔다고 밝혔다. 니시오카 쓰토무는 우에무라가 김학순의 기생 배경을 알고도 고의로 은폐했다고 주장했지만, 우에무라는 녹음테이프에서 김학순이 기생학교 출신 배경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고, 2019년 10월 도쿄지방법원에 제출된 증거 테이프에서도 "기생"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3.1. 김학순 증언 보도 (1991년)
1991년 8월 11일, 우에무라 다카시는 아사히 신문에 김학순의 녹음된 증언을 바탕으로 한 위안부 관련 첫 번째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기사에서 우에무라는 김학순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3일 뒤 김학순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기사에서 "여자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2014년 12월 23일 기사를 통해 "잘못된 것이므로 사과드리고 정정합니다."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위안부 연구가 충분하지 않았고, 우에무라 기자가 참고한 자료에도 혼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1991년 12월 25일, 우에무라는 일본 변호사들이 실시한 김학순 인터뷰를 바탕으로 두 번째 기사를 보도했다.
3.2. '날조' 논란과 비판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는 1991년 아사히 신문에 처음 게재된 이후, 일본 우익 인사들로부터 '날조'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니시오카 쓰토무는 1992년 문예춘추 기고문에서 우에무라가 '여자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중요한 사실 오인"이라고 지적했다. 1998년 저서에서는 "완전한 거짓말", "사실무근의 주장", "완전한 날조 보도"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2007년 저서에서는 "의도적인 날조", "우에무라 기사의 악질적인 날조 보도"라고 주장했다.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子)는 『주간신조』 2014년 4월 17일호에서 우에무라의 기사가 "큰 계기 중 하나"였다고 지적하며, "정신대는 근로 봉사를 하던 젊은 여성들로 위안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에무라가 한국어를 구사하고, 그의 장모가 위안부 문제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단체의 간부라는 점을 언급하며, "우에무라 씨의 '오보'는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의도적인 허위 보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우에무라의 기사에 실린 김학순의 증언(기사에서는 익명)이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에서의 김학순의 진술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2014년 8월 검증 기사에서 우에무라가 참고한 자료에 혼동이 있었고 오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에무라가 장모로부터 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의혹은 부인했으며, 김학순이 기생 학교에 다녔던 것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사실의 왜곡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아사히 신문은 2014년 12월 23일, 우에무라의 기사 중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연행되어"라는 부분이 잘못되었다며 사과하고 정정했다.
우에무라는 자신의 기사를 날조라고 평가한 니시오카 쓰토무,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고재판소까지 모두 패소했다. 특히 니시오카에 대한 소송에서는 법원이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작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우에무라는 2015년 1월, 외국 특파원 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날조 기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제 연행이라고 적지 않았다. 나는 폭력적으로 납치하는 종류의 강제 연행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3.3. 우에무라의 반론
1991년 8월 11일 아사히 신문에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가 보도된 후, 여러 전문가와 단체들은 해당 기사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는 내용으로, 실제 전직 위안부의 증언과는 다르다고 비판했다.
우에무라는 자신의 기사를 날조라고 평가한 니시오카 쓰토무,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고재판소까지 모두 패소했다. 특히 니시오카에 대한 소송에서는 전직 위안부가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었다는 인식이 없었음에도 "전장으로 연행되었다"고 보도한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 법원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었다.
우에무라가 1991년 8월 11일에 작성한 기사에는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연행되어 일본군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받았던 '조선인 위안부' 중 한 명이 서울에 생존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으며"라고 적혀있다.
2014년 12월 23일, 아사히 신문은 우에무라의 기사에 대해 『기사 본문은 이 여성의 이야기로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여성이 정신대로 전장으로 연행된 사실은 없습니다. 서문의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연행되어"라는 부분은 잘못된 것이므로 사과드리고 정정합니다.』라는 사과 기사를 게재했다.
니시오카 쓰토무는 우에무라가 "여자정신대"라고 쓴 것을 "중요한 사실 오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완전한 거짓말", "사실무근의 주장", "완전한 날조 보도"등으로 비판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우에무라의 기사가 "일본이 강제 연행했다는 내용으로 보도했다"며 "정신대는 근로 봉사를 하던 젊은 여성들로 위안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에무라 씨의 '오보'는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의도적인 허위 보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에무라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 '여자정신대' 용어 사용: 당시 한국에서는 '여자정신대'가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김학순의 증언 테이프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에서 제공받았다.
* 김학순의 기생 경력: 김학순의 증언 테이프에는 기생 경력이 없었고,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이 아니다. 2019년 10월 도쿄지방법원에 제출된 증거 테이프에서도 '기생'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 장모(양순임) 관련: 장모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간부였지만, 기사 작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정보는 다카기 겐이치 변호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윤정옥 대표로부터 얻었다.
* 강제 연행 표현: 자신은 '강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폭력적인 납치와 같은 강제 연행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4. 명예훼손 소송 및 법적 분쟁
우에무라 다카시는 2014년 3월 아사히 신문을 떠나 대학교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아사히 신문이 위안부 보도에 대한 비판을 받기 시작하면서 우에무라도 함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가 강의를 하던 홋카이도 삿포로의 북성학원대학(Hokusei Gakuen University)은 그를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익명의 편지 세례를 받았다. 재팬타임스(The Japan Times)는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많은 일본어 사용자들이 아사히 신문을 비난하며 일본의 명성을 훼손했다고 비난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행위는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 중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협박으로까지 이어졌으며, 홋카이도 캠퍼스에 폭탄 위협도 있었다. 이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우에무라의 십대 딸을 자살로 몰아넣으려는 시도 또한 극우 세력의 소행으로 지목되었다.
주간 문춘(週刊文春)에 실린 우에무라 다카시 비난 기사에서,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는 우에무라가 고의적인 "날조"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우에무라는 이후 분게이슌주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2021년 3월 12일 대법원은 우에무라의 상고를 기각했다.
야마구치 토모미는 재팬타임즈에서 니시오카 등의 우에무라 비판 논설을 비방이라고 비판했다.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의 이케다 에리코 관장은 "(우에무라 씨는) 아내가 한국인이고, 시어머니가 전후 보상 운동 단체 간부였기 때문에, 「그들과 결탁하여 '위안부' 문제를 일으켰다」고 날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주간 킨요비(週刊金曜日)는 우에무라 옹호 기사를 정리한 66페이지의 특별호를 발행했다. 집필자는 노가와 겐이치, 나카지마 가케시, 신숙옥, 니시노 루미코, 요시카타 베키, 카미하라 겐, 코쥬 카후미, 하세가와 아야 등이다.
우에무라의 수기 『진실-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2016년 2월)의 한국어 번역자이자 한겨레 도쿄 특파원인 길륜형은 "결국 우에무라 비난이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올바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을 포기한 일본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기사화한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이성을 잃은 비난을 퍼부은 현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4.1. 니시오카 쓰토무, 분게이슌주 상대 소송
2015년 1월, 우에무라는 자신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에 대해 니시오카 쓰토무와 분게이슌주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소송은 니시오카가 주장한 세 가지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김 씨가 "여자 자원병"이라는 명목으로 끌려갔다는 우에무라의 묘사는 잘못된 명칭이며 사실 날조라는 것, 둘째, 우에무라는 김 씨가 기생 수업을 받았던 배경을 고의적으로 은폐하여 진실과 다른 위안부가 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 셋째, 우에무라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전 위안부들의 집단 소송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 이유는 우에무라의 한국인 장모가 이 소송에 연루된 위안부 지원 단체를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에무라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원병"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지칭하는 동의어였으며, 그가 지어낸 용어가 아니었다고 반론했다. 또한 김 씨가 기생 학교에 보내졌다는 것과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며, 신문의 서울 지국장으로부터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취재를 수락했으며(장모의 지시가 아니었음), 니시오카가 주장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2019년 6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는 우에무라가 분게이슌주와 니시오카 쓰토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2020년 3월 3일, 도쿄고등재판소는 니시오카 쓰토무 등을 피고로 한 재판의 1심 판결을 지지하여 청구를 기각, 우에무라 측이 패소했다. 2021년 3월 11일, 대법원은 니시오카 쓰토무에 대한 소송에 대해 우에무라 측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우에무라의 소송은 대법원까지 모두 패소가 확정되었다.
4.2. 사쿠라이 요시코 외 상대 소송
2015년 2월, 우에무라는 사쿠라이 요시코와 와쿠, 신초샤, 다이아몬드샤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삿포로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2018년 11월, 삿포로지방재판소는 우에무라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사쿠라이의 기사가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켰다고 인정했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기사의 목적에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2020년 2월, 삿포로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지지하며 우에무라의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 과정에서 사쿠라이는 우에무라를 비판한 논문의 오류를 일부 인정하고 정정하기도 했다. 2020년 11월, 대법원은 우에무라 측의 상고를 기각하여, 우에무라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5. 협박 사건
2014년 우에무라 다카시가 아사히신문을 조기 퇴직하고 대학교수 취임을 준비하던 중, 과거 위안부 관련 기사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협박 사건이 발생했다. 우에무라는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극우 성향의 언론매체로부터 "위안부 사실 조작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우에무라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근무하는 대학교에 대한 협박이 이어졌다. 특히 홋세이가쿠엔대학에는 우에무라를 해고하라는 항의와 함께 폭파 협박까지 있었다.
5.1. 대학 및 가족에 대한 협박
2014년, 우에무라 다카시는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 교원으로 내정되어 아사히신문사를 퇴직하고 강단에 서려고 했으나, 주간분슌에 우에무라에 관한 “위안부 날조” 기사가 실린 후, 대학 측에 항의 전화와 이메일이 쇄도하여 고용 계약이 해지되었다.
우에무라가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던 홋세이가쿠엔대학에도 2014년 3월부터 우에무라의 위안부 기사가 날조라는 내용의 전화, 이메일, 팩스, 편지 등이 다수 발송되었고, 대학 주변에서는 정치 단체에 의한 전단지 살포 및 시위 활동도 이루어졌다. 5월과 7월에는 협박 편지가 도착했고, 전화로는 “대학을 폭파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에 대학은 피해 신고를 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으며, 전화로 폭파 예고를 한 범인은 체포 기소되어 삿포로간이재판소에서 벌금 300000JPY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2014년 6월, 우에무라의 가족을 캐는 글이 SNS에 나타났고, 8월에는 사진과 함께 “이 녀석의 아버지 때문에 일본인들이 고생했다. 자살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라고 적힌 블로그가 나타나 악성 댓글이 다수 게시되었으며, SNS에서 동성 동명의 사람이 착각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초 대학 측은 우에무라의 고용을 유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나, 전국 변호사들의 형사 고발과 시모무라 하루후미 장관의 발언을 받아들여 고용을 계속하게 되었다.
2015년 1월과 2월에도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암시하는 협박 편지가 도착하여 홋카이도경찰이 수사 중임을 발표했다.
우에무라는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족에게까지 협박이 미쳤다고 말하며, “익명성에 숨은 비열한 협박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도쿄변호사회는 홋세이가쿠엔대학 및 교원에 대한 협박 행위를 비난하는 회장 성명과 우에무라의 대리를 맡은 변호사 사무소에 다량의 팩스를 보내 업무 방해를 한 것을 비난하는 회장 성명을 발표했다.
5.2. 북성학원대학교의 대응
북성학원대학은 우에무라 다카시가 위안부 관련 기사를 쓴 것에 대한 비판 여론과 협박에 직면했다. 2012년부터 이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 중이던 우에무라는 2014년, 대학 측으로부터 계약 종료를 통보받을 위기에 처했다. 대학 측은 우에무라의 해임을 요구하는 익명의 편지와 협박, 항의 전화에 시달렸으며, 학생들의 안전과 입시에 미칠 영향 등을 우려했다.
그러나 대학 내외에서 우에무라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자, 변호사,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져서는 안 된다 북성!의 모임"이 결성되어 우에무라의 고용 계속을 요구했다. 이 모임에는 이케자와 나츠키, 강상중, 와다 하루키 등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 인물 | 비고 |
|---|---|
| 이케자와 나츠키 | |
| 이토 세이이치 | 변호사,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부회장 |
| 우치다 키 | |
| 우치우미 아이코 | |
| 오타하라 타카아키 | |
| 오카모토 요시히로 | 간사이가쿠인대학 교수, 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 |
| 오기노 후지오 | |
| 오노 유고 | |
| 카이와토 유이치 | |
| 카츠라 케이이치 | |
| 가토 타이치 | 그림책 작가 |
| 칸누마 고사부로 |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
| 카야마 리카 | 정신과 의사 |
| 강상중 | |
| 카미하라 마사루 | |
| 코가 키요타카 | 목사, 북성학원대학 교수 |
| 고토 켄이치 | |
| 코바야시 세츠 | |
| 코모리 요이치 | 국문학자 |
| 사이토 코 | 변호사 |
| 사토 히로아키 | 시즈오카대학 명예교수·전 총장 |
| 신니시 코우지 | 전 고등학교 교사 |
| 스즈키 켄 | |
| 다카하시 테츠야 | |
| 타나카 히로시 | 경제학자 |
| 치바 마코토 | 국제기독교대학 교수 |
| 나카지마 가케시 | |
| 나카노 코이치 | 죠치대학 교수 |
| 니시타니 오사무 | |
| 니시타니 빈 | |
| 하라 토시오 | |
| 히데시마 유카리 | 변호사 |
| 후쿠치 야스마 |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의사 |
| 후지타 푼치 | 전 BPO(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 |
| 후지와라 히로시 | 전 미야자키대학 총장 |
| 마카베 진 | |
| 마츠다 마사히사 | |
| 미즈코시 신 | |
| 모리무라 세이이치 | |
| 야마구치 지로 | |
| 유키 요이치로 | 오타루상과대학 명예교수 |
| 와타나베 타츠오 | |
| 와다 하루키 |
당초 대학 측은 우에무라와의 계약을 종료하려 했으나, 12월 17일 고용 계속을 발표했다. 이는 협박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과 문부과학대신의 발언, 전국의 변호사들로부터의 형사 고발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무라 신이치 총장은 "종군위안부 문제 및 우에무라 씨의 기사에 대해서는 본 학은 판단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히며, 외부 압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임을 강조했다.
5.3. 법적 대응
우에무라 다카시는 2014년 3월 아사히 신문을 떠나 대학교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위안부 보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홋카이도 캠퍼스에 폭탄 위협을 가하고, 우에무라의 십대 딸을 자살로 몰아넣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2015년 1월, 우에무라는 니시오카 치카라와 분게이슌주샤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2월에는 사쿠라이 요시코 등 4개사를 상대로 삿포로지방재판소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17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변호단이 구성되었고, "우에무라 재판을 지지하는 시민의 모임"도 결성되어 우에무라를 지원했다.
재판에서 피고 측은 "날조"라는 표현이 "의견 또는 논평"이라고 주장했지만, 2018년 11월 삿포로지방재판소는 우에무라의 청구를 기각했다. 2019년 6월 도쿄지방재판소도 우에무라의 청구를 기각했다.
2020년 2월 삿포로고등재판소, 3월 도쿄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지지하여 우에무라 측이 패소했다. 2020년 11월 대법원은 사쿠라이 요시코에 대한 소송에서, 2021년 3월 니시오카 치카라에 대한 소송에서 우에무라 측의 상고를 기각하여 패소가 확정되었다.
한편, 우에무라가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는 홋세이가쿠엔대학에는 2014년 3월부터 협박 전화, 이메일 등이 쇄도했고, 대학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전화로 폭파 예고를 한 범인은 체포되어 삿포로간이재판소에서 벌금 30만 엔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2014년 9월, 트위터에 우에무라 딸의 사진과 비방글을 올린 작성자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2016년 8월 도쿄지방재판소는 작성자에게 170만 엔의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6. 수상 내역
* 2002년 일본신문협회상 - 연재 "테러리스트의 궤적 모하메드 아타를 추적하다"
* 2008년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공공봉사 부문) - 연재 "신문과 전쟁"
* 2018년 제24회 김용근 민족교육상 -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공로
* 2019년 제7회 이영희상
7. 저서
* 《서울의 바람 속에서》(1991)
* 《만화 한국 현대사 코바우 아저씨의 50년》(그림: 김성환, 2003)
*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2016)
8. 평가 및 의의
우에무라 다카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언론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보도는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 왜곡에 맞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2018년 김용근 민족교육상, 2019년 이영희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그의 보도가 '날조'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최초로 보도한 기사에서 '여자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는 이를 "중요한 사실 오인", "의도적인 날조"라고 비판했다. 우에무라는 이에 대해 "날조 기사"라는 발언은 명예훼손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니시오카는 "언론의 자유 범위"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위안부 관련 기사들을 취소했지만, 우에무라는 요시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에무라와 그의 가족은 일본 우익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협박과 공격에 시달렸다. 그가 강의하던 북성학원대학에는 해고를 요구하는 협박 편지가 쇄도했고, 심지어 폭탄 위협까지 있었다.
우에무라 사건은 일본 사회의 역사 인식 문제와 언론의 자유, 그리고 개인의 인권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