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 전쟁
1. 개요
난민촌 전쟁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레바논에서 아말 운동과 팔레스타인 난민촌 민병대 간에 벌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을 의미한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나크바 이후 레바논으로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과 PLO의 성장, 시리아의 개입이 배경이 되었다. 1985년 베이루트 난민촌 전투를 시작으로 시돈과 티레 지역 전투를 거쳐 1987년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휴전되었다. 이 전쟁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으며, 난민촌이 파괴되고 레바논 내 시아파 세력 간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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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 | 레바논 내전의 일부 |
|---|---|
| 기간 | 1985년 5월 19일 – 1988년 7월 |
| 장소 | 베이루트 및 레바논 남부 |
| 원인 | 아말과 알무라비툰 간의 갈등 |
| 결과 | 무승부 알무라비툰의 패배 시리아의 서베이루트 점령 팔레스타인인 난민촌 대부분 파괴 일부 잔존 난민촌 PLO가 접수 |
| 교전국 1 | PLO 파타 PFLP DFLP 알무라비툰 2·6 운동 OACL 쿠르드 민주당 진보사회당 레바논 공산당 |
|---|---|
| 교전국 2 | 제6보병여단 제8보병여단 PNSF 파타 알인티파다 앗사이카 PFLP-GC 팔레스타인 해방군 |
| 교전국 1 지휘관 | 야세르 아라파트 아바스 알무사위 이브라힘 쿨라일라트 무흐신 이브라힘 왈리드 베이 줌블라트 |
|---|---|
| 교전국 2 지휘관 | 미셸 아운 하페즈 알아사드 가지 카난 사이드 알무라그하 아흐메드 지브릴 |
| 교전국 1 병력 | 알 수 없음 |
|---|---|
| 교전국 2 병력 | 알 수 없음 |
| 총 사상자 | 4,500명 ~ 6,500명 사망 |
|---|---|
| 교전국 1 사상자 | 알 수 없음 |
| 교전국 2 사상자 | 3,781명 사망, 6,787명 부상 |
-
1988년 레바논 -
1988년 동계 올림픽 레바논 선수단
1988년 동계 올림픽에 레바논은 알파인 스키 종목에 4명의 남자 선수를 파견하여 슈퍼-G에서 에르완 엘-솔흐가 47위, 일리아스 마즈달라니가 32위를, 대회전에서 에르완 엘-솔흐가 53위를 기록했으며, 회전 경기에서는 피에르 수카르가 41위, 일리아스 마즈달라니가 46위를 기록했다. -
1985년 분쟁 -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종파 갈등, 영유권 분쟁, 이란 혁명 후 중동 정세 변화로 인해 발생하여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고 양국에 깊은 상처를 남긴 무력 충돌이다. -
1985년 분쟁 -
스리랑카 내전
스리랑카 내전은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민족 갈등으로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무력 분쟁으로, 타밀족 차별에 저항한 LTTE의 무장 투쟁으로 격화되었고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후 2009년 LTTE 패배로 종식되었지만, 인권 문제와 화해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
레바논 내전 -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브라-샤틸라 학살은 1982년 이스라엘군의 지원을 받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자행한 학살 사건으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국제적인 논쟁과 유엔의 규탄을 야기했다. -
레바논 내전 -
카타이브 규제군
카타이브 규제군은 1961년 레바논 팔랑헤당의 명령으로 창설되어 당의 집회 보호 및 질서 유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레바논 내전 중에는 당의 무장 역량 강화에 기여했으나 1980년 레바논 군대에 통합되며 해산되었다.
2. 배경
캠프 전쟁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레바논 유입, 1969년 카이로 협정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레바논 내 활동 증가는 주요 배경이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레바논 내 세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시아파 알라위파 출신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가 레바논 내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2.1.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과 PLO의 성장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그 이후 팔레스타인의 나크바로 인해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남부 레바논으로 도망쳤다. 기술과 자본을 가진 소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대부분은 레바논 경제에 숙련되지 않은 노동력만을 제공할 수 있는 가난한 농민이었고, 주요 도시 근처의 열악한 난민 캠프에서 살았다. 남부 레바논에 도착한 직후, 현지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에 공감했고, 많은 사람들이 당국이 상황을 처리할 때까지 압둘 후세인 샤라프 앗-딘의 알-자파리야 학교에 수용되었다. 샤라프 앗-딘은 또한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것을 끝낼 수 있도록 "대학교 입학"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가 설립되기 전에도 레바논 및 기타 아랍 국가에 거주하는 망명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은 1950년대 후반에 은밀한 준군사 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1969년 카이로 협정 이전에, PLO 의장 아흐마드 슈케이리 (1964–1967)는 카프 둔닌 남부 마을에 PLO 훈련 캠프를 세웠다. 따라서 일부 레바논인, 특히 시아파들 사이에서는 친팔레스타인 정서가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무조건적인 지원은 1969년 4월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군 간의 충돌로 인해 중단되었다. 팔레스타인 작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은 주로 지역 민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970년에는 5만 명 이상이 남부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2.2. 1982년 이스라엘 침공과 시리아의 개입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지휘 아래 있던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남부 레바논과 서부 베이루트에서 쫓겨났다. 국제사회의 후원으로 PLO군은 북부 레바논의 트리폴리로 이동하여 재정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는 아라파트와 그와 동맹한 팔레스타인 분파들을 레바논에서 추방했다. 이스라엘은 1982년 침공을 계기로 남부 레바논의 얕은 변두리(10~15km)를 국경 보안 구역으로 설정하고 20년 동안 점령했으며, 남 레바논군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시리아의 허가를 받은 이란은 혁명수비대를 레바논에 파견하여 헤즈볼라를 결성하도록 했다.
아사드는 PLO와 레바논을 모두 통제하려 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활동이 또 다른 이스라엘 침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처음에는 시리아 정부가 선호하는 팔레스타인 단체들이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도록 장려했지만, 시리아군이 통제하는 베카 계곡과 같은 지역에서만 강세를 보였다. 시리아의 통제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파타, PFLP 및 DFLP와 같은 팔레스타인 조직이 훨씬 더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아사드는 사이드 알-무라가를 영입하여 아라파트와 그의 전사들을 레바논에서 몰아냈다. 1983년 11월, 무사의 파타 알-인티파다 분파는 트리폴리에서 한 달 동안 아라파트주의 파타와 싸웠고, 아라파트는 12월에 다시 튀니지로 떠났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파타군은 2년 동안 레바논으로 돌아와 베이루트와 남부의 난민 캠프에 자리 잡았다.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남부에서 재결집하면서, 아사드는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침공의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아 아말 운동의 시아파 민병대를 나비 베리의 지휘 아래 영입하여 아라파트의 전사들을 몰아냈다. 아말은 이 동맹을 통해 레바논 문제에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시아파 인구가 밀집된 레바논 지역에 대한 추가적인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85년 중반까지 아말은 드루즈 진보 사회당 (PSP)과도 갈등을 겪었다. 아말-PSP 관계가 악화되면서, 드루즈 PSP와의 팔레스타인 동맹이 재건되었다. 레바논 공산주의 행동 기구 (OCAL)는 시리아의 아라파트를 몰아내려는 시도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1987년부터 지하에서 활동하도록 강요받았다.
3. 전개 과정
캠프 전쟁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베이루트와 남부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이다. 시아파 아말 운동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아 난민촌을 장악하려 했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이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치상으로는 시아파가 팔레스타인인보다 5:1로 많았고, 아말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반면, PLO는 외부의 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군사 장비 면에서도 아말이 PLO보다 우위에 있었다.
1985년 5월, 베이루트의 사브라, 샤틸라, 부르지 알-바라즈네 난민촌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말은 레바논 육군의 지원을 받았다. 6월, 다마스쿠스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9월에 충돌이 재발했다.
1986년에는 티레의 라시디에 난민촌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져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아말은 난민촌을 포위, 봉쇄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시돈 동쪽 언덕의 마그두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스라엘 공군이 팔레스타인 진지를 공습하기도 했다. 12월, 휴전이 협상되었지만, 아라파트의 파타는 이를 거부했다.
1987년, 국제 언론의 관심과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기구)의 인도적 지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민촌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헤즈볼라 지지자 사망 사건으로 이란이 시리아에 압력을 가했고, 시리아군은 난민촌 주변 진지를 점령하고 의약품 반입을 허용했다.
3.1. 1985년: 베이루트 난민촌 전투
1985년 5월 19일, 레바논 내전 당시 베이루트의 사브라, 샤틸라, 부르지 알-바라즈네 난민촌을 장악하기 위한 아말 운동과 팔레스타인 민병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말은 레바논 육군의 제6여단(주로 시아파)과 미셸 아운 장군에게 충성하는 제8여단(주로 마론파 기독교도)의 지원을 받았다.
단순히 수치로만 보면 시아파가 팔레스타인인보다 5:1로 많았다. 아말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간접적인 지원도 받은 반면, PLO는 외부의 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말은 군사 장비, 특히 포병과 장갑차 면에서도 PLO보다 우위에 있었다.
1985년 5월 30일, 사브라의 대부분이 공격자들에게 넘어갔다. 아랍과 소련이 시리아에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6월 8일 아랍 연맹 외무 장관 긴급 회의가 예정되자, 아말은 다음 날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소규모 전투는 계속되었다. 샤틸라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난민촌의 일부만 유지했다. 부르지 알-바라즈네는 아말이 물자 출입을 막고 주민들의 탈출을 막으면서 포위 상태로 남았다.
사망자 수는 불확실하지만,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압력으로 1985년 6월 17일 다마스쿠스에서 아말과 팔레스타인 민족구원전선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산발적인 충돌은 1985년 9월에 다시 발생했다.
3.2. 1986년: 시돈과 티레 지역 전투
1986년 9월 29일, 티레의 라시디에 난민촌 주변에서 아말과 현지 PLO 단체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로써 시아파가 다수인 지역에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주둔하면서 발생한 잦은 충돌로 인한 긴장이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아말은 난민촌을 포위하고 봉쇄했지만, 일부 물품은 해상으로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소규모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파괴되었고 수백 채의 집이 불탔으며, 1,000명의 팔레스타인 남성이 납치되었다. 12월까지 7,5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아말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시돈으로 피난했고, 수천 명이 내륙으로 피난했다. 약 7,000명의 비전투원이 난민촌에 남아 있었다.
티레에서 전투가 발발한 지 한 달 후, 아말은 베이루트의 난민촌을 포위했다. 11월 24일, 시돈에 있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파벌로 구성된 병력이 라시디에로 가는 길을 다시 열기 위해 시돈 동쪽 언덕에 있는 기독교 도시인 마그두셰에 있는 아말 진지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그들은 도시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세 과정에서 이스라엘 공군(IAF)은 시돈 주변의 팔레스타인 진지를 여러 차례 공습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랍 연맹은 양측에 전투 중단을 압박했다. 12월 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국왕은 난민촌 공격이 "모든 아랍을 상처 입혔다"고 말했다. 1986년 12월 15일, 아말과 친 시리아 팔레스타인 단체 간에 휴전이 협상되었지만, 아라파트의 파타는 이를 거부하고 난민촌에 물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일부 진지를 알-무라비툰 민병대에 넘겨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3.3. 1987년: 국제사회의 개입과 휴전
1987년 1월, 테리 웨이트가 실종된 후 베이루트의 상황이 변했다. 국제 언론이 다시 도시에 모여들면서 부르즈 엘-바라즈네와 샤틸라 포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부르즈 엘-바라즈네에 있던 영국인 의사 포린 커팅은 무선 전화를 통해 수용소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기구)의 인도적 지원은 아말 민병대의 봉쇄로 인해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의료 서비스와 물품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8주 동안 신선한 음식이나 의약품 반입이 금지되었다. 2월 13일, 두 대의 보급 트럭이 부르즈 엘-바라즈네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도착 즉시 포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한편, 서베이루트에서는 드루즈계 PSP/PLA와 아말 사이에 "깃발 전쟁"으로 불리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PSP/PLA 전투원이 무사이트베, 베이루트의 탈레 엘-카얏 구역에 있는 채널 7 TV 방송국 건물에 게양된 레바논 국기를 드루즈 깃발로 교체하면서 시작된 이 분쟁은 아말 민병대에게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격렬한 전투 끝에 아말군은 서베이루트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2월 21~22일, 가지 카난 소장이 지휘하는 7,000명의 시리아 방위대 부대가 레바논 내부 치안군(ISF) 헌병의 지원을 받아 서베이루트에 도착하면서 일주일간의 전투가 끝났다. 이들은 민병대 "사무실"을 폐쇄하고 무기 소지를 금지했으며, 민병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무허가 무기를 소지한 사람을 처형했다.
2월 24일, 파탈라 병영에서 20명 이상의 헤즈볼라 지지자가 사망한 사건은 이란이 시리아에 압력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리아군은 시아파 주민 거주 지역으로의 진격을 중단했다. 이후 시리아군은 난민촌 주변의 진지를 점령하고 의약품 반입을 허용했다. 여성은 음식을 구하러 나갈 수 있었지만, 남성은 허용되지 않았다. 샤틸라에는 약 200명, 부르즈 엘-바라즈네에는 700명의 PLO 전투원이 남아 있었고, 비전투원은 약 2만 명이었다. 마지막 전투 과정에서 약 240명이 사망하고 1,40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상자가 슈프에서 포격을 받은 시아파 지역에서 발생했다.
4. 주요 세력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레바논으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 난민을 기반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와 레바논 시아파를 대표하는 아말 운동이 주요 세력이었다. 아말 운동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레바논군 일부도 아말을 지원했다. PLO는 파타 등 다양한 팔레스타인 파벌로 구성되었으며, 일부 레바논 좌파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4.1. 아말 운동과 시리아
아말 운동은 레바논 내 시아파를 대표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시리아는 아말 운동을 지원하여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장악하려 했다. 시리아는 아말 운동을 통해 레바논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4.2.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레바논 좌파 세력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레바논으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기반으로 1964년에 설립되었다. PLO는 파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 전선(DFLP) 등 여러 팔레스타인 파벌들로 구성되었으며,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아말 운동에 맞서 난민촌을 방어하기 위해 싸웠다.
PLO를 지지한 주요 레바논 좌파 세력으로는 레바논 공산당(LCP), 왈리드 주블라트가 이끄는 진보사회당(PSP), 레바논 공산주의 행동 기구(OCAL) 등이 있었다. 특히, 드루즈파의 진보사회당(PSP)은 슈프 지역에서 아말과 갈등을 겪으면서 팔레스타인과의 동맹을 재건했다.
5. 결과 및 영향
레바논 국민 운동 소속 무슬림/좌익 진영 내 분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난민촌 전쟁처럼 대규모로 발생한 적은 없었다. 이 전쟁은 많은 무슬림 민병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들의 단결을 약화시켰다. 레바논의 주요 수니파 민병대였던 알-무라비툰은 궤멸되었고, 지도자 이브라힘 쿨라일라트는 망명길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일부 난민촌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면서 피해를 일부 완화할 수 있었다.
레바논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아말과 팔레스타인 간 전투로 3,781명이 사망하고 6,787명이 부상당했다. 친 시리아 단체와 친 아라파트 단체 간 충돌로 약 2,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추가로 사망했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레바논에 등록되지 않았고, 봉쇄로 인해 공무원들이 난민촌에 접근할 수 없어 정확한 사상자 집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5.1. 인명 피해와 난민촌 파괴
레바논 내전 기간 중 1985년 5월부터 1987년 2월까지 벌어진 난민촌 전쟁으로 인해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과 레바논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레바논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아말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투로 총 3,781명이 사망하고 6,787명이 부상당했다. 친 시리아 단체와 친 아라파트 단체 간의 충돌로 약 2,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추가로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레바논에 등록되지 않았고, 봉쇄로 인해 공무원들이 난민촌에 접근할 수 없어 모든 사상자를 집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브라, 샤틸라, 부르지 알-바라즈네 난민촌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1986년 12월까지 7,5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아말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시돈으로 피난했고, 수천 명이 내륙으로 피난했다. 약 7,000명의 비전투원이 난민촌에 남아 있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기구(UNRWA)의 인도적 지원은 아말 민병대의 지속적인 봉쇄로 인해 난민촌으로의 전달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와 물품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