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메스토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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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베 메스토(프라하)는 14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통치 하에 건설된 프라하의 신도시이다. 카를 4세는 기존 구시가지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 프라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도시 건설을 결정했다. 노베 메스토는 구시가지보다 넓은 면적(약 250 헥타르)을 차지하며, 격자형 도로망과 다양한 시장, 종교 시설을 갖춘 중세 도시 계획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신도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4만 명의 인구를 수용하며 유럽에서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주요 명소로는 댄싱 하우스, 국립 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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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구시가지인 스타레메스토는 14세기 카렐 4세 통치 하에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역사적 건축물과 유적지를 통해 유럽 건축 양식의 발전을 보여준다.
노베메스토 (프라하)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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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 | |
좌표 | 50° 4′ 36″ N, 14° 25′ 35″ E |
일반 정보 | |
이름 (한국어) | 신시가지 |
이름 (체코어) | Nové Město |
유형 | 프라하의 구역 |
별칭 | 없음 |
행정 구역 | |
국가 | 체코 |
지역 | 프라하 |
행정구 | 프라하 1, 프라하 2, 프라하 8 |
면적 | |
총 면적 | 3.34 km² |
인구 | |
총 인구 (2021년) | 21,941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시간대 | |
시간대 | CET (+1) |
하계 시간대 | CEST (+2) |
기타 정보 | |
우편 번호 | 110 00 |
웹사이트 | 없음 |
2. 역사적 배경
(내용 없음)
2. 1. 카를 4세의 통치와 신도시 건설 결정
134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카를 4세는 프라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344년 프라하 대주교구가 설립되어 교회가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한 이후, 왕의 새로운 거처가 된 프라하의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카를 4세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 통치 시기부터 나타났던 프라하 성벽 안의 주택 부족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체코인들은 성벽 바깥의 교외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블타바 강 주변은 거의 끊임없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카를 4세의 계획에서 독특한 점은, 단순히 기존 구시가지에 행정적으로 종속된 교외 지역을 만들거나 구시가지를 확장하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가진 독립적인 왕립 도시를 새로 건설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 4세는 처음에는 구시가지와의 물리적, 법적 통합을 염두에 두고 1367년에 공동 행정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두 도시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이 계획은 실패했고, 불과 10년 만에 포기해야 했다. 신도시 주민들에게 많은 권리와 자유가 부여되자, 신도시에 둘러싸이게 된 구시가지 주민들 역시 기존의 권리와 자유를 문서로 확인받았으며, 신도시의 북쪽 문을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신도시 건설과 함께 카를 4세는 프라하의 중요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신도시는 왕의 새로운 거처이자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계획되었다. 특히 1348년 4월 7일에는 중앙 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렐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나아가 프라하를 중앙 유럽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앙 유럽의 교통로를 프라하로 연결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으며, 블타바 강을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정비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어느 정도 실행되었다. 신도시 건설은 구시가지와의 통합이 잠시 시도되었던 1367년 무렵에 대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2. 2. 기존 도시 문제와 신도시의 필요성
134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카렐 4세는 프라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344년 프라하 대주교구 설립으로 교회의 독립성이 확보된 이후, 신도시 건설은 왕의 새로운 거처가 된 프라하의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프라하는 카렐 4세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 통치 때부터 성벽 안의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주로 가난한 체코인들이 성벽 바깥의 교외 지역에 정착했으며, 블타바 강변을 따라서는 거의 끊임없이 건물이 들어서는 등 도시 문제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의 위상을 강화할 필요성이 신도시 건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신도시 건설
134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카렐 4세는 프라하의 위상을 높이고 기존 프라하 성 내부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단순한 교외 확장이 아닌,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가진 왕립 도시를 만드는 혁신적인 계획이었다. 1348년 카렐 대학교 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도시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프라하를 중앙유럽의 정치, 경제, 학문 중심지로 만들려는 카렐 4세의 포부와 맞닿아 있었다.
신도시는 기존 구시가지의 두 배가 넘는 약 250ha 규모로 계획되었으며, 체계적인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었다. 또한 도시의 안전과 법적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1348년 견고한 성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신도시 건설은 카렐 4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오늘날 프라하 도시 구조의 기초를 이루었다.
3. 1. 건설 과정과 특징
134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카렐 4세는 프라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344년 프라하 대주교구가 설립되어 교회의 독립성이 확보된 상황에서, 새로운 도시 건설은 왕의 새로운 거처로서 프라하의 위상을 더욱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카렐 4세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 통치 시기부터 나타났던 프라하 성 성벽 안의 주택 부족 문제는 해결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주로 가난한 체코인들이 성벽 주변 교외에 정착했으며, 블타바 강 유역은 지속적으로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카렐 4세의 계획은 당시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행정적으로 종속된 교외나 구시가지의 확장이 아니라,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갖춘 독립적인 왕립 도시를 건설하는 독창적인 구상이었다. 그는 구시가지와의 물리적, 법적 통합을 염두에 두고 1367년에 공동 행정을 명령했으나, 주로 두 도시 의회의 반대로 인해 이 계획은 실패했고 10년 만에 포기되었다. 새로운 도시 주민들에게 많은 권리와 자유가 부여되었으며, 신도시에 둘러싸이게 된 구시가지 주민들 역시 기존의 권리와 자유를 문서로 확인받고 신도시의 북쪽 문을 통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카렐 4세는 새로운 도시 건설과 더불어 프라하의 중요성을 높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신도시는 왕의 새로운 거처이자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으며, 실제로 1348년 4월 7일 중앙 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렐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중앙 유럽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만들고자 중앙 유럽 교통로의 이동과 새로운 경로 개설을 계획하고, 블타바 강의 항해 가능성을 높이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며 계획은 상당 부분 실행되었다. 새로운 도시의 건설은 구시가지와의 통합 시도가 있었던 1367년 무렵에 대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신도시는 약 250ha의 면적을 차지했는데, 이는 구시가지(106ha)의 두 배가 넘는 크기였다. 남북 길이는 약 5km, 동서 너비는 0.8km에서 1.2km에 달했다. 계획된 지역은 지형적 특성에 따라 여러 구획으로 나뉘었다. 비셰흐라트에서 구시가지 방향으로 블타바 강을 따라서는 이미 여러 제혁업자와 어부의 정착지, 유대인 묘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시가지 서쪽 블타바 강변에는 성 클레멘트 교회, 성 베드로 교회, 주교 관저 등이 있는 포르지치('강가'라는 뜻) 정착지가 밀집되어 있었다.
동쪽의 토지 테라스는 강변 평야와 6m에서 8m 깊이의 뚜렷한 도랑으로 구분되었다. 상부 고원에는 서쪽으로 뻗은 두 개의 능선이 있었으며, 이곳은 나중에 계획된 건축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이 지역에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 교회가 있는 '나 립니치쿠' 또는 '리브니체크'('연못 옆'이라는 뜻)와 같은 작은 정착지가 이미 존재했는데, 이 교회는 원래 성 스테판에게 봉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 도시 방어 체계
카렐 4세는 1348년 3월 26일 신시가지 성벽의 첫 돌을 놓으며 건설을 시작했다. 이 성벽은 새로 계획된 신시가지의 안전을 보장하고, 주변 지역과 법적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 건설은 단 2년 만에 완료되었는데, 이는 보헤미아의 다른 오래된 도시 성벽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기간으로, 요새화에 큰 중요성을 두었음을 보여준다.신시가지의 성벽은 비셰흐라트(당시 함께 요새화됨)에서 시작하여 보티치 개울을 따라 상부 블타바 강 테라스 절벽을 거쳐 지역 최고 지점까지 이어졌다. 이 최고 지점에는 나중에 카렐 궁정(성모 승천 교회와 카를 대제 교회)이 세워질 예정이었다. 성벽은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츠나(Ječná, 보리) 길의 도시 문과 말 시장(현재 바츨라프 광장) 사이에서 동쪽으로 약간 꺾인 후, 성 비투스 언덕 개울을 따라 이어졌다. 이 개울의 깊게 파인 계곡은 구시가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블타바 강에 이르렀고, 여기서 성벽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시가지와는 달리, 신시가지의 블타바 강변에는 성벽이 세워지지 않았다. 이는 강으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전체 성벽의 길이는 약 3.5km였고, 높이는 6m에서 10m, 폭은 3m에서 5m에 달했으며, 꼭대기에는 성가퀴(총안)가 설치되었다. 성벽 동쪽 면에는 100m 간격으로 탑이 세워졌으나, 남쪽 면은 지형의 경사 때문에 계곡에 단 하나의 탑만 세워졌다. 더 견고한 탑들은 남동쪽과 북동쪽 모퉁이(성 비투스 언덕 개울 부근), 그리고 블타바 강 북쪽 끝에 위치했다. 성벽에는 4개의 주요 성문과 몇 개의 작은 후문만 있었다. 성벽 바깥쪽에는 도랑이 파여 방어력을 높였는데, 도랑의 물은 대부분 이전 개울 바닥에서 흘러왔지만, 고도 차이 때문에 일부 구간은 물이 없는 마른 도랑이었다. 도랑 바깥에는 별도의 외벽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신도시의 구조와 배치
카를 4세의 주도로 1348년에 건설된 프라하 신도시(Nové Město|노베메스토cs)는 중세 유럽 도시 계획의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두 배가 넘는 250ha 규모로 계획되었으며, 기존 정착지와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넓은 도로와 광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 구조를 형성했다.
신도시 계획은 블타바 강가의 기존 정착촌 구조를 일부 유지하면서도, 개발되지 않은 넓은 지역에 격자형 도로망과 대규모 광장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카를 광장(과거 가축 시장), 바츨라프 광장(과거 말 시장), 세노바즈네 광장(과거 건초 시장) 등 세 개의 주요 시장은 신도시의 경제 및 사회 활동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 카를 4세는 세금 감면과 같은 적극적인 정착 정책을 통해 인구 유입을 유도했으며, 특정 직업군을 관련 시장 주변에 배치하여 도시 기능의 효율성을 높였다.
신도시에는 신시청을 비롯하여 성 헨리 및 쿤니군데 교회와 같은 주요 종교 시설, 수도원, 유럽 최초의 식물원 중 하나인 '천사의 정원' 등 다양한 중요 건물과 시설이 들어섰다. 이러한 계획적인 구조와 배치는 프라하가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 1. 토지 이용 계획
신도시는 약 250ha의 면적으로, 프라하 구시가지(약 106ha)의 두 배가 넘는 크기였다. 북쪽에서 남쪽까지의 길이는 약 5km였고,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너비는 0.8km에서 1.2km에 달했다. 계획된 지역은 신도시 배치를 위한 토지의 적합성에 따라 여러 구획으로 나뉘었다. 비셰흐라트에서 구시가지 방향으로 블타바 강을 따라서는 이미 자체 교회를 가진 여러 가죽 다루는 장인(제혁업자)과 어부의 정착지, 그리고 유대인 묘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구시가지 서쪽 블타바 강가에는 성 클레멘트 교회와 성 베드로 교회, 주교의 법정이 있는 포르지치("강가"라는 뜻) 정착지가 이미 밀집되어 있었다.
동쪽을 향한 토지 테라스는 강둑의 평야와 깊이 6m에서 8m 정도 되는 뚜렷한 도랑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상부 고원에는 서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두 개의 능선이 있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계획된 구조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이곳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 교회가 있는 '나 립니치쿠' 또는 '리브니체크'("연못 옆"이라는 뜻)와 같은 작은 정착지도 이미 존재했으며, 이 교회는 아마도 원래 성 스테판에게 헌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48년 신시가지가 건설될 당시, 구획된 지역은 이미 대부분 조사되어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도로 계획과 다양한 시장의 위치, 심지어 각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까지 모두 결정되었다. 블타바 강가에 있던 더 오래된 정착촌의 구조는 대체로 유지되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에는 유난히 넓은 거리와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던 도로의 경로는 존중되었다. 신시가지의 면적이 매우 넓었기 때문에 즉시 완전히 정착될 수는 없었고, 북쪽의 포르지치 정착촌 주변과 남동쪽의 넓은 지역은 19세기까지 개발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신시가지 계획은 아마도 1342년 또는 1344년에 카를 4세가 아비뇽에서 프라하로 초빙한 프랑스인 주교좌 성당 건축가 아라스의 마티아스의 책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카를 4세는 부동산 투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정착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12년간 세금 면제 혜택을 부여하는 등 적극적인 정착 정책을 펼쳤다. 다만, 세금 면제를 받기 위해서는 지정된 부지에 한 달 안에 석조 건물의 건설을 시작하여 1년 반 안에 완공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특권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제공되었지만, 후자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시 재무 기록에 따르면 1372년까지 신시가지의 거리는 대부분 주택으로 건설되었다. 신시가지가 빠르게 정착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카를 4세의 칙령으로, 시끄럽고 지저분한 직업들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신시가지 내에서는 특정 장인들이 적절한 시장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예를 들어 어부, 목수, 뗏목꾼, 무두장이, 염색공, 벽돌공, 석회 제조업자는 블타바 강을 따라 자리를 잡았고, 마차 시장 주변에는 대장장이, 마차 제작자, 구리 세공업자, 가구 제작자들이 모였다.
결과적으로 신시가지는 특히 강변의 오래된 마을에서부터 거주해 온 체코인 국적의 가난한 장인들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으며, 반면 구시가지에는 주로 독일인 및 유대인 장인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큰 경제적, 민족적 차이는 두 도시 간의 명확한 분리를 초래했고, 결국 후스 혁명 기간 동안 바츨라프 4세 통치 말기에 발생한 소요 사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 2. 도로망과 시장
1348년 신시가지가 건설될 당시, 구획된 지역은 이미 대부분 조사되어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도로 계획과 다양한 시장의 위치, 각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까지 모두 결정되었다. 블타바 강(Vltava)에 있는 더 오래된 정착촌의 구조는 대체로 유지되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에는 유난히 넓은 거리와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던 도로의 경로는 존중되었다. 신시가지 계획은 아마도 1342년 또는 1344년에 카를 4세(Charles IV)에 의해 아비뇽(Avignon)에서 프라하로 초빙된 프랑스인(French people) 주교좌 성당 건축가 아라스의 마티아스(Matthias of Arras)의 책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부 신시가는 특히 중요하게 계획되었다. 비셰흐라트(Vyšehrad)로 가는 옛길과 보헤미아 남부로 가는 길은 프라하에서 가장 긴 교통로가 되었고, 오늘날의 스팔레나(Spálená|스팔레나cs) 거리, 비셰흐라드스카(Vyšehradská|비셰흐라드스카cs) 거리, 나 슬루피(Na Slupi|나 슬루피cs) 거리를 포함하는 상부 신시가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이 도로는 페르슈틴(Perštýn|페르슈틴cs)의 성 마틴 문 또는 Zderaz 문에서 시작되었으며 중요한 구시가의 간선 도로의 연장선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셰흐라드(Vyšehrad)로 가는 도로 동쪽의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뚜렷하게 보이는 격자형 패턴의 넓고 평행한 도로 시스템이 계획되어 건설되었다. 각각 폭이 약 27m인 이 두 도로는 가축 시장에서 교차로를 형성하여 곡물 거래를 담당했으며, 호밀 거리(Žitná ulice|지트나 울리체cs)와 보리 거리(Ječná ulice|예치나 울리체cs)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리 거리 끝자락에는 네 번째 문인 돼지 문(Svinská brána|스빈스카 브라나cs) 또는 성 요한 문이 있었다. 이 문은 요새 형태로 건설되었으며, 신시가지로 들어오는 개울 입구를 보호했다. 1891년에서 1897년 사이에 철거되었으나, 프라하 지하철 I. P. 파블로바역 건설 중 잔해가 발견되어 현재 역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북쪽 구역의 경제 중심지는 건초 및 짚 시장이었으며, 오늘날의 세노바즈네 광장(Senovážné náměstí|세노바즈네 나몌스티cs)과 대략 일치한다. 현재의 히베르니아 거리(Hybernská ulice|히베른스카 울리체cs)는 과거 시장의 남쪽 경계를 형성했다. 1379년 신시가지의 첫 번째 도로로 포장되어 포장 차선(Dlážděná ulice|들라주데나 울리체cs)이라는 옛 이름을 얻었다. 시장은 동쪽 쿠트나 호라로 가는 옛 길을 따라 뻗어 있었으며, 구시가지 입구에는 화약탑(Prašná brána|프라슈나 브라나cs)의 전신인 문이 있었다. 신시가지 성벽 상단에는 산 문 또는 성 비투스 문(Horská brána|호르스카 브라나cs)이 있었다.
신시가지 하부에 있는 두 번째 중요한 시장 거리는 리버 스트리트(나 포리치, Na Poříčí|나 포르지치cs)였다. 이 거리는 구시가지의 성 베네딕트 문에서 시작하여 기존 정착지를 지나 블타바 강으로 이어지는 옛 길에서 유래되었다. 동쪽에는 신시가지 방어의 일부로 성 베드로 문 또는 강 문(Poříčská brána|포르지치스카 브라나cs)이 세워졌다(1873년 철거).
도로 중앙에는 카를 4세가 가축 시장(Dobytčí trh|도비치 트르흐cs)을 동쪽으로 넓혀 오늘날의 카를 광장(Karlovo náměstí)을 만들었다. 약 550 x 150 미터의 면적을 가진 이 광장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이었고, 신시가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은 주로 가축, 생선, 목재, 석탄 거래에 사용되었으며, 그 중심적인 지위는 후에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전되었다. 카를 4세는 이곳에 나무 탑을 건설하여 1354년부터 매년 왕관 보석과 유물을 전시하게 했고, 이는 프라하를 유럽의 중요한 순례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무 탑 자리에는 1382년부터 1393년 사이에 성혈 예배당 또는 그리스도 성체 예배당이 건설되었다(1791년 철거). 가축 시장 북동쪽 모서리에는 1367년 이후, 1377년 이전에 신시청(Novoměstská radnice|노보몌스트스카 라드니체cs)이 건설되어 독립적인 왕립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신시가지에는 세 개의 주요 시장이 있었다.
옛 이름 (체코어) | 현재 이름 | 주요 거래 품목 |
---|---|---|
말 시장 (Koňský trh|콘스키 트르흐cs) | 바츨라프 광장 (Václavské náměstí|바츨라프스케 나몌스티cs) | 말 등 |
가축 시장 (Dobytčí trh|도비치 트르흐cs) | 카를 광장 (Karlovo náměstí|카를로보 나몌스티cs) | 가축, 생선, 목재, 석탄 |
건초 시장 (Senný trh|세니 트르흐cs) | 세노바즈네 광장 (Senovážné náměstí|세노바즈네 나몌스티cs) | 건초, 짚 |
4. 3. 주요 건물과 시설
신도시는 계획 당시 이미 존재하던 여러 정착지와 시설들을 포함하여 설계되었다. 블타바 강을 따라 비셰흐라트 방향으로는 제혁업자와 어부의 정착지, 유대인 묘지가 있었고, 구시가지 서쪽 강변의 포르지치("강가") 지역에는 성 클레멘트 교회, 성 베드로 교회 등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 원형 교회가 있던 Na Rybníčku|나 립니치쿠cs("연못 옆")와 같은 작은 정착지도 신도시 부지에 포함되었다.
성 헨리 및 쿤니군데 교회는 1350년경 신도시의 주요 본당(ecclesia parochialis primaria|la)으로 지정되었다. 이 교회는 높이가 같은 세 개의 첨탑을 가졌으며, 부속 교구 학교는 카렐 4세에 의해 설립되어 16-17세기에도 프라하 최고의 학교 중 하나로 여겨졌다. 교회 인근에는 카렐 4세의 주치의이자 약사였던 안젤루스 데 플로렌티아가 조성한 카렐 대학교의 식물원, 즉 유럽 최초의 식물원인 Andělská zahrada|안젤스카 자흐라다cs("천사의 정원")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후에 중앙 우체국(Hlavní pošta|cs) 건물이 들어섰다.
북부 지역의 경제 중심지는 건초와 짚을 거래하던 건초 시장(오늘날의 세노바즈네 광장 부근)이었다. 시장 남쪽 경계를 이루는 현재의 히베르니아 거리(Hybernská ulice|cs)는 1379년 신도시에서 가장 먼저 포장된 도로로, 과거에는 '포장된 길'(Dlážděná ulice|cs)로 불렸다. 이 길은 동쪽 쿠트나 호라로 가는 옛길과 연결되었다. 구시가지 입구에는 '누더기 문'(Odraná brána|cs) 또는 성 암브로시우스 문이라 불리던 문이 있었으며, 이는 훗날 1475년에 건설된 화약탑(Prašná brána|cs)으로 대체되었다. 신도시 성벽 상단에는 산 문 또는 성 비투스 문(Horská brána|cs)이 있었다. 카렐 4세는 1355년 건초 시장 하단부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했는데, 이는 밀라노 대성당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수도원 근처에는 요한과 야곱 구호소도 위치했다.
신도시 하부의 또 다른 중요한 거리는 리버 스트리트(나 포리치)였다. 이 길은 구시가지의 성 베네딕트 문에서 시작하여 블타바 강으로 이어지는 옛 길에서 유래했다. 동쪽 끝에는 신도시 방어 시설의 일부인 성 베드로 문 또는 강 문(Poříčská brána|cs)이 세워졌으나 1873년에 철거되었다. 이 지역의 기존 교회였던 포리치의 성 베드로 교회(Kostel sv. Petra na Poříčí|cs)와 포리치의 성 클레멘트 교회(Kostel sv. Klimenta na Poříčí|cs)는 모두 14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증축 및 개조되었다.
상부 신도시는 더욱 중요하게 계획되었다. 비셰흐라트(Vyšehrad)와 보헤미아 남부로 이어지는 옛길은 프라하에서 가장 긴 교통로가 되었으며, 오늘날의 스팔레나 거리(Spálená ulice|cs), 비셰흐라드스카 거리(Vyšehradská ulice|cs), 나 슬루피 거리(Na Slupi|cs)를 포함하는 상부 신도시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이 도로는 페르슈틴(Perštýn)의 성 마틴 문 또는 즈데라즈 문에서 시작되었다. 신도시 남쪽 끝, 비셰흐라드 인근 성벽의 가장 가파른 부분에는 남쪽 탑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보티치(Botič) 개울의 배출구가 있었다. 블타바 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기존 정착지를 수용하며 좁고 구불구불한 형태를 유지했으나, 19-20세기 강변 정비 과정에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비셰흐라드행 도로 동쪽의 인구 밀도가 낮았던 지역에는 격자형 도로망이 계획되었다. 폭이 약 27m에 달하는 두 개의 넓은 평행 도로는 가축 시장에서 교차하며 곡물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고, 각각 호밀 거리(Žitná ulice|cs)와 보리 거리(Ječná ulice|cs)로 불리게 되었다. 보리 거리 끝에는 전장 성 요한 교회(Kostel sv. Jan Na bojišti|cs)가 있었고, 그 근처에는 네 번째 문인 돼지 문(Svinská brána|cs) 또는 성 요한 문이 있었다. 이 문은 요새 형태로 건설되었으며, 신도시로 유입되는 개울 입구를 보호했다. 1891년에서 1897년 사이에 철거되었으나, 프라하 지하철 I. P. 파블로바역 공사 중 잔해가 발견되어 현재 역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도로 중앙에는 카렐 4세가 가축 시장(Dobytčí trh|cs)을 조성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카를로보 광장(Karlovo náměstí)이다. 면적이 약 550m x 150m에 달했던 이 광장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이었으며, 신도시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주로 가축, 생선, 목재, 석탄 거래가 이루어졌으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후에 바츨라프 광장(과거 말 시장)으로 옮겨갔다.
카렐 4세는 1354년 가축 시장 중앙에 나무 탑을 세워 매년 왕관 보석과 유물을 전시하도록 했다. 이 성유물 축제는 왕국의 공휴일로 선포되어 프라하를 유럽의 주요 순례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나무 탑 옆에는 1382년부터 1393년 사이에 성혈 예배당 또는 그리스도 성체 예배당이 건설되었으나 1791년에 철거되었다. 이 예배당은 팔각형 중앙 건물과 석조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탑의 갤러리에서 유물이 전시되었다.
가축 시장 북동쪽에는 1377년 이전에 신시청(Novoměstská radnice|cs)이 건설되어 독립적인 왕립 도시로서의 위상을 상징했다. 광장의 다른 면들도 활발히 채워졌으며, 귀족과 왕족들이 거주지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남쪽에는 오파바(Opava) 공작의 고딕 양식 궁전이 있었다.
5. 종교와 문화
노베메스토는 카렐 4세의 치밀한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면서 다양한 종교 및 문화 시설이 함께 들어섰다. 새로 세워진 교회와 수도원들은 단순한 신앙 활동의 공간을 넘어, 교육, 사회, 행정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하며 신시가지의 발전에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카렐 4세는 슬라브 문화의 진흥에도 관심을 보여, 옛 슬라브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 시설 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특정 형태로 배치되어 도시 전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5. 1. 다양한 종교 시설
노베메스토에는 카렐 4세의 도시 계획에 따라 다양한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졌다. 이 종교 시설들은 단순한 신앙의 중심지를 넘어, 교육, 사회, 행정 기능까지 담당하며 신시가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시설이 기존 정착지나 도로와 연계되어 건설되었으며, 일부는 카렐 4세의 특별한 의도에 따라 전략적인 위치에 세워지기도 했다.- '''성 헨리 및 쿤니군데 교회''': 1350년경 신시가지의 주요 본당(ecclesia parochialis primariala)으로 지정되었다. 교회 부지에는 카렐 4세가 설립한 교구 학교가 있었는데, 16세기와 17세기에도 프라하 대학교와 함께 프라하 최고의 교육 기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1]
- '''성 암브로시우스 베네딕토회 수도원''': 1355년 카렐 4세가 건초 시장(오늘날의 세노바즈네 광장) 하단부에 설립했다. 카렐 4세가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 왕으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여 성 암브로시우스에게 헌정되었다.[2] 수도원 근처에는 요한과 야곱 구호소가 있었다.
- '''포리치의 성 베드로 교회''' 및 '''포리치의 성 클레멘트 교회''': 리버 스트리트(나 포리치)에 위치한 기존 교회들로, 14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증축과 개조를 거쳤다.
- '''성 슈테판 교회''': 상부 신시가지의 본당 교회로, 1351년에서 1394년 사이에 기존의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로툰다(성 롱기누스 로툰다) 옆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슬라브의 성 마리아 수도원''' (엠마우스 수도원): 1347년 카렐 4세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동의를 얻어 설립했다. 비셰흐라드 대성당 구역에 옛 슬라브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을 정착시켰으며, 수도원 교회는 1372년에 봉헌되었다. 포드스칼리의 성 코스마와 다미아노 교회와 인접해 있다.
- '''초원 성 마리아 교회''' (Na Slupi): 1360년 설립된 세르비테 수도원이다.
- '''성 카타리나 교회''': 1355년 카렐 4세가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녀회를 위해 설립했다. 이는 1332년 산 펠리체 술 파나로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1367년에 봉헌되었다.
- '''성 아폴리나리스 대학 교회''': 1362년경 바람 언덕(Větrná hora|베트르나 호라cs)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노베메스토 상부에 위치한 5개 교회가 이루는 상징적인 십자가 배치의 중심점으로 여겨진다.
- '''카를 법정''' (Karlov): 1350년 카렐 4세가 프랑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들을 정착시킨 곳이다. 흐라트차니와 비셰흐라드 사이에 위치하며 성과 같은 구조를 가졌다.
- '''성혈 예배당''' (그리스도 성체 예배당): 가축 시장(오늘날의 카렐 광장) 중앙에 1382년부터 1393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매년 왕관 보석과 성유물을 전시하는 성지 축제가 열렸으며, 이로 인해 프라하는 유럽의 중요한 순례 중심지가 되었다. 1791년에 철거되었다.
카렐 4세와 바츨라프 4세 통치 기간 동안 블타바 강변의 기존 정착지에 있던 교회들도 확장되거나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 성 아달베르트 교회 (v Jirchářich): 약 1370년경 남쪽 측랑이 추가되었다.
- 성 미카엘 교회 (오파토비체):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에 성가대석과 두 개의 측랑이 추가되었다 (1400년경).
- 즈데라즈의 성 바츨라프 교회: 1399년 이전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이 외에도 비셰흐라드의 성 요한 세례자 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성 삼위일체 교회(후에 성 안토니오 교회로 대체), 성 안드레아 교회, 성 미카엘 교회(나 슬루피),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회 등 수많은 종교 시설이 노베메스토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고통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 바위 위의 성 요한 네포무크 교회,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대성당 등도 노베메스토의 중요한 종교 건축물이다.
특히 노베메스토 상부에 새로 설립된 5개의 교회(성 아폴리나리스, 카를 법정, 엠마우스 수도원, 초원 성 마리아 교회, 성 카타리나 교회)는 거의 대칭적인 십자가 형태를 이루도록 배치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성 아폴리나리스 대학 교회가 그 중심에 위치하며, 이 배치는 비셰흐라드까지 이어지는 도시 계획의 일부로 해석된다.
5. 2. 슬라브 문화 진흥
카를 4세는 프라하 신시가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슬라브 문화의 진흥에도 힘썼다. 그는 이미 존재하던 강변 공동체 포드스칼리의 옛 교구 교회인 성 코스마와 다미아노 교회와 가까운 곳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고자 했다. 1347년 11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승인을 받아 비셰흐라드 대성당 구역 내에 옛 슬라브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을 정착시켰다. 이들을 위해 건립된 수도원 교회는 1372년에 봉헌되었고, 그 정체성을 반영하여 '슬라브의 성 마리아'(klášter P. Marie na Slovanech|클라슈테르 파니 마리에 나 슬로바네흐c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수도원은 현재 엠마우스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6. 사회와 경제
카를 4세는 프라하 신도시(노베메스토)를 단순한 주거지 확장을 넘어 중앙유럽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하고 소음이나 위생 문제가 있는 특정 직업군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이전시키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정착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은 신시가지의 빠른 정착과 특정 산업의 집중을 유도했다. 블타바 강변에는 어업, 목공, 피혁 가공 등 물과 관련된 직업군이, 마차 시장 주변에는 대장장이, 마차 제작자 등 관련 기술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신시가지는 주로 체코인 국적의 가난한 장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특징지어졌다. 반면, 구시가지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독일인 및 유대인 장인들이 주로 남아 경제적, 민족적 차이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분리는 두 도시 간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바츨라프 4세 통치 말기 후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갈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 1. 인구 구성과 직업
1348년 신시가지가 건설될 당시, 이미 구획된 지역은 대부분 조사되어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고, 도로 계획과 다양한 시장의 위치, 각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까지 결정된 상태였다. 블타바 강 주변의 오래된 정착촌 구조는 대체로 유지되었지만, 개발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에는 넓은 거리와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기존 도로 경로는 존중되었다. 신시가지 면적이 넓어 즉시 완전히 정착되기는 어려웠고, 북쪽 포르지치(Poříčí) 정착촌 주변과 남동쪽 넓은 지역은 19세기까지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신시가지 계획은 1342년 또는 1344년에 카를 4세가 아비뇽에서 프라하로 초빙한 프랑스인 건축가 아라스의 마티아스가 주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를 4세는 부동산 투기를 금지하고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12년간 세금 면제 혜택을 부여했다. 세금 면제를 받으려면 지정된 부지에 한 달 안에 석조 건물 건설을 시작하여 1년 반 안에 완공해야 했다. 이 혜택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주어졌으나, 유대인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시 재무 기록에 따르면 1372년까지 신시가지 거리는 대부분 주택으로 채워졌다. 신시가지의 빠른 정착에는 카를 4세의 칙령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칙령은 소음이 심하고 위생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직업들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이전하도록 했다. 신시가지 내에서는 특정 장인들이 관련 시장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예를 들어 어부, 목수, 뗏목꾼, 무두장이, 염색공, 벽돌공, 석회 제조업자 등은 블타바 강을 따라 자리를 잡았고, 마차 시장 주변에는 대장장이, 마차 제작자, 구리 세공업자, 가구 제작자 등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신시가지는 주로 강변의 오래된 마을에서부터 거주해 온 체코 국적의 가난한 장인들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반면, 구시가지에는 주로 독일 및 유대인 장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당한 경제적, 민족적 차이는 두 도시 간의 뚜렷한 분리를 야기했으며, 결국 바츨라프 4세 통치 말기 후스 혁명 기간 동안 발생한 사회적 불안과 소요 사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
1869 | 73,277 | 1930 | 78,121 | 1991 | 34,991 |
1880 | 74,355 | 1950 | 64,636 | 2001 | 28,113 |
1890 | 75,734 | 1961 | 64,805 | 2011 | 27,105 |
1900 | 84,462 | 1970 | 54,907 | 2021 | 21,941 |
1910 | 81,760 | 1980 | 44,224 |
6. 2. 경제 정책과 특권
카렐 4세는 프라하 신도시(노베메스토)를 단순한 거주지 확장을 넘어 중앙유럽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앙 유럽 교통로의 이동과 새로운 경로 개설을 계획하고, 블타바 강을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정비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신도시 정착을 활성화하기 위해 카렐 4세는 파격적인 경제 정책과 특권을 부여했다. 우선 부동산 투기를 명시적으로 금지했으며, 신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12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다만, 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다. 지정된 부지에 한 달 안에 돌로 된 건물을 짓기 시작해야 했고, 1년 반 안에 완공해야만 했다. 이러한 특권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동등하게 제공되었으나,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 혜택을 이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카렐 4세는 도시 환경을 정비하고 경제 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소음과 오염을 유발하는 특정 직업군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이전하도록 명령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신시가지의 빠른 정착을 유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신시가지 내에서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을 관련 시장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정책을 펼쳤다.
위치 | 주요 직업군 |
---|---|
블타바 강변 | 어부, 목수, 뗏목꾼, 무두장이, 염색공, 벽돌공, 석회 제조업자 |
마차 시장 주변 | 대장장이, 마차 제작자, 구리 세공업자, 가구 제작자 |
이러한 경제 정책과 특권 덕분에 1372년경에는 신시가지의 거리가 대부분 주택으로 채워질 정도로 빠른 정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시가지에는 주로 체코인 국적의 가난한 장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반면 구시가지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독일인 및 유대인 장인들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민족적 차이는 두 도시 간의 뚜렷한 분리를 야기했으며, 훗날 바츨라프 4세 통치 말기 후스 혁명 기간 동안 발생한 사회적 갈등과 소요 사태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7. 신도시 건설의 의의와 영향
카렐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프라하의 위상을 높이고, 기존 도시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 노베메스토 건설을 추진했다.[1] 이는 단순한 도시 확장을 넘어,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가진 왕립 도시를 세워 프라하를 중앙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1] 노베메스토는 카렐 대학교 설립 등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이자, 교통망 정비를 통해 중요한 경제 허브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1]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규모와 혁신적인 도시 계획을 통해 건설된 노베메스토는 중세 도시 계획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1]
7. 1. 중세 도시 계획의 모범 사례
134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카렐 4세는 프라하에 새로운 도시(노베메스토) 건설을 결정했다. 이는 1344년 프라하 대주교구 설립으로 교회의 독립을 확보한 데 이어, 왕의 새로운 거처가 된 프라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아버지 룩셈부르크의 요한 시대부터 심화된 프라하 성 안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많은 빈민층, 특히 체코인들이 성벽 밖에 정착하며 블타바 강변은 이미 건물이 들어차 있었다.
카렐 4세의 계획은 단순히 기존 도시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가진 독립적인 왕립 도시를 건설하는 점에서 독창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구시가지와의 통합을 구상하여 1367년 공동 행정을 명령했으나, 두 도시 의회의 반대로 10년 만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신시가지 주민들에게 많은 권리와 자유를 부여하고, 구시가지 주민들의 기존 권리도 보장하며 신시가지 북문을 통한 자유로운 통행을 약속했다.
카렐 4세는 신시가지 건설을 통해 프라하를 중앙 유럽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곳은 왕의 거처이자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1348년 중앙 유럽 최초의 카렐 대학교 설립)가 되었으며,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도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중앙 유럽 교통로 정비, 새로운 경로 개설, 블타바 강 운항 개선 등이 추진되었고 상당 부분 실행되었다. 신시가지 건설은 구시가지와의 통합 시도가 있었던 1367년경 대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카렐 4세가 신시가지를 계획할 때 로마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넓고 직선적인 도로와 견고한 성문은 로마를 연상시킨다. 과거 아헨의 샤를마뉴, 마그데부르크의 오토 1세, 밤베르크의 하인리히 2세 등 다른 황제들도 '새로운 로마'(Nova Roma|노바 로마la) 건설을 시도한 바 있다. 또한, 보헤미아를 포함한 중앙 유럽에 이미 존재했던 격자형 도시 계획 역시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예루살렘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시가지에는 수많은 종교 시설이 들어섰다. W. 브로셰에 따르면, 1400년경 신시가지에는 병원 3곳(교회/예배당 포함), 수도원 9곳(봉헌 공간 10개), 본당 14곳(부속 예배당 3개), 시청 예배당 등이 있었으며, 비셰흐라드의 후원 성인(Patrozinien|파트르치니엔de) 관련 장소까지 합하면 총 40개의 교회가 세워져 구시가지의 35개 예배 장소를 넘어섰다.
프라하의 수도원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다양한 수도회가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계열 베네딕토회, 나 카를로베의 프랑스 출신 아우구스티누스회, 피렌체의 성모 마리아 종자회, 크로아티아 출신 슬라브 베네딕토회(엠마우스 교회) 등이 있었다. 눈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은 작센의 카르멜회가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2.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발전
134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카렐 4세는 프라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도시, 즉 노베메스토(Nové Město, 새로운 도시) 건설을 결정했다.[1] 이는 1344년 프라하 대주교구가 설립되어 교회의 독립성이 확보된 이후, 프라하를 명실상부한 왕국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 통치 시기부터 심화된 프라하 성벽 내 주택 부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당시 많은 프라하 주민들, 특히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체코인들은 성벽 바깥 교외 지역에 정착했으며, 블타바 강변을 따라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었다.[1]
카렐 4세의 도시 계획은 단순히 기존 구시가지(Staré Město)를 확장하거나 행정적으로 종속된 교외를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랐다. 그는 노베메스토에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독립적인 왕립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1] 비록 1367년에 구시가지와의 물리적, 법적 통합을 시도하고 공동 행정을 명령했지만, 두 도시 의회의 반대로 인해 이 계획은 10년 만인 1377년에 철회되었다.[1] 대신 카렐 4세는 노베메스토 주민들에게 많은 권리와 자유를 부여했으며, 구시가지 주민들의 기존 권리 또한 문서로 확인해주고 노베메스토의 북쪽 문을 통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1]
노베메스토 건설은 단순한 주거 공간 확충을 넘어, 프라하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카렐 4세의 큰 그림 아래 진행되었다. 그는 노베메스토를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삼는 동시에,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348년 4월 7일, 중앙 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렐 대학교가 설립되었다.[1] 또한 프라하를 중앙 유럽의 중요한 경제 허브로 만들기 위해 교통로를 정비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블타바 강의 수운을 활성화하는 계획도 추진했다.[1] 노베메스토 건설은 구시가지와의 통합 시도가 있었던 1367년경에 대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1]
1378년 카렐 4세의 지시로 실시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프라하의 인구는 약 4만 명에 달했다. 이는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에서는 파리, 겐트, 브뤼헤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였다.[1] 도시의 물리적인 면적만으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다음으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1] 노베메스토의 도시 계획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혁신적이고 거대했다. 역사가 빌렘 로렌츠(Vilém Lorenc)는 카렐 4세가 "중세 시대 최대의 도시 계획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며, 당시 유럽에서는 이와 동등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노베메스토가 약 2km2에 달하는 면적에 체계적으로 계획되어 건설되었으며, 도로 폭이 18m에서 27m에 달하고, 주요 간선 도로는 길이가 0.75km를 넘고 폭이 60m 이상인 곳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노베메스토의 중앙 시장 하나만으로도 당시 대부분의 도시 전체 크기(성벽 포함)보다 컸다. 이는 노베메스토가 처음부터 중앙 유럽의 행정, 문화, 경제 중심지로 기능하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보여준다.[1]
8. 주요 명소
참조
[1]
웹사이트
Results of the 2021 Census - Open data
https://csu.gov.cz/p[...]
Czech Statistical Office
2021-03-27
[2]
웹사이트
Historický lexikon obcí České republiky 1869–2011 – Praha
https://csu.gov.cz/d[...]
Czech Statistical Office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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