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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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신영은 193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주미 1등 서기관, 외무부 차관 등을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88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019년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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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 |
---|---|
기본 정보 | |
이름 | 노신영 |
한자 표기 | 盧信永 |
로마자 표기 | No Sinyeong |
출생일 | 1930년 2월 28일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일제 강점기) |
사망일 | 2019년 10월 21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광주(光州) |
학력 | 서울대학교 법학과 켄터키 주립대 대학원 |
종교 | 개신교 |
호 | 학천(鶴泉) |
배우자 | 김정숙 |
자녀 | 노경수(장남) |
부모 | 노창열(부), 방인숙(모) |
형제 | 형 4명 |
경력 | |
제18대 국무총리 | 재임 시작: 1985년 5월 16일 재임 종료: 1987년 5월 25일 대통령: 전두환 전임: 진의종 후임: 김정렬 |
제18대 외무부 장관 | 재임 시작: 1980년 9월 2일 재임 종료: 1982년 6월 1일 대통령: 전두환 |
제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 재임 시작: 1982년 6월 2일 재임 종료: 1985년 2월 18일 대통령: 전두환 |
훈장 | |
서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
군 복무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중위 전역 |
기타 | |
정당 | 무소속 |
웹사이트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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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노신영은 1930년 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에서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형 넷은 모두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강서 덕흥공립국민학교를 전 학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평양고보의 후신인 평양 제2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1949년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로 월남하여 고구마를 팔며 고학 생활을 했다. 본래 역사학과를 지망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입학 2주 만에 6.25 전쟁이 발발, 9·28 수복 후 학도의용군에 지원하였다. 1953년 2월, 군 복무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현 외무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규정상 군 복무자는 수습행정관으로 채용될 수 없었다. 방법을 찾던 중, 외국 대학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또는 재정 보증서를 받고 유학 시험에 합격하면 제대가 가능했기에 유학길에 올라 1955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외무부에 들어갔다.[1]
2. 1. 초기 생애
노신영은 1930년 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에서 태어났다. 5남 중 장남이었는데, 먼저 태어난 형 넷은 모두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강서 덕흥공립국민학교를 전 학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평양고보의 후신인 평양 제2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1949년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로 월남하였다. 월남 후에는 고구마를 팔며 고학 생활을 했다. 본래 역사학과를 지망하려 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입학 2주 만에 6.25 전쟁이 발발, 9·28 수복 후 학도의용군에 지원하였다. 1953년 2월, 군 복무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현 외무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규정상 군 복무자는 수습행정관으로 채용될 수 없었다. 방법을 찾던 중, 외국 대학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또는 재정 보증서를 받고 유학 시험에 합격하면 제대가 가능했기에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외무부에 들어갔다.[1]2. 2. 외무부 시절
1955년 11월 외무부에 입부하였다. 정무국에 배정되어 7개월 만에 사무관이 되었고, 구미과, 방교국 정보문화과장을 거쳐 총무과장이 되었다. 이후 주미 1등서기관, 주 터키 1등서기관, 조약과장, 문서국장, 주 타이 참사관, 아주국장, 주 이탈리아 참사관, 기획관리실장,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 주 뉴델리 총영사, 외무부차관, 주 제네바 대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외무부장관을 지냈다.[10]2. 3. 외무부 장관
1980년 9월 10일 노신영은 제18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장관 임명 당시 전두환은 정보 보고를 통해 노신영을 등용했다고 밝혔다.[1]노신영은 외무부 장관 재임 시절, 69명의 외교관 숙정 문제에 직면했으나,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전두환의 재가를 얻어내어, 결국 3명을 제외하고는 숙정을 막아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외무공무원법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법안을 마련하고, 여러 차례의 공청회와 관계 부처의 동의를 얻어 1981년 5월 14일부터 시행되도록 하였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올림픽 개최를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국민적 일체감을 고취하고자 하였다.[1]
1982년 6월 2일, 전두환은 노신영에게 안기부장 자리를 제안했으나, 노신영은 이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방송 발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안기부장으로 발령받게 되면서 외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 노신영은 훗날 회고록에서 외무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2]
2. 3. 1. 69명의 숙정자 문제
1980년 9월 10일 노신영은 제18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한다.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전두환은 노신영에게 정보 보고를 보고 괜찮다고 판단하여 등용했다고 밝혔다. 임명 당일부터 노신영은 이른바 "69명의 숙정자 문제"를 겪게 된다. 명단에 포함된 69명의 외교관들은 대부분 밑에서부터 올라온, 정치적으로 무관한 직업 외교관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그들을 숙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미 타 부서는 숙정 작업을 끝낸 상태라서 외무부 내부에서도 숙정을 막을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노신영은 긴밀히 해당 관계자들과 협의한 끝에 전두환으로부터 "내가 장관을 믿으니 장관에게 맡기겠지만 절대로 잘못이 없도록 하시오"라는 재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두환 측근의 반발로 끝내 3명의 직원은 숙정을 피할 수 없었다.[1]2. 3. 2. 외무공무원법 제정
노신영은 숙정자문제 같은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에 외무공무원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때마침 외무부 내에서도 특례법 논의가 나오던 때였으므로 노신영은 이 기회에 외무공무원법 성안을 서두르도록 지시하였다. 외무부에서 마련한 법안은 부내에서 여러 차례의 공청회를 거친 후 총무처, 경제기획원과 법제처의 동의를 얻어 1980년 12월 8일 차관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청와대 측으로부터의 수정 요청이 있어 국무회의에서는 1981년 2월 17일에야 통과되었다. 몇 가지 수정을 거친 뒤 위원회를 통과한 외무공무원법은 1981년 5월 14일부터 실행되었다.2. 3. 3. 88올림픽 유치
노신영은 올림픽 개최 반대론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올림픽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1]- 첫째,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소개가 미흡하거나 잘못된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제1우방인 미국에서조차 6.25 전쟁 중 초가집이 불타고 남루한 모습의 한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 부담이 있더라도 중진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 둘째, 올림픽은 4년마다 대륙별로 순환 개최되므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 20세기 안에는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었다. 21세기에는 아시아에서 개최될 차례가 되더라도 중국 등 강대국이 새로운 경쟁 상대로 등장할 가능성이 컸다.
- 셋째, 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국력 신장을 보여주어 비동맹권 미수교국과의 관계 개선을 조속히 추진하고, 역사적인 대규모 행사를 통해 국민적 일체감을 고취할 수 있었다. 또한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는 통상 확대와 교역 증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었다.
2. 3. 4. 외무부 장관 이임
Richard L. Walker영어 前 주한 미국 대사의 회고록『KOREAN REMEMBRANCES』에 따르면, 처음에 전두환이 안기부장 자리를 제안했을 때부터 노신영은 그 자리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고 한다.[1] 그는 거듭 안기부장의 자리를 거절하였으나 뜻밖에도 1982년 6월 2일 낮, 방송을 통해 인사발표가 나버렸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기부장으로 발령이 되었다.[1]후일 노신영이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길 "외무부는 나의 인생 그 자체였고 외무부 없이는 나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만큼 나는 외무부에 정열을 쏟았고 사랑했다 ... 중략 ... 1970년대에는 공직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새마을연수에도 가지 못하였고 27년 동안 나는 그저 외무부의 일에만 열중하였고 외무부의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았다 ... 중략 ...."[2]
2. 4. 국가안전기획부장
노신영은 1980년 5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1982년 6월 2일부터 1985년 2월 18일까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1982년 12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김대중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에 관여했다. 노신영은 전두환의 지시로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및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워커 대사와 협의하여 김대중의 미국 망명을 지원했다.[1]
1983년 9월 1일에는 대한항공기(KAL)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 하원의원 래리 맥도널드를 비롯한 296명이 사망했다.[1] 대한민국 정부는 즉각 대통령 주재하에 안보장관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했으며,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도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1]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기대만큼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자, 노신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두환에게 사표를 제출했다.[1] 그러나 전두환은 사표를 반려하고 1년간 유임시키려 했으나, 노신영의 거듭된 사의 표명으로 결국 며칠 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1]
노신영은 안기부장 재임 시절, "국민들이 안기부장이 누구인지 모를수록 사회는 안정되고 국정은 잘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
2. 4. 1.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981년 1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김대중은 1982년 3월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노신영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처음부터 김대중을 사형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1982년 8·15 광복특사 때 김대중을 석방하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12월, 전두환은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어 안기부장이었던 노신영을 불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논의했다. 전두환은 노신영에게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와 협의하고 미국 측과도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노신영은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워커 대사에게 연락해 미국 망명 시 사증 발급에 대해 논의했고, 워커 대사는 즉시 발급을 약속했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기로 예정된 전날, 청와대에서 관계 장관과 측근 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김대중 씨를 석방하여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김대중은 부인 및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2. 4. 2. KAL기 격추사건
1983년 9월 1일에 발생한 대한항공기(KAL) 격추 사건은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서울로 비행 중이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1]이 사건으로 미국 하원의원 래리 맥도널드를 비롯한 56명의 미국인, 일본인, 대만인 등 150여 명의 외국인을 포함, 총 296명이 사망하였다.[1] 대한민국 정부는 즉각 대통령 주재하에 안보장관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도 KAL기 격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1]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이사회에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였다.[1] 9월 8일 미국과 영국 등 우방 9개국은 소련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였으나,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하였다.[1]
9월 12일과 9월 16일 한국과 미국은 두 차례에 걸쳐 피해보상각서를 소련 측에 전달하려 했으나, 소련 측은 접수를 거부하였다.[1]
2. 4. 3. 안기부장 이임
1985년 2월 12일에 열린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로 창단된 신민당이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여 기존의 민한당과 국민당을 누르고 원내 제1야당이 되었다. 여당인 민정당이 기대한 만큼 의석을 늘리지 못하자 안기부장인 노신영은 그에 대한 책임으로 전두환에게 사표를 제출하였다.[1] 하지만 전두환은 사표를 거부하고 1년간은 그대로 유임시키겠다며 안기부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이 사실을 알리라고 했다.[1] 그럼에도 노신영이 재차 사의를 표명하자 전두환은 그의 말은 듣지 않고 "빨리 내려가라"고 지시하였고, 어쩔 수 없이 그날 회의를 열어 유임 소식을 알렸다.[1] 그러나 며칠 후 노신영은 국무총리에 임명된다.[1]노신영은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누가 안기부장인지를 국민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사회는 안정되고 국정은 잘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라는 안기부장으로서의 신념을 내비쳤다.[1]
2. 4. 4. 후계자 문제
1986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으로 민간인 출신의 노신영을 선택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라며 극렬하게 반대하자 결국 뜻을 거두고 말았다.[1]2. 5. 국무총리 시절
1987년 1월 14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노신영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다.[1] 이후 범인 축소 조작 사건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노신영은 총리로서 책임을 지고 전두환에게 사의를 표명했고, 악화되는 여론에 결국 사임했다.[1]2. 5. 1.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퇴임

1987년 1월 14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다.[1] 노신영은 다음 날인 1월 15일 저녁, 일간지 구석에 작게 실린 기사를 이상하게 여기고 김종호 내무부 장관과 정재철 정무장관을 추궁했다.[1] 김종호는 처음에는 경찰 발표대로라며 거짓말을 했지만, 정재철이 자리를 뜨자 고문에 의한 사망 사건임을 실토했다.[1]
이에 노신영은 즉시 대책회의를 소집, 노태우 대표위원, 박영수 청와대 비서실장, 장세동 안기부장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다.[1] 이 자리에서 노신영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며, 늦었지만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이후 범인 축소 조작 사건이 추가로 드러났고, 노신영은 총리로서 책임을 지고 전두환에게 사의를 표명했다.[1] 전두환은 처음에는 임기가 9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류했으나, 악화되는 여론에 결국 사임을 결정했다.[1]
3. 퇴임 후
퇴임 후 국정자문위원, 한·미현인회의 한국 측 대표, 고려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12] 롯데복지·장학재단과 안중근 의사숭모회 이사장직을 역임했다.[12]
4. 사망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투병하던 중 2019년 10월 21일 오후에 향년 89세로 별세하였다.[13]
5. 가족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배우자 | 김정숙(金貞淑) | 1932년 9월 10일 | 2009년 4월 25일 | |
첫째 아들 | 노경수 | 1954년 10월 27일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 |
첫째 며느리 | 정숙영(鄭淑英) | 1959년 12월 21일 | ㈜가교아트 대표, 정세영의 딸 | |
둘째 아들 | 노철수(盧哲秀) | 1956년 7월 27일 | 애미커스그룹 회장, 중앙데일리 상임고문 | |
둘째 며느리 | 홍라영(洪羅玲) | 1960년 1월 10일 | 삼성미술관 부관장, 홍진기의 딸 | |
셋째 아들 | 노동수(盧東秀) | 1959년 5월 13일 | 2017년 2월 13일 | 고려서적 사장 |
첫째 딸 | 노은경(盧恩卿) | 1957년 11월 14일 | ||
둘째 딸 | 노혜경(盧惠卿) | 1960년 8월 30일 | ||
둘째 사위 | 류진(柳津) | 1958년 3월 5일 | 풍산금속 대표이사 |
6. 상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 수교훈장 광화대장
7. 저서
盧信永 回顧錄|노신영 회고록중국어, 고려서적 (2000년)
8. 노신영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서적
Profile of Lho Shin-yong
https://books.google[...]
[2]
웹사이트
노신영 롯데그룹 총괄고문, 故 이인원 조문…'묵묵부답'
https://web.archive.[...]
2016-08-29
[3]
웹사이트
Former Prime Ministers
https://archive.toda[...]
Office for Government Policy Coordination, Prime Minister's Secretariat
2018-02-19
[4]
웹사이트
역대 장관 / Former Ministers
https://archive.toda[...]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outh Korea)
2018-02-19
[5]
웹사이트
역대원장 / Former Directors
https://archive.toda[...]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South Korea)
2018-02-19
[6]
웹사이트
역대총리소개 / Former Prime Ministers
https://web.archive.[...]
Office for Government Policy Coordination, Prime Minister's Secretariat
2017-07-25
[7]
웹사이트
Former Ministers
https://archive.toda[...]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outh Korea)
2018-02-19
[8]
웹사이트
노신영 선생 - 2009년도 -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 SNU Awards
https://www.snu.ac.k[...]
[9]
간행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https://web.archive.[...]
신동아
2004-03-02
[10]
뉴스
http://dna.naver.com[...]
1982-06-02
[11]
뉴스
http://dna.naver.com[...]
1985-02-19
[12]
뉴스
새 컴퓨터 들고 시골학교 찾은 前 총리 롯데재단, 충남 태안 만리포高에 최신형 컴퓨터 32대 기증
http://srchdb1.chosu[...]
Chosun.com
2007-11-03
[13]
웹사이트
https://m.news.naver[...]
[14]
뉴스
반기문 장관, 노신영씨 등 원로 외교관과 만찬
http://article.joins[...]
joins
200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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