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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메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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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메리아누스는 282년부터 284년까지 로마 황제였으며, 카루스의 차남이다. 카루스가 황제가 된 후 카리누스와 함께 카이사르로 승격되었고, 사산 제국 원정에 참여하여 승리했다. 카루스 사망 이후 카리누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동방에서 눈의 염증을 앓다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웅변가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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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메리아누스
기본 정보
이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전체 이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우스 누메리아누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282년)
로마자 표기Marcus Aurelius Numerius Numerian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누메리아누스 안토니니아누스
누메리아누스의 안토니니아누스
통치
로마 황제카이사르: 282년 - 283년 7월
아우구스투스: 283년 7월 - 284년 11월
공동 황제카리누스 (283년–284년)
선임자카루스
후임자디오클레티아누스
개인 정보
사망일284년 11월
사망 장소에메사
배우자아리우스 아페르의 딸
아버지카루스

2. 생애



누메리아누스는 카루스의 둘째 아들이었다.[4] 282년, 라에티아와 노리쿰에 주둔한 상부 도나우 군단이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프로부스가 사망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5] 카루스는 60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에[8] 즉시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9]

283년, 카루스는 카리누스에게 서방 지역을 맡기고, 누메리아누스와 그의 장인인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아리우스 아페르를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사산 제국은 샤푸르 1세 사후 계승 분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카루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10][11] 조나라스, 유트로피우스, 페스투스에 따르면, 카루스는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셀레우키아와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현재 이라크 알마다인 부근)을 점령했다. 이 도시들은 티그리스 강 양쪽에 위치해 있었다.[12] 이러한 승리를 기념하여 누메리아누스, 카루스, 카리누스는 모두 ''페르시치 막시미''라는 칭호를 받았다.[13] 그러나 카루스는 283년 7월 또는 8월 초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2] 일설에 따르면 번개에 맞은 것이 사인이라고 한다.[14]

카루스의 죽음 이후, 누메리아누스와 카리누스는 공동으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284년 1월 로마로 향했지만, 누메리아누스는 동방에 머물렀다.[15] 로마 군은 페르시아에서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는데, 바흐람 2세가 아직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16]

284년 3월, 누메리아누스는 시리아의 에메사(홈스)에 있었고, 11월에는 소아시아에 도착했다.[17] 에메사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유일하게 현존하는 칙령이 있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다.[18] 284년 말 이전에 키지쿠스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화가 발행되었지만, 그가 여전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불분명하다.[19]

에메사를 떠난 후, 누메리아누스의 측근들과 장인 아페르는 누메리아누스가 눈병을 앓고 있어 닫힌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고 보고했다.[20] 군대가 비티니아[15] 트라키아[21] 도착했을 때, 누메리아누스의 병사들은 마차에서 썩은 시체 냄새를 맡게 되었다.[16] 병사들이 마차의 휘장을 열자, 누메리아누스는 이미 죽어 있었다.[22]

아페르는 284년 11월 니코메디아(이즈미트)에서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3] 병사들이 황제의 텐트를 강제로 열고 상황을 확인하면서 은폐는 실패했다. 누메리아누스의 장군들과 트리부누스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칼케돈에서 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논의했고, 아페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실 근위 기병대 사령관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23][24] 동방 군대는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를 만장일치로 환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자색 옷을 입고 칼을 햇빛에 비추며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음을 맹세했다. 그는 아페르가 누메리아누스를 살해하고 이를 은폐했다고 주장하며, 군중 앞에서 아페르를 처형했다.[25]

2. 1. 초기 생애와 카루스 황제 즉위



누메리아누스는 카루스의 차남이었다.[4] 282년, 라에티아와 노리쿰에 주둔한 상부 도나우 군단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으로 프로부스는 사망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5] 한 견해에 따르면 카루스는 스스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시르미움(스렘스카 미트로비차, 세르비아)에 주둔한 프로부스의 군대는 카루스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아 대신 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6] 『아우구스타사』에 따르면 카루스는 프로부스의 죽음에 책임이 없었고, 살해범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7] 이미 60세였던 카루스는 왕조를 세우기를 원했고,[8] 즉시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켰다.[9]

283년, 카루스는 카리누스를 서방에 남겨두고 누메리아누스와 그의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아리우스 아페르를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사산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사산 제국은 샤푸르의 죽음 이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카루스의 진격을 막을 입장이 아니었다.[10][11]

조나라스, 유트로피우스, 페스투스에 따르면 카루스는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셀레우키아와 사산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오늘날 이라크의 알마다인 인근)을 점령했는데, 이 도시들은 티그리스 강의 양쪽에 위치해 있었다.[12] 이를 기념하여 누메리아누스, 카루스, 카리누스는 모두 칭호인 ''페르시치 막시미''를 사용했다.[13] 카루스는 283년 7월 또는 8월 초에 사망했는데,[2] 번개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14]

2. 2. 사산 제국 원정과 카루스의 죽음



누메리아누스는 카루스의 차남이었다.[4] 282년, 라에티아와 노리쿰에 주둔한 상부 도나우 군단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에 대한 반란 이후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를 황제로 선포했는데, 이 반란으로 프로부스는 사망했다.[5]

283년, 카루스는 카리누스를 서방에 남겨두고 누메리아누스와 그의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아리우스 아페르를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사산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사산 제국은 샤푸르의 죽음 이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카루스의 진격을 막을 입장이 아니었다.[10][11]

조나라스, 유트로피우스, 페스투스에 따르면 카루스는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셀레우키아와 사산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오늘날 이라크의 알마다인 인근)을 점령했는데, 이 도시들은 티그리스 강의 양쪽에 위치해 있었다.[12] 이를 기념하여 누메리아누스, 카루스, 카리누스는 모두 칭호인 ''페르시치 막시미''를 사용했다.[13] 카루스는 283년 7월 또는 8월 초에 사망했는데,[2] 번개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14]

2. 3. 누메리아누스와 카리누스의 공동 통치

카루스가 죽자 누메리아누스와 카리누스가 새로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284년 1월 로마로 향했고, 누메리아누스는 동방에 머물렀다.[15] 로마 군은 페르시아에서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는데, 페르시아 왕 바흐람 2세가 아직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느라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16]

284년 3월까지 누메리아누스는 시리아의 에메사(홈스)에 있었고, 11월까지는 소아시아에 도착했다.[17] 에메사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행된 유일한 현존하는 칙령을 발행할 정도로 살아있었고 건강했던 것으로 보인다.[18] 284년 말 이전에 키지쿠스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화가 발행되었지만, 그 시점에 그가 여전히 대중의 주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19]

에메사 이후, 아페르 총독을 포함한 누메리아누스의 측근들은 누메리아누스가 눈에 염증이 생겨 닫힌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고 보고했다.[20] 군대가 비티니아[15] 트라키아[21] 도착했을 때, 누메리아누스의 군인들은 마차에서 부패한 시체 냄새가 나는 것을 맡았다.[16] 그들은 마차의 커튼을 열었고 누메리아누스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22]

2. 4. 누메리아누스의 죽음

카루스의 죽음으로 누메리아누스와 카리누스가 새로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284년 1월 로마로 향했고, 누메리아누스는 동방에 머물렀다.[15] 페르시아로부터의 로마 군의 퇴각은 질서정연했고, 바흐람 2세가 아직 그의 권위를 확립하려 분투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16]

284년 3월까지 누메리아누스는 시리아의 에메사(홈스)에, 11월까지는 소아시아에 도착했다.[17] 에메사에서 그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유일한 현존하는 칙령을 발행할 정도로 살아있었고 건강했던 것으로 보인다.[18] 284년 말 전에 키지쿠스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화가 발행되었지만, 그 시점에 그가 여전히 대중의 주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19]

에메사 이후, 아페르 총독을 포함한 누메리아누스의 측근들은 누메리아누스가 눈의 염증으로 고통받아 닫힌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고 보고했다.[20] 군대가 비티니아[15] 트라키아[21] 도착했을 때, 누메리아누스 군인들은 마차에서 부패한 시체의 냄새가 나는 것을 맡았다.[16] 그들은 마차의 커튼을 열었고 누메리아누스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22]

2. 5. 누메리아누스의 사후

아페르는 284년 11월 니코메디아(이즈미트)에서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3] 이 소식을 숨기려던 속주 총독의 의도와는 달리 병사들이 황제의 텐트를 강제로 열고 상황을 직접 확인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장군들과 트리부누스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칼케돈에서 후계자 선출을 위한 회의를 열었고, 아페르의 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황실 근위 기병대 사령관인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황제로 선출했다.[23][24] 동방 군대는 만장일치로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를 환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색 황제의 옷을 받아들고 칼을 햇빛에 들어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맹세를 했다. 그는 아페르가 누메리아누스를 죽이고 그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중 앞에서 묶여 끌려온 아페르를 처형했다.[25]

3. 성격 및 평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누메리아누스는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매우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고, 뛰어난 웅변가이자 시인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원로원이 그에게 "가장 강력한 웅변가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진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4. 가계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프로부스카루스디오클레티아누스
플로리아누스colspan="2" rowspan="2" |-- 카리누스누메리아누스갈레리아 발레리아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Manual of Latin Epigraph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문서 Carus
[3] 웹사이트 Portraiture of Emperor Numerian http://rome101.com/P[...] 2023-03-26
[4] 문서 Carus
[5]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6]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7]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The Modern Library
[8] 문서 Constantine and the Christian Empire
[9]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0] 문서 Carus
[11] 문서
[12]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3]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4]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5]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6] 문서 Severus to Constantine
[17]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18] 문서 Codex Justinianeus
[19] 문서 Roman Imperial Coinage
[20] 문서 Numerianus
[21] 문서
[22]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23]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24] 문서 The Roman Empire at Bay
[25] 문서 Constantine and Eusebius
[26] 문서
[27] 문서 Classical Latin
[28] 문서 Ca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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