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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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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NWOBHM)은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헤비 메탈 운동으로, 펑크 록 이후 쇠퇴하던 영국 록 음악의 부활을 목표로 했다. 1979년 닐 케이가 주최한 라이브 이벤트 "Heavy Metal Nite"를 통해 아이언 메이든, 삼손, 엔젤 위치 등의 밴드가 주목받으며 시작되었고, 펑크 록의 DIY 정신과 헤비 메탈의 전통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1980년대 초반 데프 레파드, 아이언 메이든 등의 성공으로 주류 음악 시장에 진입했으나, 1980년대 중반 MTV의 등장과 글램 메탈의 부상으로 쇠퇴했다.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재조명받으며 부활했고, 블랙 메탈, 스래시 메탈 등 다양한 하위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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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
장르 정보
스타일 기원헤비 메탈, 하드 록, 펍 록, 프로그레시브 록
문화적 기원1970년대 중후반, 영국
파생 장르블랙 메탈, 글램 메탈, 파워 메탈, 스피드 메탈, 스래시 메탈
퓨전 장르UK 82
지역적 배경영국
기타 주제익스트림 메탈, NWOAHM, 프로그레시브 메탈, 펑크 록, NWOTHM
명칭
영문 명칭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약칭NWOBHM

2. 역사적 배경

1970년대 후반, 영국은 경제 불황, 높은 실업률, 잦은 파업과 폭동 등으로 사회가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1] 특히 탈산업화로 인해 노동계급 청년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좌절감을 느꼈고, 이는 펑크 록헤비 메탈 같은 저항적인 음악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등 19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영국의 헤비 록 밴드들은 여러 문제에 직면하며[4] 대중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디스코, 글램, 모드 리바이벌, 뉴 웨이브, 전자 음악 등 새롭고 유행하거나 수익성이 높은 장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펑크 록과 뉴 웨이브에 열광하던 언론은 헤비 록 밴드들을 "굼뜬 공룡"으로 폄하했으며,[7] 일부는 헤비 메탈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했다.[8]

이러한 상황에서 1975년 결성된 모터헤드펑크 록헤비 메탈을 융합하여 빠른 음악, 음량 선호를 위한 기술적 기교 포기,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펑크와 헤비 메탈 팬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다. 모터헤드는 많은 NWOBHM 밴드들의 투어를 지원했으며,[13] 1981년 6월 라이브 앨범 ''노 슬립 '틸 해머스미스''로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9년 여름, DJ 닐 케이가 주최한 헤비 메탈 디스코 "Bandwagon"에서 상업적으로 무명인 밴드들의 라이브 이벤트 "Heavy Metal Nite"가 열렸다. 여기서 주목받은 아이언 메이든, 삼손, 엔젤 위치는 투어를 진행하며 하드 록/헤비 메탈 밴드들이 잇따라 등장하는 발단이 되었다.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NWOBHM)이라는 용어는 "Sounds"지의 제프 버튼이 쓴 기사에서 유래했다. 이는 펑크 이후 등장한 뉴 웨이브 지지자들이 과거의 록을 "올드 웨이브"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대응이자, 영국 록의 침체로부터의 부활을 바라는 의미였다. 또한 하드 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2. 1. 사회 불안

1970년대 후반 영국은 3년간의 경제 불황으로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의 비효율적인 사회 정책으로 인해 사회 불안과 광범위한 빈곤 상태에 놓였다.[1] 탈산업화 결과, 특히 노동계급 청년층 사이에서 실업률이 매우 높았다. 1980년대 초에도 실업률은 계속 상승하여 1983년 2월에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불만은 잦은 파업으로 이어져 사회 불안을 야기했고, 브릭스톤 폭동과 톡스태스 폭동을 포함한 일련의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1984년 광부 파업 집회


이 시기, 이전 세대가 누렸던 비교적 낮은 기술 직업조차 얻을 기회를 박탈당한 많은 젊은이들은 음악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쏟아져 나온 새로운 밴드와 새로운 음악 스타일의 폭발은 마가렛 대처 총리 재임 전후 영국을 강타한 경제 불황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2. 2. 영국 헤비 록의 위기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등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영국의 헤비 록 밴드들은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4] 레드 제플린은 멤버 간 불화와 개인적인 비극으로 활동이 줄었고,[6] 블랙 사바스는 매력적이지만 불안정한 프론트맨 오지 오스본을 해고했으며, 딥 퍼플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헤비 록이 대중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디스코, 글램, 모드 리바이벌, 뉴 웨이브, 전자 음악 등 새롭고 더 유행하거나 수익성이 높은 장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펑크 록과 뉴 웨이브에 열광하던 언론은 헤비 록 밴드들을 "굼뜬 공룡"으로 폄하했고,[7] 일부는 헤비 메탈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했다.[8]

2. 3. 모터헤드의 등장

모터헤드의 이언 "레미" 킬미스터


모터헤드는 1975년에 결성되었다. 리더인 이언 "레미" 킬미스터는 스페이스 록 밴드 호크윈드의 전 멤버였고, 래리 윌리스는 핑크 페어리즈와 함께 연주했으며, 에디 클라크는 커티스 나이트의 제우스 멤버였다.[11] 이들은 이미 경험이 풍부한 뮤지션들이었기에,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에 속하는지에 대해 비평가들과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11]

일부에서는 모터헤드가 NWOBHM 밴드들이 지역 클럽에서 벗어나기 전에 이미 음반 계약, 전국 투어, 차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일부가 아닌 영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1] 모터헤드는 BBC 라디오 DJ 존 필의 ''Peel Sessions''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녹음한 유일한 이 시기의 메탈 밴드였으며, 1981년 6월 라이브 앨범 ''노 슬립 '틸 해머스미스''로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에 오른 최초의 밴드였다. 레미 자신은 모터헤드가 "그것보다 조금 일찍 나왔기" 때문에 "NWOBHM...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모터헤드를 이 운동의 최초의 중요한 대표자이자[12] 펑크 록헤비 메탈의 크로스오버를 완전히 구현한 최초의 밴드로 평가한다. 빠른 음악, 음량 선호를 위한 기술적 기교 포기, 타협하지 않는 태도는 펑크와 헤비 메탈 팬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다. 모터헤드는 많은 NWOBHM 밴드들의 투어를 지원했으며,[13] 레미의 친구들인 펑크 밴드 더 댐드와도 함께 공연했다. 모터헤드의 음악 스타일은 NWOBHM 기간 동안 큰 인기를 얻어, 초기 운동과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메탈 하위 장르 음악가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14]

3. 특징

NWOBHM은 펑크 록의 영향을 받아 빠르고 공격적인 사운드를 추구한 경향이 있지만,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포괄하는 운동이었다. 아이언 메이든, 엔젤 위치, 색슨, 홀로코스트, 타이거스 오브 팬 탕, 걸스쿨, 탱크, 모어 등은 이러한 스타일을 대표한다. 반면, 데프 레파드, 프레잉 맨티스, 화이트 스피릿, 데몬, 샤이, 개스킨 등은 멜로딕하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며, 발라드를 포함하거나 키보드, 어쿠스틱 악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가사적으로는 신화, 오컬트, 판타지, SF, 공포 영화 등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회적, 정치적 주제는 피하거나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15][16][17][18]

3. 1. 정체성과 스타일

NWOBHM은 주로 젊고 남성이며 백인으로, 계급, 윤리, 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음악가와 팬들을 모두 포함했다.[15] 미국의 사회학자 디나 와인스타인은 저서 ''헤비 메탈: 음악과 그 문화''에서 1970년대 초에 헤비 메탈이 탄생한 후 여러 하위 장르로 분화되기 전까지 이 운동이 성숙해진 과정을 묘사했다. 뮤타스, 메탈헤드, 또는 헤드뱅어로 알려진 영국 헤비 메탈 팬들은 1960년대 반문화에서 물려받은 반항적인 젊음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와 1970년대 헤비 록의 특징인 사이키델릭한 부착물을 일축하고, 헤비 메탈 하위 문화의 공유된 원칙과 규범을 업데이트하며 주류 사회와 명확히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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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에 이르러 영국 메탈헤드는 권력을 찬양하고 남성성을 기념하는 동료들의 닫힌 공동체로 뭉쳤다.[16] 디나 와인스타인의 분석에 따르면, 그들의 남성적 동지애와 그룹 내 여성의 전반적인 부재는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로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글에서 그녀는 영국 헤비 메탈에 대해 "균일하게 백인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적이지 않으며, 가사에는 인종적 언급이 없다."라고 썼다. 하위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잠재적인 동성애 혐오였으며, 영국 스킨헤드의 성향과 다르지 않지만 덜 폭력적이었다. 로버트 월서는 저서 ''악마와 함께 달리기: 헤비 메탈 음악의 권력, 젠더, 광기''에서 이를 "집단적인 이성애 긍정"이라고 부르고, 영국 사회학자 존 클라크는 저널에서 이를 "전통적으로 이용 가능한 남성성의 고정관념 침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간주한다.

헤드뱅어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서로의 동료 관계, 맥주 소비, 음악에서 그들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찾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종종 허무주의[17] 또는 도피주의로 비난받았다.[18] 펑크족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음악성을 사랑했고 거장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를 우상으로 삼았으며, 라이브 쇼를 그들의 지위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팬들은 음악, 서로, 그리고 그들과 기원을 공유하고 그들로부터 가치, 진정성 및 지속적인 접근성을 요구하는 밴드에 매우 충성했다.[19] 이 엄격한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변절자" 또는 "포저"로 낙인 찍히고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다. 색슨의 "Denim and Leather" 가사는 열정이 넘치던 그 시절 영국 메탈헤드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 여성 음악가와 팬이 이 남성 중심적인 세상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남성 상대방의 기준과 규범에 적응한 여성만이 받아들여졌다. 걸스쿨[20]과 록 여신이 이를 증명하며, 이 시대의 유일한 주목할 만한 여성 헤비 메탈 밴드였다.[21]

헤비 메탈 밴드와 팬들의 음악, 철학, 라이프 스타일은 좌익 비평가와 보수적인 여론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무의미하고 자가 패러디의 한계까지 웃기며, 심지어 젊은 세대에게 위험한 것으로 묘사되었다.[22] 1984년 모큐멘터리 ''스파이널 탭''은 영국 메탈 밴드의 많은 특이성을 다루며, 외부 관찰자들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할 이 세상의 코믹한 면을 보여주었다.[23] 대신 메탈 음악가들은 영화의 내용을 너무 현실적이라고 여겼다.[24]

영국 헤드뱅어들의 복장은 새롭게 형성된 이 운동의 결속력을 반영하며 1960년대 로커와 미국 바이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흔한 요소는 긴 머리와 청바지, 밴드 로고와 커버 아트로 장식된 검은색 또는 흰색 티셔츠, 그리고 패치가 달린 가죽 재킷이나 데님 조끼였다. 유다스 프리스트의 예에 따라 S&M 패션의 요소가 1980년대 메탈 의상에 도입되었으며, 금속 스터드와 장식을 뽐내거나 메탈 뮤지션들이 스판덱스나 가죽 바지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25] 탄띠와 휘장과 같은 군사적 물품의 요소도 이때 도입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의상은 빠르게 전 세계 메탈헤드의 유니폼이 되었다.

NWOBHM의 대부분의 밴드는 팬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특별한 시각 효과 없이 록 쇼를 공연했다. 주목할 만한 예외는 아이언 메이든으로, 그들은 데뷔 초부터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끔찍한 캐릭터 에디 더 헤드를 무대 소품으로 만들었다.[26] 다른 예외로는 공연에서 다양한 소품, 의상, 트릭을 사용한 데몬, 클로븐 후프 및 샘슨이 있으며, 페이건 알타와 베놈은 쇼크 록과 사탄 숭배에서 영감을 얻은 정교한 무대 연출로 유명해졌다.[27]

3. 2. 시각적 측면

NWOBHM 밴드와 팬들은 긴 머리, 청바지, 밴드 로고 티셔츠를 착용하고, 가죽 재킷이나 데님 조끼를 입는 등 로커와 바이커 스타일의 복장을 선호했다.[15] 이 복장에는 밴드 로고와 커버 아트가 담긴 패치를 데님 재킷에 바느질하여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16]

아이언 메이든의 에디와 같은 마스코트나, 데몬, 클로븐 후프, 샘슨, 페이건 알타, 베놈 등의 밴드들은 무대 소품, 의상, 쇼크 록, 사탄 숭배 등 다양한 시각적 요소를 활용하여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다.[44]


3. 3. 음악적, 가사적 요소

NWOBHM은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포괄하는 운동이었지만, 대체로 펑크 록의 영향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사운드를 추구했다. 아이언 메이든, 엔젤 위치, 색슨, 홀로코스트, 타이거스 오브 팬 탕, 걸스쿨, 탱크, 모어 등이 이러한 스타일을 대표한다. 한편, 데프 레파드, 프레잉 맨티스, 화이트 스피릿, 데몬, 샤이, 개스킨 등은 멜로딕하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며, 발라드를 포함시키거나 키보드, 어쿠스틱 악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가사적으로는 신화, 오컬트, 판타지, SF, 공포 영화 등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회적, 정치적 주제는 피하거나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15][16][17][18]

4. 전개 과정

1970년대 후반, 씬 리지, UFO, 주다스 프리스트처럼 국제적으로 성공한 헤비 록 밴드들이 이미 존재했지만,[46] 영국에서는 이들보다 더 젊은 헤비 메탈 밴드들이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런던의 Angel Witch, 아이언 메이든, 프레잉 맨티스, 샘슨, 반슬리의 Son of a Bitch(색슨의 전신), 스타우어브리지의 다이아몬드 헤드 등이 그 예시이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결성된 이 밴드들은 각 도시와 타운의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NWOBHM 운동의 중요한 밴드들로 떠올랐다.

이들은 펑크 밴드들과 공연 공간을 놓고 경쟁했으며, 이념, 태도, 외모의 차이로 인해 두 관객층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47] 그러나 펑크와 NWOBHM 밴드들은 음악에 대한 "DIY" 태도와 자체 제작 및 배포 관행을 공유했고, 이는 인디 레코드 레이블의 탄생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닐 케이는 런던 북서부 킹스버리에 있는 디스코 클럽인 The Bandwagon에서 하드 록과 헤비 메탈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The Heavy Metal Soundhouse를 운영하며 NWOBHM 밴드들의 음악을 소개했다.[49] 사운즈의 기자 제프 바턴은 새롭게 떠오르는 메탈 밴드들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 운동을 주도했다.[52] 그는 1979년 5월 런던 The Music Machine에서 열린 Metal Crusade 투어에서 Angel Witch, Iron Maiden, Samson의 공연 리뷰에서 "브리티시 헤비 메탈의 뉴 웨이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53] 이는 곧 전체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1981년, 음악 잡지 "Sounds"의 발행인은 헤비메탈 전문 잡지 "Kerrang!"을 창간했고,[72] 이는 NWOBHM을 비롯한 전 세계 헤비메탈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2년 아이언 메이든의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는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NWOBHM의 정점을 찍었다.

블리츠크리그는 2000년대에 재결성된 NWOBHM 밴드 중 하나이다.


1980년대 중반, 글램 메탈의 부상과 뮤직 비디오 케이블 채널 MTV의 등장은 NWOBHM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93] MTV는 뮤직 비디오를 통해 밴드의 시각적 매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부 영국 메탈 그룹에게는 부족한 부분이었다. 다이아몬드 헤드, 타이거스 오브 판 탕 등 NWOBHM의 선두 주자들은 초기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더 넓은 청중의 새로운 기대에 맞춰 외모와 사운드를 변화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원래 팬들마저 멀어지게 만들었다.

본 조비유럽과 같이 하드 록과 로맨틱 팝을 융합한 글램 메탈 밴드들이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레코드 회사들은 NWOBHM 밴드보다 더 세련된 글램 메탈 하위 장르에 집중했다.

NWOBHM의 관심이 줄어드는 동안, 파워 메탈스래시 메탈과 같이 NWOBHM에서 파생되었지만 더 빠르고 강력한 사운드를 가진 새로운 메탈 하위 장르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 후반, 헤비메탈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나뉘는데 NWOBHM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엔젤 위치, 위치파인데, 클로븐 후프, 특히 베놈블랙 메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터헤드, 아이언 메이든, 레이븐, 탱크, 베놈 등은 스피드 메탈스래시 메탈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다이아몬드 헤드의 "Am I Evil?"은 메탈리카가 초창기에 연주했던 커버곡 중 하나이며, 여전히 그들의 라이브 세트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4. 1. 언더그라운드 운동 (1975–1978)

1970년대 후반, 씬 리지, UFO, 주다스 프리스트와 같이 국제적인 무대에서 이미 큰 성공을 거둔 헤비 록 밴드들이 있었지만,[46] 더 젊은 연령대의 새로운 헤비 메탈 밴드들이 영국 여러 도시의 소규모 공연장에서 데뷔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대형 공연장들은 1위를 차지하는 디스코 음악을 위해 예약되었고, 록 음악 클럽으로 사용하는 것은 수익성이 낮다고 여겨졌다. 과거 대부분의 영국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그룹들은 클럽, 펍, 댄스홀, 사교 모임에서 저임금으로 라이브 공연을 하며 초기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의 기술을 연마하고, 지역 팬층을 확보하며, 매니저 및 음반사 관계자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해주었다.[47]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런던의 Angel Witch, 아이언 메이든, 프레잉 맨티스, 샘슨,[45] 반슬리의 Son of a Bitch(이후 색슨), 스토브리지의 다이아몬드 헤드, 리버풀의 마르세유, 하틀풀의 화이트 스피릿, 더비셔의 위치파인드, 웨이크필드의 바디스, 셰필드의 데프 레파드, 뉴캐슬 주변의 레이븐과 타이거스 오브 판 탕, 에든버러의 홀로코스트가 결성되어 각 도시와 타운의 클럽을 활성화시킨 가장 중요한 메탈 밴드들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음악 운동의 첫 번째 밴드들은 펑크 밴드들과 공연 공간을 놓고 경쟁했으며, 이로 인해 클럽들은 펑크나 록/하드 록만 전문적으로 공연하게 되었다. 이념, 태도, 외모의 차이는 두 관객 간의 격렬한 경쟁을 유발했다. 펑크와 NWOBHM 음악가들이 공유하는 점은 음악 사업에 대한 "DIY" 태도와 오디오 카세트 데모 형태 또는 개인적으로 제작된 싱글 형태의 녹음 자료를 자체 제작하고 자체 배포하는 관행이었으며, 이는 처음에는 지역 지지자들을 겨냥했다.

이는 또한 펑크와 메탈 음반을 모두 제작하는 경우가 있는 음반점 및 독립 녹음 스튜디오의 확장이었던 작은 인디 레코드 레이블의 탄생과 확산을 이끌었다. 인디 레이블은 1970년대 후반에 록 음악을 방해했던 기업의 간섭을 제거하여 지역 밴드들이 더 극단적인 형태의 음악을 실험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운동의 발전에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4. 2. 부상과 확산 (1979–1981)



씬 리지, UFO, 주다스 프리스트 등 이미 국제적인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둔 헤비 록 밴드들이 있었지만,[46]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더 젊은 연령대의 새로운 헤비 메탈 밴드들이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런던의 Angel Witch, 아이언 메이든, 프레잉 맨티스, 샘슨, 반즐리의 Son of a Bitch(색슨의 전신), 스타우어브리지의 다이아몬드 헤드, 리버풀의 마르세유, 하틀풀의 화이트 스피릿, 더비셔의 위치파인드, 웨이크필드의 바디스, 셰필드의 데프 레파드, 뉴캐슬 주변의 레이븐과 타이거스 오브 판 탕, 에든버러의 홀로코스트 등은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결성되어 각 도시와 타운의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NWOBHM 운동의 중요한 밴드들로 떠올랐다.

이들은 펑크 밴드들과 공연 공간을 놓고 경쟁했으며, 이념, 태도, 외모의 차이로 인해 두 관객층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47] 그러나 펑크와 NWOBHM 밴드들은 음악에 대한 "DIY" 태도와 자체 제작 및 배포 관행을 공유했고, 이는 인디 레코드 레이블의 탄생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DJ 닐 케이는 런던 북서부 킹스버리에 있는 디스코 클럽인 The Bandwagon에서 하드 록과 헤비 메탈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The Heavy Metal Soundhouse를 운영하며 NWOBHM 밴드들의 음악을 소개했다.[49] 그는 The Soundhouse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들을 모아 매주 헤비 메탈 Top 100 목록을 만들었고, 이를 음반점과 음악 저널 ''사운즈''에 보냈다.[50]

''사운즈''의 기자 제프 바턴은 새롭게 떠오르는 메탈 밴드들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 운동을 주도했다.[52] 그는 1979년 5월 런던 The Music Machine에서 열린 Metal Crusade 투어에서 Angel Witch, Iron Maiden, Samson의 공연 리뷰에서 "브리티시 헤비 메탈의 뉴 웨이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53] 이는 곧 전체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The Number of the Beast'' 앨범 커버는 아이언 메이든의 마스코트 에디(Eddie)가 지옥에서 불타는 영혼들을 인형처럼 조종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Sounds'' 외에도 여러 신문과 음악 잡지들이 NWOBHM을 다루기 시작했으며, ''Melody Maker''는 음반 판매를 기준으로 주간 헤비 메탈 차트를 발행하기도 했다. ''Sounds'' 발행인은 1981년 6월 Kerrang!을 창간하여 NWOBHM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72]

데프 레파드는 1983년 앨범 ''Pyromania''를 발매하여 이전보다 더 멜로디컬하고 FM 라디오 친화적인 음악으로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79] ''Pyromania''는 ''빌보드'' 200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고, 1984년까지 미국에서 6백만 장 이상 판매되며 데프 레파드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4. 3. 주류 진입과 쇠퇴 (1981–1985)

1981년, 음악 잡지 "Sounds"의 발행인은 헤비메탈 전문 잡지 "Kerrang!"을 창간했고, 이는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NWOBHM)을 비롯한 전 세계 헤비메탈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52] 1982년 아이언 메이든의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는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NWOBHM의 정점을 찍었다.

1982년 뮤직 비디오 케이블 채널 MTV가 방송을 시작하면서, 뮤직 비디오는 단순한 홍보 도구를 넘어 대중에게 다가가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MTV는 많은 하드 록과 헤비 메탈 비디오를 방영했지만, 이는 레코드 계약이 없거나 소규모 독립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NWOBHM 밴드들에게는 제작 비용이 너무 비쌌다. 게다가 뮤직 비디오는 밴드의 시각적 매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부 영국 메탈 그룹에게는 부족한 부분이었다.

1980년대 중반, 글램 메탈이 밴드의 외모를 강조하고 사랑과 섹스에 대한 가사를 특징으로 하며 많은 영국 록 팬들의 취향에서 다른 스타일의 메탈을 빠르게 대체했다. 할리우드선셋 스트립에서 시작된 이 하위 장르는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반 헤일런이 선두에 섰고, 머틀리 크루, 콰이어트 라이엇, 도켄, 그레이트 화이트, 래트, W.A.S.P.와 같은 밴드들이 뒤를 이었다. 본 조비와 스웨덴의 유럽은 하드 록과 로맨틱 팝을 융합하여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본 조비는 1987년 몬스터즈 오브 록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레코드 회사들은 NWOBHM 밴드보다 더 세련된 글램 메탈 밴드에 집중했고, NWOBHM 밴드들은 유럽에서는 팬층을 유지했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밀려났다. NWOBHM 밴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동안, 파워 메탈스래시 메탈같은 새로운 메탈 하위 장르가 등장하여 영국 메탈 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헬로윈, 사바타지, 메탈리카, 슬레이어, 메가데스, 앤스랙스와 같은 밴드들은 주류적이고 팝 지향적인 메탈 밴드의 사운드나 스타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메탈 팬들의 시장 점유율을 상당 부분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NWOBHM 그룹들은 해체되었고, 프레잉 만티스는 일본, 색슨, 데몬, 도쿄 블레이드는 유럽 본토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레이븐, 걸스쿨, 그림 리퍼와 같은 그룹들은 미국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미국 시장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아이언 메이든은 프로그레시브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영향력 있는 헤비 메탈 밴드 중 하나가 되었고, 데프 레파드는 하드 록 사운드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 미국 주류 록 시장을 공략하면서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4. 4. 쇠퇴

1980년대 중반, 글램 메탈의 부상과 뮤직 비디오 케이블 채널 MTV의 등장은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NWOBHM)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93] MTV는 뮤직 비디오를 통해 밴드의 시각적 매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부 영국 메탈 그룹에게는 부족한 부분이었다.

다이아몬드 헤드, 타이거스 오브 판 탕, 엔젤 위치, 샘슨과 같은 NWOBHM의 선두 주자들은 초기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들은 더 넓은 청중의 새로운 기대에 맞춰 외모와 사운드를 변화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원래 팬들마저 멀어지게 만들었다.

본 조비유럽과 같이 하드 록과 로맨틱 팝을 융합한 글램 메탈 밴드들이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레코드 회사들은 NWOBHM 밴드보다 더 세련된 글램 메탈 하위 장르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NWOBHM 밴드들은 유럽에서는 팬층을 유지했지만, 영국과 미국 시장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NWOBHM의 관심이 줄어드는 동안, 파워 메탈스래시 메탈과 같이 NWOBHM에서 파생되었지만 더 빠르고 강력한 사운드를 가진 새로운 메탈 하위 장르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다. 헬로윈, 사바타지, 메탈리카, 슬레이어, 메가데스, 앤스랙스와 같은 밴드들은 주류 메탈 밴드의 사운드나 스타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메탈 팬들을 사로잡았다.

Malc Macmillan의 ''The N.W.O.B.H.M. Encyclopedia''에 따르면,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 결성된 500개 이상의 NWOBHM 밴드들이 있었다. 베이비 터쿠, 크롬 몰리, 트레데거, 배틀존 등이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밴드들이었다. 하지만, 레코드 레이블의 무관심, 밴드의 부실한 관리, 내부 갈등, 음악적 변화 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그룹들은 해체되고 10년이 끝나갈 무렵 사라졌다.

프레잉 만티스는 일본에서, 색슨, 도쿄 블레이드는 유럽 본토에서 활동하며 해외 시장에서 생존을 모색했다. 레이븐, 걸스쿨그림 리퍼와 같은 그룹들은 미국 시장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아이언 메이든은 진보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헤비 메탈 밴드 중 하나가 되었고, 데프 레파드는 하드 록 사운드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 미국 주류 록 시장을 공략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4. 5. 부활

1980년대 후반, 헤비메탈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나뉘는데 NWOBHM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의 글램 메탈 성장에 데프 레파드가 영향을 주었으며, 엔젤 위치, 위치파인데, 클로븐 후프, 특히 베놈블랙 메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터헤드, 아이언 메이든, 레이븐, 탱크, 베놈 등은 스피드 메탈스래시 메탈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1982년경부터 북미, 서독, 브라질은 각각 스래시 메탈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탈리카라스 울리히는 NWOBHM 음반 수집가였으며, 초기 메탈리카 공연은 영국 메탈 그룹의 커버 곡으로 채워졌다. NWOBHM은 UK 82와 같은 스트리트 펑크 밴드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초 스피드 메탈의 탄생은 독일의 헬로윈, 미국의 마노워, 사바타지, 버진 스틸과 같은 1980년대 후반 파워 메탈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이아몬드 헤드의 "Am I Evil?"은 메탈리카가 초창기에 연주했던 커버곡 중 하나이며, 여전히 그들의 라이브 세트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NWOBHM 시작 이래, 앤빌, 라이엇, 트위스티드 시스터, 마노워, 버진 스틸, 더 로즈, 헬리온, 시리쓰 언골, 엑사이더와 같은 북미 밴드들은 영국 메탈 팬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졌다. 마노워와 버진 스틸은 영국의 뮤직 포 네이션스와 계약했고, 트위스티드 시스터는 런던에서 처음 두 앨범을 녹음했다.

어스셰이커, 라우드니스, 앤섬 등 일본 밴드들도 NWOBHM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앨범에 영국 사운드 엔지니어가 사용되었다. 바우 와우는 영국 메탈 씬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으로 이적했다. 독일,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유고슬라비아, 멕시코는 새로운 영국 밴드를 환영하고 모방 밴드를 배출했다. 독일의 억셉트, 그레이브 디거, 시너, 워록, 스웨덴의 E. F. 밴드, 덴마크의 머시풀 페이트, 벨기에의 킬러와 오스트로고스, 네덜란드의 픽처보딘, 프랑스의 트러스트, 소르티레주, 나이트메어, 스페인의 바론 로호, 오부스, 앙헬레스 델 인피에르노, 유고슬라비아의 고르디, 포마란차, 디블레 야고데, 워리어스, 멕시코의 루스벨, 소련의 아리아는 1978년에서 새로운 10년이 시작될 때 형성되었으며 NWOBHM의 사운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 중 다수는 로드러너 레코드 또는 마우솔레움 레코드와 계약했다.

5. 영향과 유산

NWOBHM은 침체된 헤비메탈 장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스래시 메탈, 파워 메탈, 블랙 메탈 등 다양한 하위 장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베놈은 블랙 메탈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모터헤드, 아이언 메이든, 레이븐, 탱크 등은 스피드 메탈과 스래시 메탈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메탈리카라스 울리히는 NWOBHM 음반 수집가이자 팬으로서, 메탈리카의 초기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무브먼트의 영향으로 1980년 8월 16일 영국 도닝턴에서 제1회 몬스터즈 오브 록이 개최되어 HR/HM계 밴드만의 록 페스티벌로서 레인보우, 주다스 프리스트, 스콜피온스, 색슨, 에이프릴 와인, 터치, 라이엇이 출연했다. 전통적인 레딩 페스티벌에서는 펑크, 뉴 웨이브계에서 HR/HM계 밴드가 주요 출연진이 되었고, 1980년에는 배지, 화이트스네이크 등이, 1981년에는 스콜피온스, UFO 등이, 1982년에는 다이아몬드 헤드, 마이클 쉥커 그룹 등이 출연했다. 또한, 영국 이외의 국가(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의 헤비 메탈 융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6. 대표적인 밴드

색슨, 데프 레파드, 아이언 메이든은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NWOBHM)의 대표적인 밴드로 꼽힌다.[1] 이들은 각각 1979년 5월, 8월, 12월에 EMI와 포노그램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1]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 인디 레이블이나 자비 출판으로 음반을 낸 많은 밴드들도 NWOBHM의 중요한 অংশを占めた.[1] 1980년대 초반까지 7인치 레코드를 발표한 밴드만이 NWOBHM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1]

레인보우, 주다스 프리스트, UFO, 씬 리지 등은 NWOBHM 시대에도 활동했지만, 이 무브먼트 이전에 데뷔했기 때문에 NWOBHM에 포함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1] 와일드 호시즈, 마이클 쉥커 그룹처럼 NWOBHM 이전에 데뷔한 멤버가 포함된 밴드도 마찬가지다.[1]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데프 레파드는 자신들을 헤비 메탈 밴드가 아닌 하드 록 밴드라고 주장한다.[1]

다음은 대표적인 NWOBHM 밴드 목록이다.


  •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1]
  • 위치파인더 제너럴(WITCHFINDER GENERAL)[1]
  • 위치파인드(WITCHFYNDE)[1]
  • 울프(WOLF)[1]
  • 엔젤 위치(ANGEL WITCH)[1]
  • 가스킨(GASKIN)[1]
  • 걸(GIRL)[1]
  • 걸스쿨(GIRLSCHOOL)[1]
  • 쿼츠(QUARTZ)[1]
  • 그랑프리(Grand Prix)[1]
  • 그림 리퍼(GRIM REAPER)[1]
  • 색슨(SAXON)[1]
  • 샘슨(SAMSON)[1]
  • 재규어(JAGUAR)[1]
  • 스위트 새비지(SWEET SAVAGE)[1]
  • 새턴(SATAN)[1]
  • 다크 스타(DARK STAR)[1]
  • 타이거스 오브 판탕(TYGERS OF PAN TANG)[1]
  • 타이탄(TYTAN)[1]
  • 다이아몬드 헤드(DIAMOND HEAD)[1]
  • 탱크(TANK)[1]
  • 데몬(DEMON)[1]
  • 데프 레파드(DEF LEPPARD)[1]
  • 도쿄 블레이드(TOKYO BLADE)[1]
  • 트레스패스(TRESPASS)[1]
  • 패스트웨이(FASTWAY)[1]
  • 피스트(FIST)[1]
  • 블랙 로즈(BLACK ROSE)[1]
  • 블리츠크리크(BLITZKRIEG)[1]
  • 프레잉 맨티스(PRAYING MANTIS)[1]
  • 바디스(VARDIS)[1]
  • 베놈(VENOM)[1]
  • 홀로코스트(HOLOCAUST)[1]
  • 화이트 스피릿(WHITE SPIRIT)[1]
  • 마마스 보이즈(MAMA'S BOYS)[1]
  • 모터헤드 (Motörhead)[1]
  • 레이븐(RAVEN)[1]
  • 와일드 호시즈(WILD HORSES)[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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