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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야마정 (지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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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야마정(지바현)은 지바현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처음 성립되었다. 사토미 씨가 다테야마 성을 축성하면서 조카마치를 형성했고,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1914년 도요쓰촌과 합병하여 2대 다테야마정이 되었고,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해군 비행장 건설과 관광업 진흥을 통해 복구되었다. 1933년 호조정과 합병하여 다테야마호조정이 되면서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다테야마시의 일부이다. 주요 교통 수단으로는 철도(우치보선)와 국도, 그리고 과거에는 도쿄와 연결되는 기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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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889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으로 야와군에 초대 다테야마정이 성립되었다. 이후 1914년 도요쓰촌과 합병하여 2대 다테야마정이 되었고, 1933년에는 호조정과 합병하여 다테야마호조정이 되면서 폐지되었다.

2. 1. 전근대

전국 시대에 아와 국을 지배하던 사토미 씨는 다테야마 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테야마 성을 쌓고 본거지를 옮겼다. 성 주변에는 가신들의 거주지와 상인, 장인들이 모여 사는 조카마치(성하 마을)가 형성되어 다테야마 지역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에도 시대 초기인 1614년, 사토미 씨가 다스리던 다테야마 번이 영지를 몰수당하면서 성하 마을로서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그러나 도쿄 만 입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다테야마 만 연안은 에도로 향하는 배들이 잠시 머물거나 바람을 기다리는 중요한 정박지가 되었고, 해상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여러 번(藩)들이 다테야마에 짐 관리를 위한 관청을 두기도 했으며, 에도에 신선한 생선 등을 공급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1781년에는 이나바 마사아키다이묘가 되면서 소규모 다테야마 번이 다시 설치되기도 했으나, 번 행정의 중심은 주로 에도에 있었다.

2. 1. 1. 사토미 씨의 성하 마을 건설

다테야마 만 남동부(매의 섬의 동남쪽, 가시와자키에서 아라이에 걸친 해역)는 수심이 깊고 서풍을 피하기 좋아 예로부터 정박지로 이용되었다. 전국 시대의 사료에는 "구스미시타"나 "아라이노시마"로, 에도 시대에는 "다카노시마 항"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국 시대에는 아와 국을 지배했던 전국 다이묘 사토미 씨 수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80년(덴쇼 8년), 사토미 요시요리는 이 해역이 내려다보이는 독립된 언덕에 다테야마 성을 쌓았다. 현재 시로야마(城山)라고 불리는 이 언덕에는 사토미 씨가 성을 쌓기 전에도 성이나 요새가 있었으며, 여기서 '다테야마'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즉, 다테야마라는 지명은 이 언덕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1591년(덴쇼 19년), 사토미 요시야스는 사토미 씨의 본거지를 다테야마 성으로 옮겼다(다테야마 번 참조). 그는 성 주변에 가신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그 북쪽에는 상인과 장인들을 모아 바다에 접한 조카마치(성하 마을)를 형성했다. 다테야마 조카마치는 마쿠라 향(馬喰郷) 중 하마방(浜方)에 있던 아라이우라(新宿浦)와 구스미우라(楠見浦)의 땅 일부를 나누어 조카마치(上町), 나카마치(中町), 시모마치(下町) 세 마을로 마을 나누기를 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라이마치(新宿町)"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한 뒤 세 마을로 나뉜 것으로 여겨진다.

1601년(게이초 6년), 사토미 요시야스는 성 아래의 아라이마치와 호조마치의 시장 외에서의 거래를 금지하고, 다른 지역 상선의 아라이마치 외 기항을 금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상인들이 반강제적으로 조카마치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후 규제가 완화되고 여러 세금 면제 정책이 시행되면서, 아라이마치 서쪽에 위치한 구스미마치(楠見町)나 아라이마치와 호조마치 사이의 나가스카마치(長須賀町) 등이 마을로 발전하게 되었다.

2. 1. 2. 항구 도시로서의 발전

게이초 19년(1614년)에 사토미 씨가 다스리던 다테야마 번이 영지를 몰수당한 후, 이를 대체할 만한 큰 영주가 나타나지 않아 다테야마가 성 아랫마을(성하 마을, 城下町)로서 발전하는 것은 멈추었다. 그러나 도쿄 만 입구에 위치한 다테야마 만 연안은 바람을 기다리는 배(회선, 廻船)들이 정박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모리오카 번이나 센다이 번 등은 다테야마 마을에 짐 관리를 위한 관청을 두기도 했다. 또한 에도에 신선한 생선과 말린 정어리 찌꺼기(간시, 干鰯)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다테야마는 상인, 장인, 어부, 운송업자 등이 자립적으로 운영하는 마을로 유지되었으며, 서쪽의 가시와자키 우라에서 다테야마, 나가스카(那古宿), 신주쿠(新宿), 호조(北条)에 이르기까지 약 4km에 걸쳐 마을이 형성되었다.

에도 시대 다테야마는 '다테야마 삼정 사포(館山三町四浦)'라 불리는 8개 마을과 기타시타다이 촌(北下台村)으로 구성되었다. '다테야마 삼정 사포'는 다테야마 가미마치(館山上町), 나카마치(館山仲町), 시타마치(館山下町)의 세 마을(三町)과, 우라가타(浦方)라고 불린 아라이 우라, 구스미 우라, 하마가미스카 촌, 오카가미스카 촌의 네 포구(四浦)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8개 마을과 기타시타다이 촌은 총 11개 마을로 이루어진 대촌인 마쿠라 촌의 일부였다.

덴메이 원년(1781년)에는 이나바 마사아키가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이묘가 되면서, 1만 석 규모의 소번(小藩)으로 다테야마 번이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번사의 대부분은 에도의 번 저택에 근무했고, 번 행정의 중심도 에도에 있었다. 2대 번주 이나바 마사타케는 성산(城山) 기슭에 진야를 짓고 번사들의 저택 부지도 마련했다.

2. 2. 근대

1889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으로 야와군에 다테야마정 (초대)이 성립하였다. 이후 1914년 4월 1일에는 도요쓰촌과 합병하여 새로운 다테야마정(2대)이 설치되었다. 1933년 4월 18일, 다테야마정(2대)은 호조정과 다시 합병하여 다테야마호조정이 되었고, 이로써 다테야마정은 폐지되었다.

2. 2. 1. 다테야마정 (초대)

1877년(메이지 10년), 이전의 다테야마 8개 마을(다테야마 3정 4포와 기타시타다이)에 해당하는 지역이 합병하여 다테야마 정이 되었다. 이 중 가미스카촌은 1875년(메이지 8년)에 하마가미스카촌, 오카가미스카촌, 기타시타다이가 먼저 합병된 상태였다.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다테야마와 도쿄 사이에 기선 운행이 시작되었다. 다테야마의 다쓰노 야스고로가 도쿄 니혼바시의 어물 상인 지원을 받아 설립한 "안전사"가 증기선 "쓰우카이마루"(60ton)를 취항시켜 여객과 화물(다테야마의 해산물, 도쿄의 일용품)을 수송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야와군 다테야마정 (초대)이 공식적으로 성립하였다.

1914년(다이쇼 3년) 4월 1일, 도요쓰촌과 합병하여 새로운 다테야마정(2대)이 설치되면서 초대 다테야마정은 폐지되었다.

2. 2. 2. 다테야마정 (2대)

1914년(다이쇼 3년) 4월 1일, 기존의 다테야마정(초대)이 서쪽에 인접한 도요쓰촌과 합병하여 새로운 다테야마정(2대)이 발족했다.

1923년(다이쇼 12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다테야마정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정내 가옥의 99%가 붕괴되거나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해안 지형이 융기하면서 다테야마 잔교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변 다른 마을들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지진 피해로부터 복구하는 과정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관광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1930년(쇼와 5년)에는 간토 대지진으로 융기된 얕은 여울(미야기·가시와자키와 다카노시마·오키노시마 사이)을 활용하여 일본 해군의 다테야마 비행장(현재 해상자위대 다테야마 항공기지)이 건설되었고, 다테야마 해군 항공대가 배치되었다. (덧붙여, 비행장 건설에 따라, 그 전까지 다카노시마에 있던 농림성 수산강습소(도쿄 해양대학의 전신 중 하나) 다카노시마 실험장이 고미나토로 이전했다.) 이후 다테야마는 군사 도시로서의 성격도 갖추게 되었다.

1933년(쇼와 8년) 4월 18일, 다테야마정(2대)은 북쪽에 인접하며 철도역(아와호조역)이 있는 호조정과 합병하였다. 두 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자치단체를 설립하는 신설 합병 방식을 택했으며, 새로운 정 이름은 두 지역의 이름을 합쳐 '다테야마호조정'으로 정해졌다. 이 합병으로 다테야마정(2대)은 폐지되었다.

2. 3. 행정 구역 및 자치체 연혁

3. 지리

현재 다테야마시는 시 전체를 10개 지구로 나누고 있으며, 옛 2대 다테야마정 구역을 "다테야마 지구"로 부른다. 다테야마 지구의 동쪽은 초대 다테야마정, 서쪽은 옛 도요쓰촌에 해당한다.

초대 다테야마정 구역은 현재의 이나 대자로는 '''다테야마'''(たてやま), '''가미사나구라'''(かみさなぐら), '''시모사나구라'''(しもさなぐら)에 해당한다. 대자 다테야마는 대략 현재 다테야마역 남쪽의 다테야마성 방면 지역이다. 가미사나구라와 시모사나구라는 대자 다테야마의 동쪽, 시오이리강 중류 양쪽에 펼쳐진 지역으로, 본래 농업 지역이었다. '사나구라'라는 지명은 오래되었으며, 중세 기록에는 "실창(実倉)"으로 나타나 당시 곡창 지대였음을 시사한다. 에도 시대에는 초대 다테야마정 구역 전체가 "사나구라촌"으로 묶여 있었다.

도요쓰촌 구역에는, 동쪽부터 '''누마'''(ぬま)・'''가시와자키'''(かしわざき)・'''미야기'''(みやぎ)・'''가사나'''(かさな)・'''오오카'''(おおか)의 대자가 있으며, 1923년 시점에서 다테야마정(2대)에 대자는 합계 8개 있었다. 관동 대지진 후, 누마에서 오오카까지의 해안이 융기한 것을 이용하여 매립이 이루어져, 해군 다테야마 비행장이 설치되었다(현재는 해상자위대 다테야마 항공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매립지에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후지미(ふじみ)라는 대자가 명명되었다. 또한 가시와자키는 누마에 편입되었으며, 현재의 대자로는 남아 있지 않다(다테야마 가시와자키 우편국의 명칭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매립으로 인해, 누마 지구의 앞바다에 있던 다카노 섬(鷹ノ島)과, 오오카 지구의 앞바다에 있던 오키노 섬이 육지로 이어졌다. 또한, 다카노 섬과 오키노 섬은 대자 다테야마에 속해 있다.

4. 교통

(내용 없음)

4. 1. 철도

과거 일본국유철도 (현재 동일본 여객철도)의 우치보선 (구 기사라즈선)이 지나간다.

현재 JR 동일본 우치보선다테야마역은 구 호조정 지역에 위치한다. 다테야마역은 1919년에 '''아와호조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업했으며, 1946년에 현재의 이름인 다테야마역으로 변경되었다.

4. 2. 도로

4. 3. 항로


  • 다테야마항


1878년(메이지 11년), 도쿄(레이간섬)와 다테야마 간에 "안전사(安全社)"의 기선이 처음으로 취항했다. 이후, 후나카타촌 출신의 마사키 테이조가 설립한 아와 기선 회사(초기에는 "호조 기선(北条汽船)", 이후 아와 공립 기선 회사로도 불림)를 비롯한 여러 회사가 도쿄-다테야마 항로에 뛰어들면서 치열한 화물 및 승객 유치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과도한 운임 인하 경쟁으로 인해 안전사와 아와 기선 회사 모두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안전사는 보유 기선을 내국통운(현재의 일본통운)에 매각하고 해산했으며, 아와 기선 회사 역시 파산을 겪은 뒤 1887년(메이지 20년)에 제2회 아와 기선 회사로 재건되었다.

1889년(메이지 22년), 아와 기선 회사(제2 보슈 기선)와 내국통운 등 도쿄만 내에서 기선을 운항하던 4개 회사가 사업을 통합하여 도쿄 만 기선 회사(현재의 도카이 기선)를 설립했다.

메이지 시대에 기선 직행편은 도쿄와 다테야마를 5시간 만에 연결했다. 또한,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해수욕이 인기를 끌면서, 가가미가우라(다테야마 만) 일대가 관광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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