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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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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2월 23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접 선거로 치러졌다. 박정희가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2,357표를 얻어 당선되었으며, 이 선거는 야당 후보가 배제된 채 형식적으로 진행되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거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 사실상 공개 투표, 투표 용지의 문제 등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으며, 이는 10월 유신 이후 권력 집중과 야당 탄압으로 이어진 유신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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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
지도
선거 정보
국가대한민국
국기 연도1949
선거 유형대통령
투표 방식선거인단
이전 선거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71년
선거일1972년 12월 23일
다음 선거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78년
선거인단재적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수 2,359명
당선 필요 득표수1,180표
후보
후보 1박정희
소속 정당 1민주공화당
득표수 12,357
득표율 199.92%
선거 결과
당선자박정희
당선자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선거 전 대통령박정희
선거 전 대통령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선거 후 대통령박정희
선거 후 대통령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기타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접견
박정희 대통령
197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결과 지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득표 현황 지도

2. 배경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통해 3선에 성공하여 장기 집권했으며, 10월 유신을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 선거 제도로 헌법을 개정했다.[1]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 등 행정구역 단위를 선거구로 하여 전국을 1,630개 구로 나누었다. 농촌에서는 소선거구제를, 도시 지역에서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인구 20,000명을 기준으로 1인에서 5인까지 대의원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의 대의원 정수는 2,359명이었다.[1]

3.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972년 12월 15일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6] 전국 1,630개 선거구에서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정당 후보 출마가 금지되어 모든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다.[2]

전국 2,359석에 5,876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여 2.5:1의 경쟁률을 보였고, 투표율은 70.3%였다.[6] 당선자들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유명 인사로, 기업인, 농업인, 새마을 운동 참여자, 정·재계, 학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법조계, 군 출신 인사 등이 포함되었다. 구자경 럭키화학 사장, 박두승 대한상의회장, 조중훈 KAL 사장, 박병규 해태제과 사장 등 재벌급 인사들과 박종화 예술원 회장, 배우 신영균, 임영신중앙대학교 총장 등 문화계와 학계 인사들도 많았다. 임영신, 기세풍, 엄대섭 전 의원 등 은퇴 정치인과 박동규 전 재무부 장관 등 관료 출신도 있었다.[6]

3. 1. 지역별 결과

지역선거인 수투표율 (%)유효표대의원 수
서울3,113,76757.01,702,369303
부산941,88468.2622,823104
경기1,664,44769.41,123,083280
강원788,27679.9613,395145
충북602,55476.6447,557127
충남1,278,74372.3900,402231
전북1,092,51676.7810,011200
전남1,636,38271.81,138,441312
경북1,970,64776.51,457,409354
경남1,339,58377.51,009,869278
제주170,81881.1135,24225
합계14,599,61770.49,960,6012,359


4. 대통령 선거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3]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 간 대통령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곽상훈 등 515명의 대의원의 추천으로 등록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하게 입후보하였다.[7] 박정희는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2,359표 중 2,35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3] 무효표는 2표였으며,[3] 그 중 하나는 송동헌 대의원이 독재에 항의하는 의미로 "박정의"라고 기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박정희민주공화당2,357100%
무효2
합계2,359



더불어민주당은 이 선거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며,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4. 1. 선거 과정의 문제점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정당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치러져 모든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했다.[2] 후보 단일화 과정과 사실상 공개 투표 방식은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앙정보부의 개입 의혹도 제기되었다. 송동헌 당시 충남 대전시 제1선거구 대의원은 중앙정보부가 대의원들에게 백지를 나눠주고 주소와 성명을 쓰게 하여 글씨체와 지문을 파악하려 했다고 증언했다.[8]

투표 용지 자체도 문제였다. 엽서 크기의 빳빳한 용지 전면에는 금박으로 '제8대 대통령 투표용지'라고 인쇄되어 있었고, 이면에는 '박정희' 이름을 쓰도록 흰 여백만 있었다. 이는 반대 의사 표시를 어렵게 만드는 구조였다.[8] 이러한 상황에 항의하며 송동헌 대의원은 '박정희' 대신 '박정의'라고 적었다고 밝혔다.[8]

당시 투표장 안에서는 선관위 직원들이 대의원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일부 대의원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박정희'라고 쓰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공개 투표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8]

결과적으로 야당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2,359표 중 2,357표를 얻어 당선되었지만,[3] 이러한 선거 과정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5. 결과 및 영향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모여 1명의 결석도 없이 투표를 진행했다.[7] 박정희는 2,357표를 얻어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4선에 성공하며 유신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당시 충남 대전시 제1선거구 대의원이었던 송동헌은 훗날 두 무효표 중 하나가 자신의 표였다고 밝혔다.[8] 그는 투표용지에 '박정희' 대신 '박정의'라고 적었는데, 이는 유신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박정희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고 한다.

송성빈의 저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대의원들에게 사전에 백지에 주소와 성명을 쓰게 하여 글씨체와 지문을 파악했고, 투표장 안에서는 선관위 직원들이 대의원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사실상 공개 투표가 이루어졌다.[8]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당시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이 선거 결과로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인권 탄압이 심화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선거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하며,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사건은 1970년대 내내 민주화 운동이 지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는 왜 나왔을까 - 매일경제 https://www.mk.co.kr[...] 2018-11-14
[2] 웹사이트 99.9% 박정희 옹립한 북한식 거수기들, 그 실체는… http://www.pressian.[...] 2016-06-08
[3] 간행물 Korea Annual, 1978 Hapdong News Agency
[4] 서적 Democratic Development in East Asia Psychology Press 2005
[5] 간행물 Stories Behind 1972 Presidential Election: Indirect Election, Told By Then-Deputy Song Dong-heon Study of Home Province, South Chungcheong Home Province Research Association
[6] 저널 Purification of human red cell glucose 6-phosphate dehydrogenase by affinity chromatography https://www.ncbi.nlm[...] 1975-11-26
[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8] 저널 제8대 대통령 선거 비화 : 체육관대통령선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송동헌의 육성기록을 통해보다 충남향토연구회 20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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