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신
1. 개요
임영신은 1899년 금산군에서 태어나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1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며 여성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총장, 한국부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및 사회 활동에도 기여했다. 1977년에 사망했으며, 중앙대학교 교정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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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승당 임영신 |
|---|---|
| 로마자 표기 | Im Yeong-sin |
| 영문 이름 | Louise Yim |
| 출생일 | 1899년 11월 20일 |
| 출생지 | 금산, 대한제국 |
| 사망일 | 1977년 2월 17일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
| 직책 |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 |
|---|---|
| 임기 시작 | 1948년 8월 |
| 임기 종료 | 1949년 |
| 소속 정당 | 무소속 |
| 국회의원 | 제헌 국회의원 |
| 학교 |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
|---|---|
| 전공 | 교육학 석사 |
| 직업 |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가, 사회운동가, 저술가 |
|---|---|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 배우자 | 한순교(이혼) |
| 부모 |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어머니 김경순(金敬順) |
| 형제 | 임태희(남동생) |
| 친인척 | 임철순(조카), 유진산(사돈) |
| 주요 경력 | 대한여자국민당 총재 |
|---|---|
| 상공부 장관 서리 임기 | 1948년 8월 4일 ~ 1948년 8월 15일 |
| 초대 상공부 장관 임기 | 1948년 8월 15일 ~ 1949년 6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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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총장 -
이재철 (1923년)
이재철은 대한민국의 법학자, 교육자, 공무원으로, 외무부 입부 후 과학기술처 차관, 교통부 차관을 역임하고 인하대학교, 국민대학교,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한국해양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했고 황조근정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
대한여자국민당의 정치인 -
박현숙 (1896년)
박현숙은 숭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정 시기 임시 입법 의회 의원과 자유당,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4대 및 제6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대한여자국민당의 정치인 -
이은혜 (교육인)
이은혜는 대한민국의 교육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이화학당 교사, 대한여자국민당 부당수, 기독교 권사로 활동하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옹호하고 이승만을 지지했다. -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동문 -
최명희
최명희는 1980년 등단하여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혼불》로 주목받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동문 -
조수진 (정치인)
2. 생애
임영신은 1899년 금산군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여성 YMCA에서 활동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운영했다.
1945년 광복 후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국제 연합에서 한국 대표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독립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 1948년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으며, 1949년 제헌 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3년부터 중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교육계에 헌신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고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다. 1972년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77년 사망하여 유해는 중앙대학교 교정에 안장되었다.
2.1. 생애 초반
임영신은 1899년 금산군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백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몰래 학교를 다녔고, 1914년 심광소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전주시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일본 내지의 히로시마 기독 여자 전문학교에서 수학했고,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공주시의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2.1.1. 출생과 가계
승당(承堂) 임영신은 1899년 11월 20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아버지 풍천 임씨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金敬順)의 열두 남매 중 다섯째, 딸로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구환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으며, 금산의 명문거족인 김해 김씨와 인척관계였다.
임영신의 선조 임온(任溫)은 중국 원나라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출신으로, 고려에 와서 은자광록대부를 지냈다. 임온의 6대손 임주가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로 와서 정착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주의 아들 임자송의 6대손 임원준, 임사홍 부자와, 임자순의 8대손 임유겸, 9대손 임권, 임추 등을 배출하였다.
임영신의 7대조 때 금산군으로 낙향하였으나 가세는 기울었고, 아버지 임구환 대에 이르기까지 6대 독자로 겨우 이어왔다. 임구환은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라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임구환은 '할머니의 중매로 5년 연상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게 해 달라고 오래 기도하여 오빠 상희(尙熙), 양희(亮熙), 건희(建熙), 언니 선유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다섯째인 임영신이 태어났다. 그 뒤로도 남동생 춘희(春熙), 여동생 영애(永愛), 남동생 태희(泰熙), 여동생 영실(永實)과 영선(永善)이 태어났다.
임영신은 12남매 중 둘째 딸이다. 둘째 오빠는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 어머니: 김경순(金敬順)
* 남동생: 임태희(任泰熙)
* 남편: 한순교(1939년 미국에서 결혼하였으나 1940년 임영신 혼자 한국으로 돌아옴)
* 조카 : 임철순(任哲淳, 둘째 오빠의 아들로 중앙대학교 제2대 총장이다.)
2.1.2. 소녀 시절
임영신은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임구환은 동학 농민 운동, 러시아와 일본의 동전 유입 등 시사 이야기를 들려주며 딸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 임구환은 백인선교사들을 집으로 데려왔는데, 임영신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학업보다는 결혼을 강요했고, 이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영신은 몰래 담을 넘어 학교에 계속 다녔다. 키가 커서 금방 눈에 띄었고, 이 사실이 동네에 알려지면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1914년 심광소학교를 졸업했다.
2.2. 학창 시절
1899년 금산군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1년 12세 무렵, 일본으로 강제 결혼을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모가 정해준 혼사를 거절하였다. 중매쟁이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제 인생은 제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는 어려서 중매하러 온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 '제 인생은 제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자기 주관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그는 시집가는 대신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해달라고 부모를 졸라 뜻을 이루었다.
소학교 시절, 언니 임선유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말을 듣고 언니에게 굶고 매일 울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조언대로 언니는 매일 울거나 굶어 수척해졌고, 결국 결혼은 파혼되었다. 이후 언니 선유는 목사의 아들인 최용환과 결혼하였다.
2.2.1. 청소년기
1911년 일본으로 강제 결혼을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2세의 나이에 부모님이 정해준 조혼을 거부했다. 중매쟁이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제 인생은 제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며 주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임영신의 태도는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결혼 대신 상급 학교 진학을 선택하여, 1914년 전주의 기전여학교에 진학하였다. 기전여학교 재학 시절, 기독교인 여학생 모임을 주도하며 신앙 활동을 하였다. 또한, 교사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며, 친구들과 함께 동국역사를 필사하는 등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2.2.2. 일사립 기전여교 재학 시절
1914년 기전여고 2학년 시절 친구 오자현 등과 함께 항일 자살특공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고, 명칭을 자살대(自殺隊)라고 하였다. 첫 번째 모임에서 행동을 결정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일본 국가를 부르고 일본 황제의 사진 앞에 절하게 했다. 임영신과 자살대원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매일 아침마다 행해지는 여학생들의 거부 행위에 일본인 교사들은 분노하고 당황해했다. 얼마 뒤 기전여고 내에 자살대 소문이 확산되었다.
임영신은 학교 각 교실마다 일본 천황의 사진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새벽에 친구들과 뾰족한 나무 연필을 가지고 교실 창문으로 비밀리에 들어가 모든 교실에 붙어 있는 일본 천황 사진의 눈에 구멍을 냈다. 그날 아침 조회에서 이를 발견한 일본인 선생들은 분개하여 교장인 미스 골든 선교사에게 항의하였다. 임영신과 자살대 회원들은 스스로 한 일이라고 밝혔고, 주모자를 찾을 수 없던 미스 골든은 이들을 기숙사로 보냈다.
2.2.3. 항일 동맹 휴학 활동
1915년 친구 오자현 등과 항일 자살특공대 '자살대'를 조직하여, 일본 국가 제창과 천황 사진 훼손 등의 저항 활동을 하였다.
2.2.4. 쓰개치마 거부 운동
1915년 기전여학교 재학 중, 임영신은 교내에서 한국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착용하던 쓰개치마 착용을 거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여학생들은 외출 시 반드시 쓰개치마를 착용해야 했는데, 임영신은 이를 불합리한 관습으로 여겨 폐지를 주장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그는 정학 처분을 받았고, 그의 친구들 역시 퇴학당했다.
이에 임영신은 퇴학당한 친구들의 복학을 요구하며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그는 학생들을 설득하여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교장에게 친구들의 복학을 허가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학교 측은 결국 퇴학 조치를 철회하고 학생들을 복학시켰다.
임영신의 쓰개치마 거부 운동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6년에는 전국적으로 쓰개치마를 착용하지 않는 여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쓰개치마 미착용 관습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여성의 복식 자유를 확대하고, 불합리한 전통 관습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3. 일제 강점기 활동
1916년 7월 기전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금산의 집으로 돌아갔다. 임영신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학교에 다니겠다는 내 고집으로 부모님께 이와 같은 모욕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한 데에 죄책감을 느꼈다. 동리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나는 옳지 못한 여자였으며 그들은 내가 정신적으로 잘못된 데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채소 밭에 간다 던 지 집 근처 들을 산책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남산에 올랐는데 거기에는 우리 집 뽕 밭이 있었다. 나는 숨어버리고 싶었다."
1916년 8월 다시 전주로 올라갔다. 3학년 2학기 무렵 교목 김목사는 우수한 성적의 여학생들과 국내 명문가의 자제들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임영신은 '한국의 딸들을 결혼 시키는 전통적 풍습의 야만성을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임영신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여성 YMCA에서 활동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운영했다.
2.3.1. 고교 졸업
1917년 고향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 혹은 생계로 고향을 떠났지만, 임영신의 집은 지역 유지였던 덕에 무사하였다. 오히려 임영신이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딸들을 학교로 보내는 것이 고향 마을에도 점차 확산되었다. 4학년 2학기 무렵 일본인들이 조선인 청년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임영신은 한국인 지하 활동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접하기도 했다. 1918년 3월 20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학교 동료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와 시학관을 골탕 먹이기 위해 조직했던 자살대를 공식 해체하였다.
2.3.2. 일본 유학 생활과 감시
1919년 11월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 열차편으로 부산에 도착,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 히로시마로 갔다.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 입학, 그는 게인스(Gaines)와 샤론(Sharon)이라는 수녀들을 만났다. 그러나 일본 형사들은 계속 연락을 취하며 밀착하여 그를 감시하였다. 이때 일본인 동기로부터 일본 여자와 한국 여자의 차이점을 듣게 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인 여자들은 우리 한국 여자와는 대단히 달랐다. 그들은 혼전에는 우리보다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우리들보다 덜 자유로웠다. 그들은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천황에게 미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생아를 생산해도 좋다고 격려까지 받고 있었다. 그들의 잡담에는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기생을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토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그들의 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세밀했으며 그것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일본 여자라고 해서 내가 만난 여자가 전부 관능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략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로서 인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몇 년 안 되어서 독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2.3.3. 영명학교, 이화학당 교사 생활
1921년 히로시마 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선교사 친구인 메리 쉐라(Mary Shearer)의 도움으로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교사가 되었고, 그해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로도 출강하였다. 1921년 4월, 금산 주민들의 요청으로 딸 9명을 선발하여 영명여학교에 입학시키고 생계를 지원하였다. 공주군 영명여학교 재직 중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을 하였다.
1921년 10월 공주 YMCA 청년회 강연에서 "우리들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여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경찰이 강연을 제지하려 하자 청중들은 저항하였고, 이 사건으로 공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쉐라 부인의 책임 하에 석방되었다. 경찰은 교사 증을 압수하며 재발 시 종신 수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며칠 뒤 경찰은 그가 아직 집행 유예 상태임을 확인했고, 이로 인해 도지사, 공주 시장, 공주 교육 국장이 해임되었다. 쉐라 부인의 배려로 영명여학교 병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1922년 영명여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1924년 이화학당 교사로 복직하였다.
2.3.4. 미국 생활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요코하마에서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한 현장 사진과 사망자 명단을 입수, 이승만에게 전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LA에 있던 오빠 임양희와 함께 이승만이 투숙하고 있던 호텔로 찾아가 자료들을 전달했다. 임영신은 이 자료들을 서방 언론에 폭로하면 열강들의 도움으로 곧바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승만은 앞으로의 독립 투쟁은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영신은 이승만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 국민 주권, 외교를 통한 독립 달성이라는 견해에 공감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 허정, 박마리아, 이원순 등을 만나 오랫동안 이승만을 보좌했다.
둘째 오빠 임양희에게서 여비를 받아 그래머시 플레이스(Gramercy Place)의 노인 요양원에 취직하여 노인을 돌보았다. 그 뒤 기초부터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래머시 플레이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미국 교포 사회에는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가 대립하였는데, 임영신은 안창호에게 편견이 없어 동지회와 국민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양측의 시각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매료되어 그를 지지하였다. 1925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편입하였고, 동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1931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2.4. 광복 이후
임영신은 해방 후 1945년 10월에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으며,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국제 연합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1948년 8월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뇌물수수 사건으로 기소되어 같은 해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49년 제헌 국회 안동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한국 여성 최초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0년 제2대 총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1952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2.7%의 득표율로 7위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1950년 2월 상공일보 사장, 1952년 여성계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계에도 진출했다.
2.4.1. 광복 직후
1945년 9월 이은혜, 김활란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에 설치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 의원을 지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조국으로 환국하자, 대한여자국민당의 부당수 이은혜 등과 함께 그의 거처인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이승만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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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무렵 이승만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이 소문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던 것이다. 이러한 소문들로 인하여 프란체스카는 그녀를 냉대하였고 돈암장 출입이 자제되었다.
1945년 가을, 임정의 지하조직원 여성인 황현숙 등과 함께 전국 각지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방문하며 미군정에 대한 우호적인 강연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였으며, 세계 상황에 대한 개요,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 민주주의 하에서의 개인의 권리 및 종교적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이유 등을 설명하였다.
2.4.2. 독립을 위한 UN 활동 (1945~1948)
1946년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자 신분으로 총회에 참석하여, 엘리너 루스벨트, 폴 헨리 스파크 유엔 총회 의장,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 등에게 한국 문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중국과 필리핀 대표단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나, 미국과 소련 대표단은 한국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승만의 유엔 외교 활동을 지원하고, 국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힘썼다.
2.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5년 9월, 이은혜, 김활란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0월에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지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대한여자국민당 부당수 이은혜 등과 함께 돈암장을 자주 방문하며 이승만을 도왔다. 그러나 이승만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냉대를 받았고, 돈암장 출입이 자제되었다. 이 소문은 이승만이 미국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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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가을, 임영신은 임시정부 지하조직원 여성인 황현숙 등과 함께 전국 고등학교들을 방문하며 미군정에 대한 우호적인 강연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를 촉구하고, 세계 정세,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 민주주의 하에서의 개인 권리와 종교 자유, 민주주의 채택 이유 등을 설명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국제 연합에서 한국 대표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독립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
2.5.1. 상공장관 재직 중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에 의해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상공장관 재직 중 중앙대학교로 학교를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중앙대학을 종합 단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중앙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48년 11월 대한여자국민당과 지청천의 대동청년단을 흡수하고, 윤치영 등을 참여시켜 대한국민당을 창당했다. 이후 지청천, 신익희 계열의 이탈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으나 윤치영과 함께 당을 유지해 나갔다.
1949년 정현모의 경상북도 도지사 취임으로 공석이 된 안동시 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당수로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 선거에서 장택상을 이겨 화제를 모았으며, 서울에 주소를 둔 원정 출마에다 남녀 성(性) 대결까지 펼쳐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여성 최초의 장관 경력 소유자인 임영신이 승리함으로써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였다.
1949년 5월 28일,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49년 6월, 의정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장관 직에서 사임하였다.
2.5.2. 국회의원 활동
1949년 정현모가 경상북도 도지사로 취임하면서 공석이 된 안동시 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임영신은 대한국민당 당수 자격으로 출마했다. 이 보궐선거에서 임영신은 장택상을 꺾고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다. 임영신과 장택상은 서울에 주소를 둔 원정 출마였고, 성(性) 대결까지 펼쳐져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여성 최초의 장관 경력을 가진 임영신이 승리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였다.
1949년 5월 28일, 임영신은 보궐선거 당시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49년 6월, 의정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장관직에서 사임하였다.
1949년~1950년 제헌 국회 의원을 지냈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1950년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임병직(단장), 장면, 장택상, 김동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1953년 빨치산 이현상이 사살되자, 동향 출신인 유진산과 함께 그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다.
2.5.3. 교육, 정치 활동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49년 6월 의정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장관직에서 사임하였다. 1949년~1950년 제헌의회 의원,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0년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임병직(단장), 장면, 장택상, 김동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1950년 1월 국회 부의장 윤치영과 함께 애치슨 라인을 한반도까지 확장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53년 2월~1961년과 1963년~1971년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1961년 이후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61년~1974년 한국부인회 회장, 1965년~1972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2.5.4. 야당 정치인 활동
1958년, 대한국민당이 해체되자 일시적으로 자유당에 복귀했다가, 1959년 11월 대한국민당의 후신으로 대한여자국민당을 다시 부활시키고 부통령 후보자로 추대됐다. 대통령 후보자로는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낙선하였다.
그 뒤 1960년 8월, 장면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친일 분자들의 망동과 일본의 흉계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결사반대했다.
2.6. 생애 후반
1950년 1월, 임영신은 국회 부의장 윤치영과 함께 애치슨 라인을 한반도까지 확장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2월에는 상공일보사 사장에 취임했고, 그해 6월 22일 한국 전쟁 직전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뉴욕에 체류했다. 이승만의 급보로 소환되어 전시 내각에 참여했다. 1952년에는 여성계사 사장을 맡는 등 언론계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53년 2월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중앙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61년 11월에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그 외에도 대한여자청년단 단장(1961년~), 한국부인회 회장(1961년~1974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1965년~1972년), 세계교직자연합회장(1966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1969년)을 역임했다. 이은혜, 박마리아 등 우익 성향의 여성 인사들과 함께 대한여성청년단을 운영하고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예비후보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단독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56년에도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자유당 내 이기붕 계열이 성장하면서, 임영신은 윤치영, 이범석, 이윤영 등과 함께 이승만의 곁에서 밀려나 배척당했다. 이후 윤치영과 함께 친이승만 인사로서 이기붕 계열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데 가담했다.
2.6.1. 박정희 정권 지지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임영신은 이를 적극 지지하며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1963년 2월 윤치영, 정구영, 윤일선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총재고문에 선임되었다.
1963년 한국부인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65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이 되었다.
임영신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지지했으며, 1971년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2.6.2. 만년
1972년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에 취임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77년 2월 17일 사망하여, 유해는 중앙대학교 교정에 안장되었다.
3. 사상과 신념
임영신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적극 지지하며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친여 성향의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64년과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야당을 비판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1969년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본의 윤리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일본의 자결 문화를 죄악으로 여기고, 일본의 윤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를 가르친다"며 비판했다.
3.1.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 비교
한국 여성들은 비록 20세기까지 발언권과 참정권은 없었지만, 가정을 지배할 권리를 누렸다고 평가받는다. 한국 여성들은 정치적, 법적 권리는 없었어도 가정을 다스리고 남편의 상담 역할을 했다. 선덕여왕처럼 여왕이 나라를 다스린 적도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예술과 과학을 전국적으로 발전시키고 문학 연구를 확대했으며, 기사 제도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는 유럽에서 봉건 제도가 발전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또한 선덕여왕은 세계 최초의 천문대를 세우기도 했다.
반면 일본 여성들은 남편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와 같았다. 남자아이들까지도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하인에게 하는 말투로 명령했으며, 여자는 남자의 편리를 위한 도구였다. 부부 관계에는 거의 감정이 없었고, 아내는 남편과 가정 일에 대해 의논하거나 정상적인 사교 생활에 참여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임영신은 일본 여성들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일본 여성들이 혼전에는 자유를 누리지만 결혼 후에는 덜 자유롭고,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 사생아를 낳는 것도 장려되었다고 언급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일본 처녀들이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기생과 성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임영신은 이러한 일본의 성 윤리가 인력 증가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고 보았다.
3.2. 일본식 윤리에 대한 반감
기독교인이고 자결을 죄악으로 여긴 임영신은 일본의 윤리관에 반감을 가졌다. 일본의 윤리와 도덕이 일본 국민에게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임영신은 '일본의 아들들은 어린 시절부터 천황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어떻게 사람을 죽이며,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 하는 가르침을 받았다.'며 일본인들의 윤리가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알게 된 임영신은 한국 민족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5. 일화
1930년대에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자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임영신은 아내가 될 것인지, 동지로 남을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청혼을 거절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자신만의 주장인지, 아니면 다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불분명하다.
위의 구문에서 인용문2는 제거 대상 템플릿이다. 따라서 제거하고 다음과 같이 출력한다.
1930년대에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자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임영신은 아내가 될 것인지, 동지로 남을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청혼을 거절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자신만의 주장인지, 아니면 다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 ⋯ 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6. 역대 선거 결과
| | 당선 여부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
| 1949년 재보궐선거 (경북 안동을) | 당선 | 대한여자국민당 | ||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금산군) | 당선 | 대한여자국민당 | ||
| 1952년 부통령 선거 | 낙선 | 대한여자국민당 | 2.7% | |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금산군) | 낙선 | 대한여자국민당 | ||
| 1960년 부통령 선거 | 낙선 | 무소속 | 1% 미만 | |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영등포구 제4선거구) | 당선 | 무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