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댄 미트리오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댄 미트리오네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경찰 경력을 시작하여 리치몬드 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제 협력청(ICA)과 공공 안전 사무소(OPS)에서 일하며 브라질과 미국에서 훈련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9년 우루과이에서 OPS 공공 안전 고문으로 근무하던 중, 좌익 게릴라 단체 투파마로스에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고문 혐의와 관련하여 논란을 빚었으며, 영화와 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루과이에 거주한 미국인 - 비치 털러
    비치 털러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위키백과 도입부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 FBI 요원 - 멜빈 퍼비스
    멜빈 퍼비스는 1930년대 FBI 요원으로 활동하며 존 딜린저, 프리티보이 플로이드, 베이비 페이스 넬슨과 같은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체포 및 사살하는 데 기여했지만, 존 에드거 후버 국장과의 갈등으로 FBI를 사임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그의 죽음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암살된 외교관 - 더럼 스티븐스
    더럼 스티븐스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일본 외무성에서 일했으며, 대한제국 외부 고문으로 친일 행보를 보이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에게 피격되어 사망, 한국 역사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
  • 암살된 외교관 - 폴케 베르나도테
    스웨덴 왕족 출신 외교관이자 인도주의자인 폴케 베르나도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 포로 송환과 강제수용소 수감자 구출에 기여했으며, 전후 유엔 팔레스타인 중재자로서 휴전 성사에 힘썼으나 극단주의 단체에 의해 암살당했다.
댄 미트리오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댄 미트리오네
댄 미트리오네
본명대니얼 앤서니 미트리오네
출생1920년 8월 4일
출생지이탈리아
사망1970년 8월 10일
사망지몬테비데오, 우루과이
배우자헨리에타 린드
자녀9명
경력
리치먼드, 인디애나주 경찰서장1956년 – 1960년
공공 안전 사무국 수석 공공 안전 고문몬테비데오, 우루과이 1969년 – 1970년

2. 초기 생애 및 경력

댄 미트리오네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서 성장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시간 해군 기지에서 복무했으며, 헨리에타 린드와 결혼하여 아홉 자녀를 두었다.[2] 종전 후 1945년 리치몬드에서 경찰관이 되어 1956년 경찰서장으로 임명, 1960년까지 재직했다.[3]

2. 1. 출생 및 가족

댄 미트리오네는 조셉 미트리오네와 마리아 미트리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출생지는 이탈리아이다. 댄이 태어난 직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서 성장하였다.[1] 댄 미트리오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시간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던 중 헨리에타 린드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2]

2. 2. 경찰 경력

댄 미트리오네는 이탈리아에서 조셉 미트리오네와 마리아 미트리오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댄이 태어난 직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미트리오네는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 정착하여 성장했다.[1]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시간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면서 헨리에타 린드와 결혼했으며, 부부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2] 전쟁이 끝난 후, 리치몬드의 경찰관이 된 그는 1945년 순찰 경관으로 시작하여 1956년 리치몬드 경찰서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승진했으며, 1960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3]

3. 공공안전국(OPS) 경력

1960년, 댄 미트리오네는 국제 협력청(ICA)의 공공 안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이 프로그램은 1954년에 시작되어 전 세계 여러 국가의 민간 경찰에게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트리오네는 브라질벨루오리존치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며, 이후 ICA는 미국 국제 개발처(USAID)로, 경찰 지원 프로그램은 공공 안전 사무소(OPS)로 개편되었다.

3. 1. 국제협력청(ICA) 및 USAID 합류

1960년, 미트리오네는 국제 협력청(ICA)의 공공 안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1954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여러 국가의 민간 경찰에게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제공했다. 미트리오네의 첫 번째 근무지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대도시인 벨루오리존치였다. 미트리오네가 벨루오리존치에서 근무하는 2년 동안, ICA는 미국 국제 개발처(USAID)로 대체되었고, 경찰 지원 프로그램은 공공 안전 사무소(OPS)로 개편되었다.

1962년 미트리오네는 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하여 5년간 훈련 고문으로 근무했다. 1967년, 그는 미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OPS 국제 경찰 아카데미에서 2년간 가르쳤다.

3. 2. 브라질에서의 활동

1960년, 미트리오네는 국제 협력청(ICA)의 공공 안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1954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여러 국가의 민간 경찰에게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제공했다. 미트리오네의 첫 번째 근무지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대도시인 벨루오리존치였다. 미트리오네가 벨루오리존치에서 근무하는 2년 동안, ICA는 미국 국제 개발처로 대체되었고, 경찰 지원 프로그램은 공공 안전 사무소(OPS)로 개편되었다.

1962년 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하여 5년간 훈련 고문으로 근무했다. 1967년, 그는 미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OPS 국제 경찰 아카데미에서 2년간 가르쳤다.[1]

3. 3. 미국 복귀 및 교육 활동

1960년, 미트리오네는 국제 협력청(ICA)의 공공 안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1954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여러 국가의 민간 경찰에게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제공했다.[1] 미트리오네의 첫 번째 근무지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대도시인 벨루오리존치였다.[1] 미트리오네가 벨루오리존치에서 근무하는 동안, ICA는 미국 국제 개발처로 대체되었고, 경찰 지원 프로그램은 공공 안전 사무소(OPS)로 개편되었다.[1]

1962년, 미트리오네는 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하여 5년간 훈련 고문으로 근무했다.[1] 1967년, 그는 미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OPS 국제 경찰 아카데미에서 2년간 가르쳤다.[1]

4. 우루과이에서의 활동과 죽음

1970년 7월 31일, 투파마로스는 댄 미트리오네를 납치하여 정치범 150명의 석방을 요구했다.[9] 우루과이 정부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를 거부했고, 미트리오네는 나중에 차 안에서 머리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9] 납치 당시 미트리오네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회복 중이었고, 수감 중 치료 외에 다른 학대 징후는 없었다.[9]

프랭크 V. 오르티스는 자서전에서 미트리오네의 추모식에 참석한 일과 납치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10]

1987년, 투파마로스의 지도자 라울 센디크는 인터뷰에서 미트리오네가 폭동 진압 훈련을 시켰고, 학생 시위대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납치 대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문 혐의는 언급하지 않았으며,[11] 미트리오네의 죽음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투파마로 지도자들은 정부가 요구를 계속 거부할 경우, 미트리오네를 살해하는 대신 무기한 억류하기로 결정했었다.[11]

1970년 8월 7일, 우루과이 경찰은 투파마로 지도부가 있던 집을 급습하여 센디크 등을 체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트리오네를 살려두려는 계획을 알고 있던 대체 지도부도 체포되었다.[11] 센디크는 "체포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연락을 잃었고, 마감일이 다가왔을 때 미트리오네와 함께 남겨진 그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위협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11]

4. 1. 우루과이 부임 배경

1969년, 댄 미트리오네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OPS 공공 안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콜로라도당이 이끄는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 붕괴, 노동자와 학생들의 파업, 그리고 투파마로스라는 좌익 도시 게릴라 단체의 활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 연합'' 정부가 쿠바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것처럼, 우루과이에서도 좌익 연합인 ''프렌테 암플리오''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2] OPS는 1965년부터 우루과이 경찰을 지원하며 무기와 훈련을 제공해 왔다.

전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와 CIA 요원은 미트리오네가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 기술을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그는 몬테비데오 자택 지하실에서 전기 충격을 희생자의 입과 생식기에 가하는 등 가혹한 고문을 했다고 알려졌다.[3] 그의 신조는 "원하는 효과를 위해 정확한 고통을, 정확한 부위에, 정확한 양으로"였다고 한다.[4] 그는 또한 냉전의 맥락에서 미국에서 외국 경찰 요원들을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78년, 제11회 국제 청년 축제에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이중 스파이로 CIA에 잠입했다고 주장하는 쿠바인 마누엘 헤비아 코스쿠예야는 미트리오네가 노숙자들을 납치하여 고문 수업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7][5][6] 그는 각 희생자를 여러 고문 세션 동안 살려두려 했지만, 고문으로 결국 그들을 죽였고, 훼손된 시신을 거리에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미트리오네가 개인적으로 노숙자 4명을 고문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다.[7]

미트리오네의 포로들은 그를 "미트리오니 조끼"라고 알려진 고문 장치의 발명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8] 이 장치는 "심문 중에 가슴에 압력을 가하여 때로는 갈비뼈를 부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팽창식 조끼"로 묘사되었다.[8]

4. 2. 고문 연루 의혹

1969년, 미트리오네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OPS 공공 안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콜로라도당이 이끄는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 붕괴, 노동 및 학생 파업, 좌익 도시 게릴라 단체인 투파마로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워싱턴은 1970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 연합'' 정부의 쿠바 지원을 받은 승리와 유사하게, 좌익 연합인 ''프렌테 암플리오''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2] OPS는 1965년부터 현지 경찰을 지원하며 무기와 훈련을 제공해 왔다.

전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와 CIA 요원은 미트리오네가 몬테비데오 자택 지하실에서 전기 충격을 희생자의 입과 생식기에 가하는 등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 기술을 가르쳤다고 진술했다.[3] 그의 신조는 "원하는 효과를 위해 정확한 고통을, 정확한 부위에, 정확한 양으로"였다.[4] 그는 또한 냉전의 맥락에서 미국에서 외국 경찰 요원들을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78년, 제11회 국제 청년 축제에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이중 스파이로 CIA에 잠입했다고 주장하는 쿠바인 마누엘 헤비아 코스쿠예야는 미트리오네가 노숙자들을 납치하여 고문 수업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7][5][6] 그는 각 희생자를 여러 고문 세션 동안 살려두려 했지만, 고문으로 결국 그들을 죽였고, 훼손된 시신을 거리에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미트리오네가 개인적으로 노숙자 4명을 고문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다.[7]

미트리오네의 포로들은 그를 "미트리오니 조끼"라고 알려진 고문 장치의 발명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8] 이 장치는 "심문 중에 가슴에 압력을 가하여 때로는 갈비뼈를 부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팽창식 조끼"로 묘사되었다.[8]

4. 3. 투파마로스에 의한 납치 및 살해

1969년, 미트리오네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OPS 공공 안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콜로라도당이 이끄는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 붕괴, 노동 및 학생 파업, 좌익 도시 게릴라 단체인 투파마로스의 활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프렌테 암플리오와 같은 좌익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2]

전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와 CIA 요원은 미트리오네가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 기술을 가르쳤다고 진술했다.[3] 그의 신조는 "원하는 효과를 위해 정확한 고통을, 정확한 부위에, 정확한 양으로"였다.[4] 그는 냉전의 맥락에서 미국에서 외국 경찰 요원들을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쿠바인 마누엘 헤비아 코스쿠예야는 미트리오네가 노숙자들을 납치하여 고문 수업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했다.[7][5][6] 그는 미트리오네가 개인적으로 노숙자 4명을 고문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다.[7]

미트리오네의 포로들은 그를 "미트리오니 조끼"라고 알려진 고문 장치의 발명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8]

프랭크 V. 오르티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미트리오네의 추모식에 참석한 일과 납치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10]

4. 3. 1. 납치 및 살해 과정

1970년 7월 31일, 투파마로스는 댄 미트리오네를 납치하여 정치범 150명의 석방을 요구했다.[9]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루과이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이후 미트리오네는 차 안에서 머리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9] 납치 당시 미트리오네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회복되었고, 수감 중 치료 외에 다른 학대 징후는 없었다.[9]

1987년, 투파마로스의 지도자 라울 센디크는 인터뷰에서 미트리오네가 폭동 진압 훈련을 시킨 것과 학생 시위대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납치 대상이 되었다고 말했다.[11] 그는 고문 혐의는 언급하지 않았으며,[11] 미트리오네의 죽음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투파마로 지도자들은 정부가 요구를 계속 거부할 경우, 미트리오네를 살해하는 대신 무기한 억류하기로 결정했었다.[11]

1970년 8월 7일, 우루과이 경찰은 투파마로 지도부가 있던 집을 급습하여 센디크 등을 체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트리오네를 살려두려는 계획을 알고 있던 대체 지도부도 체포되었다.[11] 센디크는 "체포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연락을 잃었고, 마감일이 다가왔을 때 미트리오네와 함께 남겨진 그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위협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11]

4. 3. 2. 미트리오네의 죽음에 대한 논란

1969년, 미트리오네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OPS 공공 안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 붕괴, 노동 및 학생 파업, 좌익 도시 게릴라 단체인 투파마로스의 활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 연합 정부가 쿠바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것처럼, 우루과이에서도 좌익 연합인 프렌테 암플리오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2] OPS는 1965년부터 우루과이 경찰을 지원하며 무기와 훈련을 제공해 왔다.

전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와 CIA 요원은 미트리오네가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 기술을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여기에는 전기 충격을 희생자의 입과 생식기에 가하는 등의 행위가 포함되었다.[3] 그의 신조는 "원하는 효과를 위해 정확한 고통을, 정확한 부위에, 정확한 양으로"였다.[4] 1978년, 제11회 국제 청년 축제에서 쿠바인 마누엘 헤비아 코스쿠예야는 미트리오네가 노숙자들을 납치하여 고문 수업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했다.[7][5][6] 그는 미트리오네가 개인적으로 노숙자 4명을 고문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다.[7]

미트리오네의 포로들은 그를 "미트리오니 조끼"라고 알려진 고문 장치의 발명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8] 이 장치는 "심문 중에 가슴에 압력을 가하여 때로는 갈비뼈를 부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팽창식 조끼"로 묘사되었다.[8]

1970년 7월 31일, 투파마로스는 미트리오네를 납치하여 정치범 150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루과이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미트리오네는 나중에 차 안에서 머리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납치 당시 미트리오네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회복 중이었고, 수감 중 치료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학대 징후는 없었다.[9]

프랭크 V. 오르티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미트리오네의 추모식에 참석한 일과 납치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10]

1987년, 투파마로스의 지도자 라울 센디크는 인터뷰에서 미트리오네가 폭동 진압 훈련을 시켰고, 학생 시위대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납치 대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문 혐의는 언급하지 않았다.[11] 센디크는 미트리오네의 죽음이 의도적이지 않았으며, 투파마로 지도자들은 정부가 요구를 계속 거부할 경우 미트리오네를 살려두고 무기한 억류하기로 결정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70년 8월 7일 우루과이 경찰의 급습으로 센디크 등이 체포되었고, 이후 대체 지도부도 체포되면서 계획이 실행되지 못했다.[11]

5. 논란과 외교적 파장

댄 미트리오네 사건은 2008년 미국-우루과이 관계에서 계속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주 우루과이 미국 대사 프랭크 E. 백스터는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우루과이 민간-군사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저질러진 다른 범죄에 대한 우루과이 조사와 관련된 고위급 교환에 관여했는데, 이와 관련된 연계성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5. 1. 미-우루과이 관계에 미친 영향

미트리오네 사건은 2008년에도 미국-우루과이 관계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당시 주 우루과이 미국 대사였던 프랭크 E. 백스터는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우루과이의 민간-군사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저질러진 다른 범죄에 대한 우루과이의 조사와 관련된 고위급 교환에 관여했는데, 이와 관련된 연계성이 감지되었다고 전해진다.

5. 2. 고문 논란과 진실 규명 노력

댄 미트리오네 사건은 2008년에도 미국-우루과이 관계 내에서 계속해서 파장을 일으켰으며, 당시 주 우루과이 미국 대사였던 프랭크 E. 백스터는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우루과이의 민간-군사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저질러진 다른 범죄에 대한 우루과이의 조사와 관련된 고위급 교환에 관여했는데, 이와 관련된 연계성이 감지되었다고 전해진다.

6. 사후 평가 및 기념

닉슨 행정부는 대변인 론 지글러를 통해 미트리오네가 "질서 있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진보를 위한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며, 이는 "모든 자유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12] 그의 장례식에는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등이 참석하여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프랭크 시나트라제리 루이스는 인디애나주 리치먼드에서 미트리오네 가족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13]

6. 1. 미국 정부의 입장

닉슨 행정부는 대변인 론 지글러를 통해 미트리오네의 "질서 있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진보를 위한 헌신적인 봉사는 모든 자유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12] 그의 장례식은 미국 언론에 의해 널리 보도되었으며,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등이 참석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제리 루이스는 인디애나주 리치먼드에서 그의 가족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다.[13]

6. 2. 추모 행사

닉슨 행정부는 대변인 론 지글러를 통해 미트리오네의 "질서 있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진보를 위한 헌신적인 봉사는 모든 자유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12] 그의 장례식은 미국 언론에 의해 널리 보도되었으며, 특히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리처드 닉슨의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등이 참석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제리 루이스는 그의 가족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인디애나주 리치먼드에서 개최했다.[13]

7.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1972년 영화 계엄령은 댄 미트리오네의 납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

미트리오네의 납치와 처형은 우루과이 작가 Carlos Martínez Moreno|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모레노es의 소설 ''El color que el infierno me escondiera''의 줄거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제라르 드 빌리에가 1973년에 집필한 프랑스 첩보 소설 ''SAS 31: L'ange de Montevideo''는 투파마로스가 CIA 요원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원의 이름은 론 바버이지만, SAS 소설의 특징처럼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가상의 인물 론 바버는 우루과이에서 고문 강사였기 때문에 바버가 댄 미트리오네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7. 1. 영화 "계엄령"

1972년 영화 계엄령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작품으로 미트리오네의 납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

미트리오네의 납치와 처형은 우루과이 작가 Carlos Martínez Moreno|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모레노es의 소설 ''El color que el infierno me escondiera''의 줄거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7. 2. 기타 작품

1972년 영화 계엄령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작품으로 미트리오네의 납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

미트리오네의 납치와 처형은 우루과이 작가 Carlos Martínez Moreno|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모레노es의 소설 ''El color que el infierno me escondiera''의 줄거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제라르 드 빌리에가 1973년에 집필한 프랑스 첩보 소설 ''SAS 31: L'ange de Montevideo''는 투파마로스가 CIA 요원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원의 이름은 론 바버이지만, SAS 소설의 특징처럼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가상의 인물 론 바버는 우루과이에서 고문 강사였기 때문에 바버가 댄 미트리오네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1] 서적 Department of State Biographic Register. https://babel.hathit[...] 1970-06-01
[2] 웹사이트 Nixon: "Brazil Helped Rig the Uruguayan Elections", 1971 http://www.gwu.edu/~[...] 2002-06-20
[3] 웹사이트 Finding Gary, Part 2 http://www.browardpa[...] 2005-08-11
[4] 서적 Washington Bullets: A History of the CIA, Coups, and Assassinations Monthly Review Press 2020
[5] 웹사이트 Dan Mitrione, un maestro de la tortura https://www.clarin.c[...] 2001-09-02
[6] 서적 The Praetorian Guard: The U.S. Role in the New World Order https://books.google[...] South End Press 1991
[7] 웹사이트 Cuban 'Agent' Says U.S. Police Aides Urged Torture https://www.nytimes.[...] 1978-08-05
[8] 뉴스 Building a better thumbscrew https://books.google[...] 1973-07-19
[9] 간행물 The Mitrione Kidnapping in Uruguay https://www.rand.org[...] RAND Corporation 1987-08
[10] 서적 Ambassador Ortiz: Lessons from a Life of Servic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2005
[11] 뉴스 Uruguayan Clears Up 'State of Siege' Killing https://www.nytimes.[...] 1987-06-21
[12] 뉴스 Forever Missing Part 2 http://www.miaminewt[...] 2011-04-10
[13] 뉴스 Remembering Dan Mitrione: Ex-RPD chief's murder made international news 50 years ago https://www.pal-item[...] 2010-08-10
[14] 웹사이트 State of Siege: Their Torture, and Ours, by Mark Danner https://www.criterio[...]
[15] 간행물 American Foreign Service Association: Foreign service journal American Foreign Service Association 1969
[16] 문서 Langguth, p. 40
[17] 웹사이트 Nixon: "Brazil Helped Rig the Uruguayan Elections", 1971 http://www.gwu.edu/~[...] 2002-06-20
[18] 서적 'Determinants of gross human rights violations by state and state-sponsored actors in Brazil, Uruguay, Chile, and Argentina, 1960-1990 - Volume 59 of International studies in human right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999
[19] 문서 Langguth, pp. 285–7
[20] 웹사이트 Dan Mitrione, un maestro de la tortura http://www.clarin.co[...] Clarín (Argentine newspaper) 2001-09-02
[21] 웹인용 New Times (Broward-Palm Beach, FL, August 11, 2005) http://www.browardpa[...] 2016-05-08
[22] 웹사이트 Dan Mitrione, un maestro de la tortura http://www.clarin.co[...] Clarín (Argentine newspaper) 2001-09-02
[23] 문서 Langguth, p. 22
[24] 뉴스 Uruguayan Clears Up 'State of Siege' Killing http://query.nytimes[...] 1987-06-21
[25] 뉴스 Forever Missing Part 2 http://www.miaminewt[...] 2011-04-10
[26] 서적 'American Torture: From the Cold War to Abu Ghraib and Beyond.' Melbourne Univ. Publishing 2007
[27] 서적 Killing hope: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http://williamblum.o[...] Zed Books 2003
[28] 웹사이트 State of Siege: Their Torture, and Ours, by Mark Danner https://www.criteri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