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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쿠 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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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고쿠 국가론은 일본 중세사 연구에서 중요한 논쟁 중 하나로, 가마쿠라 막부를 독립적인 국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포함한다. 1950년대 재지영주제론을 통해 가마쿠라 막부를 봉건 국가 형성 과정으로 보았고, 1960년대 사토 신이치는 도고쿠를 기반으로 한 자립성을 강조하며 가마쿠라 막부를 '도고쿠 국가'로 규정했다. 이후 이시이 스스무는 단일 국가 기구 상정을 비판하고, 야마모토 히로나리는 가마쿠라 막부의 불간섭주의를 주장했다.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중세를 통괄하는 국가 모델로 제시되며, 도고쿠 국가론은 권문체제론과 비교하여 '관사청부제'와 '가업'의 논리를 통해 중세 국가를 설명하려는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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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쿠 국가론
도고쿠 국가론
저자다카하시 미쓰오마사
국가일본
장르역사서
서지 정보
발행고분켄
간행일1999년
ISBN4771009621

2. 학설사

도고쿠(東国, 동일본) 지역에 성립된 가마쿠라 막부를 서일본의 조정 중심의 '왕조 국가'(王朝国家)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중세 국가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왕조 국가와 가마쿠라 막부(도고쿠 국가)는 상호 규정적인 관계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걸었다고 본다.[12][1] 특히 싯켄 호조 도키요리가 친왕 쇼군을 맞이한 이후에는 서일본과의 상호 불간섭 및 자립을 지향했다는 '도고쿠 독립 국가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도고쿠 국가론은 일본 중세사 연구에서 중요한 논쟁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1950년대 이시모다 쇼 등의 재지영주제론이 막부를 봉건 국가 형성 과정으로 본 이후, 사토 신이치는 1949년 연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통해 도고쿠 행정권을 획득하며 막부가 국가적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6][2] 이후 1963년 구로다 토시오가 공가무가가 천황 아래 단일 국가 체제를 이루었다는 권문체제론을 제창하자, 사토는 이를 의식하며 가마쿠라 막부를 왕조 국가와 병립하는 '도고쿠 국가'로 명확히 규정하고, 두 체제 모두 관사청부제라는 공통 원리를 가졌다고 설명했다.[12][1][15]

그러나 사토의 이론에 대해 이시이 스스무 등은 중세 일본에 단일 국가 기구를 상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고,[20][3] 우와요코테 마사다카는 주에이 2년 10월 선지가 오히려 도고쿠 국가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24] 또한 막부를 독립된 '국가'로 볼 수 있는지, '관사청부제'만으로 국가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22][23] 야마모토 히로나리는 막부의 조정 불간섭주의를 주장했으며,[21][4] 이하라 케사오는 후대 가마쿠라 부의 사례를 들어 도고쿠의 완전한 독립성에 의문을 표했다.[9][10]

이러한 논의 속에서 고미 후미히코는 도시, 교역 등에 주목하여 동서에 별개의 왕권이 존재했다는 '''두 개의 왕권론'''을 제시하며 권문체제론을 비판하고 동서 왕권의 관계를 강조했다.[25][26][5][6][7][8]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중세 국가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명확한 우열은 가려지지 않은 상태이다.[29][11]

2. 1. 재지영주제론 (1950년대)

1950년대에 제기된 이시모다 쇼나 나가하라 게이지 등의 재지영주제론은 가마쿠라 막부봉건 국가의 형성 과정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는 일본 중세를 '고대적 권력'인 공가 정권과 '중세적'인 가마쿠라 막부가 병존하는 이중 정권의 시대로 이해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는 중세 국가론이 사실상 막부론에 불과하다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가마쿠라 막부와 공가 정권 전체가 민중을 지배하는 국가 기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연구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 2. 도고쿠 국가론의 등장 (1960년대)

사토 신이치가마쿠라 막부가 도고쿠 지역을 기반으로 서쪽의 조정과는 다른 독자적인 자립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는 1949년 저서 『신일본사강좌 봉건시대 전기』(新日本史講座 封建時代前期)의 「막부론」(幕府論)[16][2]에서, 주에이 2년 10월 선지[17]를 통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조정으로부터 '도고쿠 행정권'을 부여받음으로써 독자적인 국가적 존재, 즉 '도고쿠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며 가마쿠라 막부를 하나의 국가로 규정했다.[18] 이는 당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조정으로부터 "도카이(東海) · 도산(東山) 제국(諸國)의 장공(庄公)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요리토모에게 알려 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해석되었다.[18]

1950년대 이시모다 쇼나 나가하라 게이지 등이 제시한 재지영주제론(在地領主制論)은 가마쿠라 막부를 봉건 국가 형성 과정으로 이해하며, '고대적 권력'인 공가 정권과 '중세적'인 가마쿠라 막부가 병존하는 이중 정권 시대로 파악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세 국가론이 지나치게 막부 중심으로 편향되었다는 반성이 제기되었고, 가마쿠라 막부와 공가 정권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 기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연구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3년 구로다 도시오는 권문체제론(権門体制論)을 제창했다. 이 이론은 공가(귀족)와 무가(무사)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한 국가 체제를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즉, 중세 일본에 두 개의 국가가 병립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권문(権門, 유력 가문이나 사원 세력)들이 천황 아래 통합된 하나의 국가 시스템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사토 신이치는 이러한 구로다의 권문체제론을 의식하면서[19] 자신의 기존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를 단순한 '정권'이 아니라, 교토 및 서일본 중심의 '왕조 국가'와 병립하는 또 다른 하나의 독립된 국가, 즉 '도고쿠 국가'로 명확히 규정했다.[12][1] 사토는 왕조 국가와 도고쿠 국가 모두 특정 가문이 특정 관직과 관청 운영을 세습적으로 청부받아 운영하는 관사청부제라는 공통된 국가 편성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15] 다만 가마쿠라 막부는 도고쿠 지역에 기반한 강력한 자립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왕조 국가와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사토의 도고쿠 국가론은 막부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전국보다는 도고쿠 지역에 집중되었다고 보는 점에서, 막부를 여러 권문 세력 중 하나로 간주했던 구로다 도시오의 권문체제론과 일부 인식을 공유하는 측면도 있었다.[19] 그러나 이시이 스스무 등은 다카야나기 미쓰토시의 논의를 바탕으로 중세 일본에 과연 단일한 국가 기구를 상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도고쿠 국가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0][3]

2. 3. 도고쿠 국가론에 대한 비판

사토 신이치의 도고쿠 국가론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시이 스스무는 다카야나기 미쓰토시의 논의를 바탕으로 중세 일본에 단일한 국가 기구를 상정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을 전개했다.[20][3]

주에이 2년 10월 선지의 해석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다. 우와요코테 마사다카는 이 선지가 도고쿠 국가의 성립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1180년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봉기하며 형성했던 일종의 '도고쿠 국가'가 소멸하고 기존의 공가 중심 왕조 국가 체제에 흡수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라고 주장했다.[24] 우와요코테는 가마쿠라 막부가 단순한 권문 이상의 자립성을 가졌으며 그 영향력이 도고쿠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이었다고 보면서도, 막부를 '국가'로 규정하는 것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24]

또한, 가마쿠라 막부를 독립된 '국가'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왕조 국가나 막부의 운영 특징인 '관사청부제'와 같은 씨족 중심의 '가업' 논리만으로 국가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되었다.[22][23] 이러한 사적인 운영 방식을 넘어서는 공적인 '국제(國制)'가 없다면 '국가'라고 부르기 어렵고, 차라리 중세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무국가론'이나 구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이 당시 실상에 더 가깝다는 비판이다.

이하라 케사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가마쿠라 부가 교토 장원의 연공 미납을 처벌하고, 천황 및 막부와 함께 관동 지방에서 동별전을 징수한 사례를 들어 '동국 독립 국가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9][10]

한편, 권문체제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연구도 등장했다. 고미 후미히코는 도시를 거점으로 한 교역 관계와 역신(疫神) 진무(鎮撫)에 주목하여 '''두 개의 왕권론'''을 주장하며, 동서 왕권 간의 적극적인 관계를 강조했다.[25][26][27][28][5][6][7][8]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중세 국가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명확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고 있다.[29][11]

2. 4. 새로운 학설의 등장

1977년 야마모토 히로나리(山本博也)는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에 대해 불간섭주의를 펼쳤다고 주장하였다.[21][4] 이 주장은 기존의 도고쿠 국가론을 주장했던 사토 신이치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는 1983년 저서 『일본의 중세 국가』[12][1]에서 이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후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는 도시를 거점으로 한 교역 관계와 역신(疫神) 진무(鎮撫) 등에 주목하여 '두 개의 왕권론(二つの王権論)'을 제시하였다.[25][26][5][6] 이 학설은 구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을 비판하는 한편, 동국 왕권이 서일본 왕권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역할을 강조했다.[27][28][7][8] 현재 중세 일본의 국가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은 학계에서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세하다고 보기는 어렵다.[29][11]

한편, '도고쿠 독립 국가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하라 케사오(伊原 Kesao)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가마쿠라 부가 실제로는 교토 조정의 지시를 받아 장원의 연공 수납 및 상납을 관리하고 처벌했으며,[9] 천황과 무로마치 막부가 가마쿠라 부를 통해 관동 지방에서 동별전을 징수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10] 이를 통해 그는 가마쿠라 막부나 그 후신인 가마쿠라 부가 교토 조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2. 5. 현재의 상황

일본 중세 국가 모델에 대한 논의는 현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구로다 토시오가 제기한 권문체제론은 공가(귀족)와 무가(무사)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의존하며 천황을 중심으로 단일 국가 체제를 형성했다는 주장이다.[11][29] 한편, 고미 후미히코는 도시를 거점으로 한 교역 관계와 역신(疫神) 진무(鎮撫, 전염병을 막는 의례) 등에 주목하여, 가마쿠라 막부로 대표되는 도고쿠(東國, 동일본)의 왕권과 교토 조정의 왕권이 별개로 존재했다는 '''두 개의 왕권론'''(二つの王権論)을 제시했다. 이는 권문체제론을 비판하며 동서 왕권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이다.[5][6][7][8][25][26][27][28]

또한, 이하라 케사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지방 기관인 가마쿠라 부가 교토의 장원 운영에 관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중앙의 통제를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도고쿠 지역이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는 도고쿠 국가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9][10]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중세 국가를 설명하는 주요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 이론이 더 우세하다고 명확히 결론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11][29]

3. 도고쿠 국가론의 핵심 내용

도고쿠(東国)는 동일본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토 신이치(佐藤進一)가 제창한 '''도고쿠 국가론'''(東国国家論)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도고쿠 지역에서 서쪽의 조정(朝廷)과는 독립된 독자적인 특질을 가진 또 하나의 중세 국가로 보는 이론이다.[1] 이 이론에 따르면, 교토 및 서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 국가'(王朝国家)와 가마쿠라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도고쿠 국가'가 병존하며 "상호 규정적인 관계를 토대로 각각의 길을 따로 열어갔다"(相互規定的関係をもって、それぞれの道を切り開いた)[12]고 본다.

사토 신이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3]

# 고대 율령 국가 해체 후에 등장한 '왕조 국가'는 일본 중세 국가의 원형이다.

# 12세기 말 동국에서 성립한 가마쿠라 막부는 독자적인 특질을 가진 또 하나의 중세 국가(도고쿠 국가)이다.

# 왕조 국가와 가마쿠라 막부(도고쿠 국가)는 상호 규정적 관계를 가지며 각각 발전해 나갔다.

나아가 도고쿠 국가는 싯켄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가 친왕 쇼군(親王将軍)을 맞이한 이후 서일본과의 상호 불간섭과 자립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보는데, 이를 특별히 '''도고쿠 독립국가론'''(東国独立国家論)이라고도 부른다.

사토 신이치 설의 핵심은 일본 중세 국가를 이처럼 왕조 국가와 가마쿠라 막부(도고쿠 국가)의 병존으로 파악하고, 이 두 국가 체제 내부에 관사청부제(官司請負制)라는 동일한 국가 편성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지적한 점에 있다.[15] 이를 통해 기존의 재지영주제론이 가진 무사의 성장과 귀족의 몰락이라는 단선적인 역사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3. 1. 관사청부제

율령 국가가 왕조 국가로 전환하면서 국가 편성 원리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바로 특정 씨족이 특정 관직 및 관청을 세습적으로 취임하고 운영하는 현상이다. 사토 신이치는 이를 관사청부제(官司請負制)라 명명하였으며, 특정 관직(職)과 특정 이에(家)가 결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14]

왕조 국가에서는 여러 씨족이 특정 관직을 세습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대로 산도(算道, 수학·계산) 업무를 담당했던 오즈키 씨(小槻氏)는 태정관의 핵심 부서인 변관국(弁官局)의 대∙ 소사(大 · 少史) 관직을 역임했으며, 그 직계 자손들은 실무 핵심인 좌대사(左大史)에 올라 변관국을 사실상 독점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태정관 외기국(外記局) 소속의 기요하라 씨(淸原氏)와 나카하라 씨(中原氏)는 9세기 이후 외기국이 인사 관리 기능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대외기(大外記) 수장직을 맡았고, 10~11세기에는 외기국의 실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12세기 초반이 되면 이처럼 특정 씨족이 특정 관사(官司)의 업무를 청부받아 운영하고 이를 가업(家業)으로 삼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가마쿠라 막부 역시 왕조 국가처럼 관사청부제를 국가 편성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 사토 신이치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왕조로부터 받은 제국 수호권(諸國守護權)을 일본 66개 구니(國) 전체에 대한 총슈고(總守護) 및 총지토직(總地頭職)으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치안 및 경찰 업무에 대한 독점적인 청부권으로서, 이 역시 일종의 관사청부제였다. 물론 가마쿠라 막부의 관사청부제는 그 대상 범위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었으며, 주종제의 영향으로 직무 통합 경향이 강했다는 점에서 왕조 국가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특정 세력(가마쿠라 막부)이 특정 권한(치안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는 관사청부제의 핵심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었다.[15]

4. 권문체제론과의 비교

아미노 요시히코는 권문체제론을 '일본국 의식'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도고쿠 국가론을 '도고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보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했다.[30] 그러나 두 이론은 중세 국가 운영의 '사적' 측면[31]이나 조정과의 관련성을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32] (→ 공통점 참조)

두 이론의 핵심적인 차이는 중세 일본 국가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드러난다. 사토 신이치는 초기에 수영 2년 10월 선지를 근거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조정으로부터 동국(東國) 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가마쿠라 막부)를 세웠다고 주장하며 도고쿠 국가론의 기초를 마련했다.[2]

이에 대해 1963년 쿠로다 토시오는 권문체제론을 제창하며, 중세 일본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공가(公家)와 무가(武家)가 때로는 대립하면서도 상호 의존하며 천황 아래 단일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쿠로다의 주장에 대해 도고쿠 국가론을 지지하는 이시이 스스무 등은 과연 중세 일본에서 단일한 국가 기구를 상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했다.[3] 이후 1977년 야마모토 히로야가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에 대해 기본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는 주장을 내놓자[4], 사토 신이치는 이 견해를 받아들여 자신의 도고쿠 국가론을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1]

최근 학계에서는 이 두 이론 외에도 다양한 시각이 제시되고 있다. 고미 후미히코는 도시를 거점으로 한 교역 관리 등에 주목하여 '''두 개의 왕권론'''을 주장하며[5][6], 권문체제론을 비판하고 동서 왕권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 했다.[7][8] 또한 이하라 케사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 가마쿠라 부가 교토 조정의 지시에 따라 장원의 연공 납부 문제에 관여하거나[9], 천황 및 막부와 함께 관동 지방에서 세금을 징수한 사례[10]를 들어 동국이 독립적인 국가였다는 주장에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다.

현재 일본 중세사 연구에서는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중세를 설명하는 주요 모델로 여겨지며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11]

4. 1. 공통점

아미노 요시히코는 권문체제론과 도고쿠 국가론을 각각 '일본국 의식'을 강조하는 입장과 '도고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했다.[30] 그러나 사토 신이치의 도고쿠 국가론과 쿠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은 일본 중세 국가를 보는 관점에서 여러 유사점을 공유한다.

첫째, 국가 운영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 공통점이 있다. 도고쿠 국가론은 관청 운영이 특정 씨족의 '가업'으로 이루어지는 '관사청부제'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권문체제론은 여러 '권문'이 국가 정치 집행 권한을 나누어 맡는 구조로 파악한다. 즉, 양쪽 모두 국가의 공적인 측면보다는 특정 씨족이나 권문과 같은 '사적'인 주체가 국가 운영의 핵심 원리라고 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31] 이러한 사적 측면을 강조하면 중세 무국가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두 이론 모두 당시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관계를 중시하여 중앙 중심의 일정한 구심력을 강조하는 편이다.[31]

다카하시 노리유키(高橋典幸) 역시 이러한 공통점을 지적한다. 그는 도고쿠 국가론이 '도고쿠'라는 독자적인 '지역 공간'의 확립을 중시하고, 권문체제론이 치안·경찰 기능과 같은 막부의 '직능'을 중시하지만, 실제로는 두 이론 모두 조정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32]

참조

[1] 서적 日本の中世国家 岩波現代文庫 2007
[2] 서적 日本中世史論集 岩波書店 1990
[3] 서적 石井進著作集第1巻 日本中世国家史の研究 岩波書店 2004
[4] 간행물 関東申次と鎌倉幕府 財団法人史学会
[5] 서적 王の記憶―王権と都市 新人物往来社 2007
[6] 서적 京・鎌倉の王権 吉川弘文館 2003
[7] 서적 鎌倉幕府と公家政権 山川出版社 2006
[8] 서적 新・中世王権論―武門の覇者の系譜 新人物往来社 2004
[9] 논문 東国荘園年貢の京上システムと国家的保障体制 : 室町期再版荘園制論(2)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3
[10] 논문 室町期東国本所領荘園の成立過程 : 室町期再版荘園制論の提起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3
[11] 웹사이트 山崎正和『室町記』-山崎史学の位相を探る- 東京大学 https://www.hi.u-tok[...]
[12] 서적 日本の中世国家 岩波現代文庫 2007
[13] 서적 (新版)古文書学入門 法政大学出版局 1997
[14] 문서
[15] 서적 日本の中世国家
[16] 서적 日本中世史論集 岩波書店 1990
[17] 문서
[18] 문서 鎌倉幕府論
[19] 문서 鎌倉 · 室町幕府と朝廷 1987
[20] 서적 石井進著作集第1巻 日本中世国家史の研究 岩波書店 2004
[21] 간행물 関東申次と鎌倉幕府 財団法人史学会
[22] 서적 中世に国家はあったか
[23] 서적 中世の国家と在地社会 校倉書房 2005
[24] 문서
[25] 서적 王の記憶―王権と都市 新人物往来社 2007
[26] 서적 京・鎌倉の王権 吉川弘文館 2003
[27] 서적 鎌倉幕府と公家政権 山川出版社 2006
[28] 서적 新・中世王権論―武門の覇者の系譜 新人物往来社 2004
[29] 웹사이트 山崎正和『室町記』-山崎史学の位相を探る- 東京大学 http://www.hi.u-toky[...]
[30] 서적 東と西の語る日本の歴史 そしえて 1982
[31] 서적 中世の奥家と天皇 · 儀礼 校倉書房 2012
[32] 문서 鎌倉幕府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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