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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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문체제론은 구로다 도시오가 제창한 학설로, 일본 중세 사회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공가, 종교, 무가 권력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며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파악한다. 권문세가, 즉 권위와 세력을 가진 유력 가문들이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각자의 지배 체계를 갖추면서도 분업을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일본 중세 사회의 복잡한 권력 관계를 설명하는 데 기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 이후 권문 쇠퇴와 지방 분권 세력 성장으로 한계를 보이며, 동국국가론과 두 개의 왕권론 등 다른 학설과의 논쟁을 낳았다. 또한 학술 용어 '왕가' 사용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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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체제 | |
---|---|
개요 | |
유형 | 정치 체제 |
존속 시기 | 헤이안 시대 후기 ~ 무로마치 시대 |
주도 세력 | 권문 (섭관가, 인의 근신 세력, 외척, 사사로이 무사 등) |
배경 | |
사회 경제적 배경 | 장원제의 확립, 공령제 동요 |
정치적 배경 | 섭관 정치 쇠퇴, 인정 시작 |
특징 | |
권력 구조 | 권문에 의한 정치 독점 |
사회 구조 | 계층 사회 심화, 무사 세력 성장 |
경제 구조 | 장원 중심 경제 |
문화 | 귀족 문화 발달 |
변천 | |
발전 |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무사 정권으로 이행 |
쇠퇴 | 가마쿠라 막부 성립으로 쇠퇴 |
주요 권문 | |
섭관가 | 후지와라 씨 (섭관가) |
인의 근신 세력 | 기요모리 가 |
외척 | 미나모토 씨 |
사사로이 무사 | 헤이시 |
영향 | |
후대 정치 체제 | 무사 정권 성립에 영향 |
사회 경제 | 장원제 변화 초래 |
문화 | 가마쿠라 문화 형성에 영향 |
관련 항목 | |
관련 인물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고시라카와 천황 다이라노 기요모리 |
관련 사건 |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
2. 권문체제론의 성립과 전개
구로다 도시오(黒田俊雄)가 제창한 권문체제론은 기존의 중세사관,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공가 권력, 종교 권력(사가), 무가 권력이 대립 항쟁하는 사회였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19]
패전 후 일본 중세사의 통설은 개발영주를 중심으로 고대 율령 국가의 와해와 중세 봉건국가(사회)의 성립 과정을 해명하고, 농촌과 변경에서 성장하여 수도의 귀족을 대신하여 권력을 잡은 재지영주, 즉 '무사'를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파악하여 그 '무사'의 출현과 성장을 중시하는 재지영주제론에 입각한 학설이었다. 특히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이러한 연구 과정을 이론화하여 이후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시모다는 그의 저서에서 헤이안 중기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이가 국(伊賀國) 남부 산간 지역에 위치한 구로다 장원(黒田庄)의 역사를 배경으로 재지영주(미나모토노 도시카타)의 성장과 이를 가로막는 장원영주(도다이지)의 항쟁을 이 지역의 주요 인물과 집단의 부침을 중심으로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였고, 이를 통해서 장원영주=고대적 세력, 재지영주=중세적 세력으로 규정하여 양자를 대비시킨 점에서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가 진전되면서 장원영주나 재지영주 모두 '장원'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계급적으로 양자 간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시모다처럼 장원영주 대 재지영주라는 대립적인 관계로만 파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구로다 도시오가 재지영주론의 무사 중심 관점을 비판하고 귀족=고대, 무사=중세(봉건)의 대립이라는 도식을 극복하고자 하였다.[20]
권문체제론의 등장으로 무가 세력의 성장과 고대 사회의 붕괴라는 재지영주제론적인 단순 발전론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시모다 쇼가 주장했던 "중세의 형성은 고대의 몰락"이라는 관점은 부정되고, 오히려 재지영주와 고대 국가 체제의 연관성이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중세 국가를 통일적인 단일 국가로 설정하고 권문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권문체제론이 헤이안 시대 이후 가마쿠라 시기, 즉 중세 전기까지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 중세 사회가 끊임없이 분열되어 권력은 공가, 무가, 사가로 나뉘고, 왕가는 천황과 상황(즉 치천의 군)으로, 무가는 쇼군과 싯켄, 도쿠소 등으로 분열하였다. 또 중세 사회의 물질 기반을 이루는 장원공령제 역시 중층적 토지 소유 관계, 직의 체계 등 비집권적 분권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의 권력 자체가 분열되어 약체화되어 있었으므로 상호 보완이 필요했고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권문체제론의 강점이 있다.
다만 권문의 쇠퇴기인 무로마치 시대는 권문의 통합으로 일원화가 촉진(구심력 작용)되고 자립적인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원심력 작용)하여 구로다가 제시한 것과 같은 권문 상호 간의 협력 또는 분쟁만으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2. 1. 권문(権門)의 개념
권문세가(権門勢家)란 간단히 말해 권위와 세력이 있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유력한 가문을 의미한다. 구로다 도시오는 문헌에 나타나는 '권문세가'라는 용어를 체계화하여 권문체제론을 주장했다.[20]구로다에 따르면, 권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21]
- '권세 있는 가문', '권위· 세력을 지닌 문벌 가문'을 뜻한다.
- 관직이나 관제상의 지위보다는 제도 외적인 측면이 강하다.
- 하나의 문벌가가 아니라 복수의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일본 중세 시대 권문은 공가(公家) 즉 왕가(천황가) 및 왕신가(王臣家), 사가(寺家) 즉 남도북령(南都北嶺) 등 거대 지샤(大寺社) 및 공가의 씨사(氏寺) · 씨신(氏神), 무가(武家) 즉 무사의 동량(棟梁) · 수장)으로 구성된다.[21] 이들은 각각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19]
이들 권문 세력은 정치 수완 및 부유한 경제력이라는 사적인 실력뿐만 아니라 각각 현귀(顯貴)한 문관(文官)의 가문, 국가 진호의 기도, 무력 통솔을 통한 국가 수호라는 국가 차원에서의 직능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권문은 일종의 카스트 제도로서 서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 권력 기구를 담당했으며 어느 한 권문이 국가 전체를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했다.[21]
구로다는 이들 권문이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21]
- 집행기관에 해당하는 정소(政所) · 공문소(公文所) ∙ 문전(文殿) ∙ 구로도도코로(藏人所) ∙ 사무라이도코로(侍所) 등 중핵을 이루는 집무기관과 여기에 딸린 벳토 이하의 가사제(家司制)를 갖추고 있다.
- 문서 발급 수속을 갖추고 있으며 만도코로 구다시부미(政所下文) ∙ 조쿠다시부미(廳下文)의 구다시부미(下文), 어교서(御敎書) ∙ 원선(院宣) 등의 봉서(奉書)를 사용했다.
- 가사(家司)를 비롯한 근신∙ 시코인(伺候人) ∙ 부지인(扶持人) ∙ 요리우도(寄人) ∙ 사무라이(侍) ∙ 게닌(家人) 등의 사적 주종조직 내지 사병을 거느렸다.
- 법령 제정과 재판권을 소유했다.
- 장원∙ 지행국 등의 소령(所領)을 문벌이 직(職)으로 조직한 지행 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권문들은 대립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일종의 분업에 가까운 형태로 권력을 행사했다. 각 권문은 독자적인 지배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천황이 이들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구로다는 이러한 체제를 권문체제라고 정의하고, 오닌의 난으로 인해 장원제가 붕괴하면서 권문체제도 함께 붕괴했다고 보았다.[19]
2. 2. 권문체제의 특징
구로다 도시오는 권문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21]번호 | 특징 | 설명 |
---|---|---|
① | 집행기관 | 정소(政所), 공문소(公文所), 문전(文殿), 구로도도코로(藏人所), 사무라이도코로(侍所) 등 중핵을 이루는 집무기관과 여기에 딸린 벳토 이하 가사제(家司制) |
② | 문서 발급 | 만도코로 구다시부미(政所下文), 조쿠다시부미(廳下文) 등의 구다시부미(下文), 어교서(御敎書), 원선(院宣) 등의 봉서(奉書) |
③ | 사적 주종조직 | 가사(家司)를 비롯한 근신, 시코인(伺候人), 부지인(扶持人), 요리우도(寄人), 사무라이(侍), 게닌(家人) 등의 사적 주종조직 내지 사병 |
④ | 법령 제정 및 재판권 | 법령 제정 및 재판권 소유 |
⑤ | 소령(所領) 조직 | 장원, 지행국 등의 소령(所領)을 문벌이 직(職)으로 조직한 지행 체계 |
이들 권문 세력은 정치 수완 및 부유한 경제력이라는 사적인 실력뿐만 아니라, 각각 현귀(顯貴)한 문관(文官) 가문, 국가 진호의 기도, 무력 통솔을 통한 국가 수호라는 국가 차원에서의 직능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권문은 일종의 카스트 제도로서 서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 권력 기구를 담당했으며, 어느 한 권문이 국가 전체를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했다.
권문체제가 정립된 것은 11세기 후반 인세이(院政) 시대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각 권문의 통치 기구인 가사제(家司制) 확립, 장원 기진의 성행, 승병의 대두 등이 일반화되었다.
2. 3. 권문체제의 정립과 쇠퇴
권문체제는 11세기 후반 상황(上皇)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인세이(院政) 시대에 정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 권문의 통치 기구인 가사제(家司制)가 확립되고, 장원 기진(寄進)이 성행했으며, 승병이 대두하는 현상 등이 일반화되었다.[2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무가(武家)라는 독자적인 정권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권문체제의 제2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슈고와 지토의 직권도 공가(公家)나 사가(寺家) 등의 권한과 상호 보완적이었으며, 막부만이 국가 권력을 독점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개별 권문도 다른 권문을 압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권문 간의 상호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통합자로서 국왕(천황)을 필요로 했다. 권문 간 상호 협조 체제는 국왕(천황)의 권한을 극도로 압축시켰지만, 반대로 국왕은 권위에 비해 실권이 없었기에 권문의 조정자 내지는 국가적 통합자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21]오닌의 난 이후 장원제가 붕괴하면서 권문체제도 쇠퇴하고, 센고쿠 시대로 이어진다.
3. 권문체제론에 대한 비판과 논쟁
권문체제론은 무가 세력의 성장과 고대 사회의 붕괴라는 재지영주제론적인 단순 발전론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이시모다 쇼가 주장했던 "중세의 형성은 고대의 몰락"이라는 관점은 부정되고, 오히려 재지영주와 고대 국가 체제의 연관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중세 국가를 통일적인 단일 국가로 설정하고 권문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 중세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되어 권력은 공가(귀족), 무가, 사가(寺家)로 나뉘고, 왕가는 천황과 상황(치천의 군)으로, 무가는 쇼군과 싯켄, 도쿠소 등으로 분열하였다. 중세 사회의 물질 기반인 장원공령제 역시 중층적 토지 소유 관계, 직(職)의 체계 등 비집권적 분권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권력 자체가 분열되어 약화되었기 때문에 상호 보완이 필요했고,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권문체제론이 강점을 가진다.
하지만 권문이 쇠퇴하는 무로마치 시대에는 권문의 통합으로 일원화가 촉진(구심력 작용)되고 자립적인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원심력 작용)하여, 권문 상호 간의 협력 또는 분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3. 1. 중세 일본의 '국가' 존재 여부
구로다 도시오는 중세 일본을 천황(왕가)을 필두로 하는 단일 국가로 보는 권문체제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토 신이치를 필두로 하는 동국국가론은 가마쿠라 막부를 조정과 독립된 별개의 중세 국가로 간주하여 권문체제론에 유력한 비판을 제기했다.[19] 동국국가론은 가마쿠라 막부와 서일본의 왕조 국가가 상호 규정적 관계를 가지며 발전했다고 보았다.고미 후미히코는 '두 개의 왕권론'을 제시하여, 동국 국가를 도고쿠의 왕권, 조정을 사이고쿠의 왕권으로 비정하고 쇼군을 동쪽의 왕, 천황을 서쪽의 왕으로 인식하여 두 왕권의 존재를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했다.[51]
권문체제론 내부에서도 국왕의 지위에 있던 것은 천황이 아니라 치천의 군이라는 설[52],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로 한정하는 설[53]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중세 국가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정설로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사키 무네오는 구로다의 권문체제론이 '가설'로서 제창되었지만 충분한 검증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토 신이치의 동국국가론 역시 가마쿠라 시대는 무가 정권의 시대였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 두 이론 모두 가설에 대한 검증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54]
3. 2. 도고쿠 국가론(東国国家論)과 두 개의 왕권론
사토 신이치를 필두로 하는 동국국가론은 가마쿠라 막부를 조정으로부터 독립한 독자적인 특성을 가진 별개의 중세 국가로 간주한다. 천황 중심의 서일본 왕조 국가와 가마쿠라 막부는 상호 규정적 관계를 가지며 각각의 길을 개척했다고 한다. 호조 도키요리가 친왕 장군을 맞이한 이후 두 국가는 서일본으로부터의 상호 불간섭·자립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국가 간의 상호 불간섭은 어려웠고, 이 점을 고려하여 고미 후미히코는 "두 개의 왕권론"을 제창했다.[51]두 개의 왕권론: 동국 국가를 동쪽의 왕권으로, 조정을 서쪽의 왕권으로 설정한다. 쇼군을 동쪽의 왕, 천황을 서쪽의 왕으로 인식하여 두 왕권의 존재를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했다.[51]
4. 역사 용어로서의 '왕가(王家)'
구로다 도시ោង(黒田俊雄)은 중세 일본 황실에 대해 공가(公家)·무가(武家)·사가(寺家)와 호응하는 학술 용어로서 "왕가(王家)"를 채용했다.[30][31][29][32] 1977년 저서 《현실 속의 역사학》, 1980년 「역사독본」 기고 등에서 중세에 천황의 일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왕가", "왕씨(王氏)"가 사용되었음을 언급했다. 또한 "천황가(天皇家)"나 "황실(皇室)"이라는 용어는 메이지(明治) 이후 근대 국가 권력에 의해 사용된 용어이며 (실제로는 "황실"은 797년 《속일본기》에서 사용된 예가 있으며, 중세 사료에도 종종 보이는 용어이다),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의미를 담은 근대 천황제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으로 학술적 중립성을 견지하기에는 부적절하며, 그러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왕가"라는 말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33][34]
이러한 구로다의 '왕가' 용어 제창에 대해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廣)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었고, 두 학자는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쳐 논쟁을 벌였다. 오쿠노는 "황가(皇家)"나 "조가(朝家)"라는 말이 중세 일본에서 "황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제시하며 반박하였고, 구로다는 "황가"와 "왕가"는 어의적으로 거의 같지만, "황"이라는 글자를 고집하는 것은 천황에게 여러 외국의 일반적인 "국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왕가"가 적당하다고 주장했다.[39][40][41]
1993년부터 도모세 아키미(伴瀬明美)가 "왕가"라고 표기한 몇 개의 논문을 발표한 후, 일본 학계에서도 "왕가" 표기를 사용하는 연구가 증가했다.[42][43] 그러나 도모세 아키미는 이후 천황을 배출하는 집안의 정체성으로서 "천황가" 호칭이 적절하다고 입장을 바꾸어 "천황가"라고 표기한 논문을 집필하게 되었고, 오카노 도모히코(岡野友彦)는 "왕가"라는 표현이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王氏) 등과 혼란을 초래할 우려도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할 용어라고 보았고, 구로다의 "왕가" 의미로는 사료 표기상 "원궁가(院宮家)"가 적절하다고 지적했으며, 엔도 기로(遠藤基郎)도 이에 동의를 나타내고 있다.[44][45]
도코로 이사오(所功)는 왕가는 시라카와하쿠오가의 별칭으로 이용되며 좌익적인 학자 중에 황실에 대해서 사용하는 것이 있다고 지적했고,[46] 일본 국어사전인 다이지센에서도 시라카와하쿠오가를 나타내는 말로 소개되고 있다.[47][46] 아미노 요시히코는 "'왕가령장원'(王家領荘園)이라고는 표기하지 않고 '천황가령'(天皇家領)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고수하고 있다.[31][38]
한편, "왕가" 정의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에서 재정의나 정의 엄밀화를 요구하는 의견도 있다. 구리야마 게이코(栗山圭子)는 '왕가' 주인은 천황이 아닌 인(태상천황)과 국모 부부이며, '왕가'를 일본 황실 전체가 아닌 인의 지위의 적계 계승을 지향하는 특정 집안(인과 국모 그리고 그 자녀)에 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48] 사에키 도모히로(佐伯友弘)도 "고산조 천황의 부계 아들딸(양자녀 포함) 및 남자의 배우자 여성으로 구성된 친족 집단"으로 정의하고, 학술적으로는 "고산조 천황에 의한 친정을 상한으로, 煕仁親王(후시미 천황)의 태자 책립에 의한 '다이카쿠지 왕통', '지묘인 왕통'의 성립을 하한"으로 하는 기간(1068년~1275년)에 한정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49]
이처럼 당시 일본 황실 호칭에 대한 학술적인 정설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31] 연구자들은 자각적으로 용어 선택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4. 1. 구로다 도시오의 '왕가' 개념
구로다 도시오는 중세 일본 황실을 지칭하는 학술 용어로 '왕가'를 채택했다.[29][30][31][32] 그는 1977년 저서 《현실 속의 역사학》, 1980년 「역사독본」 기고 등에서 '천황가(天皇家)'나 '황실(皇室)'은 근대 이후 사용된 용어이며, '만세일계(万世一系)'라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고 있어 학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33][34] 그는 '왕가'가 중세 천황 일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근대 천황제의 이데올로기적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적절하다고 보았다.구로다는 중세 일본 황실을 공가, 무가, 사가와 상호 보완 관계를 가진 하나의 권문으로 보았고,[35] 이러한 권문체제론의 학술 용어로 '왕가'를 채택했다.[36] 그는 '왕가'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가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립적인 권문(인(院), 미야(宮))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37]
그러나 구로다가 정의한 '왕가'와 사료에 나타난 '왕가'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엔도 모토로는 '왕가'론이 인세이기, 가마쿠라기를 다루는 연구에서만 사용되는 '방언'과 같다고 설명했다.[38]
구로다의 '왕가' 용어 제창에 대해 오쿠노 다카히로는 비판을 제기했고,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논쟁이 벌어졌다. 오쿠노는 '황가(皇家)'나 '조가(朝家)'가 중세 일본에서 '황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제시하며 반박했다. 구로다는 '황가'와 '왕가'는 의미가 거의 같지만, '황'이라는 글자를 고집하는 것은 천황에게 일반적인 '국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하며 '왕가'가 적절하다고 반박했다.[39][40][41]
또한, 중세 사료인 『호겐 이야기』, 『헤이지 이야기』, 『무쓰와키』, 『쇼몬키』, 『헤이케 이야기』, 『겐페이 성쇠기』에는 '왕가'라는 표현이 없고, '황실', '황거', '황화', '조가', '군조', '천황' 등의 표현이 나타난다. 『신황정통기』에는 '왕가지권(王家之権)'이라는 숙어로 '왕가'가 2건 나오지만, '천황'은 100건 이상, '황가', '황궁', '황조', '황통' 등 '황'자가 들어간 표현이 다수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3년부터 도모세 아키미(伴瀬明美)가 '왕가'로 표기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본 학계에서 '왕가' 표기를 사용하는 연구가 증가했다.[42][43] 그러나 도모세 아키미는 이후 입장을 바꾸어 '천황가'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카노 도모히코는 '왕가'가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王氏) 등과 혼동될 수 있어 피해야 할 용어이며, 구로다의 '왕가' 의미로는 '원궁가(院宮家)'가 적절하다고 지적했고, 엔도 모토로도 이에 동의했다.[44][45] 도코로 이사오는 왕가가 시라카와하쿠오가의 별칭으로 이용되며, 좌익적인 학자들이 황실에 대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46] 다이지센에서도 시라카와하쿠오가를 가리키는 말로 소개된다.[47][46]
한편, '왕가' 정의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에서 재정의나 정의의 엄밀화를 요구하는 의견도 있다. 구리야마 게이코는 '왕가'의 주인은 천황이 아닌 인(태상천황)과 국모 부부이며, '왕가'를 일본 황실 전체가 아닌 인의 지위의 적계 계승을 지향하는 특정 집안(인과 국모 그리고 그 자녀)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사에키 도모히로는 '고산조 천황의 부계 아들딸(양자녀 포함) 및 남자의 배우자 여성으로 구성된 친족 집단'으로 정의하고, 학술적으로는 1068년~1275년 기간에 한정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9]
이처럼 당시 일본 황실의 호칭에 대한 학술적인 정설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31] 연구자들은 자각적으로 용어 선택의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4. 2. '왕가' 용어 논쟁
구로다 도시ោង(黒田俊雄)은 중세 일본 황실을 가리키는 학술 용어로 '왕가'를 제안했다. 그는 '천황가'나 '황실'은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므로 학술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구로다는 '왕가'를 공가, 무가, 사가와 상호 보완 관계를 가진 하나의 권문으로 정의했다.[30][31][29][32] 그는 '왕가'가 몇 개의 자립적인 권문(인, 미야)을 포괄하는 가계의 총칭이라고 설명했다.[37]하지만 구로다의 '왕가' 용어는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廣) 등의 비판을 받았다. 오쿠노는 중세 사료에 '황가', '조가' 등의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구로다는 '황'이라는 글자가 천황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라고 반박했다.[39][40][41] 또한, 중세 사료인 『호겐 이야기』, 『헤이지 이야기』, 『무쓰와키』, 『쇼몬키』, 『헤이케 이야기』, 『겐페이 성쇠기』에는 '왕가'라는 표현이 없고, '황실', '황거', '황화', '조가', '군조', '천황' 등의 표현이 나타난다. 『신황정통기』에는 '왕가지권'이라는 표현이 2건 나오지만, '천황'은 100건 이상, '황가', '황궁', '황조', '황통' 등 '황' 자가 들어간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
이후 '왕가' 용어를 사용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났지만,[42][43] 도모세 아키미(伴瀬明美)는 '천황가'가 더 적절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오카노 도모히코(岡野友彦)는 '왕가'가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王氏)와 혼동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원궁가'가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엔도 기로(遠藤基郎)도 이에 동의했다.[44][45] 도코로 이사오(所功)는 '왕가'가 시라카와하쿠오가의 별칭으로 사용되며, 좌익 학자들이 황실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고 지적했다.[46] 아미노 요시히코는 '왕가령장원' 대신 '천황가령' 표기를 고수한다.[31][38]
쿠리야마 게이코(栗山圭子)는 '왕가'의 주인이 천황이 아닌 인(태상천황)과 국모 부부이며, '왕가'를 인의 지위를 계승하는 특정 집안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사에키 도모히로(佐伯友弘)는 '왕가'를 고산조 천황의 자손들로 구성된 친족 집단으로 정의하고, 사용 기간을 1068년부터 1275년까지로 한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9]
이처럼 '왕가' 용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학계에서 통일된 견해는 아직 없다.[31]
5. 권문체제론의 의의와 한계
권문체제론은 중세 일본 사회의 권력 구조를 설명하는 유력한 학설이지만, 몇 가지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권문체제론은 무가 세력의 성장과 고대 사회의 붕괴라는 단순한 발전론을 극복하고, 고대 국가 체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즉 중세 전기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19] 그러나 중세 국가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로 설정하고 권문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에 대한 비판도 많다.[21]
무로마치 시대에는 권문의 통합으로 일원화가 촉진되고 자립적인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하여, 권문 상호간의 협력 또는 분쟁만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해지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권문체제론의 한계에 대해 사토 신이치는 동국국가론을 통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이론은 가마쿠라 막부를 조정으로부터 독립한 별개의 중세 국가로 간주한다. 고미 후미히코는 "두 개의 왕권론"을 제시하여 쇼군을 동쪽의 왕, 천황을 서쪽의 왕으로 인식하고 두 왕권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했다.[15]
권문체제론 내부에서도 국왕의 지위에 있던 것은 천황이 아니라 치천의 군이라는 설[16],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라는 설[17]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사사키 무네오는 구로다가 권문체제론을 "가설"로 제창했지만, 그 "가설"을 검증한 것은 아닌데 그 "가설"이 독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비판했다.[18]
결론적으로, 중세를 관통하는 국가 모델로서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학계에서 유력시되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정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5. 1. 의의
권문체제론은 중세 일본 사회의 복잡한 권력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기여했다. 기존의 재지영주제론(在地領主制論)적 단순 발전론을 극복하고, 고대 국가 체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중세 전기(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19]기존 일본 중세사관에서는 중세 국가는 천황을 대표하는 공가 권력, 종교 권력(사가寺家), 신흥 무가 권력이 삼파전으로 대립 항쟁을 벌이는 사회라는 견해가 주류였다. 이에 구로다 도시오는 권문체제론을 제창하여, 공가 권문(집정執政), 종교 권문(호지護持), 무가 권문(수호守護)이 각각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대립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일종의 분업 형태로 권력을 행사했다고 보았다. 이 권문들의 통합자로서 천황이 기능했다고 설명한다.[20]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주장했던 "중세의 형성은 고대의 몰락"이라는 관점은 부정되고, 오히려 재지영주와 고대 국가 체제의 연관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22] 이는 마키 겐지(真木 靖)가 일본 중세 사회의 특징인 '시키'(職)가 고대 관료 및 장관(莊官)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해명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권문체제론은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지만,[21] 무로마치 시대에는 권문이 쇠퇴하고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하면서 권문 간의 협력이나 분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한계도 존재한다.
5. 2. 한계
권문체제론은 중세 일본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로 전제하고, 권문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중세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23][24]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는 권문체제론이 '피지배 인민 위에 군림하는 통일적인 국가 권력 기구'를 설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3] 이는 중세 국가를 통일적인 단일 국가로 보고 그 안에서 권문들 간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의 논지에 대해, '통일적인 단일 국가'라고 부를 만한 단일 국가 기구가 중세 일본에 존재했는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시이 스스무(石井進)는 "중세 일본에 단일 국가 기구가 있다는 것이 정말 명료한 상식적인 사실인가? 그러한 전제 자체를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권문체제론과 같이 중세 일본을 '단일'적인 통일 국가로 보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여기에는 일본 중세를 단일 국가가 아닌 무(無)국가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24]
닛타 이치로(新田一郞)는 《중세에 국가는 있었는가》라는 책에서 중세 국가 기구가 다양하고 다기한 중세의 여러 사회관계를 규율할 수 있는 근본 질서·구조를 갖추었는지에 회의적이라고 했다.[27]
권문체제론의 등장으로 무가 세력의 성장과 고대 사회의 붕괴라는 재지영주제론적인 단순 발전론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주장했던 "중세의 형성은 고대의 몰락"이라는 관점은 부정되고, 오히려 재지영주와 고대 국가 체제의 연관성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중세 국가를 통일적인 단일 국가로 설정하고 권문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권문체제론이 헤이안 시대 이후 가마쿠라 시대까지, 즉 중세 전기까지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 중세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되어 권력은 공가, 무가, 사가로 나뉘고, 왕가는 천황과 상황(치천의 군)으로, 무가는 쇼군과 싯켄, 도쿠소 등으로 분열하였다. 또 중세 사회의 물질 기반을 이루는 장원공령제 역시 중층적 토지 소유 관계, 직(職)의 체계 등 비집권적 분권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의 권력 자체가 분열되어 약체화되어 있었으므로 상호 보완이 필요했고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권문체제론의 강점이 있다.
다만 권문의 쇠퇴기인 무로마치 시대는 권문의 통합으로 일원화가 촉진(구심력 작용)되고 자립적인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원심력 작용)하여 구로다가 제시한 것과 같은 권문 상호간의 협력 또는 분쟁만으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이처럼 중세 일본을 천황을 필두로 하는 단일 국가로 보는 권문체제론에 대해, 사토 신이치를 필두로 하는 동국국가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이 있다. 이 설은 가마쿠라 막부를 동국에서 조정으로부터 독립한 독자적인 특성을 가진 별개의 중세 국가로 간주하고, 서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 국가와 가마쿠라 막부는 상호 규정적 관계를 가지며 각각의 길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국가 간의 상호 불간섭이 있을 수 있다고 보기 어렵고, 이 점을 고려하여 제창된 것이 고미 후미히코에 의한 "두 개의 왕권론"이며, 동국 국가를 동국의 왕권에 비유하고, 조정을 서국의 왕권에 비정하여, 쇼군을 동쪽의 왕, 천황을 서쪽의 왕으로 인식한 다음 두 왕권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했다.[15]
한편 권문체제론 내부에서도 국왕의 지위에 있던 것은 천황이 아니라 치천의 군이라고 하는 설[16],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라고 하는 설[17] 등이 제시되고 있다. 중세를 관통하는 국가 모델로서의 권문체제론과 두 개의 왕권론이 학계에서 유력시되고 있으며, 우열이 가려질 기미는 없고, 권문체제론이 반드시 정설이 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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