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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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 올림픽》은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을 기록한 이치카와 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하차 이후 이치카와가 총감독을 맡아 제작되었으며, 선수와 관중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예술적인 기록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영화는 개봉 전 일본 정부와 갈등을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165분에서 93분으로 재편집되었다. 개봉 후에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칸 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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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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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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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東京オリンピック (Tōkyō Orinpikku) |
영어 제목 | Tokyo Olympiad |
감독 | 이치카와 곤, 시부야 쇼코(배구), 아오야스 쇼타로(체조), 호소에 에이코 |
제작 총지휘 | 이치카와 곤 |
제작 | 다구치 스케타로 |
각본 | 이치카와 곤, 와다 나쓰, 시라사카 요시오, 다니카와 슌타로 |
해설 | 미쿠니 이치로 |
음악 | 마유즈미 도시로 |
촬영 | 미야가와 가즈오, 하야시다 시게오, 나카무라 긴지, 다나카 마사 |
편집 | 에하라 요시오 |
미술 | 가메쿠라 유사쿠 |
스튜디오 | 제18회 올림픽 경기대회 조직위원회 |
배급사 | 도호 |
개봉일 | 1965년 3월 20일 |
상영 시간 | 169분 |
국가 | 일본 |
언어 | 일본어 |
흥행 | |
제작비 | 3억 5360만 엔 |
배급 수입 | 12억 2321만 엔 |
티켓 판매 | 2450만 장 (일본/프랑스) |
관련 정보 | |
관련 항목 | 1964년 하계 올림픽 2020년 대회 기록 영화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 목록 |
촬영 장비 | 나크 카메라 서비스 (현: 나크 이미지 테크놀로지) |
2. 제작 배경
1964년 하계 올림픽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기반 시설을 복구하고, 현대화된 도로와 산업, 그리고 급성장하는 일본 경제를 세계에 과시할 기회였다.[8] 1896년 하계 올림픽 이후 모든 올림픽은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서 자금을 지원했다.[8] 1964년 올림픽을 위해 일본 정부는 자체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
2. 1. 감독 선임 과정
1964년 하계 올림픽은 일본 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였으며, 올림픽 기록 영화 제작은 중요한 과제였다.[8] 당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내정되었으나, 1960년 로마 올림픽 답사까지 진행하며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 영화 협회와의 갈등 및 예산 문제로 하차했다.[8] 구로사와 감독이 희망한 예산은 5.2억엔이었으나, 조직위원회는 절반 수준인 2.4억엔밖에 제시하지 못했다.[8]이후 이마이 타다시, 이마무라 쇼헤이, 시부야 미노루, 신도 카네토 등 여러 감독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이치카와 곤 감독에게 제안이 돌아갔다.[8] 당시 다이에이와 계약하여 영화를 제작 중이던 이치카와 감독은 나가타 마사이치 다이에이 사장의 전화를 받고, 본작의 프로듀서였던 요미우리 신문 사장 타구치 스케타로와 면회하여 총감독을 제안받았다.[8]
올림픽과 스포츠에 문외한이었던 이치카와 감독은 고심 끝에 아내이자 각본가인 와다 나츠토와 상담 후, 나가타 사장에게 결정을 위임했다.[8] 며칠 후, 나가타 사장은 다이에이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감독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이치카와 감독은 이를 수락하여 총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다.[8]
2. 2. 제작진 구성
이치카와 곤 감독은 아내이자 각본가인 와다 나츠토를 비롯해 시라사카 요시오, 타니가와 슌타로 등과 함께 각본을 집필했다.[9] 미야가와 카즈오, 하야시다 시게오 등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태프들이 촬영에 참여했다.[10]역할 | 이름 |
---|---|
총감독 | 이치카와 곤 |
각본 | 이치카와 곤, 와다 나츠토, 시라사카 요시오, 타니가와 슌타로 |
촬영부 치프 | 하야시다 시게오, 미야가와 카즈오, 나카무라 킨지, 다나카 마사시 |
미술 고문 | 가메쿠라 유자쿠 |
감독 | 야스오카 쇼타로, 호소에 에이코, 히가시마츠 시게미 |
프로듀서 보조 | 타니구치 센키치 |
감수 | 난부 케이노스케 |
2. 3. 제작 준비
이치카와 곤 감독은 올림픽과 스포츠 전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록 영화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우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대립했던 뉴스 전문 회사에서 스태프를 모아 1963년 도쿄 국제 스포츠 대회의 기록 필름을 보며 공부했다. 이와 함께 인력 모집과 조직 구성을 진행했다.[9]시나리오 제작에는 아내이자 각본가인 와다 나츠토, 각본가 시라사카 요시오, 시인 타니카와 슌타로가 참여했다. 키쿠시마 류조에게도 제안했지만 다른 일 때문에 불참했다. 이치카와는 상영 시간을 3시간 이내로 하고, 모든 종목의 결승 장면을 반드시 넣으려고 했으나,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경기 종목을 중요도에 따라 A, B, C 세 등급으로 나누어 촬영 우선순위를 정했다. 전체 흐름은 성화 릴레이, 선수 입장, 개회식, 2주간의 경기, 폐회식 순서로 정하고, 데이터 수집과 의견 수렴을 통해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또한, 경기 전후의 드라마에도 주목하여 경기 외적인 장면도 적극적으로 촬영하도록 시나리오에 넣었다. 출전 선수뿐만 아니라 준비 스태프와 관객도 올림픽 참가자로 간주하여 촬영반을 경기반과 잡감반으로 나누어 역할을 분담했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이치카와는 스포츠 팬만을 위한 영화가 되지 않도록 스태프들에게 철저히 주지시켰다.[9]
스태프는 이치카와가 직접 선정했다. 미술 고문으로는 가메쿠라 유자쿠가, 감독으로는 소설가 야스오카 쇼타로, 사진가 호소에 에이코와 히가시마츠 시게미 등이 참여했다. 이치카와와 같은 도호 출신 베테랑 감독인 타니구치 센키치도 프로듀서 보조로 참여했다. 영화 제작 주요 멤버들이 대부분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의견을 위해 영화 평론가 난부 케이노스케를 감수로 기용했다.[10]
예산과 관련하여, 촬영용 필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이치카와는 프로듀서 타구치 스케타로와 함께 국회 예산 위원회에 가서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그 결과, 예산이 2억 4천만 엔에서 3억 9천만 엔으로 증액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 이치카와는 기업 협찬을 생각해냈다. 국책 영화라 자금 제공은 불가능하다는 제약 때문에, 코카콜라와 올리베티 등으로부터 촬영 필름을 무상 제공받는 대신, 극 중에 선수들이 콜라를 마시거나 올리베티 타자기를 사용하는 장면을 넣는 연출을 추가했다. 또한 국립 경기장에서 로케이션 헌팅 중 망원 렌즈의 필요성을 느껴 일본 전역의 망원 렌즈를 모으고, 일부는 고가의 외국 제품을 주문하는 등 촬영 환경을 갖추었다.[10]
3. 촬영
市川|이치카와일본어 곤 감독은 모든 경기를 직접 촬영하는 대신 감독부를 구성하여 각 경기장에 배치하고, 자신은 주요 경기를 중심으로 촬영했다. 포환던지기, 창던지기, 멀리뛰기, 배구 등 몇몇 경기에만 직접 참여하고, 그 외에는 아카사카 이궁에 설치된 본부에서 대기하며 원격 회의를 통해 촬영을 지휘했다. 이치카와는 매일 직접 그린 그림 콘티를 카메라맨들에게 배포하며 회의에 심혈을 기울였다.[11]
10월 10일 개회식 전날에는 폭풍우가 몰아쳐 개최가 불투명했지만, 당일에는 맑게 개었다. 이치카와는 사무총장 요사노 히데에게 문의하여 날씨에 따른 진행 여부를 확인하고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13]
대회 기간 동안 촬영용 차량은 한 대만 허가되었으며, 고속 카메라 2대와 일반 카메라 2대, 총 4대를 활용하여 주로 마라톤 경기를 촬영했다. 이치카와 감독이 직접 촬영한 여자 배구 경기에서는 실내 경기 특성상 광량 부족으로 망원 렌즈 대신 광각 렌즈를 사용해야 했다. 촬영을 둘러싸고 단체 측과 기술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협의 끝에 결승전에서는 약 30대의 카메라가 배치되었다. 1600mm 망원 렌즈가 많이 사용되었고, 일부 경기에서는 경기장 내에 약 9척(약 2.7m) 높이의 망루를 세워 촬영하기도 했다. 멀리뛰기는 접근 촬영, 포환던지기는 뒤쪽에서 촬영한 영상을 사용했다. 폐회식은 예정에 없던 해프닝 형식으로 진행되어 촬영 계획이 무산되기도 했다.[13]
3. 1. 촬영 기법
市川|이치카와일본어는 모든 경기를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감독부를 설치하고 각 경기장에 담당자들을 배치했다. 이치카와 본인은 포환던지기, 창던지기, 멀리뛰기, 배구 등 몇몇 경기에만 참여했고, 그 외에는 본부가 있던 아카사카 이궁에서 대기했다.[11] 감독들과 스태프들 사이의 의식을 통일하기 위해 매일 각 부서별로 원격 회의를 하는 것을 상례로 했다. 이치카와는 이 회의가 연출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하여, 매일 자신이 그린 그림 콘티를 카메라맨들에게 배포하는 등 회의에 심혈을 기울였다.[11]아카사카 이궁의 본부에는 100대 정도의 카메라와 렌즈 등 기재가 모였고, 스태프는 매일 아침 집합하여 로케 촬영에 출발했다. 대회 종료 후에는 아오이 스튜디오가 전적으로 제공한 한 층에 편집실과 영사실이 만들어져 마무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본작은 올림픽 최초의 컬러 와이드 작품이 되었으며, 테크니스코프가 채용되었다. 촬영 필름은 이스트만, 후지, 사쿠라 세 종류가 사용되었지만, 기술 감독 미도오카 미치오의 판단으로, 사쿠라와 후지 필름은 당시 기술적인 문제로 고속 촬영에 사용할 수 없어 러쉬용 포지나 공개용 프린트 등의 일부에 사용되는 데 그쳤고, 대부분은 이스트만 컬러로 촬영되었다.[11]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치카와는 본작의 주역은 도쿄라는 도시라고 생각하여, 매일 회의가 끝나면 바로 카메라맨과 외출하여 올림픽으로 격변하는 도쿄의 거리를 계속 촬영했다. 이는 이치카와가 참고한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민족의 제전』을 다른 시각으로 표현하려는 연출을 시도했기 때문이다.[12] 또한 『민족의 제전』에서는 작품으로서 본 촬영에서 찍지 못한 부족분을 보충하는 후 촬영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참고 시사를 통해 발견하고, "만들어낸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도 기록 영화로서의 연출이라고 판단하여 성화 봉송 장면 등의 일부를 후 촬영으로 진행했다.[12]
10월 10일 개회식 당일에는 전날 폭풍우가 몰아쳤던 탓에 개최가 위태로웠다. 이치카와는 사무총장 요사노 히데에게 문의하여, "내일도 폭풍우가 치면 중단, 순연은 없다. 천황 폐하가 우산을 쓰고 관람석의 옥좌에 서 계실 정도의 비라면 진행한다"라는 답변에 마음을 졸였지만, 당일에는 맑게 개어, "천황 폐하는 함께하시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13]
대회 중 촬영용 반송차는 한 대만 허가되었으며, 고속 카메라 2대, 일반 카메라 2대, 총 4대를 활용하여 주로 마라톤 경기에 사용되었다. 이치카와 자신이 촬영에 참여한 여자 배구 경기에서는 실내 경기이므로 망원 렌즈가 광량 부족으로 사용될 수 없어 광각 렌즈로 촬영되었다. 또한 촬영을 둘러싸고 단체 측과 기술부가 갈등을 빚는 장면도 있었지만, 협의 결과, 결승전에서는 약 30대의 카메라가 배치되었다. 본작에서는 제작 당시 이치카와가 준비한 1600mm 망원 렌즈가 다용되고 있지만, 일부 경기에서는 허가된 경기장 내에 약 9척 정도의 야구라를 세워 촬영하기도 했다. 또한 각 경기 담당자와 협의한 후에, 멀리뛰기는 접근 촬영한 영상, 포환던지기는 허가된 뒤쪽에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 폐회식은 당초 예정에 없던 해프닝 형식으로 막을 내렸고, 전날부터의 촬영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된 이치카와는 불안해하며 경기장 안을 뛰어다니며 촬영 상황을 확인하고, 후일 러쉬를 보고 안도했다.[13]
3. 2. 촬영 에피소드
이치카와 곤 감독은 모든 경기를 직접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감독부를 설치하고 각 경기장에 담당자를 배치했다. 이치카와 감독은 포환던지기, 창던지기, 멀리뛰기, 배구 등 일부 경기에만 직접 참여하고, 그 외에는 아카사카 이궁에 마련된 본부에서 대기했다. 감독과 스태프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매일 원격 회의를 진행했고, 이치카와 감독은 직접 그린 그림 콘티를 카메라맨들에게 배포하며 회의에 힘을 쏟았다.[11]본부는 아카사카 이궁에 설치되었으며, 100여 대의 카메라와 렌즈 등 장비가 준비되었다. 스태프들은 매일 아침 모여 촬영을 나갔고, 대회 종료 후에는 아오이 스튜디오에 편집실과 영사실을 마련하여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다. 이 영화는 올림픽 최초의 컬러 와이드 작품으로, 테크니스코프가 채택되었다. 촬영에는 이스트만, 후지, 사쿠라 세 종류의 필름이 사용되었지만, 기술 감독의 판단에 따라 사쿠라와 후지 필름은 고속 촬영에 부적합하여 일부 장면에만 사용되었고, 대부분은 이스트만 컬러로 촬영되었다.[11]
이치카와 감독은 영화의 주역을 도쿄라는 도시로 설정하고, 올림픽으로 변화하는 도쿄의 모습을 담기 위해 매일 카메라맨과 함께 촬영을 나섰다.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민족의 제전』을 참고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민족의 제전』에서처럼 촬영 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후 촬영'을 통해 성화 봉송 장면 등을 연출했다. 이치카와 감독은 이 영화가 단순한 기록 영화가 아닌, 다양한 감정을 담은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스에서의 성화 점화 촬영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성화 주자가 지나가는 히로시마시 촬영에는 참여했다.[12]
10월 10일 개회식 전날에는 폭풍우가 몰아쳐 개최가 불투명했지만, 당일에는 맑게 개었다. 대회 중에는 촬영용 차량이 한 대만 허가되었고, 고속 카메라 2대, 일반 카메라 2대, 총 4대를 활용하여 주로 마라톤 경기에 사용되었다. 이치카와 감독이 직접 촬영한 여자 배구 경기에서는 실내 경기 특성상 광량 부족으로 망원 렌즈를 사용할 수 없어 광각 렌즈로 촬영해야 했다. 촬영을 둘러싸고 단체 측과 기술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협의 끝에 결승전에서는 약 30대의 카메라가 배치되었다. 제작 당시 준비한 1600mm 망원 렌즈가 많이 사용되었고, 일부 경기에서는 경기장 내에 약 9척(약 2.7m) 높이의 망루를 세워 촬영하기도 했다. 멀리뛰기는 접근 촬영, 포환던지기는 뒤쪽에서 촬영한 영상을 사용했다. 폐회식은 예정에 없던 해프닝 형식으로 진행되어 촬영 계획이 무산되었지만, 이후 촬영 상황을 확인하고 안도했다.[13]
4. 후반 작업
촬영된 필름은 총 연장 40만 피트, 약 70시간 분량이었으나, 컬러로 인화할 예산이 부족하여 모두 흑백으로 인화되었다. 촬영 당일 토요 현상소(현 이매지카)에 필름을 넘겨, 다음 날 저녁 아카사카 이큐(赤坂離宮) 지하실에서 휴대용 영사기로 흑백 래쉬를 확인했다.[14] 이치카와 곤 감독은 모든 필름의 래쉬를 확인한 후, 그 중 4분의 1을 컬러로 다시 인화하고, 3시간으로 편집했다. 극 중 복싱 경기 장면은 "복싱은 격투기이며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독부의 이의 제기로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이치카와 감독은 "생생하게 찍지 않고, 미국의 권투 영화처럼 찍자"라고 설득하여 컬러화되지 않았다.[14]
내레이션은 미쿠니 이치로가 맡았는데, "말투에 지성이 있고, 또한 부드러우며, 그다지 소리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 때문이었다.[15] 음악 감독은 당초 다케미쓰 토루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다른 작품 제작 일정과 겹쳐 다이 미로가 대신 맡게 되었다.[15] 메인 테마는 후쿠시마현에 전해지는 자장가를 편곡한 것으로, 이치카와 감독이 자장가를 사용하고 싶어해 제작되었다.[15]
당시 일본 영화로서는 드물게 스테레오 녹음되었으나,[15] 스테레오 설비가 있는 영화관이 한정되어 있어 자기 3트랙 부착 방식을 사용했다. 사운드트랙은 광학 녹음이 아닌 자기 테이프를 필름 옆에 3개 붙인 형태였으며, 지방 상영을 위해 모노럴 버전이 새로 만들어졌다.[15] 현재 상영되는 버전은 모두 모노럴 버전이다.[15] 철봉에 손바닥이 스치는 소리, 자전거 은륜 소리 등 공들인 음향 소재가 사용되었고, 오하시 테츠야(大橋鉄矢)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분야 녹음 스태프들은 이치카와 감독의 효과음 주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연출 의도를 이해하고 효과음 제작을 진행했다.[15]
4. 1. 편집
촬영된 필름은 컬러 네거티브였으나, 총 연장 40만 피트, 약 70시간 분량에 달했다. 컬러로 인화할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두 흑백 상태로 인화되었다. 촬영 당일 토요 현상소(현 이매지카)에 필름을 넘겨, 다음 날 저녁 아카사카 리큐(赤坂離宮) 지하실에서 휴대용 영사기로 흑백 래쉬를 확인했다.[14]이치카와 곤은 모든 필름의 래쉬를 확인한 후, 그 중 4분의 1을 컬러로 다시 인화하고, 그 컬러 래쉬를 다시 3시간으로 편집하는 과정을 거쳤다. 극 중 복싱 경기 장면은 "복싱은 격투기이며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독부의 이의 제기로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이치카와는 "생생하게 찍지 않고, 미국의 권투 영화처럼 찍자"라고 설득하여 컬러화되지 않았다.[14]
4. 2. 음향
내레이션은 "말투에 지성이 있고, 또한 부드러우며, 그다지 소리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전부터 이치카와 감독이 팬이기도 했던 미쿠니 이치로가 기용되었다.[15] 음악 감독은 당초 다케미쓰 토루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다른 작품의 제작 스케줄과 겹쳐 하차하여, 다이 미로가 급거 기용되었다.[15] 메인 테마는 후쿠시마현에 전해지는 자장가를 편곡한 것으로, 이치카와 감독이 자장가를 사용하고 싶어해 제작되었다.[15]당시 일본 영화로서는 드물게 스테레오 녹음되었으나,[15] 스테레오 설비가 있는 영화관이 한정되어 있어 자기 3트랙 부착 방식을 사용했다.[15] 사운드트랙은 광학 녹음이 아닌 자기 테이프를 필름 옆에 3개 붙인 형태였으며, 지방 상영을 위해 모노럴 버전이 새로 만들어졌다.[15] 현재 상영되는 버전은 모두 모노럴 버전이다.[15] 철봉에 손바닥이 스치는 소리, 자전거 은륜 소리 등 공들인 음향 소재가 사용되었고, 오하시 테츠야(大橋鉄矢)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분야 녹음 스태프들은 이치카와 감독의 효과음 주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연출 의도를 이해하고 효과음 제작을 진행했다.[15]
5. 공개와 논란
이치카와 곤 감독의 영화 《도쿄 올림픽》은 공개 전부터 일본 정부와 시각 차이로 논란이 되었다. 고노 이치로 당시 올림픽 담당 대신은 "기록성을 완전히 무시한 엉망진창인 영화"라고 혹평했고,[17] 아이치 키이치 문부대신도 "문부성으로서 이 영화를 기록 영화로서는 추천할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8]
일본 올림픽 위원회는 이치카와 감독에게 영화 재편집을 요구하여, 원래 165분이었던 영화가 93분으로 줄었다.[17] 이로 인해 교육계는 영화 추천을 취소하는 단체와 유지하는 단체로 나뉘어 혼란을 겪었다.[19]
이러한 상황에서 타카미네 히데코는 도쿄 신문에 이치카와 감독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하고, 고노 이치로와 직접 만나 영화와 이치카와 감독의 장점을 설명하며 면담을 요청했다.[21][22] 이후 고노는 이치카와와 만나 원만하게 화해했다.[23]
이치카와 감독은 20년 후 인터뷰에서 "고노 씨는 말이나 마라톤 경기를 보고 싶어했는데, 영화에 충분히 들어 있지 않아 불만이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25]
5. 1. 시사회 반응
이치카와 곤 총감독은 자신과 아내이자 각본가인 와다 나츠토와의 협업에 더해, 신예 각본가 시라사카 요시오와 시인 타니가와 슌타로를 기용하여 올림픽을 위한 치밀한 각본을 바탕으로 『도쿄 올림픽』을 촬영하는 제작 방식을 택했다.[16] 선수들의 심리 묘사를 중시하고, 초망원 렌즈를 비롯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다각적인 연출을 구사하여, 기존의 '기록 영화'와는 성격이 다른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완성했다. 그러나 이는 '예술인가 기록인가'라는 논쟁을 일으켰다.완성 피로 시사회 이틀 전, 고노 이치로 당시 올림픽 담당 대신은 "기록성을 완전히 무시한 엉망진창인 영화"라고 혹평하며, "기록성을 중시한 영화를 하나 더 만들겠다"라고 말했다.[17] 아이치 키이치 문부대신도 "문부성으로서 이 영화를 기록 영화로서는 추천할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8] 이로 인해 교육계는 혼란에 빠져, 영화 추천을 취소하는 단체와, 개의치 않고 학생들에게 시청을 계속하게 한 단체로 양분되었다.[19]
이러한 상황에서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도쿄 신문에 이치카와를 옹호하는 의견을 기고하고, 고노와 직접 만나 영화와 이치카와의 뛰어난 점을 설명하며 면담을 요청했다.[21][22] 이후 고노는 세 차례에 걸쳐 이치카와와 면담했고, 최종적으로는 이치카와 등 관계자들의 노력을 인정하며 원만하게 화해했다.[23] 이치카와는 훗날 "저 혼란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데코 쨩(타카미네)의 중재 덕분이다"라고 회고했다.[23]
당시의 소동에 대해 이치카와는 영화 완성 20년 후 인터뷰에서 "고노 씨는 말이나 마라톤에 대해 잘 아는 분이었는데, 영화에서 그쪽 경기를 보고 싶어 했지만, 충분히 들어 있지 않아 불만이었던 것이다. 작품을 전면 부정한 것도 아니다. 지금 와서 보면 웃긴 이야기다"라고 말했다.[25]
5. 2. 수정 요구와 갈등
이치카와 곤 감독의 영화 《도쿄 올림픽》은 일본 정부와 감독의 시각 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16] 이치카와 감독은 단순한 기록 영화가 아닌 선수와 관람객에게 초점을 맞춘 예술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올림픽 위원회는 이치카와 감독에게 요구 사항에 맞게 영화를 재편집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원래 165분이었던 영화는 93분으로 줄어들었다.[17]이 과정에서 고노 이치로 올림픽 담당 대신은 영화가 "기록성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비판했고,[17] 아이치 키이치 문부대신도 "기록 영화로 추천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8] 교육계도 혼란에 빠져 추천을 취소하는 단체와 유지하는 단체로 나뉘었다.[19]
이러한 상황에서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이치카와 감독을 옹호하며 고노 대신과 면담을 주선했고,[21][22] 결국 고노 대신은 이치카와 감독과 원만하게 화해하고 영화 제작을 지지하게 되었다.[23][24]
이치카와 감독은 20년 후 인터뷰에서 "고노 씨는 말이나 마라톤 경기를 보고 싶어했는데, 영화에 충분히 들어 있지 않아 마음에 안 들어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25]
영어판에서는 대회 조직위원회가 재편집하여 상영 시간이 일본어판보다 40분 짧아졌다. 이치카와 감독은 2004년에 발매된 DVD에서 자신이 재편집한 디렉터스 컷을 공개했는데, 이 버전도 공개판보다 22분 짧다.
5. 3. 타카미네 히데코의 중재
타카미네 히데코는 1965년 3월 18일자 도쿄 신문에 "이치카와 작품은 올림픽의 오점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적어도 국무 대신이라는 직함을 가진 인물이 할 짓은 아니다"라고 이치카와 곤을 옹호하는 의견을 기고했다.[21] 타카미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고노 이치로와 만나 영화와 이치카와 감독의 뛰어난 점을 설명하고, 고노가 이치카와와 면담할 것을 요청했다.[22]이후 고노는 세 차례에 걸쳐 이치카와와 면담을 가졌고(그 중 두 번은 타카미네도 동석), 이치카와는 예산 및 촬영 일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하며 고노의 이해를 구했다.[23] 고노는 자신의 발언이 신문 기사에 의해 확대된 것이라고 해명하며, 이치카와와 원만하게 악수했다.[23] 결국 고노는 이치카와 등 관계자들의 노력을 인정하며, 프로듀서 타구치에게 전화하여 험악한 분위기를 수습했다.[24]
이치카와는 훗날 "저 혼란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데코 쨩(타카미네)의 중재 덕분이에요"라고 회고했다.[23]
6. 평가와 영향
이 영화는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와 함께 올림픽에 관한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이자, 역대 최고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비평가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단순히 경기 결과 기록에 그치지 않고 선수와 관중의 인간적인 면모, 즉 육체적인 노력, 흥분, 승리의 기쁨, 패배의 실망 등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점이 매우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줌 렌즈와 클로즈업을 사용한 촬영 기법은 스포츠 영화 촬영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치카와 곤 감독은 이 영화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로부터 올림픽 공로 훈장을 받았다.
수상 연도 | 영화제 | 상 이름 |
---|---|---|
칸 영화제 | 비평가상 | |
키네마 준보 | 베스트 텐 제2위 | |
rowspan="3"|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감독 특별상 | |
음악상 | ||
베스트 텐 입선 | ||
일본 영화 기자회 | 베스트 파이브 제3위 | |
영화의 날 | 특별 공로상 | |
NHK 영화상 | 특별상 | |
청소년 대상 | 최우수 영화상 | |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 스포츠 연맹상 |
일본 극장 개봉 당시 1223210000JPY의 배급 수입을 올렸으며, 7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후 학교와 공공 회관에서 상영되어 1,600만 명의 관객을 추가로 동원, 총 2,350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일본 역대 흥행 영화 중 관객 수 기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동률을 이루었다. 프랑스에서는 993,555장의 티켓이 판매되었으며, 일본과 프랑스에서 총 24,493,555장의 티켓이 판매되었다.
6. 1. 긍정적 평가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와 함께 올림픽에 관한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이자, 역대 최고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여겨진다.[5] 단순히 결과 기록에 그치지 않고, 선수와 관중의 인간적인 면모, 즉 육체적인 노력, 흥분, 승리의 기쁨, 패배의 실망 등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점이 매우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5] 줌 렌즈와 클로즈업의 사용은 스포츠 영화 촬영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5] 영화 평점 집계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11개의 리뷰 중 100%의 평론가가 이 영화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5] 감독 이치카와 곤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로부터 올림픽 공로 훈장을 받았다.6. 2. 수상 내역
수상 연도 | 영화제 | 상 이름 |
---|---|---|
칸 영화제 | 비평가상 | |
키네마 준보 | 베스트 텐 제2위 | |
rowspan="3"|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감독 특별상 | |
음악상 | ||
베스트 텐 입선 | ||
일본 영화 기자회 | 베스트 파이브 제3위 | |
영화의 날 | 특별 공로상 | |
NHK 영화상 | 특별상 | |
청소년 대상 | 최우수 영화상 | |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 스포츠 연맹상 |
6. 3. 흥행
이 영화는 일본 극장에서 개봉 당시 1223210000JPY의 배급 임대료 수입을 올렸으며, 7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2] 이후 학교와 공공 회관에서 상영되어 1,600만 명의 관객을 추가로 동원, 총 2,350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일본 역대 흥행 영화 중 관객 수 기준 최고 기록을 세웠다.[2] 이 기록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동률을 이루었다.[3]프랑스에서는 993,555장의 티켓이 판매되었으며,[4] 이로써 일본과 프랑스에서 총 24,493,555장의 티켓이 판매되었다.
7. 출연
- 잭 더글러스
7. 1. 주연
잭 더글러스8. 기타
(도쿄 올림픽 (영화)의 기타 섹션 내용 없음)
8. 1. 다른 올림픽 공식 영화
- 레니 리펜슈탈 감독,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관한 영화 올림피아(1938)
- 로몰로 마르첼리니 감독, 1960년 로마 올림픽에 관한 영화 라 그란데 올림피아(1961)
- 옴니버스 영화로, 1972년 뮌헨 올림픽에 관한 영화 8인의 시선(1973)
- 버드 그린스팬 감독,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관한 영화 16일의 영광(1986)
참조
[1]
웹사이트
Tokyo 1964 Official Film {{!}} Tokyo Olympiad
https://olympics.com[...]
2021-07-22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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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dansha
1984
[3]
웹사이트
日本新記録達成!「千と千尋の神隠し」記者会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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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Tōkyō Orinpikku (1965)
http://www.jpbox-off[...]
2022-03-24
[5]
웹사이트
Tokyo Olympiad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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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6]
웹사이트
The Complete Tokyo 1964 Olympics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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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7]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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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8]
서적
完本 市川崑の映画たち
洋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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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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洋泉社
2015-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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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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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本 市川崑の映画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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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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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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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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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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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16]
서적
完本 市川崑の映画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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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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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オリンピック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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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8]
문서
野地、2011年、p.247。文部省はすでに都道府県[[교육위원회]]に児童生徒が集団鑑賞する通達を出していたが、それについては「取り消さない」との但し書きが着いていた。
[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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洋泉社
2015-11
[20]
문서
完本 市川崑の映画たち
洋泉社
2015-11
[21]
문서
野地、2011年、pp.247 - 248。高峰は市川の監督デビュー作と2作目に主演するなど親しい間柄だった。
[22]
문서
野地、2011年、p.249。河野は高峰の話を笑いながら聞き、「実は映画のことは少しも分からんのだ」と打ち明けたという。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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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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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地、2011年、p.250。2度面談に同席した高峰によると、その模様は「和気あいあいで歓談しただけ」だったという。
[25]
뉴스
1985年8月27日『朝日新聞』
朝日新聞
1985-08-27
[26]
간행물
1972年度日本映画/外国映画業界総決算
キネマ旬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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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ギネスブ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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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28]
뉴스
朝日新聞・昭和39年6月30日朝刊記事
朝日新聞
1964-06-30
[29]
뉴스
朝日新聞・昭和39年5月28日夕刊記事
朝日新聞
1964-05-28
[30]
웹사이트
東京オリンピック(とうきょうおりんぴっく)
http://www.borderles[...]
ボーダーレス/Borderless TOKYO co.,ltd.
2016-02-18
[31]
서적
完本 市川崑の映画たち
洋泉社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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