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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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정 전투는 228년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나라의 손권은 주방에게 위나라 장수 조휴를 유인하기 위해 거짓 투항을 명령했고, 조휴는 이를 믿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완으로 진격했다. 오나라는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조휴를 공격했고, 육손의 반격에 위나라는 대패하여 조휴는 전사하고 가규 또한 사망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위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마의는 철군했으며, 촉나라의 제갈량은 이 기회를 틈타 제2차 북벌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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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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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석정 전투 |
부분전 | 삼국 시대의 전쟁 |
시기 | 228년 8월 |
장소 | 오나라 양주 석정 일대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 서성현) |
원인 | 주방의 거짓 투항 계책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위나라 |
교전국 2 | 오나라 |
지휘관 및 병력 | |
위나라 지휘관 | 조휴, 가규, 왕릉, 만총, 호질 |
위나라 병력 | 10만 명 (일설에는 15만 이상) |
오나라 지휘관 | 육손, 주방, 전종, 주환 |
오나라 병력 | 9만 명 (좌우군 각 3만, 중앙군) |
결과 및 피해 | |
결과 | 오나라의 승리 |
위나라 피해 | 1만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힘 |
관련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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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위는 과거 여러 차례 오에 출병했지만, 연패를 거듭했다.[5] 위의 양주 자사 겸 도독 양주제군사였던 조휴는 227년에 심덕을 참하고 환성을 탈환했고, 오 측에서는 한종이 조휴에게 귀순하는 등 항복자도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의 손권은 번양군의 태수였던 주방에게 위에 거짓 투항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조휴를 오 영내로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조휴는 조비 시대부터 위의 군사 면에서 중진이었기 때문에, 주방은 위장 투항 연기를 철저하게 했다. 주방은 위 영내에 간첩을 보내 조휴에게 투항 의사를 일곱 통에 달하는 편지로 전하거나, 그의 저택에 손권의 질책 사자를 방문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그 사자에게 관청 앞에서 단발과 사죄를 하게 하는 등의 일을 행하게 했다. 이 박진감 넘치는 연기에 조휴는 완전히 속아 형주 제군사를 맡고 있던 사마의와, 예주 제군사를 맡고 있던 가규까지를 별동대로 하여, 총 15만 명 이상의 병사를 이끌고 오로 진군했다.
2. 1. 오나라의 전략
위는 과거 여러 차례 오에 출병했지만, 연패를 거듭했다.[5] 그중 위의 양주 자사 겸 도독 양주제군사였던 조휴는 227년에 심덕을 참하고 환성을 탈환하자, 오 측에서는 한종이 조휴에게 귀순하는 등 항복자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오의 손권은 번양군의 태수였던 주방에게 위에 거짓 투항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조휴를 오 영내로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다만, 조휴는 조비 시대부터 위의 군사 면에서 중진이었기 때문에, 주방은 위장 투항 연기를 철저하게 했다. 이후 주방은 위 영내에 간첩을 보내 조휴에게 투항 의사를 일곱 통에 달하는 편지로 전하거나, 그의 저택에 손권의 질책 사자를 방문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그 사자에게 관청 앞에서 단발과 사죄를 하게 하는 등의 일을 행하게 했다. 이 박진감 넘치는 연기에 조휴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는지, 형주 제군사를 맡고 있던 사마의와, 예주 제군사를 맡고 있던 가규까지를 별동대로 하여, 총 15만 명 이상의 병사를 이끌고 오로 진군했다.3. 전투 과정
오나라의 주방이 위나라에 거짓 투항하자, 위나라 대장군 조휴는 이를 믿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228년, 조휴는 주방의 안내를 받아 완성으로 진군했으나, 이는 오나라의 함정이었다.
한편, 오나라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주환, 전종과 함께 각각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휴를 공격하게 했다. 조휴는 완(皖)으로 가는 길에 오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렸고, 석정으로 후퇴해야 했다. 밤중에 위나라 군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탈영하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병사들이 무기, 갑옷,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다.[3]
속은 것이 부끄러웠던 조휴는 자신의 병력이 많고 정예하다는 것을 믿고 오나라 군대와 교전했다. 육손은 직접 중앙 군대를 이끌었고, 주환과 전종에게 좌익과 우익을 맡도록 명령했다. 세 갈래 군대가 동시에 진격하여 조휴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오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를 협석까지 추격하여 1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수레 1만 대와 조휴 군대의 장비를 대부분 빼앗았다. 왕릉이 목숨을 바쳐 포위망을 뚫은 덕분에 조휴 군대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3]
가규는 조휴에게 주방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조휴는 듣지 않았다. 가규는 조휴가 매복에서 후퇴하도록 도왔고, 이 공로로 위나라 황제 조예에게 칭찬을 받았다.[4]
한편, 조예의 명령으로 동관으로 진격한 가규는 동관에 적의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오나라 군대는 조휴가 진격하는 환현 쪽에 집결했으며 조휴는 이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휴를 지원하는 척 진군했다. 조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속히 진군하여 의병으로 오나라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고, 조휴는 석정까지 물러났다. 사마의 또한 강릉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3. 1. 주방의 거짓 투항과 조휴의 유인
오나라의 손권은 주방에게 위나라 장군 조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위나라에 투항하는 척하도록 명령했다.[2][3] 주방은 위나라를 돕는다는 소식을 전했고, 사마의는 위나라 황제 명제에게 소식을 알리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다. 명제는 조휴에게 명해 오나라를 치게 하고 사마의를 시켜 조휴를 돕게 했으며, 가규에게는 만총, 호질 등 4군을 지휘하여 동관으로 진격하게 했다.하지만 이것은 오나라의 함정이었는데 조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심양을 향해 진격한다. 주방은 그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3] 그는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조휴를 조용한 곳으로 유인하여 조휴가 진지를 칠 수 있도록 했다.[3]
주방은 위장 투항 연기를 철저하게 했다. 위나라 영내에 간첩을 보내 조휴에게 투항 의사를 일곱 통에 달하는 편지로 전하거나, 그의 저택에 손권의 질책 사자를 방문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그 사자에게 관청 앞에서 단발과 사죄를 하게 하는 등의 일을 행하게 했다. 이 박진감 넘치는 연기에 조휴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5]
3. 2. 육손의 반격과 위군의 패배
오나라의 왕 손권은 주방에게 위나라 장군 조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위나라에 투항하는 척하도록 명령했다. 조휴는 속아 군대를 완(皖;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으로 이끌었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황월을 하사했으며, 주환, 전종에게 각각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휴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2][3]조휴는 오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기에 석정으로 후퇴했다. 밤중에 위나라 군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탈영하며 무기, 갑옷,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다.[3]
주방에게 속은 조휴는 부끄러워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가졌다고 생각하여 육손의 군대와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육손은 중앙 군대를 이끌었고, 주환과 전종에게 좌익과 우익을 맡겼다. 세 군대는 동시에 진격하여 조휴의 군대를 무찔렀다. 오나라 군대는 도망치는 위나라 군대를 가시까지 쫓아가 약 10,000명의 적군을 섬멸하고 10,000개 이상의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위나라 군대의 모든 장비와 무기가 약탈당했다.[2][3]
가규는 조휴에게 주방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조휴는 따르지 않고 주방의 계략에 빠졌다. 그는 가규를 지휘에서 해임하고 7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3] 조휴와 함께 왔던 가규는 조휴가 매복에서 후퇴하도록 도왔고, 위나라 황제 조예로부터 칭찬을 받았다.[4]
육손은 병사들을 재집결시켰고, 무창(武昌;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을 지날 때 손권은 시종들에게 육손이 궁궐 문을 드나들 때 자신의 어개를 덮어주도록 했다. 손권은 육손에게 황실 물품, 최고 등급의 귀중품을 하사했다. 육손이 받은 명예는 그 시대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2]
조휴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전장을 탈출했으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등 부위의 피부 감염으로 몇 달 후에 사망했다.[3]
3. 3. 사마의의 철군
조휴가 침공해 오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군 지휘를 맡겼다. 육손은 전종, 주환과 함께 석정 인근 완으로 출진했다.[1] 조휴는 주방의 말대로 석정으로 진군했으나, 완에 손권군이 있음을 알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철수하면 체면이 깎이고, 자군이 대군이라는 점 때문에 진군을 계속했다.[1] 가규는 조휴와 합류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조휴가 유인되어 패할 것이라 예측하고 바로 석정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조휴군이 육손군의 매복과 주환, 전종 군대의 좌우 기습으로 궤멸 직전이며,[2] 퇴로도 막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규는 진군 속도를 높여 깃발과 북으로 군세를 과장해 오나라 매복 병력을 물러나게 했다. 위군은 오나라 군의 포위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사마의 또한 옹량 군세를 이끌고 강릉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했다.[1]4. 결과 및 영향
석정 전투는 오나라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손권은 229년에 황제를 자칭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촉한에도 전해져 제갈량이 제2차 북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4. 1. 위나라의 피해
이 전투의 패배로 조휴는 등창으로 사망했고, 가규도 급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위나라의 양주 방면 전선은 만총이 전장군 ·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어 담당했다.[2][3] 조휴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전장을 탈출했지만,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등 부위의 피부 감염으로 몇 달 후에 사망했다.[3]가규는 조휴가 매복에서 후퇴하도록 도왔으며, 이 공로로 위나라 황제 조예로부터 칭찬을 받았다.[4] 가규 또한 전투 직후 질병으로 사망했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군대의 총지휘를 맡겼다. 육손은 전종과 주환을 이끌고 석정 근처의 완으로 출진했다. 조휴는 주방의 말에 따라 석정으로 진군했으나, 완에 손권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을 깨달았다. 하지만 군대가 많다는 점과 철수 시 체면을 구길 수 있다는 이유로 진군을 계속했다. 가규는 조휴와 합류하라는 조칙을 받았지만, 조휴가 유인되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즉시 석정으로 향했다. 그러나 행군 도중에 이미 조휴는 육손군의 매복과 주환, 전종 군대의 좌우 기습으로 궤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퇴로도 막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규는 더욱 속도를 높여 진군했고, 깃발과 진중 북으로 자군을 많게 보이게 하여 오나라의 매복 병사를 퇴각시켰다. 오나라 군의 포위에서 위나라 군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전투에서 위나라는 수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는 등 큰 손해를 입고 대패했다.
4. 2. 오나라의 승리
오나라의 왕 손권은 주방에게 위나라 장군 조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위나라에 투항하는 척하도록 명령했다. 조휴는 속아 군대를 완(皖;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으로 이끌었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조휴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완으로 가는 길에 조휴는 오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기에 시팅으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밤중에 위나라 군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탈영하고 무기, 갑옷,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다.[2][3]조휴는 위나라 황제 조예에게 사과하고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썼으나, 주방에게 속은 것이 부끄러워 육손의 군대와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육손은 중앙 군대를 이끌었고 주환과 전종에게 좌익과 우익을 맡겼다. 세 군대는 동시에 진격하여 조휴의 군대를 격파했다. 오나라 군대는 도망치는 위나라 군대를 가시까지 쫓아가 10,000명 가량의 적군을 섬멸하고 10,000개 이상의 전리품을 획득했다. 위나라 군대의 모든 장비와 무기가 약탈당했다.[2][3]
육손은 병사들을 재집결시켰고, 무창(武昌;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을 지날 때 손권은 시종들에게 육손이 궁궐 문을 드나들 때 자신의 어개를 덮어주도록 지시했다.[2][3] 손권은 육손에게 황실 물품, 최고 등급의 귀중품을 하사하며 그 시대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명예를 내렸다.[2]
전투 후 손권은 개선한 육손을 황제와 같은 대우로 환대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방은 비장군에 임명되어 출세했다. 229년 손권은 황제를 자칭했다.
4. 3. 촉한의 제2차 북벌
사마의에게 조휴의 소식이 전해지자 사마의 역시 철군하였다. 이 소식은 촉나라에도 전해져 제갈량이 다시 제2차 북벌을 일으켰다.[1]5. 기타
주어진 원본 소스에 석정 전투의 기타 내용을 언급하는 부분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다. (이전 출력과 동일)
5. 1. 가규와 조휴의 갈등
조휴는 주방에게 속아 가규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가규를 지휘에서 해임했다.[3]조휴와 함께 왔던 가규는 조휴가 매복에서 후퇴하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가규는 위나라 황제 조예로부터 칭찬을 받았다.[4]
기습을 받아 군이 괴멸 직전에 이르자, 조휴 자신도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는 종군했던 왕릉의 분전도 있었고 (위지 「왕릉전」), 예상되는 도주 경로를 미리 막으려는 주환의 계략이 사전에 손권과 작전을 협의했던 육손에게 채택되지 않았다는 측면도 있지만 (오지 「주환전」), 그중에서도 가규가 조휴의 패배를 가장 먼저 예상하고 구원에 온 것이 컸다. 조휴에게 가규는 생명의 은인이 되었지만, 조휴는 가규에게 예우 대신 구원에 늦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질책을 가했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 전에도 조휴가 가규의 승진을 방해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가규는 보신을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휴와 가규는 전투 직후 사망했는데, 조휴는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등 부위의 피부 감염으로, 가규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5. 2.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주 교전처가 환성, 협석이 아닌 석정으로 되어 있다. 또, 서성이 참전하여 활약하는 것으로 나온다.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7
[2]
서적
Sanguozhi vol. 58
[3]
서적
Sanguozhi vol. 9
[4]
서적
Sanguozhi, vol.15
[5]
서적
『三国志』魏書「賈詡伝」・「蔣済伝」・呉書「徐盛伝」・「孫韶伝」・『晋書』・『資治通鑑』
[6]
서적
삼국지 권56 오서 주치주연여범주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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