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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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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정 전투는 228년 촉한의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가정 지역 방어를 맡겼으나,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와 달리 부적절한 전술을 사용하여 장합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촉한은 북벌의 중요한 거점을 잃고 퇴각했으며, 마속은 처형당했다. 이 전투는 읍참마속 고사의 배경이 되었으며, 제갈량의 북벌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며, 여러 후보지가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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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가정 전투
관련 전쟁제갈량의 제1차 북벌
시기228년
위치촉나라 가정 (현재 간쑤성톈수이시친안현 룽청진)
결과위나라의 승리, 이 전투로 인하여 제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마속은 군법 위반으로 처형됨
교전 세력
교전국 1촉한
교전국 2위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촉한 지휘관마속
왕평
위연
고상
위나라 지휘관장합
허저
장패
신탐
신의
곽회
조진
사마소
사마사
사마의
병력 규모
촉한 병력3만
위나라 병력『위략』에 따르면 보병과 기병 5만, 또는 15만
피해 규모
촉한 피해마속의 선봉대 궤멸

2. 전투 이전 상황

225년, 제갈량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내부 안정을 확보한 뒤, 유비의 숙원이었던 한실 부흥 계획에 착수했다. 227년에는 북벌 준비를 마치고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쳐 위나라 타도를 맹세했다. 제갈량은 스스로 여러 군의 총지휘를 맡아 한중으로 출진·주둔했다.

제갈량과 동행한 승상부의 주요 인물로는 승상 장사 양의, 승상 참군 비의가 있었다. 성도에는 승상부 류부가 설치되어 류부 장사 사성교위 장익, 류부 참군 장완이 제갈량의 빈자리를 지켰다. 상서대는 상서령 진진과 상서복야 이복이, 유선의 신변은 시중 곽유지와 황문시랑 동윤이 담당했다. 도호 이엄은 한중과 성도를 잇기 위해 영안을 진도에게 맡기고 강주로 이동하여 성을 쌓았다.[25]

『삼국지』 위연전에 따르면, 촉 장수 위연은 병사 1만 명을 지휘하여 한신처럼 제갈량 본대와 다른 길로 가 동관에서 합류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위략』에 따르면, 장안에는 안서장군 하후무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위연은 그가 겁 많고 무책임한 인물임을 이용해 정예병 5천 명으로 장안을 기습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두 작전 모두 채택하지 않았다.

2. 1. 촉한의 북벌 준비

225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내부 안정을 확보한 제갈량유비의 숙원이었던 한실 부흥 계획에 착수했다. 227년, 북벌 준비를 마친 제갈량은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쳐 위나라 타도를 맹세하고, 스스로 여러 군의 총지휘를 맡아 한중으로 출진·주둔했다.

제갈량과 동행하여 승상부의 여러 일을 담당하는 자로서 승상 장사에 양의, 승상 참군에 비의가 임명되었다. 성도에는 승상부의 류부가 설치되어 류부 장사에 사성교위 장익, 류부 참군에 장완이 배치되어 제갈량의 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상서대는 상서령 진진과 상서복야 이복에게, 유선의 신변에 관한 것은 시중 곽유지와 황문시랑 동윤에게 맡겨졌다. 또한 도호 이엄은 한중과 성도를 잇기 위해, 영안을 진도에게 맡기고 강주로 이동하여 성을 쌓았다.[25]

『삼국지』 위연전에 따르면, 촉 장수 위연은 자신이 병사 1만 명을 지휘하여, 과거 한신처럼 제갈량의 본대와 다른 길을 통해 동관에서 합류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또한 『위략』에 따르면, 당시 장안에는 안서장군 하후무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가 겁이 많고 무책임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위연은 한중에서의 군사 회의에서 자신이 정예 5천 명을 지휘하여 장안을 기습하는 작전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위연의 작전을 채택하지 않았다.

3. 전투의 경과

225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한 제갈량유비의 숙원이던 한실 부흥 계획에 착수했다. 227년, 북벌 준비를 마친 제갈량은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쳐 타도를 맹세하고, 스스로 여러 군의 총지휘를 맡아 한중으로 출진·주둔했다.

제갈량과 동행한 승상부의 주요 인물로는 승상 장사 양의, 승상 참군 비의가 있었다. 성도에는 승상부 류부가 설치되어 류부 장사에 사성교위 장익, 류부 참군에 장완이 배치되었다. 상서대는 상서령 진진과 상서복야 이복이, 유선의 신변은 시중 곽유지와 황문시랑 동윤이 맡았다. 이엄은 영안을 진도에게 맡기고 강주로 이동하여 성을 쌓았다[25].

『삼국지』 위연전에 따르면, 위연은 병사 1만 명을 지휘하여 한신처럼 제갈량의 본대와 다른 길을 통해 동관에서 합류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위략』에 따르면, 장안에 주둔한 안서장군 하후무의 무능함을 간파한 위연은 정예 5천 명으로 장안을 기습하는 작전도 제안했으나, 제갈량은 채택하지 않았다.

위나라 조정은 촉에 대한 대비가 없었고, 제갈량이 세 군을 항복시키자 공황 상태에 빠졌다(『위략』). 양주자사는 맹건에서 서막으로 교체되었다.

조진기곡조운등지를 격파하고[27], 안정의 월지를 함락시켰다. 조운은 패했지만 병력을 잘 수습하여 큰 피해는 없었다. 고상곽회에게 패했다.

제갈량은 가정 패전으로 진군로 확보에 실패하자 전군을 철수시키고, 서현의 1,000여 가구를 으로 이주시켰다.

3. 1. 촉한의 초기 진격

228년 봄, 제갈량은 사곡도를 통해 미를 공격할 것이라고 선전하고, 조운등지기곡에 배치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주력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우회하여 기산을 공격했다.[2][3]

촉한에 대비하지 못했던 는 동요했고, 천수, 남안, 안정 3군이 촉에 투항했다. 남안 백성들은 촉군을 이끌고 농서까지 진출했다. 농서 태수 유초가 유일하게 저항했으나, 촉군은 곧 병력을 철수했다. 양주자사 서막무위에서 동진하여 남안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 상규로 도망친 천수태수 마준의 부하 강유는 촉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위에서 도망갈 곳을 잃고 제갈량에게 항복했다.[2]

3. 2. 가정 전투

228년 봄, 제갈량은 사곡도에서 미를 빼앗을 것이라고 선전하고, 조운·등지기곡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주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우회하여 기산을 공격했다. 촉나라에 대비하지 못했던 위나라는 동요했고, 천수·남안·안정의 3군이 촉나라에 투항하여 남안의 백성이 촉군을 이끌고 롱서까지 진출했다.[27] 유초가 저항하여 촉군 지휘관에게 공격의 무의미함을 호소하자 촉군은 곧 병력을 철수했다. 양주자사 서막무위에서 동진하여 남안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 상규로 도망친 천수태수 마준의 부하 강유는 촉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위나라에서 도망갈 곳을 잃고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사태를 우려한 위나라 황제 조예장안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하후무를 해임하고 조진에게 관중 방면을 맡겼으며, 장합에게는 제갈량에 맞서 여러 영토를 되찾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갈량은, 위연·오의 등 경험 많은 장수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을 듣지 않고, 마속을 발탁하여 대군의 지휘를 맡겨 가정에서 장합에 대비하게 했다.

경극 「가정의 패배」의 마속


마속은 가정에 포진했지만, 제갈량의 지시와 다르게 행동하여 타당성이 부족했다. 장합전에는 마속이 남산을 의지하여 성에 주둔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마속은 부장 왕평의 거듭된 간언을 듣지 않고, 물길을 버리고 산 위에 진을 쳤다.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먼저 촉군의 물길을 끊고, 물이 끊긴 촉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9] 촉군의 대부분은 궤멸되었지만, 왕평이 지휘하는 1,000명의 병사만이 군고를 울리며 정연하게 버텼기 때문에, 장합은 복병을 경계하여 추격을 멈추었다.[11]

가정은 보급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고, 제갈량은 마속과 왕평을 보내 이 지역을 지키게 했다. 마속은 왕평과 동행했지만 그의 올바른 군사적 조언을 듣지 않았다. 순전히 병법에만 의존한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와는 달리 "고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도시에 주둔하는 대신 산에 기지를 세웠다. 그는 또한 물이 풍부한 계곡에 진을 치라는 왕평의 조언도 무시했다. 그러나 왕평은 마속을 설득하여 병력의 일부를 지휘하게 했고, 마속이 위험에 처했을 때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마속의 진영 근처에 별도의 진지를 설치했다.[7][8]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촉군이 철수한 후, 조진장합이 천수, 남안, 안정 3군을 평정했다.[2] 남안과 천수의 태수는 중벌을 받았고, 촉군에 유일하게 저항한 농서 태수 유초만이 공적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2] 조예는 유초에게 특별히 승전을 허락했고, 유초는 조예의 숙위에 취임하기를 원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2]

촉한의 북벌에서, 위의 황제 조예를 독전(督戰)을 위해 끌어낸 것은 이 전역뿐이며(오장원의 전투에서는 조예는 대오(對吳) 방면으로 친정했다), 전역의 규모도 옹주에서 량주에까지 미치는 등, 가장 큰 것이었다.[3] 위가 촉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던 이 전역에서 기산 일대를 점령하지 못한 촉군은, 이후 촉에 대비한 위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강요받게 되었다.[3]

4. 1. 촉한의 패배와 후퇴

마속은 가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옛 친구인 향랑에게 도망쳤고, 향랑도 이를 묵인했지만, 곧 체포되어 투옥 및 처형되었다.[1] 이것은 유명한 고사인 '''울면서 마속을 벤다'''로 알려져 있다.[1] 마속 휘하의 장교인 장휴와 이성도 처형되었고, 장교 황습 휘하의 병사들은 박탈되었다.[1] 향랑은 마속의 도망을 묵인한 탓에 북벌 사무에서 제외되어 성도로 귀환했다.[1] 제갈량도 책임을 지고 3계급 강등되어 승상에서 우장군으로, 조운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가정에서 선전한 왕평만이 관위가 올라 참군의 지위를 더했다.[1]

촉군 철수 후, 천수, 남안, 안정 3군은 조진장합에 의해 평정되었고, 남안과 천수의 태수는 중벌을 받았다.[2] 유일하게 촉군에 저항한 농서 태수 유초만이 공적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고, 그의 부하들도 출세했다.[2] 조예로부터 특별히 승전을 허락받은 유초는 조예의 숙위에 취임하기를 원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2]

촉한에 의한 북벌에서, 위의 황제를 독전(督戰)을 위해 끌어낸 것은 이 전역뿐이며(오장원의 전투에서는 조예는 대오(對吳) 방면으로 친정했다), 전역의 규모도 옹주에서 량주에까지 미치는 등, 가장 큰 것이었다.[3] 위가 촉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던 이 전역에서 기산 일대를 점령하지 못한 촉군은, 이후 촉에 대비한 위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강요받게 되었다.[3]

4. 2. 읍참마속(泣斬馬謖)

마속은 전장에서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3] 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참했다는 고사이다.[13] 마속의 옛 친구 향랑은 마속의 도주를 묵인했지만, 곧 체포되어 투옥 및 처형되었다.[17] 마속 휘하 장수 장휴이성도 처형되었고,[15] 황습 휘하 병사들은 박탈되었다.[18] 향랑은 마속의 도망을 묵인한 탓에 북벌 업무에서 제외되어 성도로 귀환했다.[17]

제갈량은 책임을 지고 3계급 강등되어 승상에서 우장군으로 강등되었고,[18] 조운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18] 반면, 왕평은 공을 인정받아 관직이 올라 참군의 지위를 더했다.[18]

유비는 생전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제갈량에게 마속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 마속은 처형되기 전 제갈량에게 편지를 썼는데, "현명하신 주군께서는 저를 아들처럼 여기셨고, 저는 주군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바라건대, 이는 건이 처형되어 가 일어나는 의로움과 같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19]

4. 3. 위나라의 반격

조진장합이 천수, 남안, 안정 3군을 평정했고, 남안과 천수의 태수는 중벌을 받았다. 촉한에 유일하게 저항한 농서 태수 유초는 공적을 인정받아 열후에 봉해졌으며, 부하들도 출세했다. 조예는 유초에게 특별히 승전을 허락했고, 유초는 조예의 숙위에 취임하기를 원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

4. 4. 장기적 영향

가정 전투의 패배로 제1차 북벌은 실패로 끝났고, 촉한은 한중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로 인해 촉한의 북벌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21] 마속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갈량에 의해 사형되었고,[14]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받았다. 제갈량 자신도 유선 황제에게 강등을 요청하여 3계급 강등되었다.[18]

촉군 철수 후, 천수, 남안, 안정 3군은 조진장합에 의해 평정되었다.[21] 유일하게 촉군에 저항한 농서 태수 유초만이 공적을 인정받아 열후에 봉해졌다. 이후 위나라는 촉한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게 되었고, 촉군은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5. 삼국지연의의 묘사

제갈량마속과 왕평에게 정예병 2만 5000명을 주어 가정을 지키게 하고, 고상에게는 군사 1만 명을 주어 가정 동북쪽의 열류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위연에게는 양평관을 가는 길목을 막아 가정 방어를 후원하게 했다.[28]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산 위에 군사를 주둔하자고 제안했지만, 왕평은 산 길목에 영채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의견 충돌이 발생했지만, 마속은 결국 산 위에 영채를 세웠고, 왕평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산에서 4km쯤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웠다.[28]

사마의는 장남 사마소를 보내 가정 일대를 정탐하게 한 뒤, 군사를 이끌고 마속이 주둔한 산을 포위했으며, 장합에게는 왕평을 막도록 했다.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촉군은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의가 산에 불을 지르자 마속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산 서쪽으로 후퇴했다.[28]

마속은 장합의 추격을 피해 12km쯤 도망가다가 위연과 합류해 장합에 다시 맞섰으나, 사마의와 사마소의 협공으로 다시 크게 패하여 포위되었다. 하지만 왕평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왕평, 위연과 함께 열류성을 지키던 고상에게로 달아났다.[28]

왕평, 위연, 고상은 군사를 모아 가정을 탈환하기로 했으나, 위연과 고상은 위군의 기습으로 패배하고, 왕평이 도우러 오지만 곽회의 공격으로 패배한다. 사마의와 장합은 가정성을 점령했으며, 양평관까지 함락될 것을 우려한 위연은 양평, 고상과 함께 양평관으로 후퇴한다.[28]

이때 왕평의 충고를 무시하고 산 위에 진을 쳐 패배한 책임을 물어 제갈량이 직접 마속을 처형하였다. 이때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참했다'고 하여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이 나왔다. 유비는 생전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28]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마속은 눈물을 흘리는 제갈량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는데, 제갈량은 마속의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유지하여 매우 꺼려지는 결정이었다. 이 장면은 중국 경극에서도 재연되었다. 중국 속담인 "눈물을 닦으며 마속을 베다"는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관계나 능력에 관계없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에서, 가정 전투의 패배는 제갈량의 현재 위치인 방어력이 취약한 서성(西城)을 노출시켰다. 제갈량은 후퇴하기 전에 공성계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쳤다.

소설을 포함한 많은 이야기에서, 이 전투에는 위나라 측에 사마의가 등장하지만, 이는 삼국지의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불가능한 사건이다. 모스 로버츠는 그의 영어 번역본 삼국지연의 4권에서 역사적인 사마의는 "공성계"를 위해 서부 전선에 있지 않았고, 남방 전선에서 오나라와 더 중요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6. 전투의 위치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甘肃经济日报|간쑤 경제일보중국어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몇 그럴듯한 위치가 있다.[22]



전투 기념비는 룽청에 위치해 있다. 지형 증거와 발견된 무기들을 볼 때 룽청이 가장 유력한 장소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22]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Jin Shu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20]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뉴스 街亭之战位在何处 http://www.gsjb.com/[...] 2023-05-05
[23] 서적 Three Kingdoms Volume IV Foreign Languages Press
[24] 서적 続漢書郡国志五
[25] 서적 蜀書巻三・後主伝「四年春、都護李厳自永安住江州、築大城」
[26] 서적 「劉曄伝」によれば、魏の朝廷では蜀は小国であり名将は[[関羽]]のみとされていた
[27] 서적 「諸葛亮伝」によれば趙雲らの軍は擬軍であったが、不戒の失敗があった。『漢晋春秋』によれば趙雲らの兵は曹真が派遣した兵より多かったが、「趙雲伝」によれば趙雲らの兵は弱く曹真の兵は強かった。
[28] 서적 《삼국지》 주해를 보면 사마의가 그 싸움에 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마의는 당시 형주 도독이었기에 '완성'에 주둔했으니 제갈량과 맞서지 않았다.(리동혁 《삼국지가 울고 있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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