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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도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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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오도토스 2세는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박트리아를 통치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지배자이다. 그는 디오도토스 1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공동 섭정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어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했다. 이후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살해당했다. 그의 치세 동안 금화, 은화, 청동화를 발행했으며, 아가토클레스와 안티마쿠스 1세는 그의 기억을 기리는 주화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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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도토스 2세
기본 정보
디오도토스 2세의 주화
칭호바실레우스
통치 기간기원전 235년 – 225년경
전임디오도토스 1세
후임에우티데모스 1세
왕조디오도토스
아버지디오도토스 1세
사망 시기기원전 225년경
사망 장소박트리아
이름
그리스어Διόδοτος Θεός (디오도토스 테오스)
기타
계승박트리아 왕

2. 배경 및 공동 섭정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308년에서 305년 사이에 박트리아와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제국의 사트라피(속주)로 만들었다. 디오도토스 1세는 기원전 260년대에 박트리아 지역을 사트라프(총독)로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기원전 261-246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점차 독립을 추구했다. 이 과정은 디오도토스 1세가 기원전 255년에서 245년 사이에 스스로 왕임을 선포하면서 절정에 달했다.[2]

디오도토스 1세 치하에서 주조된 동전은 두 개의 다른 조폐소에서 나왔다. 한 조폐소의 동전에는 앞면에 성숙한 남자가 묘사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디오도토스 1세로 확인되며, 다른 조폐소에서 생산된 동전의 앞면에는 유사하지만 더 젊은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프랭크 L. 홀트는 후자가 디오도토스 2세라고 주장한다. 그는 디오도토스가 두 번째 조폐소를 포함한 왕국의 일부를 통제하도록 위임받았다고 추측한다. 이러한 배치는 태자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박트리아 포함)를 통치하도록 맡기는 관행을 따랐던 셀레우코스 제국이 확립한 모델을 따랐을 것이다.[3] 디오도토스 2세의 통치 지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홀트는 그가 파르티아의 침략에 노출된 서부 지역을 통치했으며, 박트라에 근거지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2]

3. 즉위와 파르티아와의 동맹

디오도토스 1세는 파르니 왕 아르사케스 1세를 박트리아에서 몰아냈다. 아르사케스는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파르티아 지역을 빼앗아 현재 북동부 이란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디오도토스 1세는 파르니에 계속 반대하며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맹을 유지했다. 디오도토스 2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정책을 뒤집었다.[4]

디오도토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분 틈을 타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왕국과 대립하게 된다. 파르티아의 군주 아르사케스 1세는 동쪽으로 박트리아, 서쪽으로 셀레우코스 제국과 접해 있었고, 그 양쪽의 그리스인 왕국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디오도토스 1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아르사케스 1세는 디오도토스 1세의 아들인 디오도토스 2세와 동맹 및 강화 조약을 맺어 뒤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4. 에우튀데모스와의 내전 및 최후

디오도토스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파르니 왕 아르사케스 1세를 박트리아에서 몰아냈다. 아르사케스는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파르티아 지역을 빼앗아 현재의 북동부 이란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디오도토스 1세는 파르니에 계속 반대하며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맹을 유지했다. 디오도토스 2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정책을 뒤집었다.[4]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디오도토스 1세의 죽음으로 안도한 아르사케스는 디오도토스 2세와 평화 및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아르사케스는 셀레우코스 2세와 싸워 승리했고, 파르티아인들은 이 날을 그들의 자유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기념했다.[4]

셀레우코스 2세와 아르사케스 사이의 이 전투는 기원전 228년경에 일어났다. 디오도토스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중립을 유지하여 아르사케스가 모든 군대를 침략하는 셀레우코스 군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는지는 불분명하다.[4]

이후 기원전 225년경, 디오도토스는 왕위를 찬탈하고 에우튀데모스 왕조를 세운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살해당했다.[5] 아이-하눔 도시가 기원전 225년경에 포위되었음이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밝혀졌는데, 이는 에우튀데모스의 권력 장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전 시기가 있었고, 이는 에우튀데모스의 승리로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화폐학적 증거에 의해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8]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르사케스와의 동맹을 셀레우코스 2세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보았다. 프랭크 홀트는 아르사케스와의 동맹이 에우튀데모스와의 내전 발발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제안한다.[9]

기원전 230년 또는 기원전 223년경, 디오도토스 2세는 마그네시아 출신 장군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일족과 함께 살해당하고 왕위를 찬탈당한다. 이 이후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에우튀데모스 왕조라고도 불린다.

5. 주화

디오도토스 2세는 아버지 디오도토스 1세가 확립한 주조 방식을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금화, 은화, 청동화를 발행하는 두 개의 조폐소가 있었다. 귀금속 주화는 금 스타테르와 은 테트라드라크마, 드라크마, 그리고 헤미드라크마로 구성되었으며, 아티카 중량 표준을 따랐다.

디오도토스 1세의 금 스타테르, 그리스어 명문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 – "안티오코스 왕의"


디오도토스 2세의 금 스타테르, 그리스어 명문 ΒΑΣΙΛΕΩΣ ΔΙΟΔΟΤΟΥ – "디오도토스 왕의"


디오도토스 1세의 청동 싱글, 그리스어 명문 ΒΑΣΙΛΕΩΣ ΔΙΟΔΟΤΟΥ – "디오도토스 왕의" (H 계열)


이 동전들은 앞면에 디아뎀을 착용한 남성 인물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디아뎀은 머리 주위에 감싸고 뒤로 두 줄이 늘어지는 천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헬레니즘 왕권의 표준적인 상징이었다. 이 동전의 뒷면에는 번개를 던지려는 제우스가 묘사되어 있었다. 디오도토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앞면에 두 개의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즉, 더 나이가 많은 인물('A 계열')과 더 젊은 인물('C & E 계열')이 각각 디오도토스 1세와 디오도토스 2세로 여겨진다.[13] A 계열과 C 계열은 아마도 아이-하눔[10] 또는 박트라에서 주조되었을 것이며,[11] E 계열은 프랭크 홀트가 잠정적으로 박트라로 확인한 두 번째 조폐소에서 주조되었다.[12]

중단 후, 두 조폐소 모두 더 젊은 초상과 Βασιλεωσ Διοδοτουgrc ('디오도토스의', 'D & F 계열')라는 명문이 있는 동전을 생산했다. 이전 동전의 명문은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grc ('안티오코스 왕의')였다. 홀트는 이 중단이 디오도토스 1세의 죽음과 디오도토스 2세의 즉위를 나타낸다고 제안한다.[13] 이러한 명문의 변화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권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박트리아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14]

디오도토스 2세는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비교적 적은 규모로 주화를 발행했다. 통치 말기에 그는 훨씬 더 큰 규모로 주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금화를 발행했다. 이는 두 번째 조폐소에서 디오도토스 1세의 더 늙은 인물을 다시 묘사했지만, 더욱 이상화된 방식('B 계열')으로 발행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디오도토스 2세는 또한 청동화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이 주화가 디오도토스 1세의 것과 동일한 앞면 디자인을 담고 있었다. 즉, 페타소스 모자를 쓴 헤르메스의 머리('H 계열')였다. 그러나 뒷면 디자인은 새로운 것이었다. 창에 기대어 있는 아테나의 묘사, 그리고 금화 및 은화와 마찬가지로 "Βασιλεωσ Διοδοτου" ("디오도토스 왕의")라는 새로운 명문의 도입이 있었다. 주화는 네 가지 액면가로 구성되었다.

종류무게지름
더블약 8.4그램20~24밀리미터
싱글4.2g14–18 mm
하프2.1g10–12 mm
쿼터1g8–10 mm

[16]

처음 두 가지 액면가만 디오도토스 1세 시대에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 액면가의 가치는 불확실하다. 싱글은 은 드라크마의 1/48 가치였을 수 있다.[15] 이 초기 발행 이후, 디오도토스는 새로운 디자인 세트('I 계열')를 도입했다. 더블 및 싱글 액면가에서는 앞면에 제우스의 머리가 묘사되었고(왕을 묘사한 한 발행을 제외하고—아마도 실수로), 뒷면에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묘사되었다. 쿼터에서는 앞면에 독수리가, 뒷면에는 화살통이 묘사되었다(각각 제우스와 아르테미스의 상징).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11.34.2 https://penelope.uch[...]
[6] 서적 The Greeks in Bactria and Indi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06-24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Seleucid Coins of Bactria CNG 1996
[11] 서적 Le roi et l'économie: autonomies locales et structures royales dans l'économie de l'empire séleucide : actes des rencontres de Lille, 23 juin 2003, et d'Orléans, 29-30 janvier 2004 2005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Coins of ALexander's Successors in the East (Bactria, Ariana, and India) 1884
[16] 서적
[1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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