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박트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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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25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디오도토스 1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마르기아나를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으며, 데메트리오스 1세 시기에는 인도 북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왕국은 분열과 쇠퇴를 겪었으며,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130년 사이에 유목 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문화의 융합, 중국과의 교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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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박트리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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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일반 명칭 |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박트리아 왕국 그리스-박트리아 그라에코-박트리아 |
역사 | |
존속 기간 | 기원전 256년 ~ 기원전 120년경 |
이전 국가 | 셀레우코스 제국 |
계승 국가 | 인도-그리스 왕국 파르티아 제국 쿠샨 제국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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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
정치 | |
정치 체제 | 헬레니즘 군주제 |
지도자 | 디오도토스 1세 (초대) 헬리오클레스 1세 (마지막) |
통치자 칭호 | 바실레우스 |
통계 | |
면적 (기원전 184년) | 2,500,000 km² |
언어 | |
공용어 | 그리스어 (공식) 박트리아어 산스크리트어 아람어 소그드어 파르티아어 |
종교 | |
화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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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기원전 256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총독)였던 디오도토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켜 박트라(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를 도읍으로 하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했다.[17] 이때 북부 소그디아나(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주와 부하라주, 타지키스탄 소그드주 일대, 페르가나 분지의 소그드인 국가), 서쪽 마르기아나(현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정복했다.[20]
디오도토스 2세 시대인 기원전 228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한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어 서방을 굳건히 했다.[23]
에우티데모스 1세는 기원전 230년경 디오도토스 2세를 타도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세력은 소그디아나를 넘어 페르가나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까지 미쳤다.[26]
기원전 21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에우티데모스 1세를 공격했으나, 박트라에서 3년간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버텨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에우티데모스 1세를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했다.[28]
에우튀데모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180년 이전에 인도 아대륙 침략을 시작했다. 침략은 기원전 175년에 완료되었고, 이를 통해 북서부 인도 아대륙에 인도-그리스 왕국이 세워졌다.
기원전 171년경, 에우크라티데스 1세가 에우튀데미데스 왕조를 전복하여 자신의 왕조인 유크라티데스 왕조를 세웠다.[33] 이로 인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박트리아 지역의 에우크라티데스 가문과 인도 지역의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인도-그리스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북 인도를 다시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기원전 145년경,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아들 헬리오클레스 1세[73]에게 살해당했다.
헬리오클레스 1세는 마지막 그리스-박트리아 왕으로,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130년 사이에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으로 왕국이 멸망하면서 박트리아를 버리고 카불 계곡으로 수도를 옮겼다.[75]
북방 유목 민족인 월지는 흉노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162년에는 흉노에 의해 일리강 계곡으로 밀려났고, 기원전 132년에는 우순에 의해 다시 쫓겨나 옥수스강 북쪽 영토로 이주하여 사카스탄의 유목 민족을 몰아냈다.[37]
기원전 140년경, 스키타이인(사카)은 월지의 남하에 밀려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한서의 외교관 장건은 기원전 126년 월지를 방문하여 흉노와의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는 월지가 옥수스 강 북쪽에 정착했지만, 박트리아의 나머지 지역인 옥수스 강 남쪽 영토도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월지는 기원전 120년경 박트리아 남쪽으로 더 확장되었는데, 북쪽 우순의 침략으로 더욱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스키타이 부족을 몰아냈고, 인도로 이동한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스키타이인으로 확인되었다.
헬리오클레스는 박트리아를 버리고 카불 계곡으로 수도를 옮겼다. 헬리오클레스는 기술적으로 마지막 그리스-박트리아 왕이지만, 그의 후손 중 일부는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 이동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의 서부를 형성했다.
2. 1. 건국 이전
기원전 518년경, 박트리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시대에 정복되어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메디아 왕국이 박트리아 지방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72]다리우스 1세 시대부터 박트리아에는 그리스인 정착민들이 거주했는데, 당시 키레나이카의 바르카 인구 대다수가 암살자 인도를 거부하여 이 지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14] 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에는 디디마 (서부 아나톨리아) 근처에 살았던 그리스 사제들의 후손들이 박트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15] 이후 전쟁 포로를 포함한 다른 추방된 그리스인들과 함께하며 그리스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기원전 328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박트리아를 정복할 당시 이 지역에는 이미 그리스 공동체와 언어가 널리 퍼져 있었다.[16]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박트리아가 정복되었다. 대왕의 사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시리아의 일부가 되어 종군 그리스인의 일부가 계속 거주했다.
2. 2. 디오도토스 왕조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30년)
기원전 256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총독)였던 디오도토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여 박트라(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를 도읍으로 하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했다.[17] 이때 북부 소그디아나(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주와 부하라주, 타지키스탄 소그드주 일대, 페르가나 분지의 소그드인 국가), 서쪽 마르기아나(현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정복했다.[20]디오도토스 2세 시대인 기원전 228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한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어 서방을 굳건히 했다.[23] 이 동맹은 기원전 189년까지 이어진다.
2. 3. 에우티데모스 왕조 (기원전 230년 ~ 기원전 171년)
에우티데모스 1세는 마그네시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소그디아나의 총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4][25] 그는 기원전 230년경 디오도토스 2세를 타도하고 왕위에 올랐다. 에우티데모스 1세의 세력은 소그디아나를 넘어 페르가나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까지 미쳤다.[26]기원전 21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에우티데모스 1세를 공격했다. 에우티데모스 1세는 아리우스 강에서 패배[27]했지만, 박트라에서 3년간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버텨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에우티데모스 1세를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하고, 기원전 206년경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자신의 딸을 주기로 했다.[28] 에우티데모스 1세는 안티오코스 3세와의 평화 협상에서 자신이 디오도토스 2세를 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하며, 중앙 아시아를 유목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5]
타지키스탄 동부 쿨라브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200–195년경의 비문에는, 헬리오도토스라는 그리스인이 헤스티아에게 화재 제단을 봉헌하며 에우티데모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를 언급했다.[29]
셀레우코스 군대가 철수한 후, 박트리아 왕국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는 북동부 이란 지역을 흡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파르티아까지 확장되었을 수도 있다. 이 영토들은 타푸리아와 대호라산의 박트리아 사트라피와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에우튀데모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180년 이전에 인도 아대륙 침략을 시작했다. 이는 마우리아 제국이 숭가 왕조에 의해 전복된 지 몇 년 후였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파탈리푸트라 (오늘날 파트나)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러한 원정은 메난드로스 1세의 업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침략은 기원전 175년에 완료되었고, 이를 통해 북서부 인도 아대륙에 인도-그리스 왕국이 세워졌다.
데메트리오스 1세 (재위: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80년)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간다라를 점령했다. 그는 북서 인도 침략을 계속하여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카차와르 반도까지 지배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이어 그의 동생인 안티마코스 1세 (재위: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71년)는 탁실라를 점령하고 간다라 지방을 정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171년경, 안티마코스 1세는 에우크라티데스 1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박트리아와 북서 인도 (인도-그리스 왕국)로 분열되었다.
2. 4. 왕국의 분열과 쇠퇴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데메트리우스의 장군이거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맹으로, 기원전 171년경 안티마코스 1세와 안티마코스 2세를 폐위시키고 에우튀데미데스 왕조를 전복하여 자신의 왕조인 유크라티데스 왕조를 세웠다.[33] 이로 인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박트리아 지역의 에우크라티데스 가문과 인도 지역의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인도-그리스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북 인도를 다시 지배하에 두었다.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300명의 병사로 6만 명의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35]
그러나 기원전 145년경,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아들 헬리오클레스 1세[73]에게 살해당했다. 유스티누스는 헬리오클레스 1세가 아버지의 시체를 전차로 짓밟고 묘비 없이 버렸다고 기록했다.[35]
2. 5. 유목민의 침입과 멸망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30년)
헬리오클레스 1세는 마지막 그리스-박트리아 왕으로,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130년 사이에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으로 왕국이 멸망하면서 박트리아를 버리고 카불 계곡으로 수도를 옮겼다.[75]북방 유목 민족인 월지는 원래 한나라 가장자리의 허시 회랑 지역에 살았으나, 흉노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162년에는 흉노에 의해 일리강 계곡으로 밀려났고, 기원전 132년에는 우순에 의해 다시 쫓겨나 옥수스강 북쪽 영토로 이주하여 사카스탄의 유목 민족을 몰아냈다.[37]
기원전 140년경, 스키타이인(그리스 자료에서는 사카 또는 사카라우카이)은 월지의 남하에 밀려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2세를 죽이고, 기원전 123년에는 그의 후계자 아르타바누스 1세도 살해했다.[38]
한서의 외교관 장건은 기원전 126년 월지를 방문하여 흉노와의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는 월지가 옥수스 강 북쪽에 정착했지만, 박트리아의 나머지 지역인 옥수스 강 남쪽 영토도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건은 월지가 10만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기마 궁수 전사를 보유하고 있으며,[39] 흉노와 같은 관습을 가지고 있어 그리스-박트리아 군을 쉽게 격파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기원전 126년 박트리아(다샤)를 방문하여 도시 기반 시설은 남아있지만, 정치 체제가 사라지고 사기가 저하된 나라를 묘사했다.[39]
월지는 기원전 120년경 박트리아 남쪽으로 더 확장되었는데, 북쪽 우순의 침략으로 더욱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스키타이 부족을 몰아냈고, 인도로 이동한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스키타이인으로 확인되었다.
서양 고전 자료에는 그리스인으로부터 박트리아를 빼앗은 부족으로 아시이, 파시아니, 토하리, 사카라울리가 언급된다.[40] 헬리오클레스는 박트리아를 버리고 카불 계곡으로 수도를 옮겼다. 헬리오클레스 이전에도 에우크라티데스 2세와 플라톤 에피파네스라는 두 명의 그리스-박트리아 왕이 있었다. 헬리오클레스는 기술적으로 마지막 그리스-박트리아 왕이지만, 그의 후손 중 일부는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 이동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의 서부를 형성했다. 이 "서부" 인도-그리스 왕의 마지막 통치자인 헤르마이오스는 기원전 70년경까지 파로파미사다이에서 통치했다.[40]
3. 문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월지는 기원전 176년 직전 흉노의 침공으로 허시 회랑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162년에는 일리강 계곡으로 밀려났고, 기원전 132년에는 우순에 의해 쫓겨나 옥수스강 북쪽으로 이주하여 사카스탄을 몰아냈다.[37] 기원전 140년경, 동부 스키타이인(사카)은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침략하여 프라아테스 2세와 아르타바누스 1세를 살해했다.[38]
한서의 외교관 장건은 기원전 126년 월지를 방문하여 흉노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월지는 이미 옥수스강 북쪽에 정착하여 박트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장건은 월지가 10만에서 20만 명의 기마 궁수 전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흉노와 동일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39] 그는 박트리아(다샤)가 도시 기반 시설은 남아 있지만, 정치 체제가 사라지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라고 묘사했다.
월지는 기원전 120년경 박트리아 남쪽으로 확장하여 스키타이 부족을 몰아냈고, 이들은 인도로 이동하여 인도-스키타이인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의 서양 고전 자료는 박트리아가 아시이, 파시아니, 토하리, 사카라울리에 의해 그리스인으로부터 빼앗겼다고 기록한다.[40]
헬리오클레스 왕은 박트리아를 버리고 수도를 카불 계곡으로 옮겼다. 헬리오클레스 이전에는 에우크라티데스 2세와 플라톤 에피파네스라는 두 명의 그리스-박트리아 왕이 있었다. 헬리오클레스의 후손 중 일부는 인도-그리스 왕국의 서부를 형성했다. 헤르마이오스는 기원전 70년경까지 파로파미사다이에서 통치했다.
월지는 박트리아에 1세기 이상 머물면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리스 문자를 채택하고 그리스-박트리아 왕들의 양식으로 주화를 주조했다.[41]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붕괴 이후에도 그리스 인구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42]
기원전 12년경 월지는 북부 인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높은 수준의 헬레니즘 문명을 유지했으며, 지중해 및 인접한 인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인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했으며, 많은 도시를 가진 부유한 국가로 알려졌다.[44] 아이 하눔, 박트라 등의 도시는 정교한 헬레니즘 도시 문화를 보여주었다.[47]
right의 금화, 기원전 250년경]]
3. 1. 도시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기 훨씬 전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의 반란 공동체를 그리스 정복 이전부터 그 지역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의 정복 이후에 확장된 상당한 그리스인 공동체가 있었다.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높은 수준의 헬레니즘 문명으로 유명했으며, 지중해와 인접한 인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그들은 인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했다. 고대 시대에 그들은 많은 도시를 가진 부유한 국가로 알려졌으며,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왕국이 '천 개의 도시'를 소유했다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아이 하눔(아마도 옥수스강의 알렉산드리아)과 헬레니즘 유물이 발견된 박트라(현대 발흐)와 같은 그들의 도시는 정교한 헬레니즘 도시 문화를 보여준다. 이 유적은 기원전 145년경의 그리스-박트리아 문화를 보여주는데, 그 당시 도시가 유목민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졌고 다시는 재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 하눔은 "그리스 극장, 체육관, 열주식 안뜰이 있는 그리스 가옥 등 헬레니즘 도시의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다" (보드만). 고전적인 코린트식 기둥의 유적이 그곳의 발굴에서 발견되었으며, 다양한 조각 파편도 발견되었다. 특히, 5~6미터 높이의 조각상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훌륭한 헬레니즘 스타일의 거대한 발 조각 파편이 발견되었다.

아이 하눔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로 된 비문 중 하나인 키네아스의 헤로온은 기원전 300-2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델포이 격언을 묘사한다.
>
> 어린아이일 때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
> 젊은이일 때는 욕정을 억제하라.
> 중년에는 정의롭게 행동하라.
> 노년에는 좋은 충고를 해라.
> 그리고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이하라.
>
타지키스탄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차테(현대 타지키스탄), 유크라티데아, 그리고 암피폴리스라는 또 다른 많은 그리스-박트리아 도시들이 확인되었다. 후자는 박트리아 문서에 언급되었고 고대 마케도니아의 암피폴리스의 이름을 딴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44] 발굴된 도시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캄피르 테페, 삭사노쿠르, 그리고 타지키스탄의 타흐트-이 상긴(B.A. 리빈스키 휘하의 소련 팀의 고고학적 탐사),[47] 또는 달베르진 테페가 포함된다.
타흐트-이 상긴(Takht-i Sangin, 타지크어: "돌의 왕좌")은 타지키스탄 남부, 바흐쉬 강과 판지 강이 합류하여 아무다리야 강의 근원이 되는 곳 근처에 위치한 고고학 유적지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도시였으며, 옥수스 강(바흐쉬 강)에 헌정된 큰 사원이 있었다. 이 사원은 기원후 3세기까지 쿠샨 제국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유적지는 옥수스 보물의 근원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 문화를 살려 석재를 사용했으며, 새로운 도시는 원칙적으로 사각형 또는 정방형으로 건설되었고, 사각형 탑을 갖춘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또한, 화려한 식물 문양이 새겨진 주두를 가진 코린트식 원주가 선호되었다. 아이 하눔 유적 - 타지키스탄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발견된 박트리아 유력 도시의 유적. 과거의 알렉산드리아 옥시아나로 비정된다.
3. 2. 종교
그리스-박트리아의 신화는 원래 고대 그리스 신화와 동방의 이란-인도 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웨르트라그나와 융합되었고, 아폴론은 미트라와 융합되어 두 신화의 신들은 동일한 존재로 여겨졌다.3. 3. 미술
헬레니즘 미술 양식은 인도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불꽃 팜메트, 연꽃 무늬, 구슬 앤 릴 패턴과 같은 디자인 요소들이 인도 미술에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이-카눔을 통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6]
인도 미술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

인도 신들의 최초의 시각적 표현도 나타났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 중 한 명인 아가토클레스(기원전 190–180년 통치)는 인도 신들의 최초의 알려진 묘사가 담긴 주목할 만한 인도 표준 사각형 동전을 발행했다. 이 신들은 비슈누, 시바, 바수데바, 붓다 또는 발라라마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1970년 아이-하눔에서 아가토클레스의 이름이 새겨진 6개의 인도 표준 은화 고대 드라크마가 발견되었다.[68][69][70] 이 동전들은 동전에 묘사된 최초의 베다 신들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발라라마-상카르샤나는 가다 철퇴와 쟁기 속성을, 바수데바-크리슈나는 샹카(배 모양의 케이스 또는 소라)와 수다르샤나 차크라 바퀴의 비슈누 속성을 보여준다.[69] 아가토클레스의 다른 일부 동전들은 불교의 사자와 인도 여신 락슈미(비슈누의 배우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70]
3. 4. 경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중심지였으며, 이는 다수 발견된 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데메트리오스 1세 (재위: 기원전 190년 - 기원전 167년)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파르티아, 이집트, 로마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각지의 상품을 거래했다.[53]
당시 비단은 서방 세계 지배 계급에게 필수적인 물품이었으며, 장건이 서역에 이르기 이전부터 실크로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방의 가죽·모직물, 인도의 향신료, 감미료, 금은, 보석, 귀석, 유리, 약품, 금속 제품, 상아 등이 박트리아에 모여 거래된 후 각지로 운송되어, 박트리아는 중계 시장 역할을 했다.[53] 동시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서북 인도의 사가라가 꼽힌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동전은 그리스 주화술의 훌륭한 예시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훌륭한 조화"를 보여주며 헬레니즘 세계에서 가장 큰 금화와 은화가 주조되었다. 가장 큰 금화는 에우크라티데스 1세(재위 기원전 171–145년)가, 가장 큰 은화는 인도-그리스 왕 아민타스 니카토르(재위 기원전 95–90년경)가 주조했다. 초상화는 "서방의 왕족들이 흔히 보여주는 무미건조한 묘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개성을 보여준다".[50]
동전 앞면에는 왕의 옆모습, 뒷면에는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아르테미스 등의 그리스 신들과 헤라클레스 등의 영웅 조각상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왕들이 보에오티아 기병 투구 또는 마케도니아 카우시아를 본뜬 헬멧을 쓴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다른 헬레니즘 통치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51][52]
3. 5. 중국과의 교류
기원전 220년경,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서 카슈가르와 위루무치까지 원정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중국과 서방 간의 최초의 접촉을 이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역사가 스트라보는 "그들은 그들의 제국을 세레스 (중국인)와 프리니까지 확장했다."라고 기록했다.[22]
톈산 산맥 북쪽에서는 여러 조각상과 그리스 병사들의 모습이 발견되었으며, 오늘날 위루무치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55] 장미 꽃, 기하학적 선, 만곡선 및 유리 상감 장식은 이집트, 페르시아 및/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시사하며,[56] 일부 초기 전한 시대 청동 거울에서 이러한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화폐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세계 최초로 구리-니켈 (75:25 비율) 주화를 발행했는데,[60] 이는 당시 중국에서 "백동"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합금 기술이었다.[61] 에우티데무스, 에우티데무스 2세, 아가토클레스, 판탈레온 왕은 기원전 170년경에 이러한 주화를 발행했다. 구리-니켈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주화에 다시 사용되었다.
전한 시대의 탐험가이자 외교관인 장건은 기원전 126년에 박트리아를 방문하여 박트리아 시장에서 중국 상품의 존재를 보고했다. 그는 "내가 박트리아 (대하)에 있었을 때, 쬔에서 온 대나무 지팡이와 쓰촨 성 (중국 남서부 영토)에서 만들어진 천을 보았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물건을 어떻게 구했는지 묻자, 그들은 '우리 상인들이 셴두 (인도)의 시장에서 사온다'고 답했다."라고 보고했다. (사기 123, 사마천, 번역. 버턴 왓슨).

장건의 여정 목적은 흉노에 대항하여 한나라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초원의 문명을 찾는 것이었다. 장건은 귀국 후 중국 황제 무제에게 페르가나 (대원), 박트리아 (대하) 및 파르티아 (안식)의 도시 문명이 정교하고 희귀한 물건이 가득하며, 고정된 거주지에 살며 중국 사람들과 다소 동일한 직업에 종사하며 중국의 풍부한 생산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알렸다. (''한서'', 전한서).
이에 무제는 이들과 상업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러 명의 중국 사신이 중앙아시아로 파견되면서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실크로드의 발전이 촉발되었다.[63]
4. 역대 왕
(기원전 255년경~기원전 130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