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파베르
1. 개요
레드 파베르는 1888년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난 룩셈부르크계 미국인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1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데뷔하여 1917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1920년대 라이브볼 시대에도 스핏볼을 활용하여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1933년 은퇴 후에는 화이트삭스 코치를 역임했고, 196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1976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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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투수 |
|---|---|
| 타석 | 스위치 |
| 투구 | 우투 |
| 출생일 | 1888년 9월 6일 |
| 출생지 | 아이오와주캐스케이드 |
| 사망일 | 1976년 9월 25일 |
| 사망지 | 시카고, 일리노이주 |
| 데뷔 리그 | MLB |
|---|---|
| 데뷔일 | 1914년 4월 17일 |
| 데뷔 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
| 최종 리그 | MLB |
| 최종일 | 1933년 9월 20일 |
| 최종 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
| 소속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4년~1933년) |
| 코치 경력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46년 - 1948년) |
| 승패 기록 | 254승 213패 |
|---|---|
| 평균 자책점 | 3.15 |
| 탈삼진 | 1,471 |
| 월드 시리즈 우승 | 1917년 |
|---|---|
| AL 평균 자책점 1위 | 2회 (1921년, 1922년) |
| 명예의 전당 헌액 |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
| 헌액 유형 | 국가 |
| 헌액 년도 | 1964년 |
| 헌액 방법 | 베테랑 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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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계 미국인 -
데니스 해스터트
데니스 해스터트는 일리노이주 하원의원과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제51대 하원 의장을 역임했으나, 과거 성 학대 은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룩셈부르크계 미국인 -
크리스 에버트
크리스 에버트는 1970년대와 80년대 여자 테니스를 지배하며 18번의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과 클레이 코트 125경기 연속 승리 기록을 세운 미국의 전 세계 랭킹 1위 테니스 선수이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
다코타 허드슨
다코타 허드슨은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 출신의 미국 프로 야구 투수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여 콜로라도 로키스를 거쳐 현재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소속이며, 97마일의 싱커를 던지는 땅볼 유도형 투수이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
호세 카페얀
호세 카페얀은 미국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메이저 리그와 KBO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 -
애덤 던
애덤 던은 뛰어난 장타력과 높은 삼진율을 동시에 가진 미국 프로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에서 여러 팀을 거치며 14시즌 동안 활약했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미국 대표팀으로도 출전했지만 수비에서는 약점을 드러냈다. -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 -
케빈 유킬리스
케빈 유킬리스는 뛰어난 타격과 수비로 골드글러브와 행크 아론 상을 수상하고 보스턴 레드삭스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미국의 전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로, 은퇴 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2. 초기 생애
파베르는 1888년 9월 6일 아이오와 주 캐스케이드 근처 농장에서 룩셈부르크인 혈통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선술집과 호텔을 운영하며 캐스케이드에서 부유한 시민 중 한 명이었다. 파베르는 십 대 시절 위스콘신 주 프레리 듀 시엔과 아이오와 주 더뷰크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녔으며, 16세부터는 더뷰크 지역 야구팀에서 일요일 경기마다 출전하여 2USD를 받았다.
1909년, 당시 세인트 조셉 칼리지로 알려진 로라스 대학교에서 한 시즌 동안 투수로 활동했다. 그는 세인트 앰브로스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학교 최다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전 더뷰크 마이너 리그 구단주였던 클래런스 "팬츠" 로랜드는 파베르에게 클래스 B 리그인 일리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 소속 더뷰크 마이너스와 계약할 것을 권유했다.
2.1. 출생과 가족
파베르는 1888년 9월 6일 아이오와 주 캐스케이드 근처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룩셈부르크인 혈통이었다. 파베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선술집을 운영했으며, 나중에는 캐스케이드에 있는 호텔 파베르를 운영했다. 그의 아버지는 캐스케이드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중 한 명이 되었다. 십 대 시절 파베르는 위스콘신 주 프레리 듀 시엔과 아이오와 주 더뷰크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녔다. 16세가 되면서 파베르는 더뷰크의 지역 야구팀에서 일요일 경기에 출전하여 2USD를 받았다.
1909년 파베르는 당시 세인트 조셉 칼리지로 알려진 로라스 대학교에서 한 시즌 동안 투수로 활동했다. 그 해 세인트 앰브로스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그는 9이닝 동안 2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학교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전 더뷰크 마이너 리그 구단주였던 클래런스 "팬츠" 로랜드는 파베르에게 클래스 B 리그인 일리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 소속의 더뷰크 마이너스와 계약할 것을 권유했다.
2.2. 유년 시절
파베르는 1888년 9월 6일 아이오와 주 캐스케이드 근처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룩셈부르크인 혈통이었다. 파베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선술집을 운영했고, 나중에는 캐스케이드에 있는 호텔 파베르를 운영했다. 그의 아버지는 캐스케이드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중 한 명이 되었다. 십 대 시절 파베르는 위스콘신 주 프레리 듀 시엔과 아이오와 주 더뷰크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녔다. 16세가 되면서 파베르는 더뷰크의 지역 야구팀에서 일요일 경기에 출전하여 2USD를 받았다.
1909년 파베르는 로라스 대학교(당시 세인트 조셉 칼리지)에서 한 시즌 동안 투수로 활동했다. 그 해 세인트 앰브로스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그는 9이닝 동안 2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학교 최다 기록을 세웠다. 전 더뷰크 마이너 리그 구단주였던 클래런스 "팬츠" 로랜드는 파베르에게 클래스 B의 일리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 소속 팀인 더뷰크 마이너스와 계약할 것을 권유했다.
2.3. 아마추어 야구
파베르는 1888년 9월 6일 아이오와 주 캐스케이드 근처의 농장에서 태어났으며, 룩셈부르크인 혈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베르가 어렸을 때 선술집을 운영했고, 이후 캐스케이드에서 호텔 파베르를 운영하며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중 한 명이 되었다. 파베르는 십 대 시절 위스콘신 주 프레리 듀 시엔과 아이오와 주 더뷰크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녔다. 16세 때부터는 더뷰크의 지역 야구팀에서 일요일 경기에 출전하며 2달러를 받았다.
1909년, 파베르는 당시 세인트 조셉 칼리지로 알려진 로라스 대학교에서 한 시즌 동안 투수로 활동했다. 그 해 세인트 앰브로스 대학교와의 경기에서는 9이닝 동안 2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학교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전 더뷰크 마이너 리그 구단주였던 클래런스 "팬츠" 로랜드는 파베르에게 클래스 B 일리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 소속팀인 더뷰크 마이너스와 계약할 것을 권유했다.
3. 마이너 리그 경력
1909년 MLB의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여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1년에 오른팔 부상을 당했고, 이때 팀 동료의 조언을 참고하여 스핏볼을 습득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찰스 코미스키 구단주가 뉴욕 자이언츠의 존 맥그로 감독과의 잡담 중에 제안하여 실현된 1913년 10월부터 자이언츠와 화이트삭스의 합동 세계 일주 야구 팀에 참가하여 호투했다.
3.1. 더뷰크 마이너스 (1909-1910)
파베르는 마이너 리그에서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는 1909년 두뷰크에서 15경기에 출전했고, 1910년에는 같은 팀으로 복귀하여 44경기에 등판해 18승 19패의 승-패 기록과 2.37의 평균자책점(ERA)을 기록했다. 그 해 9월에는 두뷰크 소속으로 데번포트 프로디갈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야구)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퓨에블로와 데스 모인의 마이너 리그 클럽에서도 뛰었다.
3.2. 퓨에블로와 데스 모인 (1911-1913)
파베르는 마이너 리그의 퓨에블로와 데스 모인 클럽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다.
4. 메이저 리그 경력
1913년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합동 세계 일주 야구팀에 참가하여 좋은 투구를 선보인 후, 191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데뷔 첫해부터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를 오가며 활약했으며, 10승과 리그 최다인 4세이브를 기록했다. 1915년에는 24승을 거두며 리그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다.
1917년에는 뛰어난 성적과 함께 월드 시리즈에서 3승을 거두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시리즈 4차전부터 6차전까지 3연투하며 2승을 따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8년에는 시즌 대부분을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919년 복귀 후에는 부상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블랙삭스 스캔들로 얼룩진 1919년 월드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1920년 스핏볼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용이 허용된 17명의 투수 중 한 명으로 라이브 볼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했으며, 1921년과 1922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주축 선수들이 대거 영구 제명되어 팀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도 에이스로서 꾸준히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다. 그는 홈 구장인 코미스키 파크의 넓은 구장을 잘 활용했으며, "데드 볼" 시대와 라이브 볼 시대 모두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선수 생활 말년인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주로 구원 투수로 등판하며 3년간 96경기에 출전했다. 1933년 시즌 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결렬로 1934년 시즌 전 45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한 팀에서만 20시즌 동안 활약하며 통산 254승 213패, 평균자책점 3.15, 1471탈삼진을 기록했다. 은퇴 당시 화이트삭스 구단 역사상 최다 경기 출장, 최다승, 최다 선발 등판, 최다 완투, 최다 이닝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후 일부 기록은 테드 라이언스에 의해 경신되었다. 포수 레이 샬크와는 306경기를 배터리로 호흡을 맞추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역대 4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4.1.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4-1933)
1913년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합동 세계 일주 야구팀에 참가하여 좋은 투구를 선보인 후, 191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합류하여 MLB에 데뷔했다. 그는 1933년까지 20년 동안 오직 화이트삭스 한 팀에서만 투수로 활약했다. 선수 생활 동안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를 오가며 활약했으며, 특히 191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부상, 스페인 독감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1920년 스핏볼 사용이 허용된 투수 중 한 명으로 라이브 볼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팀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며 꾸준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홈 구장인 코미스키 파크의 넓은 공간을 잘 활용하는 투수였으며, "데드 볼" 시대와 라이브 볼 시대 모두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주로 구원 투수로 등판했으며, 1933년 시즌 후 구단과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자 1934년 시즌 전 45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화이트삭스에서 20시즌 통산 254승 213패, 평균자책점 3.15, 1471탈삼진을 기록했다. 포수 레이 샬크와는 306경기를 배터리로 호흡을 맞추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역대 4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파베르는 화이트삭스 구단 역사상 최다 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통산 승리, 선발 등판, 완투, 이닝 기록도 가지고 있었으나 이는 후에 테드 라이언스에 의해 경신되었다.
4.1.1. 초기 (1914-1919)
1909년 MLB의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여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 8월에는 마이너 리그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1911년 오른팔 부상을 당했고, 이때 팀 동료의 조언을 참고하여 스핏볼을 습득했다.
1913년 10월부터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찰스 코미스키 구단주와 뉴욕 자이언츠의 존 맥그로 감독의 제안으로 성사된 자이언츠와 화이트삭스의 합동 세계 일주 야구 팀에 참가하여 좋은 투구를 선보였다.
세계 일주에서 돌아온 후 1914년 4월 17일, 이적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MLB에 데뷔했다. 그해 40경기에 등판하여 19경기에 선발 등판하고 다른 21경기에 구원 등판했다. 10승 9패, 평균자책점 2.68을 기록했으며, 리그에서 가장 많은 4개의 세이브를 올렸다 (세이브는 1969년에야 공식 야구 통계가 되었다).
1915년에는 24승 14패(승수는 월터 존슨에 이어 아메리칸 리그 2위), 평균자책점 2.55를 기록했고, 리그 최다인 50경기에 출장했다. 그 시즌 한 경기에서는 단 67개의 투구만으로 3안타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다.
1917년에는 16승 13패, 평균자책점 1.92를 기록했다. 특히 9월에는 더블헤더 두 경기와 그 다음 날 경기까지 포함하여 이틀 만에 세 경기에 연속으로 선발 등판하여 모두 승리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2012년에 잭 그레인키가 유사한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95년간 MLB에서 나오지 않은 기록이었다 (다만 그레인키의 경우 첫 경기 투구 수가 4개였고, 경기 사이에 올스타 게임 휴식기가 있었다). 같은 해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시카고에서 열린 2차전에서 승리하고 원정 4차전에서 패했지만, 홈에서 열린 5차전에 구원 등판하여 팀이 7회 2-5로 뒤지던 경기를 8-5로 뒤집는 데 기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틀 후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6차전에서는 완투하며 4-2 승리를 이끌어, 시리즈에서 총 3승을 거두며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 월드 시리즈에서 4번의 투구 판정(승패 결정)을 받은 것은 아메리칸 리그 역대 기록이다.
파베르는 주루 플레이 중 특이한 일화도 남겼다. 한 번은 이미 주자가 점유하고 있는 3루를 향해 도루를 시도했는데, 그는 앞선 플레이에서 선행 주자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간 것으로 착각했다고 해명했다. 반면, 보스턴과의 경기에서는 투수로서는 매우 드문 홈 스틸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1918년 시즌 대부분을 미국 해군에 복무하며 보냈다. 1919년 팀에 복귀했지만 팔과 발목 부상을 입었고, 전쟁 기간 동안 체중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고생하여 일시적으로 팀에서 방출되기도 했다. 그 결과 시즌 평균자책점은 3.83으로, 그의 첫 아홉 시즌 중 유일하게 3.00 이상을 기록한 해가 되었다. 이러한 부상과 질병 문제로 인해 그는 블랙삭스 스캔들로 얼룩진 신시내티 레즈와의 1919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 수년 후, 당시 팀 동료였던 포수 레이 샬크는 만약 파베르가 건강하게 출전할 수 있었다면, 승부 조작에 가담했던 에디 시콧이나 레프티 윌리엄스에게 돌아갔을 선발 등판 기회를 파베르가 가져갔을 것이며, 어쩌면 스캔들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회고했다.
4.1.2. 전성기 (1920-1929)
파베르는 1920년대 초 선수 경력의 정점을 맞이했다. 라이브 볼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1920년 스핏볼 금지 이후에도 현역 스핏볼 투수 17명에게는 계속 던지는 것이 허용되었고, 파베르는 이 규칙 변경의 혜택을 가장 잘 활용한 투수 중 하나였다. 그는 홈 구장인 코미스키 파크의 넓은 공간을 잘 활용하여 1920년부터 1931년까지 단 91개의 홈런만을 허용했는데, 이는 한 달에 홈런 1개꼴에 불과한 수치였다. 그는 "데드 볼" 시대(1920년 이전)와 라이브 볼 시대 모두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6명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1920년은 파베르에게 격동의 해였다. 라이브 볼 시대가 시작되면서 투수들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하락했지만, 스핏볼 사용이 허용된 덕분에 파베르는 23승을 거두며 리그에서 가장 많은 선발 등판 횟수를 기록했다. 또한 에디 시콧, 레프티 윌리엄스, 디키 카와 함께 역사상 최초의 20승 쿼텟을 형성하기도 했다.
1921년 여름, 파베르는 다른 몇몇 선수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열린 블랙삭스 스캔들 재판에 소환되어 워싱턴 원정에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증언을 요청받지 않았고, 선발 등판을 거르지 않고 팀에 복귀했다. 스캔들로 인해 시콧과 윌리엄스가 1921년에, 카가 1922년에 팀을 떠나며 영구 제명 처분을 받는 등 팀 전력이 크게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파베르는 에이스 역할을 굳건히 했다. 그는 1921년에 25승, 1922년에 21승을 거두며 3년 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했고, 두 해 연속으로 리그 평균자책점과 완투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1922년에는 이닝 부문에서도 1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매년 삼진 부문에서도 리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최소 25번의 완투와 300 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파베르는 대부분의 성공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거두었지만,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팀은 경쟁력을 크게 상실했다. 스캔들로 핵심 선수들이 영구 제명된 후, 화이트삭스는 파베르가 활약한 마지막 13년 동안 단 두 번의 승리 시즌만을 기록했으며, 리그 5위 이상으로 시즌을 마친 적이 없었다. 특히 1921년 시즌에는 팀이 62승 92패로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베르는 25승 15패라는 뛰어난 승패 기록을 남겼다. 1921년부터 1929년까지 그의 통산 기록은 126승 103패였다.
1927년, 파베르는 당시 40세의 노장이었지만 여전히 뛰어난 타자였던 타이 콥의 21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은 아마도 1929년, 40세의 나이로 기록한 1안타 경기였을 것이다.
4.1.3. 후기 (1930-1933)
선수 생활 말년에 접어든 파버는 구원 투수로 다시 마운드에 섰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3년 동안 총 96경기에 불펜 투수로 등판하며 여전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 기간 동안 매년 40경기 가까이 등판하며 팀에 기여했다.
그러나 1933년 시즌이 끝난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구단은 파버에게 다음 해 연봉을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삭감하는 계약을 제시했다. 이에 파버는 크게 반발하며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을 희망했지만, 구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파버는 1934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4.2. 은퇴 후
파버는 1934 시즌 전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화이트삭스에서 20년 연속 투구를 한 뒤였다. 45세의 나이로 은퇴한 그는 통산 254승 213패, 평균자책점 3.15, 1471탈삼진을 기록하며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는 화이트삭스 구단 역사상 최다 등판 경기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은퇴 당시에는 통산 승수, 선발 등판, 완투, 이닝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 기록들은 이후 테드 라이언스에 의해 깨졌다.
선수 은퇴 후 파버는 자동차 판매 및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화이트삭스 코치로 3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파버와 포수 레이 숄크는 1900년 이후 306경기를 배터리로 함께 시작했는데, 이는 역대 네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5. 선수 시절 기록
1909년에 MLB의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여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 8월에는 마이너 리그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1911년에 오른팔을 부상당했고, 이때 팀 동료의 조언을 참고하여 스핏볼을 습득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찰스 코미스키 구단주가 뉴욕 자이언츠의 존 맥그로 감독과의 잡담 중에 제안하여 실현된 1913년 10월부터 자이언츠와 화이트삭스의 합동 세계 일주 야구 팀에 참가하여 호투했다。
세계 일주에서 귀국한 후 1914년 4월 17일에 이적한 화이트삭스에서 MLB 데뷔를 했다. 같은 해 40경기에 등판하여 10승 9패, 평균자책점 2.68의 성적을 기록했다.
다음 1915년에는 24승 14패, 평균자책점 2.55를 기록했다.
1917년에는 평균자책점이 1.92까지 내려갔다. 같은 해 월드 시리즈에서는 총 6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여 총 3승을 거두었고, 특히 4차전부터 6차전까지 3연투하여 2승을 거두는 활약을 펼쳐 팀을 월드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또한, 같은 해 9월의 더블헤더 2경기와 그 다음 날 경기에 연속 선발 등판하여 3경기 연속 선발 등판했다. 이 이후 MLB에서 3경기 연속 선발 등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2년에 잭 그레인키가 기록할 때까지 95년간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레인키는 1경기째 투구수가 4구였고, 2경기와 3경기 사이에 올스타 게임이 있었기 때문에 8일의 간격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8년 시즌 중에 미국 해군에 복무했다.
1919년에는 팔과 발목 부상과 더불어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으로 고생하여 일시적으로 수 주 동안 팀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1920년은 파베르에게도 격동의 해였다. 이 해부터 소위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되어 투수들이 일제히 성적이 떨어졌다. 파베르는 투수 구제 조치로 스핏볼 투구가 허용된 17명의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해 에디 시콧, 레프티 윌리엄스, 디키 카와 함께 사상 최초의 20승 쿼텟을 형성했다. 그러나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에 의해 시콧과 윌리엄스는 다음 1921년에 블랙삭스 스캔들로 인해, 카는 1922년에 급여 삭감에 불만을 품고 팀에서 방출을 요구했기 때문에 영구 제명 처분을 받았다. 3명의 선발 투수를 단기간에 잃은 가운데, 파베르는 1920년부터 1922년에 걸쳐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었고, 그중 1921년과 1922년에는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하는 활약을 보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구원 투수로 3년 연속 40경기 가까이 등판했다.
1933년에 구단 측이 제시한 연봉 3분의 1 삭감의 다음 해 계약 계획에 반발하여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45세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화이트삭스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1964년에 베테랑 위원회 투표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6년 9월 25일에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명예의 전당 헌액
1964년에 베테랑 위원회 투표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개인 생활
1947년, 파베르는 자신보다 30살 가까이 어린 프란시스(프랜) 크누츠존과 결혼했다. 파베르는 그녀에게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결혼을 고집했다. 프랜은 루터교 신자이자 이혼녀였고, 두 사람은 서둘러 결혼했는데, 이는 파베르의 가톨릭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가족들은 이 결혼을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부는 이듬해 아들 어번 C. 파베르 2세, 일명 "페퍼"를 낳았다. 아들이 14살 때 수영 중 사고로 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겪게 되었다.
파베르는 재정적 또는 신체적 어려움에 처한 전직 야구 선수들을 돕는 자선 단체인 야구 익명(Baseball Anonymous) 설립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80세가 가까워질 때까지 쿡 카운티 고속도로 측량 팀에서 일했다. 그는 오랫동안 흡연자였으며, 1960년대에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후 심장 및 폐 관련 건강 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76년 시카고에서 사망했으며, 아카시아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