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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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맥그로는 1899년부터 1932년까지 뉴욕 자이언츠를 이끌며 10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메이저 리그 야구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였고, 감독으로서 혁신적인 전술과 선수 육성으로 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1937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그의 업적을 기려 'NY'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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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그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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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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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3루수 / 감독 |
출생일 | 1873년 4월 7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
사망일 | 1934년 2월 25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로셸 |
타석 | 좌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891년 8월 26일 |
데뷔 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 (AA/NL)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06년 9월 12일 |
최종 팀 | 뉴욕 자이언츠 |
소속 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 (AA/NL) (1891–189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00) 볼티모어 오리올스 (1901–1902) 뉴욕 자이언츠 (1902–1906) |
타격 성적 (MLB) | |
타율 | .334 |
홈런 | 13 |
타점 | 462 |
도루 | 436 |
감독 경력 | |
소속 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 (NL) (1899) 볼티모어 오리올스 (1901–1902) 뉴욕 자이언츠 (1902–1932) |
경기 수 | 4,769 |
승-패-무 | 2,763–1,948-58 |
승률 | 0.586 |
수상 및 명예 | |
월드 시리즈 우승 | 3회 (1905년, 1921년, 1922년) |
명예의 전당 헌액 | 1937년 |
헌액 방식 | 센테니얼 커미션 |
기타 | 자이언츠 영구 결번 지정 |
2. 어린 시절
남북 전쟁에 참전하고 철도 관리 일을 했던 아일랜드 이민자 존과 엘렌 맥그로의 8명의 자녀 중 맏아들로, 뉴욕주 트럭스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맥그로는 1884년-1885년 겨울 디프테리아 전염병으로 어머니와 형제 3명을 잃었다. 술 중독자였던 아버지 존 맥그로 1세는 남은 4명의 자녀를 홀로 키웠다.
존 맥그로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으며, 허드렛일을 하여 번 돈으로 야구공을 사서 투구 연습을 했다. 16세 직후에는 고향 팀인 트럭스턴 그레이스에서 뛰며 감독 앨버트 "버트" 케니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어떤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었지만, 특히 커브볼을 잘 던져 스타 투수가 되었다. 맥그로와 케니의 관계는 훗날 그의 프로 선수 경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 가을, 12세의 맥그로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집을 나와, 이웃이자 트럭스턴 하우스인을 운영하던 메리 고다드 부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맥그로의 아버지 또한 아들이 야구를 하면서 깬 창문 값 등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아들을 고다드 부인에게 맡기는 것을 허락했다.
맥그로는 학교에 다니면서 호텔 주변의 허드렛일, 신문 배달, 열차에서 캔디, 과일, 잡지를 파는 일 등을 하며 돈을 모았다. 이 돈으로 야구공과 스폴딩 잡지를 사서 야구 연습을 하고, 규칙과 내셔널 리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등 당시 야구 리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1] 그는 곧 학교 팀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1]
신문 배달원 일을 하면서 당시 마이너 리그 야구 엘미라 팀에서 뛰던 허먼 피츠와 친분을 쌓았고, 엘미라 팀의 마스코트가 되기도 했다.[1]
16세 생일 직후, 고향 팀인 트럭스턴 그레이스에서 뛰기 시작했는데,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 가능했지만 특히 큰 커브볼을 던지는 능력이 뛰어나 팀의 스타 투수가 되었다.[1] 이때 트럭스턴 그레이스의 감독이었던 앨버트 "버트" 케니와의 인연으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1]
3. 선수 경력
1891년 18세의 나이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같은 해 리그가 소멸되면서 팀은 내셔널 리그로 이적했고, 3년 차인 1893년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팀 동료였던 윌리 키러와 마찬가지로 맥그로는 땅에 공을 쳐서 빠른 발로 내야 안타를 만드는 '볼티모어 찹'의 달인이 되었고, 장타는 적었지만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 또한 볼넷을 잘 골라내는 스타일이어서 타율은 이 해부터 9년 연속 3할을 넘었고, 출루율은 23경기 밖에 출전하지 않았던 1896년을 제외하고, 1902년까지 매년 .450 이상을 기록했다. 1899년에는 전임 네드 한론을 이어 오리올스의 감독을 겸임했는데, 이 해 맥그로 본인의 타율은 .391, 출루율은 .547에 달했다.
1899년 볼티모어 구단이 해산되면서 1년 동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소속된 후, 1901년 신설된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당시 리그 고문이었던 밴 존슨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자이언츠에서는 1906년까지 선수로 뛰었지만, 1903년 이후에는 거의 감독에 전념했다.
3. 1. 마이너 리그
1890년, 맥그로는 버트 케니의 도움으로 뉴욕-펜실베이니아 리그의 올린 팀에 입단했지만, 첫 경기에서 3루수로 출전하여 10번의 수비 기회 중 8번의 실책을 기록하는 등 수비 불안으로 6경기 만에 방출되었다.[2] 그러나 웨스턴 뉴욕 리그의 웨이즈빌 팀과 계약하여 24경기에서 .365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2]
그 후, 맥그로는 프로모터 알프레드 로슨의 비시즌 팀에 합류하여 쿠바에서 열린 겨울 리그에 참가했다.[3] 유격수로 뛰면서 빠른 스피드와 작은 체구, 그리고 팀 유니폼 색깔 덕분에 현지 팬들로부터 "엘 모노 아마릴로(El Mono Amarillo|노란 원숭이es)"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얻었다.[3]
1891년 2월, 로슨의 팀은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에서 내셔널 리그의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시범 경기를 가졌다. 맥그로는 이 경기에서 5타수 3개의 2루타를 치고 유격수 수비에서도 실책 없는 경기를 펼쳐 여러 마이너 리그 팀들의 주목을 받았다.[4] 결국 맥그로는 일리노이-아이오와 리그의 시더래피즈 팀과 계약하여 정규 유격수로 85경기에서 .276의 타율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4]
3. 2. 메이저 리그
1891년 8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1] 같은 해 리그가 소멸되면서 팀은 내셔널 리그로 이적했고, 맥그로는 3년 차인 1893년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17] 팀 동료였던 윌리 키러와 마찬가지로 맥그로는 땅에 공을 쳐서 빠른 발로 내야 안타를 만드는 '볼티모어 찹'의 달인이 되었고, 장타는 적었지만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17] 볼넷을 잘 골라내는 스타일이어서 타율은 이 해부터 9년 연속 3할을 넘었고, 출루율은 23경기 밖에 출전하지 않았던 1896년을 제외하고, 1902년까지 매년 .450 이상을 기록했다.[17]
1892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 해산되고 오리올스는 12개 팀 내셔널 리그로 흡수되었다.[1] 맥그로는 만능 보결 선수로서 시즌을 시작하였으나 네드 핸런이 중반의 시즌에 감독으로 임명된 후 정규 3루수로서 차지하였다.[1] 핸런의 감독 아래 맥그로는 내셔널 리그의 최고 선두 타자가 되어 연속 9년 동안 .320 이상을 타구하고, 득점과 4구에 의한 출루에서 2번이나 리그를 이끌고, 436개의 도루를 하였으며, .466의 경력 출루율은 테드 윌리엄스와 베이브 루스 만의 뒤로 밀려 랭킹에 들어왔다.[1]
1899년에는 전임 네드 한론을 이어 오리올스의 감독을 겸임했는데, 이 해 맥그로 본인의 타율은 .391, 출루율은 .547에 달했다.[17] 선수 겸 감독으로 오리올스를 이끌었으나, 팀 해체로 인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했다. 1901년 아메리칸 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복귀했으나, 리그 회장 밴 존슨과의 불화로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1903년 무릎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감독으로서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윌리 킬러, 조 켈리, 휴이 제닝스 등과 함께 헨런의 오리올스는 3개의 연속적 페넌트(1894~96)을 우승하고 2번이나 2위(1897~98)를 하였다.[1]
4. 감독 경력
1891년 18세의 나이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했다. 같은 해 리그가 소멸되면서 팀은 내셔널 리그로 이적했고, 맥그로는 3년 차인 1893년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팀 동료였던 윌리 키러와 마찬가지로 맥그로는 땅에 공을 쳐서 빠른 발로 내야 안타를 만드는 '볼티모어 찹'의 달인이 되었고, 장타는 적었지만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 또한 볼넷을 잘 골라내는 스타일이어서 타율은 이 해부터 9년 연속 3할을 넘었고, 출루율은 23경기 밖에 출전하지 않았던 1896년을 제외하고, 1902년까지 매년 .450 이상을 기록했다. 1899년에는 전임 네드 한론을 이어 오리올스의 감독을 겸임했는데, 이 해 맥그로 본인의 타율은 .391, 출루율은 .547에 달했다.
1899년에 이끌던 볼티모어 구단이 해산되면서 1년 동안 세인트루이스에 소속된 후, 1901년 신설된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당시 리그 고문이었던 밴 존슨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자이언츠에서는 1906년까지 경기에 출전했지만, 1903년 이후에는 거의 감독에 전념했다.
1899년 맥그로는 25세의 나이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감독을 겸임했다. 팀은 전년에 주력 선수들을 대량으로 빼앗겼음에도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 1903년에는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을 2위로 도약시켰고, 1904년과 1905년에는 2년 연속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1904년 리그 제패 당시에는 보스턴 아메리칸스(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 시리즈 대전을 거부하여 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1905년에는 일본계 미국인인 스기모토 슌조를 영입했지만 인종 차별로 인해 입단이 좌절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자이언츠 감독 재임 기간은 30년에 달했지만, 그 사이 팀이 A클래스(상위 4위)에 들지 못한 것은 1902년, 1915년, 1926년, 1932년의 단 4번에 불과했다. 1919년부터는 자이언츠의 구단주, 그리고 단장도 겸임했다(현재는 구단주가 감독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맥그로는 선수 시절의 기록을 합하여 총 131번의 퇴장 처분을 받았다. 이 기록은 2007년에 바비 콕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가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최다 기록이었다.
영화 《꿈의 구장》에 등장하는 문라이트 그라함은 맥그로 감독 하의 자이언츠에서 1905년에 1경기만 수비에 출장한 선수이다.
1932년 감독 자리에서 물러날 때 당시 심복이자 "존 맥그로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프레디 린드스트롬이 아닌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빌 테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린드스트롬은 이 인사에 실망하여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다음 해인 193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했다.
4. 1. 뉴욕 자이언츠
John McGraw|존 맥그로영어는 1902년 시즌 중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재건하고 강팀으로 만들었다. 1904년과 1905년에 2년 연속으로 내셔널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04년에는 시카고 컵스를 13경기 차로 앞선 106승 47패의 기록을 세웠으나, 맥그로와 구단주 존 T. 브러시는 밴 존슨에 대한 혐오로 보스턴 아메리칸스와의 월드 시리즈 개최를 거부했다.[3] 1905년에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 크리스티 매슈슨이 3번의 완봉승을 거두는 등 5경기 중 4승을 거두었다.[3]맥그로는 1911년, 1912년, 1913년에도 자이언츠를 이끌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모두 패했다.[3] 그는 좋은 투구, 수비,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강조하는 시스템에 적합한 선수들을 발굴하고 영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3] 맥그로는 다른 감독들보다 많은 선수들을 사고 팔았으며, 대타자와 구원 투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3]
1920년 베이브 루스가 뉴욕 양키스에 합류하면서 폴로 그라운즈의 관중이 급증하자, 맥그로는 양키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1년과 1922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꺾었지만, 192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루스에게 3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패했다.[3] 1924년 자이언츠는 4년 연속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패했다.[3]
맥그로는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 지상주의'로 악명이 높았다.[3] 상대 팀 선수들을 방해하거나 심판에게 폭언을 퍼붓는 등 거친 행동으로 여러 차례 퇴장 및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3]
시간이 흐르면서 맥그로는 경기의 변화에 적응했다. 초기에는 도루를 강조했지만, 홈런이 야구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홈런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수용했다.[3] 1930년대 초반까지 자이언츠는 좋은 팀들을 배출했지만, 우승하기에는 부족했다.[3] 건강 문제로 시달리던 맥그로는 1932년 6월 3일 감독직에서 은퇴하고 빌 테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3]
뉴욕 자이언츠 감독 시절 기록
연도 | 경기 | 승리 | 패전 | 승률 | 순위 | 비고 |
---|---|---|---|---|---|---|
1902 | 65 | 25 | 38 | .397 | 8위 | 7월 19일~ |
1903 | 142 | 84 | 55 | .604 | 2위 | |
1904 | 158 | 106 | 47 | .693 | 1위 | |
1905 | 155 | 105 | 48 | .686 | 1위 | WS 우승 |
1906 | 153 | 96 | 56 | .632 | 2위 | |
1907 | 154 | 82 | 70 | .539 | 4위 | |
1908 | 157 | 98 | 56 | .636 | 2위 | |
1909 | 158 | 92 | 61 | .601 | 3위 | |
1910 | 155 | 91 | 63 | .591 | 2위 | |
1911 | 154 | 99 | 54 | .647 | 1위 | |
1912 | 154 | 103 | 48 | .682 | 1위 | |
1913 | 156 | 101 | 51 | .664 | 1위 | |
1914 | 156 | 84 | 70 | .545 | 2위 | |
1915 | 155 | 69 | 83 | .454 | 8위 | |
1916 | 155 | 86 | 66 | .566 | 4위 | |
1917 | 158 | 98 | 56 | .636 | 1위 | |
1918 | 124 | 71 | 53 | .573 | 2위 | |
1919 | 140 | 87 | 53 | .621 | 2위 | |
1920 | 155 | 86 | 68 | .558 | 2위 | |
1921 | 153 | 94 | 59 | .614 | 1위 | WS 우승 |
1922 | 156 | 93 | 61 | .604 | 1위 | WS 우승 |
1923 | 153 | 95 | 58 | .621 | 1위 | |
1924 | 110 | 61 | 48 | .560 | 1위 | 개막~5월 20일, 7월 8일~ |
1925 | 120 | 65 | 55 | .542 | 2위 | 개막~5월 2일, 6월 9일~ |
1926 | 151 | 74 | 77 | .490 | 5위 | |
1927 | 122 | 70 | 52 | .574 | 3위 | 개막~8월 30일 |
1928 | 155 | 93 | 61 | .604 | 2위 | |
1929 | 152 | 84 | 67 | .556 | 3위 | |
1930 | 154 | 87 | 67 | .565 | 3위 | |
1931 | 153 | 87 | 65 | .572 | 2위 | |
1932 | 40 | 17 | 23 | .425 | 6위 | 개막~6월 1일 |
4. 2. 일본과의 관계
1913년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세계 순회 팀을 이끌고 그해 12월 일본을 방문하여 친선 경기를 가졌다.[19]5. 은퇴 이후
1933년 7월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첫 올스타 경기에서 내셔널 리그를 감독했다. 비록 코니 맥이 이끌던 아메리칸 리그에게 패했지만, 이는 그의 마지막 주요 공식 석상이었다.[1]
1934년 2월 25일, 뉴욕주 뉴로셸의 자택에서 전립선암과 요독증으로 6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볼티모어의 가톨릭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첫 번째 부인 메리와 전 오리올스 동료 선수들 곁에 묻혔다.[1]
1937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커미셔너 랜디스는 맥그로가 "야구의 남성적이고 경쟁적인 본질"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2] 타이 콥은 그를 "선수와 감독 모두로서 야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이라고 칭송했다.[2]
6. 유산 및 평가
존 맥그로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혁신적인 전술과 선수 육성 능력, 승리에 대한 집념으로 야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3][14][15]
맥그로는 선수들에게 엄격했지만, 그들이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선수들은 그를 위해 ''플레이하고 싶어 했다''. 그는 승리 외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16] 그는 다른 팀에서 버려진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어 종종 몇 시즌 더 좋은 성적을 거두게 했다. 때로는 이러한 위험이 성공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았다.[17] 맥그로는 현장에서 선수들을 통제하려고 했고, 모든 투구와 플레이를 지시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한 번 게임에서 승리하는 홈런을 친 선수에게 벌금을 부과했는데, 맥그로가 번트를 지시했기 때문이다.[18]
맥그로는 구원 투수를 사용하여 경기를 세이브하는 것을 처음으로 사용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05년 10번의 출장 중 8번을 클로드 엘리엇을 구원 투수로 기용했다. 1969년까지 세이브가 공식 통계가 아니었지만, 엘리엇은 그 시즌에 6세이브를 기록한 것으로 소급 적용되었으며, 이는 당시 어떤 투수보다 많은 기록이었다.[19][20] 1906년 자이언츠의 세실 퍼거슨은 20번 이상 출장한 최초의 구원 투수가 되었고, 닥 크랜달은 1909년부터 1913년까지 구원 출장 기록을 반복적으로 세웠다.[21]
세부 사항에도 능하고 영감을 주는 리더였던 맥그로는 빌 제임스에 따르면 "젊은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위해 살았다. 말하자면, 그는 말, 무대, 시가, 위스키를 사랑했지만, 젊은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마이너 리그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을 데려와 그들이 뛰어난 선수가 될 때까지 함께 훈련했다."[22]
맥그로는 팀의 패배를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인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재임 기간 대부분 동안 원정 여행에 대해 오후 11시 30분 통금 시간을 설정했고, 그와 그의 코치는 선수들의 호텔 방 문을 오후 11시 30분에 정확히 두드렸다. 그는 다른 팀 구성원과 친목을 도모하는 선수들에게 벌금을 부과했고 덕아웃에서 웃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준을 위반한 사람은 맥그로 자신에게 답해야 했으며, 일반적으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맥그로의 오랜 코치인 아를리 라담은 "맥그로는 아침 식사로 화약을 먹고 따뜻한 피로 씻어낸다"라고 말했다.
그의 '승리 지상주의'는 현대 야구에서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그의 업적을 기려, 그가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팀 로고 'NY'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참조
[1]
웹사이트
List of all baseball managers in the major leagues
https://www.baseball[...]
2024-06-28
[2]
뉴스
Pitz, Old-Time Brooklyn Baseball Players Is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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