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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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저 토니는 1777년 메릴랜드에서 태어난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 1836년부터 1864년까지 미국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메릴랜드 주 법무장관과 미국 법무장관을 거쳐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토니는 대법원장 재임 기간 동안 주 정부의 권한을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특히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사건에서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으며, 토니는 사망 이후에도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동상과 흉상은 철거되거나 교체되는 등, 그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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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로저 브룩 토니 |
| 출생 이름 | Roger Brooke Taney |
| 출생일 | 1777년 3월 17일 |
| 출생지 | 메릴랜드주 캘버트 카운티 |
| 사망일 | 1864년 10월 12일 |
| 사망지 | 워싱턴 D.C. |
| 안장지 | 성 요한 복음사가 공동묘지, 프레데릭, 메릴랜드주 |
| 정당 | 연방당 (1812년 이전) 민주공화당 (1812년–1828년) 민주당 (1828년–1864년) |
| 자녀 | 6명, 앤 아놀드 토니 캠벨, 메리 토니 포함 |
| 친척 | 앨리스 토니 캠벨 에팅 (손녀) 피비 K. 캠벨 (손녀) 로저 브룩 토니 앤더슨 (손자) |
| 학력 | 디킨슨 대학교 (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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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 | |
| 미국 대법원 대법원장 | 재임 시작: 1836년 3월 28일 재임 종료: 1864년 10월 12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이전: 존 마셜 다음: 새먼 P. 체이스 |
| 재무장관 | 재임 시작: 1833년 9월 23일 재임 종료: 1834년 6월 25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이전: 윌리엄 듀안 다음: 리바이 우드베리 |
| 법무장관 | 재임 시작: 1831년 7월 20일 재임 종료: 1833년 11월 14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이전: 존 베리언 다음: 벤저민 버틀러 |
| 육군장관 대행 | 재임 시작: 1831년 6월 18일 재임 종료: 1831년 8월 1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이전: 존 이턴 다음: 루이스 캐스 |
| 메릴랜드주 법무장관 | 재임 시작: 1827년 9월 재임 종료: 1831년 6월 18일 주지사: {{Plainlist| 이전: 토머스 켈 다음: 조시아 베일리 |
| 하원 의원, 캘버트 카운티 | 1799년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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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777년 3월 17일, 토니는 메릴랜드주 캘버트 카운티에서 노예소유주로 담배 농장을 경영하는 유복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4] 토니는 일곱 자녀(아들 넷과 딸 셋) 중 차남으로 태어나 농장을 물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법률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했다. 토니는 1795년 디킨슨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의 법률가로부터 법률을 배웠다.
그 후 1806년 1월 7일, 토니는 프랜시스 스콧 키의 여동생인 앤 피비 찰스턴 키와 결혼했다.
로저 토니는 1777년 3월 17일 메릴랜드주 캘버트 군에서 마이클 토니 5세와 모니카 브룩 토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토니의 조상인 마이클 토니 1세는 1660년 영국에서 메릴랜드로 이주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노예 노동에 의해 운영되는 번창하는 담배 농장의 저명한 가톨릭 토지 소유주로 자리 잡았다.[4] 토니의 형인 마이클 토니 6세가 가문의 농장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로저에게 법학을 공부하도록 권했다. 15세의 토니는 디킨슨 칼리지에 보내져 윤리학, 논리학, 언어, 수학 및 기타 과목을 공부했다. 1796년 디킨슨 칼리지를 졸업한 후, 애나폴리스에서 제레마이아 타운리 체이스 판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토니는 1799년 메릴랜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844년, 토니는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로저 토니는 1777년 3월 17일 메릴랜드주 캘버트 군에서 마이클 토니 5세와 모니카 브룩 토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 토니의 조상인 마이클 토니 1세는 1660년 영국에서 메릴랜드로 이주하여 노예 노동에 의해 운영되는 담배 농장의 가톨릭 토지 소유주가 되었다.[4] 토니의 형인 마이클 토니 6세가 가문의 농장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로저에게 법학을 공부하도록 권했다. 15세의 토니는 디킨슨 칼리지에 보내져 윤리학, 논리학, 언어, 수학 및 기타 과목을 공부했다. 1796년 디킨슨 칼리지를 졸업한 후, 애나폴리스에서 제레마이아 타운리 체이스 판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토니는 1799년 메릴랜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5] 1844년, 토니는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5]토니는 프랜시스 스콧 키의 여동생인 앤 피비 찰턴 키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토니 본인은 가톨릭 신자로 남았지만, 그의 딸들은 모두 앤의 미국 성공회 신자로 길러졌다. 토니는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파트를 임대했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볼티모어에 영구적인 집을 유지했다. 앤이 1855년에 사망한 후, 토니와 그의 미혼 딸 두 명은 워싱턴 D.C.로 영구 이주했다.
2. 2. 초기 정치 경력
1799년 토니는 연방당 소속으로 메릴랜드주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801년 재선에 실패했다. 이후 메릴랜드주 프레데릭에서 1823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1812년에는 미영 전쟁에 반대하여 연방당 주 지도부와 결별했지만, 당적은 유지했다. 1816년, 메릴랜드주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23년, 토니는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볼티모어로 옮겼고, 그곳에서 그는 효과적인 소송 변호사로 널리 명성을 얻었다. 1826년, 토니와 대니얼 웹스터는 미국 대법원에 출두한 사건에서 상인 솔로몬 에팅을 변호했다. 1827년, 토니는 메릴랜드 법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며 민주당에 합류했다. 그는 잭슨의 민주당에 합류하여 잭슨의 1828년 메릴랜드 선거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토니는 노예 제도를 악한 관행으로 여겼다.[6] 그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일을 할 수 없는 나이든 사람들에게 매달 연금을 제공했다.[7] 그러나 그는 노예 제도가 점진적으로, 그리고 주로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주(州)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믿었으며,[6] 국가주의자로서 노예 폐지론자들이 "국가를 찢어놓고 있다"고 비난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9년 토니는 노예 제도를 비판한 혐의로 체포된 노예 폐지론자 감리교 목사 제이콥 그루버를 변호했다. 그루버는 "반란과 반역 행위"를 선동하려 한 혐의를 받았다.[9] 토니는 검찰이 그루버에 대한 사건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범죄 의도의 증거가 없으므로 그루버의 사상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토니는 "그루버를 열정적으로 변호"하며, 개시 변론에서 노예 제도를 "우리 국가적 특징에 대한 오점"이라고 비난했다. 변호를 들은 후, 배심원은 그루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9]
2. 3. 법무장관 및 재무장관
1827년 토니는 메릴랜드주 법무장관으로 지명되었고, 1831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토니는 법무장관으로서 제2 미국 은행 폐지를 주장한 잭슨 대통령을 지원했으며, 의회가 제2 미국 은행의 인가를 갱신하려 했을 때 거부 통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미국 재무장관 윌리엄 듀안은 제2 미국 은행의 존속을 주장하며, 제2 미국 은행에서 연방 정부의 자금을 인출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잭슨 대통령은 듀안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토니를 신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1833년9월 토니가 재무 장관에 취임하자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정부 예금을 인출하여 "펫 뱅크"라고 불리는 7개의 민주당 계열 주법 은행에 분산 예치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재무 장관에 취임한 토니는 재빨리 잭슨 대통령의 정책을 실행하여 제2 미국 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제2 미국 은행은 그 중앙 은행적 기능을 잃고, 결국 1836년 특허 갱신을 거부당해 주법 은행으로 전환되었다.
넉넉한 신용을 갈망하는 신흥 기업가들은 이 예금 이전을 크게 반겼지만, 중앙 은행의 통제력이 상실된 결과, 대규모 신용 붐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또한 1833년부터 1834년에 걸쳐 대규모 금융 공황이 발생했다. 상원은 대통령의 권한 강행 행사를 비난하며, 토니의 재무 장관 취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토니는 이듬해 1834년에 재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토니는 상원에서 거부된 국가 역사상 최초의 내각 지명자였다.[11]

2. 4. 대법원장 임명
1835년 1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은퇴하는 연방 대법원 판사 가브리엘 듀발의 후임으로 토니를 지명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임명이 무산되었다.[12] 1834년과 1835년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835년 7월, 잭슨은 존 마셜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토니를 다시 지명했다. 휘그당은 토니의 임명을 반대했지만, 1836년 3월 상원은 인준을 통과시켰다.[12] 토니는 연방 대법원에 재직한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다.[12]3. 대법원장 재임 시절
판사로서의 토니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다른 많은 판사들과 마찬가지로, 주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전임자인 존 마셜과는 다른 가치관이었으며, 이 때문에 종종 마셜 시대에 내려진 판결과는 다른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1819년의 다트머스 대학교 대 우드워드 사건에서 마셜은 주지사가 임명하는 이사회를 다트머스 대학교에 설치하려 했던 뉴햄프셔 주 의회의 결의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기업에 대한 주의 간섭이나 통제를 적극적으로 배제했다. 반면 토니는 1849년의 스미스 대 터너 사건에서 주의 권한을 확장하는 판결을 내려, 주에서의 개혁적인 경제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토니의 주 권한을 확장하는 생각은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사건에서 남부에서의 노예제 유지를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이 재판에서는 북부의 자유주로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인 드레드 스콧/Dred Scott영어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가 다투어졌지만, 토니는 자유주 거주가 자유 신분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결은 후에 남북 전쟁으로 이어진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전시 중에도 그는 대법원장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링컨 대통령의 정책에 제약을 가했다.
==== 주요 판결 ====
판사로서의 토니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임명을 받은 다른 많은 판사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강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은 전임 존 마샬과는 다른 가치관이었으며, 따라서 종종 마샬 시대에 내려진 판결과는 다른 판결이 내려졌다.
예를 들어, 1819년의 다트머스 대학교 대 우드워드 사건에서 마샬은 주지사가 임명하는 이사회를 다트머스 대학교에 설치하려한 뉴햄프셔주 의회의 결의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를 적극적으로 배제했다. 한편 토니는 1849년의 스미스 대 터너 사건에서 국가의 권위를 확장하는 판결을 내려 국가에서 개혁적인 경제 정책을 지지 했다.
하지만 토니의 국가 권한을 확장한 생각은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는 지 제의했지만,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고 해서, 자유민 신분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결은 이후 남북 전쟁이 벌어진 원인 중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만, 전쟁 중에도 그는 장관의 지위에 머물면서 링컨 대통령의 정책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찰스강 교량 대 워렌 교량 소송''은 타니 법원의 첫 번째 주요 사건 중 하나였다. 1785년,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찰스강에 찰스강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1828년, 주 의회는 찰스강 교량에서 불과 100야드 떨어진 곳에 워렌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다.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는 자신들의 헌장이 찰스강 지역의 교량 운영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찰스강 교량의 변호사 대니얼 웹스터는 매사추세츠 연방이 자신의 의뢰인에게 부여한 독점권을 무시함으로써 통상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의 변호사 사이먼 그린리프는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에게 명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헌장에 대한 웹스터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는 다수 의견에서 헌장이 찰스강 교량에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는 계약 조항이 주 의회가 계약의 명시적 조항을 위반하는 것을 막지만, 법원은 주의 일반적인 복지와 상충될 경우 계약 조항을 좁게 해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니는 다른 해석은 인프라 발전을 막을 것이라고 추론했는데, 다른 주 헌장의 소유주들이 암묵적인 독점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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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 제10절은 주가 신용 증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신용 증권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했다. ''크레이그 대 미주리 소송''(1830)에서 마셜 법원은 4 대 3의 투표로 주 이자부 대출 증서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그러나 토니 대법원은 은행의 주식, 자금 및 이익이 주에 속하고 임원 및 이사가 주 의회에 의해 임명된 경우에도 주가 발행한 순환 어음의 발행을 지지했다. 법원은 신용 증권을 주가 주권을 가지고 주가 발행하고 돈으로 유통되도록 설계된 어음으로 좁게 정의했다. 문제의 어음은 주 자체가 아닌 은행에서 상환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적 목적으로 신용 증권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주 은행 어음의 합헌성을 입증하였고, 이는 주 정부의 금융 통제권을 강화했다.
1839년의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소송'' 사건에서 토니는 7명의 다른 대법관과 함께 앨라배마 주에서 주 외(外) 기업의 사업 운영을 금지한 하급 법원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주 의회가 그러한 운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하지 않는 한 주 외(外) 기업이 앨라배마 (또는 다른 주)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로저 토니 대법원장은 주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1842)에서 도망 노예를 돕는 주법을 무효화하고, 연방 도망 노예법의 시행을 돕는 것도 금지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인 ''루터 대 보든''(1849년)은 연방 사법 권한을 제한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법원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체 권한을 고려했다. 도르의 구두 수선공인 마틴 루터는 루터의 집이 약탈당했기 때문에 주 민병대원인 루터 보든을 고소했다. 루터는 도르 정부가 로드아일랜드의 합법적인 정부이며, 보든의 집 침입 행위가 법적 권한이 없는 사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순회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기각하고 침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결했으며, 대법원은 1849년에 이를 확정했다. 이 판결은 정치적 질문과 사법적 질문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수 의견은 헌법 제4조 4항인 보장 조항을 해석했다. 토니는 이 조항에 따라 의회가 각 주에 어떤 정부가 수립될지 결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사법 자제력의 한 예로서 중요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판사들이 로드아일랜드 개혁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1847년 온타리오 호수에서 발생한 해상 충돌 사고에서 ''제네시 치프''호의 프로펠러가 스쿠너 ''쿠바''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해사 관할권을 오대호로 확대한 1845년 법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쿠바''호의 소유주들은 ''제네시 치프''호 선원의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제네시 치프''호의 변호사는 ''쿠바''호의 과실을 비난하며 사고가 연방 관할권의 범위를 벗어난 뉴욕의 수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핵심 헌법 문제는 이 사건이 연방 법원에 적절하게 속하는지, 특히 해사 관할권이 담수호에까지 미치는지 여부였다. 영국에서는 조수강만이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영국법에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관할권을 부여받은 해사 법원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관할권이 제한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대호와 대륙 강의 광대한 지역이 수백 마일에 걸쳐 조수가 없었지만, 이 수역에서 대형 선박이 승객과 화물을 실어 이동할 수 있었다. 토니는 미국 법원의 해사 관할권이 실제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바다 조수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미친다고 판결했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연방 해사 관할권에 대한 광범위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했다. 토니에 따르면, 1845년 법은 연방 법원의 관할권을 통제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에 속했다. "따라서 이 법이 헌법에 부합한다면, 오대호와 이를 연결하는 항해가 가능한 수역이 헌법이 채택되었을 때 미국에서 알려지고 이해된 해사 및 해상 관할권의 범위 내에 있다는 근거로 지지되어야 한다."
토니는 1851년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사건에서 다수 의견을 썼는데, 법원은 자유주인 오하이오주에서 음악 공연을 한 켄터키주 출신 노예들이 켄터키로 자발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전히 노예 신분이라고 판결했다. 토니의 좁게 구성된 의견에는 친노예 및 반노예 판사 모두 참여했다.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토니는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는 것만으로는 자유민 신분을 획득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토니는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 자유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노예화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헌법에 따른 시민의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
- 흑인은 "백인과 어울리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 백인이 존중해야 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열등했다."
-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며, 헌법은 의회에 영토 내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 연방 정부는 영토의 사람들에게 "신탁자" 역할을 하며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영토로 데려갈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오직 주만이 노예제를 금지할 수 있다.
- 스콧은 여전히 노예이다.
이 판결은 헌법 채택 당시 흑인이 법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주법을 언급했지만, 1788년에 5개 주가 흑인의 투표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북부에서 큰 비판을 받았으며, 벤자민 로빈스 커티스 대법관은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켰고, 공화당의 인기를 높였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공화당원들은 토니의 법적 추론을 거부하고 미국 독립 선언서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인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토니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며, 더불어민주당은 이 판결을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한다.
==== 찰스강 교량 대 워렌 교량 사건 (1837) ====
1785년,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찰스강에 찰스강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1828년, 주 의회는 찰스강 교량에서 불과 100야드 떨어진 곳에 워렌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다.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는 자신들의 헌장이 찰스강 지역의 교량 운영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찰스강 교량의 변호사 대니얼 웹스터는 매사추세츠 연방이 자신의 의뢰인에게 부여한 독점권을 무시함으로써 통상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의 변호사 사이먼 그린리프는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에게 명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헌장에 대한 웹스터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는 다수 의견에서 헌장이 찰스강 교량에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는 계약 조항이 주 의회가 계약의 명시적 조항을 위반하는 것을 막지만, 법원은 주의 일반적인 복지와 상충될 경우 계약 조항을 좁게 해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니는 다른 해석은 인프라 발전을 막을 것이라고 추론했는데, 다른 주 헌장의 소유주들이 암묵적인 독점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뉴욕시 시장 대 밀른 사건 (1837) ====
원고는 입항하는 선박의 선장이 입국하는 모든 승객에 대한 정보, 즉 나이, 건강 상태, 마지막 법적 거주지 등을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뉴욕주 법률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 법원 앞에 놓인 문제는 주 법률이 의회의 상업 규제 권한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뉴욕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에 속하는 경찰 권한인지 여부였다. 타니와 그의 동료들은 연방과 주의 규제 권한에 대한 상충되는 주장을 수용하는 보다 미묘한 수단을 고안하려 했다. 법원은 뉴욕의 손을 들어주어, 그 법률이 뉴욕 항구와 외국 항구 간의 상업을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 법률이 주에 정당하게 속한 경찰 권한의 행사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판결했다.[13]
==== 브리스코 대 켄터키 연방 은행 사건 (1837) ====
''브리스코 대 켄터키 연방 은행 소송''(1837)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미국 제2 은행 재인가 거부로 촉발된 금융 혁명을 완성하고 남북 전쟁 이전 시대에 은행 및 통화에 대한 주 통제를 강화하는 길을 열었다. 켄터키의 연방 은행이 발행한 어음이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신용 증권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었다. 1819년 공황 기간에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설립된 켄터키의 연방 은행은 주 재무부의 신용과 판매되지 않은 공공 토지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그 어음은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종류의 신용 증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3]
헌법 제1조 제10절은 주가 신용 증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신용 증권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했다. ''크레이그 대 미주리 소송''(1830)에서 마셜 법원은 4 대 3의 투표로 주 이자부 대출 증서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그러나 토니 대법원은 은행의 주식, 자금 및 이익이 주에 속하고 임원 및 이사가 주 의회에 의해 임명된 경우에도 주가 발행한 순환 어음의 발행을 지지했다. 법원은 신용 증권을 주가 주권을 가지고 주가 발행하고 돈으로 유통되도록 설계된 어음으로 좁게 정의했다. 문제의 어음은 주 자체가 아닌 은행에서 상환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적 목적으로 신용 증권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주 은행 어음의 합헌성을 입증하였고, 이는 주 정부의 금융 통제권을 강화했다.[13]
====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사건 (1839) ====
1839년의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소송'' 사건에서 토니는 7명의 다른 대법관과 함께 앨라배마 주에서 주 외(外) 기업의 사업 운영을 금지한 하급 법원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주 의회가 그러한 운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하지 않는 한 주 외(外) 기업이 앨라배마 (또는 다른 주)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 (1842) ====
로저 토니 대법원장은 주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1842)에서 도망 노예를 돕는 주법을 무효화하고, 연방 도망 노예법의 시행을 돕는 것도 금지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 루터 대 보든 (1849) ====
토니의 다수 의견인 ''루터 대 보든''(1849년)은 연방 사법 권한을 제한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법원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체 권한을 고려했다. 도르의 구두 수선공인 마틴 루터는 루터의 집이 약탈당했기 때문에 주 민병대원인 루터 보든을 고소했다. 루터는 도르 정부가 로드아일랜드의 합법적인 정부이며, 보든의 집 침입 행위가 법적 권한이 없는 사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순회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기각하고 침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결했으며, 대법원은 1849년에 이를 확정했다. 이 판결은 정치적 질문과 사법적 질문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수 의견은 헌법 제4조 4항인 보장 조항을 해석했다. 토니는 이 조항에 따라 의회가 각 주에 어떤 정부가 수립될지 결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사법 자제력의 한 예로서 중요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판사들이 로드아일랜드 개혁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제네시 치프 대 피츠휴 (1852) ====
1847년 온타리오 호수에서 발생한 해상 충돌 사고에서 ''제네시 치프''호의 프로펠러가 스쿠너 ''쿠바''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해사 관할권을 오대호로 확대한 1845년 법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쿠바''호의 소유주들은 ''제네시 치프''호 선원의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제네시 치프''호의 변호사는 ''쿠바''호의 과실을 비난하며 사고가 연방 관할권의 범위를 벗어난 뉴욕의 수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핵심 헌법 문제는 이 사건이 연방 법원에 적절하게 속하는지, 특히 해사 관할권이 담수호에까지 미치는지 여부였다. 영국에서는 조수강만이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영국법에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관할권을 부여받은 해사 법원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관할권이 제한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대호와 대륙 강의 광대한 지역이 수백 마일에 걸쳐 조수가 없었지만, 이 수역에서 대형 선박이 승객과 화물을 실어 이동할 수 있었다. 토니는 미국 법원의 해사 관할권이 실제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바다 조수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미친다고 판결했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연방 해사 관할권에 대한 광범위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했다. 토니에 따르면, 1845년 법은 연방 법원의 관할권을 통제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에 속했다. "따라서 이 법이 헌법에 부합한다면, 오대호와 이를 연결하는 항해가 가능한 수역이 헌법이 채택되었을 때 미국에서 알려지고 이해된 해사 및 해상 관할권의 범위 내에 있다는 근거로 지지되어야 한다."[15]
====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1851) ====
토니는 1851년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사건에서 다수 의견을 썼는데, 법원은 자유주인 오하이오주에서 음악 공연을 한 켄터키주 출신 노예들이 켄터키로 자발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전히 노예 신분이라고 판결했다.[15] 토니의 좁게 구성된 의견에는 친노예 및 반노예 판사 모두 참여했다.
====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 (1857) ====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토니는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는 것만으로는 자유민 신분을 획득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16]
토니는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17]
- 자유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노예화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헌법에 따른 시민의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
- 흑인은 "백인과 어울리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 백인이 존중해야 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열등했다."
-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며, 헌법은 의회에 영토 내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 연방 정부는 영토의 사람들에게 "신탁자" 역할을 하며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영토로 데려갈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오직 주만이 노예제를 금지할 수 있다.
- 스콧은 여전히 노예이다.
이 판결은 헌법 채택 당시 흑인이 법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주법을 언급했지만, 1788년에 5개 주가 흑인의 투표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북부에서 큰 비판을 받았으며, 벤자민 로빈스 커티스 대법관은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켰고, 공화당의 인기를 높였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공화당원들은 토니의 법적 추론을 거부하고 미국 독립 선언서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인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토니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며, 더불어민주당은 이 판결을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한다.
==== 남북 전쟁 중의 활동 ====
로저 토니는 남북 전쟁 중에도 대법원장직을 유지하며 링컨 대통령의 정책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링컨은 타니가 선호했던 후보 존 C. 브레킨리지를 꺾고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몇몇 남부 주들은 링컨의 당선에 대응하여 탈퇴하여 미국 남부 연합을 결성했고, 미국 남북 전쟁은 1861년 4월 섬터 요새 전투로 시작되었다. 토니는 남부 주들이 탈퇴할 헌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링컨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남북 전쟁 기간 동안 연방 대법원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대통령 및 연방 정부의 권한에 대한 링컨의 보다 광범위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1861년 분리주의자들이 변경 주인 메릴랜드주에서 중요한 다리와 전신선을 파괴한 후, 링컨은 주 대부분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했다. 이로 인해 군 관계자들이 의심되는 분리주의자들을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하고 투옥할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볼티모어 폭동 이후, 연방 관계자들은 연방 기반 시설을 파괴한 혐의로 주 의원 존 메리먼을 체포했다. 토니는 ''Ex parte Merryman'' 사건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할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고 판결했고, 메리먼의 석방을 명령했다. 링컨은 타니의 명령에 불복종을 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할 때, 의회에 영장 정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후에야 그렇게 했고, 그들은 1863년 인신 보호 영장 정지법을 통과시켰다.
1863년 연방 함선이 남부 연합과 무역을 수행한 선박을 압수하면서 연방 해상 봉쇄 이후에 발생한 ''Prize Cases''를 대법원에서 심리했다. 토니는 연방 대법원 판사 새뮤얼 넬슨이 작성한 반대 의견에 동참했는데, 넬슨은 링컨이 의회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봉쇄를 명령함으로써 그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3. 1. 주요 판결
판사로서의 토니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임명을 받은 다른 많은 판사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강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은 전임 존 마샬과는 다른 가치관이었으며, 따라서 종종 마샬 시대에 내려진 판결과는 다른 판결이 내려졌다.예를 들어, 1819년의 다트머스 대학교 대 우드워드 사건에서 마샬은 주지사가 임명하는 이사회를 다트머스 대학교에 설치하려한 뉴햄프셔주 의회의 결의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를 적극적으로 배제했다. 한편 토니는 1849년의 스미스 대 터너 사건에서 국가의 권위를 확장하는 판결을 내려 국가에서 개혁적인 경제 정책을 지지 했다.
하지만 토니의 국가 권한을 확장한 생각은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 제의했지만,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고 해서, 자유민 신분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결은 이후 남북 전쟁이 벌어진 원인 중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만, 전쟁 중에도 그는 장관의 지위에 머물면서 링컨 대통령의 정책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찰스강 교량 대 워렌 교량 소송''(Charles River Bridge v. Warren Bridge)은 타니 법원의 첫 번째 주요 사건 중 하나였다. 1785년,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찰스강에 찰스강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1828년, 주 의회는 찰스강 교량에서 불과 100야드 떨어진 곳에 워렌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다.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는 자신들의 헌장이 찰스강 지역의 교량 운영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찰스강 교량의 변호사 대니얼 웹스터는 매사추세츠 연방이 자신의 의뢰인에게 부여한 독점권을 무시함으로써 통상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의 변호사 사이먼 그린리프는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에게 명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헌장에 대한 웹스터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는 다수 의견에서 헌장이 찰스강 교량에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는 계약 조항이 주 의회가 계약의 명시적 조항을 위반하는 것을 막지만, 법원은 주의 일반적인 복지와 상충될 경우 계약 조항을 좁게 해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니는 다른 해석은 인프라 발전을 막을 것이라고 추론했는데, 다른 주 헌장의 소유주들이 암묵적인 독점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뉴욕시 시장 대 밀른 소송''(Mayor of the City of New York v. Miln, 1837)에서 원고는 입항하는 선박의 선장이 입국하는 모든 승객에 대한 정보, 즉 나이, 건강 상태, 마지막 법적 거주지 등을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뉴욕주 법률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 법원 앞에 놓인 문제는 주 법률이 의회의 상업 규제 권한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뉴욕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에 속하는 경찰 권한인지 여부였다. 타니와 그의 동료들은 연방과 주의 규제 권한에 대한 상충되는 주장을 수용하는 보다 미묘한 수단을 고안하려 했다. 법원은 뉴욕의 손을 들어주어, 그 법률이 뉴욕 항구와 외국 항구 간의 상업을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 법률이 주에 정당하게 속한 경찰 권한의 행사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판결했다.[13]
''브리스코 대 켄터키 연방 은행 소송''(Briscoe v. Commonwealth Bank of Kentucky, 1837)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미국 제2 은행 재인가 거부로 촉발된 금융 혁명을 완성하고 남북 전쟁 이전 시대에 은행 및 통화에 대한 주 통제를 강화하는 길을 열었다. 켄터키의 연방 은행이 발행한 어음이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신용 증권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었다. 1819년 공황 기간에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설립된 켄터키의 연방 은행은 주 재무부의 신용과 판매되지 않은 공공 토지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그 어음은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종류의 신용 증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헌법 제1조 제10절은 주가 신용 증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신용 증권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했다. ''크레이그 대 미주리 소송''(Craig v. Missouri, 1830)에서 마셜 법원은 4 대 3의 투표로 주 이자부 대출 증서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그러나 토니 대법원은 은행의 주식, 자금 및 이익이 주에 속하고 임원 및 이사가 주 의회에 의해 임명된 경우에도 주가 발행한 순환 어음의 발행을 지지했다. 법원은 신용 증권을 주가 주권을 가지고 주가 발행하고 돈으로 유통되도록 설계된 어음으로 좁게 정의했다. 문제의 어음은 주 자체가 아닌 은행에서 상환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적 목적으로 신용 증권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주 은행 어음의 합헌성을 입증하였고, 이는 주 정부의 금융 통제권을 강화했다.
1839년의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소송''(Bank of Augusta v. Earle) 사건에서 토니는 7명의 다른 대법관과 함께 앨라배마 주에서 주 외(外) 기업의 사업 운영을 금지한 하급 법원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주 의회가 그러한 운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하지 않는 한 주 외(外) 기업이 앨라배마 (또는 다른 주)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로저 토니 대법원장은 주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1842)에서 도망 노예를 돕는 주법을 무효화하고, 연방 도망 노예법의 시행을 돕는 것도 금지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인 ''루터 대 보든''(1849년)은 연방 사법 권한을 제한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법원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체 권한을 고려했다. 도르의 구두 수선공인 마틴 루터는 루터의 집이 약탈당했기 때문에 주 민병대원인 루터 보든을 고소했다. 루터는 도르 정부가 로드아일랜드의 합법적인 정부이며, 보든의 집 침입 행위가 법적 권한이 없는 사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순회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기각하고 침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결했으며, 대법원은 1849년에 이를 확정했다. 이 판결은 정치적 질문과 사법적 질문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수 의견은 헌법 제4조 4항인 보장 조항을 해석했다. 토니는 이 조항에 따라 의회가 각 주에 어떤 정부가 수립될지 결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사법 자제력의 한 예로서 중요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판사들이 로드아일랜드 개혁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1847년 온타리오 호수에서 발생한 해상 충돌 사고에서 ''제네시 치프''호의 프로펠러가 스쿠너 ''쿠바''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해사 관할권을 오대호로 확대한 1845년 법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쿠바''호의 소유주들은 ''제네시 치프''호 선원의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제네시 치프''호의 변호사는 ''쿠바''호의 과실을 비난하며 사고가 연방 관할권의 범위를 벗어난 뉴욕의 수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핵심 헌법 문제는 이 사건이 연방 법원에 적절하게 속하는지, 특히 해사 관할권이 담수호에까지 미치는지 여부였다. 영국에서는 조수강만이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영국법에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관할권을 부여받은 해사 법원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관할권이 제한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대호와 대륙 강의 광대한 지역이 수백 마일에 걸쳐 조수가 없었지만, 이 수역에서 대형 선박이 승객과 화물을 실어 이동할 수 있었다. 토니는 미국 법원의 해사 관할권이 실제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바다 조수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미친다고 판결했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연방 해사 관할권에 대한 광범위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했다. 토니에 따르면, 1845년 법은 연방 법원의 관할권을 통제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에 속했다. "따라서 이 법이 헌법에 부합한다면, 오대호와 이를 연결하는 항해가 가능한 수역이 헌법이 채택되었을 때 미국에서 알려지고 이해된 해사 및 해상 관할권의 범위 내에 있다는 근거로 지지되어야 한다."
토니는 1851년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사건에서 다수 의견을 썼는데, 법원은 자유주인 오하이오주에서 음악 공연을 한 켄터키주 출신 노예들이 켄터키로 자발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전히 노예 신분이라고 판결했다. 토니의 좁게 구성된 의견에는 친노예 및 반노예 판사 모두 참여했다.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토니는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는 것만으로는 자유민 신분을 획득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토니는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 자유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노예화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헌법에 따른 시민의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
- 흑인은 "백인과 어울리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 백인이 존중해야 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열등했다."
-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며, 헌법은 의회에 영토 내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 연방 정부는 영토의 사람들에게 "신탁자" 역할을 하며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영토로 데려갈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오직 주만이 노예제를 금지할 수 있다.
- 스콧은 여전히 노예이다.
이 판결은 헌법 채택 당시 흑인이 법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주법을 언급했지만, 1788년에 5개 주가 흑인의 투표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북부에서 큰 비판을 받았으며, 벤자민 로빈스 커티스 대법관은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켰고, 공화당의 인기를 높였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공화당원들은 토니의 법적 추론을 거부하고 미국 독립 선언서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인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토니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며, 더불어민주당은 이 판결을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한다.
3. 1. 1. 찰스강 교량 대 워렌 교량 사건 (1837)
1785년,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찰스강에 찰스강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1828년, 주 의회는 찰스강 교량에서 불과 100야드 떨어진 곳에 워렌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다.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는 자신들의 헌장이 찰스강 지역의 교량 운영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찰스강 교량의 변호사 대니얼 웹스터는 매사추세츠 연방이 자신의 의뢰인에게 부여한 독점권을 무시함으로써 통상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의 변호사 사이먼 그린리프는 찰스강 교량의 소유주에게 명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헌장에 대한 웹스터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는 다수 의견에서 헌장이 찰스강 교량에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는 계약 조항이 주 의회가 계약의 명시적 조항을 위반하는 것을 막지만, 법원은 주의 일반적인 복지와 상충될 경우 계약 조항을 좁게 해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니는 다른 해석은 인프라 발전을 막을 것이라고 추론했는데, 다른 주 헌장의 소유주들이 암묵적인 독점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3. 1. 2. 뉴욕시 시장 대 밀른 사건 (1837)
원고는 입항하는 선박의 선장이 입국하는 모든 승객에 대한 정보, 즉 나이, 건강 상태, 마지막 법적 거주지 등을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뉴욕주 법률에 이의를 제기했다. 타니 법원 앞에 놓인 문제는 주 법률이 의회의 상업 규제 권한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뉴욕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에 속하는 경찰 권한인지 여부였다. 타니와 그의 동료들은 연방과 주의 규제 권한에 대한 상충되는 주장을 수용하는 보다 미묘한 수단을 고안하려 했다. 법원은 뉴욕의 손을 들어주어, 그 법률이 뉴욕 항구와 외국 항구 간의 상업을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 법률이 주에 정당하게 속한 경찰 권한의 행사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판결했다.[13]3. 1. 3. 브리스코 대 켄터키 연방 은행 사건 (1837)
''브리스코 대 켄터키 연방 은행 소송''(Briscoe v. Commonwealth Bank of Kentucky, 1837)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미국 제2 은행 재인가 거부로 촉발된 금융 혁명을 완성하고 남북 전쟁 이전 시대에 은행 및 통화에 대한 주 통제를 강화하는 길을 열었다. 켄터키의 연방 은행이 발행한 어음이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신용 증권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었다. 1819년 공황 기간에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설립된 켄터키의 연방 은행은 주 재무부의 신용과 판매되지 않은 공공 토지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그 어음은 연방 헌법에서 금지한 종류의 신용 증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3]헌법 제1조 제10절은 주가 신용 증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신용 증권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했다. ''크레이그 대 미주리 소송''(Craig v. Missouri, 1830)에서 마셜 법원은 4 대 3의 투표로 주 이자부 대출 증서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그러나 토니 대법원은 은행의 주식, 자금 및 이익이 주에 속하고 임원 및 이사가 주 의회에 의해 임명된 경우에도 주가 발행한 순환 어음의 발행을 지지했다. 법원은 신용 증권을 주가 주권을 가지고 주가 발행하고 돈으로 유통되도록 설계된 어음으로 좁게 정의했다. 문제의 어음은 주 자체가 아닌 은행에서 상환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적 목적으로 신용 증권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주 은행 어음의 합헌성을 입증하였고, 이는 주 정부의 금융 통제권을 강화했다.[13]
3. 1. 4.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사건 (1839)
1839년의 ''오거스타 은행 대 얼 소송''(Bank of Augusta v. Earle) 사건에서 토니는 7명의 다른 대법관과 함께 앨라배마 주에서 주 외(外) 기업의 사업 운영을 금지한 하급 법원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주 의회가 그러한 운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하지 않는 한 주 외(外) 기업이 앨라배마 (또는 다른 주)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3. 1. 5.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 (1842)
로저 토니 대법원장은 주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프리그 대 펜실베이니아 사건'''(1842)에서 도망 노예를 돕는 주법을 무효화하고, 연방 도망 노예법의 시행을 돕는 것도 금지하는 판결로 이어졌다.3. 1. 6. 루터 대 보든 (1849)
토니의 다수 의견인 ''루터 대 보든''(1849년)[14]은 연방 사법 권한을 제한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법원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체 권한을 고려했다. 도르의 구두 수선공인 마틴 루터는 루터의 집이 약탈당했기 때문에 주 민병대원인 루터 보든을 고소했다. 루터는 도르 정부가 로드아일랜드의 합법적인 정부이며, 보든의 집 침입 행위가 법적 권한이 없는 사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순회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기각하고 침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결했으며, 대법원은 1849년에 이를 확정했다. 이 판결은 정치적 질문과 사법적 질문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수 의견은 헌법 제4조 4항인 보장 조항을 해석했다. 토니는 이 조항에 따라 의회가 각 주에 어떤 정부가 수립될지 결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사법 자제력의 한 예로서 중요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판사들이 로드아일랜드 개혁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3. 1. 7. 제네시 치프 대 피츠휴 (1852)
1847년 온타리오 호수에서 발생한 해상 충돌 사고에서 ''제네시 치프''호의 프로펠러가 스쿠너 ''쿠바''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해사 관할권을 오대호로 확대한 1845년 법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쿠바''호의 소유주들은 ''제네시 치프''호 선원의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제네시 치프''호의 변호사는 ''쿠바''호의 과실을 비난하며 사고가 연방 관할권의 범위를 벗어난 뉴욕의 수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핵심 헌법 문제는 이 사건이 연방 법원에 적절하게 속하는지, 특히 해사 관할권이 담수호에까지 미치는지 여부였다. 영국에서는 조수강만이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영국법에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관할권을 부여받은 해사 법원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관할권이 제한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대호와 대륙 강의 광대한 지역이 수백 마일에 걸쳐 조수가 없었지만, 이 수역에서 대형 선박이 승객과 화물을 실어 이동할 수 있었다. 토니는 미국 법원의 해사 관할권이 실제로 항해가 가능한 수역에, 바다 조수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미친다고 판결했다. 토니의 다수 의견은 연방 해사 관할권에 대한 광범위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했다. 토니에 따르면, 1845년 법은 연방 법원의 관할권을 통제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에 속했다. "따라서 이 법이 헌법에 부합한다면, 오대호와 이를 연결하는 항해가 가능한 수역이 헌법이 채택되었을 때 미국에서 알려지고 이해된 해사 및 해상 관할권의 범위 내에 있다는 근거로 지지되어야 한다."[15]3. 1. 8.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1851)
토니는 1851년 ''스트라더 대 그레이엄'' 사건에서 다수 의견을 썼는데, 법원은 자유주인 오하이오주에서 음악 공연을 한 켄터키주 출신 노예들이 켄터키로 자발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전히 노예 신분이라고 판결했다.[15] 토니의 좁게 구성된 의견에는 친노예 및 반노예 판사 모두 참여했다.
3. 1. 9.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 (1857)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토니는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북부 자유주에 주인과 함께 이주한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토니는 자유주에 거주했다는 것만으로는 자유민 신분을 획득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16]토니는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17]
- 자유로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노예화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헌법에 따른 시민의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
- 흑인은 "백인과 어울리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 백인이 존중해야 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열등했다."
-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며, 헌법은 의회에 영토 내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 연방 정부는 영토의 사람들에게 "신탁자" 역할을 하며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영토로 데려갈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오직 주만이 노예제를 금지할 수 있다.
- 스콧은 여전히 노예이다.
이 판결은 헌법 채택 당시 흑인이 법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주법을 언급했지만, 1788년에 5개 주가 흑인의 투표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북부에서 큰 비판을 받았으며, 벤자민 로빈스 커티스 대법관은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켰고, 공화당의 인기를 높였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공화당원들은 토니의 법적 추론을 거부하고 미국 독립 선언서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인의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토니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며, 더불어민주당은 이 판결을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한다.
3. 2. 남북 전쟁 중의 활동
로저 토니는 남북 전쟁 중에도 대법원장직을 유지하며 링컨 대통령의 정책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링컨은 타니가 선호했던 후보 존 C. 브레킨리지를 꺾고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몇몇 남부 주들은 링컨의 당선에 대응하여 탈퇴하여 미국 남부 연합을 결성했고, 미국 남북 전쟁은 1861년 4월 섬터 요새 전투로 시작되었다. 토니는 남부 주들이 탈퇴할 헌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링컨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남북 전쟁 기간 동안 연방 대법원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대통령 및 연방 정부의 권한에 대한 링컨의 보다 광범위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1861년 분리주의자들이 변경 주인 메릴랜드주에서 중요한 다리와 전신선을 파괴한 후, 링컨은 주 대부분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했다. 이로 인해 군 관계자들이 의심되는 분리주의자들을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하고 투옥할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볼티모어 폭동 이후, 연방 관계자들은 연방 기반 시설을 파괴한 혐의로 주 의원 존 메리먼을 체포했다. 토니는 ''Ex parte Merryman'' 사건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할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고 판결했고, 메리먼의 석방을 명령했다. 링컨은 타니의 명령에 불복종을 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할 때, 의회에 영장 정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후에야 그렇게 했고, 그들은 1863년 인신 보호 영장 정지법을 통과시켰다.
1863년 연방 함선이 남부 연합과 무역을 수행한 선박을 압수하면서 연방 해상 봉쇄 이후에 발생한 ''Prize Cases''를 대법원에서 심리했다. 토니는 연방 대법원 판사 새뮤얼 넬슨이 작성한 반대 의견에 동참했는데, 넬슨은 링컨이 의회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봉쇄를 명령함으로써 그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4. 사망과 유산
토니는 1864년 10월 12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18] 그가 살던 메릴랜드 주는 같은 날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19] 그는 두 번째로 긴 재임 기간을 가진 대법원장이었다.[18]
그가 사망한 후, 토니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인물로 남았다. 특히 드레드 스콧 판결은 "그를 사람이나 판사로서 존경심을 잃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6] 1865년, 찰스 서머 상원의원은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대법원장의 의견이 법정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끔찍했다고 비판했다.[23]

전기 작가 제임스 F. 사이먼은 "역사 속 토니의 위치는 재앙적인 ''드레드 스콧'' 의견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2017년, 메릴랜드주 의사당 부지에 있던 탄니의 동상이 철거되었다.[34]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살해 이후, 미국 하원은 탄니의 흉상을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철거하고 서굿 마셜 대법관의 흉상으로 대체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37] 2021년 6월 29일, 미국 하원은 서굿 마셜의 흉상으로 교체하고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남부 연합 동상을 철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9]
2023년 2월 9일, 메릴랜드 민주당 상원의원과 하원 의원들의 노력으로 로저 탄니의 흉상이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공식적으로 철거되었다.[40]
4. 1. 기념물 철거 논란
2017년, 메릴랜드주 의사당 부지에 있던 탄니의 동상이 철거되었다.[34] 이는 볼티모어 시장 캐서린 푸가 볼티모어 시에 있는 동상의 복제품 철거를 명령한 지 이틀 후였다.[35]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살해 이후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시위 와중에, 미국 하원은 탄니의 흉상을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철거하고 서굿 마셜 대법관의 흉상으로 대체하는 법안을 찬성 305 대 반대 113으로 통과시켰다. 이 흉상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구 대법원 회의실에 인접한 구 의복실에 설치되어 있었다.[37] 이 법안은 상원에서 더 이상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38] 2021년 6월 29일, 미국 하원은 서굿 마셜의 흉상으로 교체하고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남부 연합 동상을 철거하는 결의안을 285 대 120으로 통과시켰다.[39]
2023년 2월 9일, 메릴랜드 민주당 상원의원 벤 카딘과 크리스 밴 홀렌, 그리고 메릴랜드 민주당 하원 의원 스테니 호이어의 노력으로 로저 탄니의 흉상이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공식적으로 철거되었다.[40]
5. 가족 관계
로저 토니는 프랜시스 스콧 키의 여동생인 앤 피비 찰턴 키와 결혼했다. 슬하에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토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의 딸들은 모두 앤의 미국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파트를 임대했지만, 볼티모어에 영구적인 집을 유지했다. 1855년 앤이 사망한 후, 토니와 그의 미혼 딸 두 명은 워싱턴 D.C.로 영구 이주했다.
6. 평가
로저 토니는 사망 이후에도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35] 기디온 웰스 해군 장관은 많은 북부인들을 대변하며, ''드레드 스콧'' 판결이 "그를 사람이나 판사로서 존경심을 잃게 했다"고 말했다. 1865년 하원은 대법원장 토니의 흉상을 대법원에 전시하기 위한 기금 배정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찰스 서머 상원의원은 ''드레드 스콧'' 판결을 비판하며 반대했다.[22][23]
토니의 평판은 1865년 익명으로 출판된 소책자 ''불의한 판사: 로저 브룩 토니의 기념비''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24]
조지 티크너 커티스는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토니 앞에서 변론을 펼친 변호사 중 한 명으로, 토니를 매우 존경했다. 커티스는 토니를 "진정 위대한 치안 판사이자 삶과 인품이 특별히 청렴한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그의 ''인신 보호 영장''에 대한 변호를 높이 평가했다.[26]
전기 작가 제임스 F. 사이먼은 "역사 속 토니의 위치는 재앙적인 ''드레드 스콧'' 의견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다니엘 워커 호는 토니가 "잭슨주의 법학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버나드 슈워츠는 토니를 10명의 가장 위대한 대법원 판사 중 한 명으로 꼽으며, "''드레드 스콧''에서 토니의 기념비적인 실수는 법원에서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토니는 우리 헌법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어서 마셜 다음으로 훌륭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플랜드 페어런트후 v. 케이시'' 판결에 대한 반대 의견에서 토니의 초상화를 언급하며, ''드레드 스콧'' 판결이 토니의 업적을 가렸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토니의 노예제 옹호 판결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그의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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