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르노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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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카르노 조약은 1925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체결된 일련의 조약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주요 내용은 독일, 벨기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라인 조약)과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중재 조약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조약은 '로카르노 정신'으로 불리며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서유럽의 정치적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나, 독일의 동부 국경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불안을 야기했다. 1930년대에 들어 독일의 재무장 선언과 라인란트 진주로 인해 효력을 상실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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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르노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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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개요 | |
명칭 | 로카르노 조약 |
유형 | 다자 조약 |
체결 | 1925년 12월 1일 |
체결 장소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발효 | 1926년 9월 14일 |
발효 조건 |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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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독일, 프랑스, 벨기에 간 국경선 확정 독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간 국경 분쟁 해결 위한 중재 조약 체결 라인란트 영구 비무장화 |
참여국 |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
관련 인물 | |
주요 협상가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독일) 오스틴 체임벌린 (영국)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랑스) |
영향 | |
결과 | 유럽의 긴장 완화 시도 독일의 국제적 지위 회복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실패,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 |
2.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에게 영토 할양, 군비 제한 등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1] 독일은 조약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었으며, 일방적으로 부과된 굴욕적인 조건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2] 이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외교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베르사유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되었다.[3] 이는 전후 유럽의 불안정한 평화 속에서 새로운 안보 질서 모색의 필요성을 야기하는 배경이 되었다.
2. 1.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의 불만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에 따라 독일은 유럽 영토의 13%와 인구의 12%를 잃었다.[1] 주요 손실 지역은 프랑스(알자스-로렌)과 부활한 폴란드였다. 또한 독일이 더 이상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위협할 수 없다는 명분 아래, 라인강 서쪽의 독일 영토는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모든 독일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라인강 동쪽 50km 지역 또한 비무장화되었다.
독일은 조약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었으며, 일방적으로 부과된 가혹하고 굴욕적인 조건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2] 이에 따라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외교 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3] 독일은 조약을 수정해야만 제약으로 인해 잃었던 완전한 국내적, 외교적 독립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4]
2. 2. 프랑스의 안보 우려와 영국의 중재 노력
프랑스는 독일의 추가적인 침략 가능성에 대한 안보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동쪽에 일종의 위생선을 구축하고자 했다.[5] 또한, 서쪽에서는 독일이 여러 차례 배상금 지불을 이행하지 않자, 루르 점령을 통해 이를 강제하려 시도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조치들과 더불어 영국으로부터 추가적인 안보 보장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13]반면, 전간기 동안 영국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와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영국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국가로 재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6] 당시 외무 장관이었던 오스틴 체임벌린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프랑스가 점차 동유럽 국가들과의 동맹, 즉 위생선 정책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만약 프랑스가 독일과의 관계 개선의 대가로 동유럽 동맹을 종료한다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강대국의 보호 없이 독일의 요구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 폴란드 회랑, 단치히 자유시와 같이 독일이 요구하는 영토를 넘겨주는 것이 오히려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높인다고 보았다.[7]
3. 조약 체결 과정
로카르노 조약의 추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된 라인란트 점령 지역에서의 군대 철수를 거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8] 연합국은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 특히 육군 병력 제한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여 계획된 철수를 연기했다.[9][10][11]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 외무부 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국제 협조 외교의 일환으로 1925년 초 영국과 프랑스에 비밀 각서를 보내 라인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을 제안했다.[30] 그는 독일이 현재의 서부 국경선을 보장하고 프랑스와 중재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슈트레제만은 이를 통해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폴란드와의 동부 국경 문제를 독일에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12]
영국은 독일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루르 점령 실패 후 대독 협조 노선으로 전환한 프랑스도 신중하게 동조했다. 프랑스는 벨기에의 조약 포함과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을 조약 발효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특히 서부 국경 조약 서명국들이 독일과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간 중재 조약의 보증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 독일은 동부 국경에 대한 보증은 거부한다는 유보 조항을 달아 프랑스의 조건을 수용했다. 슈트레제만의 이러한 외교적 움직임은 알자스-로렌에 대한 권리 포기 문제 등으로 인해 독일 국내의 우익 정당 및 군부로부터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1925년 9월 초,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대표단은 런던 회담을 통해 10월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조약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1925년 10월 5일부터 10월 16일까지 로카르노에서 열린 회의 결과, 최종 의정서와 함께 상호 보증 조약, 중재 협정 등 7개의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들은 같은 해 12월 1일 런던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이듬해인 1926년 9월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면서 발효되었다. 이를 통해 독일은 국제 사회에 복귀했으며, 유럽에는 잠시나마 국제 협조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3. 1. 슈트레제만의 제안과 각국의 반응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수정해야만 완전한 국내적, 외교적 독립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3년 말부터 독일 외무 장관을 역임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이행하려는 노력을 통해 연합국의 호의를 얻고 외교적 자율성을 회복하고자 했다.[4] 그는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를 확보하고, 폴란드에 할양된 영토 문제를 해결하며, 배상금 지불 부담 완화와 라인란트 점령 종식을 목표로 삼아 독일의 강대국 지위를 점진적으로 회복시키려 했다.[15]반면, 프랑스는 독일의 재침략 가능성에 대한 안보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동맹을 맺어 독일 동쪽에 일종의 위생선프랑스어을 구축했다.[5] 또한, 독일이 여러 차례 배상금 지불을 이행하지 않자 루르 점령을 통해 이를 강제하려 했으며, 영국으로부터 추가적인 안보 보장을 얻고자 노력했다.[13]
영국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와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영국은 독일을 평화롭고 번영하는 국가로 재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6] 외무 장관 오스틴 체임벌린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개선되면 프랑스가 동유럽 동맹 정책을 점차 포기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프랑스가 독일과의 관계 개선의 대가로 동유럽 동맹을 종료하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요구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며, 주데텐란트, 폴란드 회랑, 단치히 자유시 등 독일이 요구하는 영토를 넘겨주면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보았다.[7]

로카르노 조약 추진의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는 연합국이 쾰른 지역을 포함한 점령지 라인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계획을 거부한 사건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조약 조건을 충실히 이행할 경우, 조약 서명 5년 이내에 철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8] 그러나 연합국의 군사 시설 검사 결과, 독일이 육군 병력 10만 명 제한 등 군축 조항을 심각하게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계획된 철수는 연기되었다.[9][10] 연합국은 1925년 1월 5일,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군축 조항 위반"을 이유로 철수 연기 결정을 통보했다.[11]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슈트레제만은 1925년 1월 영국, 2월 프랑스에 비밀 각서를 보내 라인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을 제안했다.[30] 그는 독일이 현재의 서부 국경선을 보장하고 프랑스와 중재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내심 슈트레제만은 프랑스와의 서부 국경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폴란드와의 동부 국경 문제를 독일에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12]
영국은 독일의 제안에 소극적이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프랑스도 신중하게 이에 동조했다. 프랑스는 벨기에가 조약에 포함되어야 하며,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할 때까지 조약이 발효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서부 국경 보증 조약 서명국들이 독일과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중재 조약에 대해서도 보증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독일은 동부 국경에 대한 보증은 할 수 없다는 중요한 유보 조항을 달아 프랑스의 조건을 수용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이 동부 국경 보증 문제에 대해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다. 슈트레제만의 이러한 외교적 움직임은 특히 알자스-로렌에 대한 권리 포기와 관련하여 독일 국내에서 한스 루터 총리, 오토 게슬러 국방 장관, 우익 정당, 그리고 ''국방군'' 지도부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925년 9월 초,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대표단은 런던에서 회담을 가진 후, 10월에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조약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3. 2. 로카르노 회의와 조약 타결
로카르노 조약 추진은 연합국이 쾰른 지역과 그 북쪽의 점령 라인란트 지역에서 군대 철수를 거부하면서 간접적으로 시작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조약 조건을 충실히 이행할 경우, 조약 서명 5년 안에 철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8] 그러나 연합국은 독일의 군사 시설 검사 결과, 특히 육군 병력 10만 명 제한 미준수 등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 위반 사실을 발견했고, 계획된 철수를 연기했다.[9][10] 1925년 1월 5일, 연합국은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군축 조항 위반"이라는 모호한 이유를 들어 철수 연기를 정당화했다.[11]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외무부 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국제 협조 외교를 추진하며, 1925년 1월 영국과 2월 프랑스에 비밀 각서를 보내 라인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을 제안했다.[30] 그는 독일이 현재 국경 상태를 보장하고 프랑스와 중재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개인적으로 슈트레제만은 프랑스와의 서부 국경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폴란드와의 동부 국경을 독일에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12]
영국이 독일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루르 점령 실패 후 대독 협조 노선으로 전환한 프랑스도 신중하게 동조했다. 프랑스는 벨기에가 조약에 포함되기를 원했고,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할 때까지 조약이 발효되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서부 국경 조약 서명국들이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간 중재 조약의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독일은 동부 국경에 대한 보증은 하지 않겠다는 유보 조항을 달아 프랑스의 조건을 수용했다. 영국은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다. 슈트레제만의 외교적 노력은 특히 라인강 서쪽의 알자스-로렌에 대한 권리 포기와 관련하여 국내에서 한스 루터 총리, 오토 게슬러 국방 장관, 우익 정당, 군부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9월 초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대표 간의 런던 회담 후, 당사국들은 10월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조약을 최종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1925년 10월 5일부터 10월 16일까지 로카르노의 비스콘티 성에서 열린 로카르노 회의의 주요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
국가 | 주요 참석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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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한스 루터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 |
프랑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외무부 장관 |
영국 | 오스틴 체임벌린 외무장관 |
벨기에 | 에밀 반데르벨데 외무부 장관 |
이탈리아 | 비토리오 샬로야 상원의원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수시 참석) |
폴란드 | 알렉산데르 스크르진스키 외무부 장관 (별도 조약 서명) |
체코슬로바키아 | 에드바르트 베네시 외무부 장관 (별도 조약 서명) |
회의 결과, 10월 16일 최종 의정서와 함께 다음 7개의 조약 및 협정이 성립되었다.
종류 | 당사국 |
---|---|
상호 보증 조약 (주요 조약) | 독일, 벨기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
중재 협정 | 독일-프랑스, 독일-벨기에 |
중재 조약 | 독일-폴란드, 독일-체코슬로바키아 |
별도 조약 | 프랑스-폴란드,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
이 조약들은 12월 1일 런던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듬해인 1926년 9월,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면서 조약이 발효되었고, 독일은 국제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1928년 불전조약 체결, 1930년 연합국의 라인란트 철수 완료 등 국제 협조 분위기가 고조되며 유럽에는 잠시 안정이 찾아왔다.
4. 주요 내용
로카르노 조약은 다음 7개의 조약으로 구성된다.
- 집단 안전 보장 조약
- 중재 재판 조약 (4개)
- 상호 원조 조약 (2개)
4. 1. 상호 보증 조약 (라인 조약)
로카르노 조약의 핵심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5개국이 체결한 지역적 집단 안전 보장 조약으로, 흔히 상호 보증 조약 또는 라인 조약이라고 불린다. 이 조약은 10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경 불가침: 독일, 프랑스, 벨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설정된 독일-프랑스 국경과 독일-벨기에 국경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그 불가침성을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 라인란트 비무장: 베르사유 조약 제42조와 43조에 명시된 대로, 라인란트 지역을 비무장 지대로 유지하며 군사 시설 건설 및 병력 주둔을 금지하는 규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 상호 불가침: 독일, 프랑스, 벨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로 상호 약속했다. 다만,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 규정 위반과 같은 특정 예외 상황에서는 이 약속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 평화적 분쟁 해결: 세 나라는 국가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 연맹 평의회의 개입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 상호 보증: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 조약의 보증국 역할을 수행했다. 만약 조약 당사국 중 하나가 조약을 위반할 경우, 국제 연맹이 위반 사실을 판단하며, 다른 당사국들은 위반 행위가 발생한 국가, 즉 피해를 입은 국가를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이 상호 보증 조약은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조약 발효의 조건으로 삼았다.
4. 2. 중재 조약
로카르노 조약의 일부로 독일은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각각 중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여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다.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벨기에 사이에 맺어진 두 중재 협정은 동일한 조건을 담고 있었다. 이 협정들은 "독일과 프랑스/벨기에 간의 모든 종류의 분쟁에 대해 당사자들이 각자의 권리에 대해 갈등을 겪고 있으며, 정상적인 외교적 방법으로는 우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 이를 평화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절차를 규정했다. 각 협정에 따라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상설 조정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해당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 또는 1907년 헤이그 협약에 의해 설립된 중재 재판소로 넘겨졌다. 또한, 당사자들은 상설 조정 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제사법재판소나 중재 재판소로 문제를 가져갈 수도 있었다. 상설 조정 위원회의 활동이 끝난 후 한 달 이내에 양 당사자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느 쪽이든 해당 문제를 국제 연맹 이사회에 제기할 것을 요청할 수 있었다.
독일과 폴란드,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간에 체결된 중재 조약은 주요 내용 면에서 독일이 프랑스 및 벨기에와 맺은 중재 협정과 거의 동일했다.[13] 그러나 이 조약들은 주요 조약의 부록 형태가 아니었으며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서부 국경처럼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설정된 독일의 동부 국경을 보장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14] 이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소위 "동부 로카르노"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그는 경제적 수단을 사용하여 폴란드를 국경 재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5] 이러한 접근은 동유럽 국가들의 안보 우려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폴란드는 로카르노 조약의 부속 문서 중 하나인 "국제 연맹 규약 제16조에 관한 독일에 대한 집단 각서"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출했다.[16] 국제 연맹 규약 제16조는 연맹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을 공격한 국가에 대해 제재나 군사 행동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집단 각서는 연맹이 제16조를 발동할 때 해당 국가의 군사적 능력을 고려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독일은 이 각서를 근거로, 향후 국제 연맹에 가입한 후 연맹이 소련(예를 들어 폴란드를 공격하는 경우)에 대해 제16조를 발동하더라도, 독일 스스로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해석했다.[14][13] 이는 폴란드 입장에서 볼 때 독일로부터의 실질적인 안보 보장이 약화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4. 3. 상호 원조 조약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각각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독일이 조약 당사국 중 하나에 대해 무력 행사를 할 경우, 다른 당사국이 공격받은 국가를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로카르노 조약의 조건이 준수되지 않아 어느 한쪽이 도발 없이 공격을 받을 경우, 국제 연맹 규약 제16조에 따라 상호 지원을 보장하는 내용과 연계된다.[17][18]5. 조약의 영향과 평가
로카르노 조약은 1925년 11월 독일 국회에서 찬성 291표, 반대 174표로 비준되었으나,[19] 이 과정에서 알자스-로렌 상실에 대한 우익의 반발과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좌익의 반대로 루터 정부가 붕괴하는 등 내부적인 진통을 겪었다.[15] 영국 하원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20]
조약 체결 이후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서유럽에서는 일시적으로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른바 "로카르노 정신"이 확산되었다.[25] 이는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15] 등 국제 사회 복귀와 연합국의 라인란트 조기 철수(1930년) 같은 긍정적인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약의 주요 협상가인 오스틴 체임벌린,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26]
그러나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동부 국경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폴란드는 독일이 동부 국경에 대한 보장을 약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으며,[22][23] 이는 프랑스-폴란드 동맹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훗날 1934년 독일의 동부 국경 안정을 위한 "동부 로카르노" 구상은 히틀러 정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4]
역사학자들은 로카르노 정신이 가져온 평화가 불안정하고 피상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샐리 마크스는 로카르노 정신이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취약한 기반"이었다고 지적했으며,[27] 한스 몸젠은 슈트레제만이 조약을 독일의 국익과 주권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 진정한 상호 신뢰 구축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5. 1. "로카르노 정신"과 국제 협력 증진

로카르노 조약 체결은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서유럽의 정치적 분위기를 크게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국제 사회에는 지속적인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는데, 이를 흔히 "로카르노 정신"이라고 부른다.[25] 이러한 협력 분위기 속에서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독일은 1926년 9월 10일 국제 연맹에 가입하며 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15] 이는 독일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조약의 결과로 영국군은 1926년 1월 쾰른 지역에서 철수했으며,[15] 독일의 군축을 감독하던 연합 위원회는 1927년에 해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영 플랜이 1929년에 서명되었고, 1930년에는 연합군이 라인란트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정한 시점보다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더불어 1928년에는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려는 불전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 협력의 성과를 인정받아 조약의 주요 협상가였던 영국의 오스틴 체임벌린은 1925년에, 프랑스의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독일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1926년에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26]
그러나 "로카르노 정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역사학자 샐리 마크스는 "로카르노 정신이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하기에는 취약한 기반"이었다고 지적했다.[27] 또한 한스 몸젠은 슈트레제만의 외교가 표면적인 협력과 달리 실제로는 독일의 국익 회복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프랑스가 기대했던 진정한 신뢰 관계 구축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동부 국경에 대한 보장을 포함하지 않아 폴란드와 프랑스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프랑스-폴란드 동맹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요제프 베크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조약을 강하게 비판했다.[22][23]
5. 2. 동유럽 국가들의 불안과 한계
독일과 폴란드,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간에 체결된 중재 조약은 표면적으로 독일이 프랑스 및 벨기에와 맺은 중재 협정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13]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는데,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조약은 구속력이 약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확정된 서부 국경과 달리 독일의 동부 국경 현상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14] 당시 독일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은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동부 로카르노"를 의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경제력을 이용하여 폴란드를 압박하고 국경 재협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15]이러한 독일의 입장은 동유럽 국가들, 특히 폴란드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폴란드는 로카르노 조약의 부록 문서인 "국제 연맹 규약 제16조에 관한 독일에 대한 집단 각서"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16] 국제 연맹 규약 제16조는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을 공격한 국가에 대해 공동으로 제재나 군사 행동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단 각서는 연맹이 제16조를 발동할 때 해당 국가의 군사적 능력을 고려할 것이라고 명시했는데, 독일은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즉, 독일은 국제 연맹 가입 후 연맹이 소련에 대해 제16조를 발동하더라도(예를 들어 소련이 폴란드를 공격하는 경우), 독일 스스로 군사 행동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한 셈이었다.[14][13] 이는 폴란드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로카르노 조약은 폴란드와 프랑스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프랑스-폴란드 동맹의 실효성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동부 국경에 대한 명확한 보장을 얻지 못한 폴란드에게 로카르노 조약은 외교적 실패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1925년 11월 그랍스키 내각이 붕괴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주재 폴란드 무관이었던 요제프 베크는 이 조약을 두고 "독일은 서부의 평화를 대가로 동쪽을 공격하라는 공식적인 요청을 받았다"고 냉소적으로 비판했으며,[22] 폴란드의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정직한 폴란드인은 [로카르노]라는 단어를 들으면 침을 뱉는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23]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인 1934년, 독일의 동부 국경 안정을 위한 소위 "동부 로카르노" 조약 체결 제안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독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4]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독일과의 국경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한편, 소련은 로카르노 조약을 서방 열강들이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압박하기 위한 포위망 구축 시도로 간주하고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등 독자적인 안보 체제, 즉 동방 로카르노 체제 구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로카르노 조약은 서유럽의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고 '로카르노 정신'이라는 평화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독일의 동부 국경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동유럽 국가들의 안보 불안을 야기하고 새로운 국제적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역사학자 샐리 마크스는 로카르노 정신이 현실보다는 희망에 가까웠으며,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기반으로는 취약했다고 평가했고,[27] 한스 몸젠 역시 슈트레제만이 로카르노 조약을 진정한 평화 구축보다는 독일의 주권 회복을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여겼다고 분석하며, 프랑스 총리가 언급한 "신뢰의 시대"는 결코 현실이 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6. 조약의 파기와 종말
1929년 시작된 대공황 이후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의 등장은 로카르노 조약 체제에 결정적인 위협이 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부과된 제약을 점차 무시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36년 3월 7일, 독일은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하며 로카르노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 체결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다.[28] 그러나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조약 서명국들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는 사실상 독일의 행동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았다.[28]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에 대한 국제 사회의 무력한 대응은 로카르노 조약의 실질적인 종말을 의미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집단 안보를 위해 구축되었던 베르사유-로카르노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유럽은 다시 한번 대규모 전쟁의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6. 1. 히틀러의 재무장 선언과 라인란트 진주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은 열강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구축된 국제 질서를 뒤흔들었다. 특히 해외 시장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독일은 경제 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영토 확장과 식민지 재분할을 모색하게 되었다.1935년 3월 16일,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했다. 이는 전후 국제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나, 국제 사회의 대응은 미미했다.
이듬해인 1936년 3월 7일,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은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 체결을 명분 삼아 로카르노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주시키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민족자결권과 프랑스-소련 조약이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다.[28]
로카르노 조약의 다른 서명국들은 이러한 독일의 명백한 조약 위반 행위에 대해 언어적인 비난 외에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는 이미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프랑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지 못해 독자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28] 비록 로카르노 조약이 법적으로는 유효했지만,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에 대한 국제 사회의 무대응은 사실상 조약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두 축으로 하던 유럽의 집단 안전 보장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6. 2. 국제 사회의 대응과 조약의 종말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은 열강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전후 국제 질서를 흔들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독일은 영토 확장과 식민지 재분할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28]1935년 3월 16일,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했다. 이는 국제 사회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조치였다.
이듬해인 1936년 3월 7일, 독일은 라인강 너머 비무장지대에 군대를 파견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했다. 이는 로카르노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약 위반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일 민족의 민족자결권과 1935년 체결된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독일은 이 조약이 로카르노 조약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로카르노 조약의 다른 서명국들은 독일의 명백한 조약 위반에 대해 구두 비난 외에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독자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기 어려웠다.[28]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에 대한 국제 사회의 소극적인 대응은 로카르노 조약이 사실상 효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두 축으로 삼았던 전후 유럽의 안전 보장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는 이후 더 큰 국제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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