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언 프로이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시언 프로이드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2011년 사망한 영국의 화가이다. 그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실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인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초기에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50년대부터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생존 작가 작품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런던의 켄싱턴에서 작업하며 말년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국의 판화가 - 발터 지커트
영국 화가 발터 지커트는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영향을 받아 런던의 도시 생활과 사회 풍경을 독특하게 묘사했으며, 캠던 타운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살인 사건 모티브 연작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말년에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며 현대 미술의 선구적인 면모를 보였다. - 영국의 판화가 - 로런스 알마타데마
로런스 알마타데마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삶을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표현하여 '대리석 화가'라는 별칭을 얻은 네덜란드 태생의 영국 화가이자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다. - 프로이트가 - 아나 프로이트
아나 프로이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아동 정신분석 분야를 개척하고 자아심리학 발전에 기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로서, 자아와 방어기제 연구를 통해 이론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고 햄프스테드 전쟁 보육원을 설립하여 전쟁 고아들을 돌봤으며 아동의 법적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에도 참여했다. - 프로이트가 -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며, 무의식, 꿈의 해석, 심리 성적 발달 단계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20세기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유대인 화가 -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출신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색면 추상화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표현하며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시그램 벽화, 로스코 채플 벽화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 유대인 화가 - 만 레이
만 레이는 미국의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미술가로, 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레이요그래프와 솔라리제이션 기법을 활용한 사진 작품으로 유명하다.
| 루시언 프로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루시안 미하엘 프로이트 |
| 출생일 | 1922년 12월 8일 |
| 출생지 |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주, 프로이센 자유주, 독일 |
| 사망일 | 2011년 7월 20일 |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 국적 | 영국 (귀화) |
| 아버지 | 에른스트 L. 프로이트 |
| 친척 | 프로이트 가문 |
| 학력 | |
| 교육 |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이스트 앵글리안 페인팅 앤 드로잉 스쿨 골드스미스 대학교 |
| 경력 | |
| 직업 | 화가, 판화가 |
| 활동 시기 | 1939년–2011년 |
| 사조 | 표현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
| 작품 | |
| 주요 작품 | 세드릭 모리스 (1940년) 키티의 초상 (1948–49년) 혜택 감독관 잠자다 (1995년) |
| 개인사 | |
| 배우자 | 키티 가먼 (1948년 결혼, 1952년 이혼) 레이디 캐롤라인 블랙우드 (1952년 결혼, 1959년 이혼) |
| 자녀 | 애니, 에스터, 벨라 포함 다수 |
| 수상 및 서훈 | |
| 훈장 | 메리트 훈장 (OM) 컴패니언 오브 아너 (CH) |
2. 생애
루시언 프로이드는 1922년 12월 8일 독일 베를린에서 건축가 에른스트 L. 프로이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며, 그의 형제로는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클레멘트 프로이트가 있다.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 가족은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루시언은 1939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4][5][8]
그는 영국에서 여러 학교를 거쳐 센트럴 아트 스쿨, 동앵글리아 회화 및 드로잉 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등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잠시 상선 선원으로 복무했으나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9] 1944년 첫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파리, 그리스, 더블린 등지에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다.[10][11]
1950년대부터는 주로 초상화와 누드화에 집중하며 두꺼운 물감을 사용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 프랭크 아우어바흐 등과 함께 구상 회화를 추구한 "런던파"(School of London)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12][13] 그의 모델은 주로 가족, 친구, 동료 화가 등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며, 대상을 깊이 관찰하며 오랜 시간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작품 중 케이트 모스의 누드 초상화는 2005년 경매에서 390만파운드에,[59] '잠자는 직업안정소 관리 직원(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은 2008년 3360만달러에[59] 판매되어 당시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프로이드는 2011년 7월 20일 런던 자택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59]
2. 1. 유년 시절과 초기 교육
프로이드는 1922년 12월 8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베를린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건축가 에른스트 L. 프로이트이고, 어머니는 독일계 유대인 루시 브라쉬였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며, 세 아들 중 둘째였다. 그의 형은 스테판 가브리엘 프로이트이고, 동생은 방송인이자 작가, 정치가였던 클레멘트 프로이트이다.[4]1933년, 프로이트 가족은 나치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영국 런던의 세인트존스 우드로 이주했다.[4][5] 그는 1939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4][5][8], 성씨도 영어식 발음인 "프로이드"로 바꾸었다.
교육 과정에서 그는 데번주 토트네스에 있는 다팅턴 홀 학교와 브라이언스턴 학교에 다녔으나[6][7], 브라이언스턴 학교에서는 방해 행위로 인해 퇴학당했다.[4][5][8] 이후 런던에 있는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와 골드스미스 컬리지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2. 초기 경력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나, 1933년 나치 정권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1939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성도 영어식 발음인 "프로이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런던의 센트럴 아트 스쿨(현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잠시 공부한 후,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세드릭 모리스가 운영하는 동앵글리아 회화 및 드로잉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에식스주 데덤에 있었으나 1940년 서퍽주 해들리 근처의 벤턴 엔드(Benton End)로 이전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런던 대학교 소속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도 수학했다.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프로이드는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에서 선원으로 복무했으나, 이듬해인 1942년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덕분에 형제들과 달리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9]
1943년에는 시인이자 편집자인 미어리 제임스 투라이라자 탐비무투의 의뢰로 니콜라스 무어의 시집 《유리 탑》(The Glass Tower)의 삽화를 그렸다. 이 책은 이듬해 시 런던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으며, 삽화에는 박제된 얼룩말과 야자수 등이 포함되었다. 이 소재들은 1944년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열린 프로이드의 첫 개인전 출품작 《화가의 방》(The Painter's Room)에도 다시 등장했다. 1946년 여름에는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이후 몇 달간 그리스에서 존 크락스턴과 함께 지냈다.[10] 1950년대 초에는 더블린을 자주 방문하여 화가 패트릭 스위프트와 작업실을 공유하기도 했다.[11] 이후 남은 생애는 주로 런던에서 보냈다.
프로이드의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며, 인물과 식물 등이 다소 기이하게 배치되고 물감 사용은 비교적 얇은 편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두껍게 덧칠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주로 초상화와 누드화에 집중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절제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프로이드의 초상화 모델은 주로 가족, 친구, 동료 화가, 연인, 자녀 등 가까운 사람들이었으며, 프랭크 아우어바흐,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등도 그의 모델이 되었다.
프로이드는 예술가 R. B. 키타이가 명명한 "런던파"(School of London)의 주요 구성원 중 한 명으로 꼽힌다.[12][13] 이들은 특정 강령을 공유하기보다는 서로 교류하며 비슷한 시기 런던에서 활동한 구상 화가들의 느슨한 집단을 지칭한다. 당시 미술계를 주도하던 추상 표현주의와는 다른 경향을 보였다. 런던파의 주요 인물로는 프로이드 외에도 키타이, 프랜시스 베이컨, 프랭크 아우어바흐, 마이클 앤드루스, 레온 코소프, 로버트 콜쿼훈, 로버트 맥브라이드, 레지날드 그레이 등이 있다. 프로이드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서 객원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며, 형 클레멘트 프로이트는 작가이자 방송인, 자유당 소속 정치가로 활동했다.
2. 3. 전성기

1950년대부터 프로이트는 초상화, 특히 누드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다른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1966년 이전까지는 전신 누드를 그리지 않았으나,[16] 1950년대 중반부터는 큰 돼지털 붓을 사용하여 훨씬 자유로운 스타일을 개발했다. 이는 살의 질감과 색상 표현에 중점을 두었으며, 임파스토 기법을 포함한 두꺼운 물감 사용이 특징이다. ''하얀 개와 소녀''(1951–1952, 테이트)는 이러한 변화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이전 스타일의 꼼꼼한 붓질과 이후 스타일의 특징을 함께 보여준다. 그는 살을 칠할 때 매번 붓을 닦아 색상의 미묘한 변화를 추구했으며, 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노년까지 이 자세를 유지했다. 이 시기 작품들에서는 인물의 살을 제외한 배경 등의 색상은 비교적 차분하게 처리된 반면, 살의 표현은 점점 더 다채롭고 풍부해졌다. 1960년대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이어갈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했다. 후기 초상화는 실물보다 큰 규모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부분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머리 초상이나 반신상이었다. 말년에는 초상화를 완성한 후, 동일한 모델을 다른 포즈로 판에 직접 드로잉하여 에칭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17]
프로이트의 초상화는 종종 모델만을 단독으로 그리거나, 때로는 바닥이나 침대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얀 개와 소녀''(1951–52)나 ''쥐와 함께 있는 누드 남자''(1977–78)처럼 다른 대상과 함께 배치되기도 한다.[18] 모델을 눕혀서 그리는 독특한 방식에 대해 미술사학자 에드워드 채니는 할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용 소파나 이집트 미라의 영향일 수 있다고 해석하며, 꿈꾸는 듯한 인물들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의식의 회복 과정을 읽어내기도 한다.[19]
동물, 특히 애완동물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며 주인과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가이와 스펙''(1980–81), ''엘리와 데이비드''(2005–06), ''이중 초상''(1985–86) 등이 그 예이다.[20] 프로이트는 특히 말에 대한 애정이 깊어 직접 말을 타는 것을 즐겼으며,[21] 말을 단독 주제로 한 ''회색 거세마''(2003), ''얼룩 암말''(2004), ''건초를 먹는 암말''(2006) 같은 작품도 남겼다. 1960년대 일부 초상화에는 시들어가는 실내 식물이 눈에 띄게 등장하며, 식물만을 그린 그림도 있다.[22] 초기 작품의 매트리스나 후기 작품에서 붓을 닦는 데 사용한 린넨 헝겊 더미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이다.[23] 1980년대 일부 초상화 배경에는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지붕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되기도 했다.[24]
프로이트는 주로 자신의 주변 인물들, 즉 친구, 가족, 동료 화가(프랭크 아우어바흐,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등), 연인, 자녀들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주제는 자전적이며, 희망과 기억, 관능, 그리고 참여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25] 하지만 작품 제목은 대부분 익명으로 붙여졌고 모델의 신원이 항상 공개되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는 어머니를 모델로 한 연작에 4,000시간 이상을 쏟았는데, 미술사학자 로렌스 고잉은 이를 렘브란트 이후 300여 년 만에 화가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6]
프로이트는 모델을 앞에 두고 직접 관찰하며 작업했으며, 초상화 배경을 그릴 때조차 모델이 자리를 지키기를 원했다. 모델들은 매우 길고 예측 불가능한 작업 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2007년에 완성된 누드화 ''리아, 누드 초상 2007''은 16개월 동안 모델 리아 커비가 거의 매일 밤 포즈를 취해야 했으며, 총 작업 시간은 약 2,400시간에 달했다.[27] 프로이트는 작업 중 모델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모방가였다고 전해진다.[27] 그는 그림을 언제 완성할지에 대해 "자신이 다른 사람의 그림을 작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끝낸다"고 말했다.[27]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한 낮 그림과 인공조명을 이용한 밤 그림으로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두 가지 조명 조건이 혼합되는 경우는 없었다.[28]
그의 작업 방식은 먼저 캔버스에 숯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캔버스의 작은 부분부터 물감을 칠하며 점차 영역을 넓혀나가는 식이었다. 새로운 모델을 그릴 때는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머리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를 그린 뒤, 모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다시 머리 부분으로 돌아와 마무리했다.[27]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캔버스의 특정 부분은 의도적으로 비워두기도 했다.[27] 이렇게 완성된 그림은 여러 겹의 물감층과 수개월에 걸친 강렬한 관찰의 결과물이다.[27]
2005년에는 프로이트가 그린 모델 케이트 모스의 누드 초상화가 경매에서 390만파운드에[59] 낙찰되어 화제가 되었다. 2008년 5월에는 또 다른 누드 초상화 '잠자는 직업안정소 관리 직원(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이 3360만달러에[59] 팔리며 당시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2. 4. 후기 경력

프로이트는 후기 경력에 프랭크 아우어바흐와 프랜시스 베이컨을 포함한 동료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한 퍼포먼스 아트 예술가 리 보어리와 많은 소호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헨리에타 모라에스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수 틸리(Sue Tilley, 일명 "빅 수")를 모델로 한 일련의 거대한 누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일부 작품 제목에는 그녀의 직업인 "복지 감독관(Benefits Supervisor)"을 사용했다.[29]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95년작 ''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은 2008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3360만달러에 판매되어, 당시 생존 예술가 작품 중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30][31]
말년에 프로이트가 가장 꾸준히 모델로 삼은 인물은 그의 작업실 조수이자 친구인 데이비드 도슨(David Dawson)이었다. 도슨은 프로이트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의 모델이기도 했다.[32] 생애 마지막 시기에는 모델 케이트 모스의 누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2005년 이 초상화는 경매에서 390만파운드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구상적인 스타일로 작업하는 가장 유명한 영국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1989년에는 터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33][34]

그의 1999-2000년 작품 ''세잔 이후''(After Cézanne)는 독특한 구성 때문에 주목받았다. 그림의 왼쪽 상단 부분이 아래쪽 주요 부분에 마치 '접목'된 것처럼 보이며, 자세히 보면 두 부분이 연결된 수평선이 확인된다. 이 작품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에서 740만호주 달러에 구입했다.[35]
후기 경력 동안 여러 중요한 전시회가 열렸다.
- 1996년: 켄달의 애벗 홀 미술관(Abbot Hall Art Gallery)에서 회화 27점과 에칭 13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 1997년: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루시안 프로이트: 초기 작품" 전시가 열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제작된 약 30점의 드로잉과 회화가 전시되었다.[36] 같은 해, 프로이트는 독일 지겐 시의 루벤스 상(Rubens Prize of Siegen)을 수상했다.[37]
- 2000년 9월 - 2001년 3월: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Museum für Moderne Kunst Frankfurt)에서 194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의 회화, 드로잉, 에칭 50점을 모은 대규모 개괄 전시회가 열렸다. 이는 프로이트가 독일에 대해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미술관과 직접 협력하여 승인한 유일한 프로젝트였다.[38][41] 전시 홍보물 등에는 수 틸리를 그린 ''사자 카펫 옆에서 잠들다''(Sleeping by the Lion Carpet, 1995-1996)의 모티프가 사용되었다.[39] 이 전시에는 1992년 작 대형 그림 ''다리를 올린 누드 (리 보어리)''(Naked Man, Back View)도 포함되었는데, 이 작품은 1993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전시에서는 제외되었던 작품이다.[40]
- 2002년: 테이트 브리튼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 200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베네치아의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 2007년 말: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그의 에칭 컬렉션이 전시되었다.[44]
1988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BBC의 예술 다큐멘터리 시리즈 ''옴니버스''(Omnibus)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프로이트와의 드문 인터뷰 중 하나가 담겨 있는데, 감독 제이크 아우어바흐(Jake Auerbach)와 나눈 대화였다.[42]
200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를 완성했으나, 영국 언론의 일부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43]

프로이트는 2011년 7월 20일 런던 자택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59] 하이게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은 비공개로 치러졌으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가 집전했다.[45]
3. 작품 스타일
루시언 프로이드의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람, 식물, 동물 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병치하여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다.[15] 이 시기에는 물감을 비교적 얇게 펴 바르고, 작은 담비털 붓을 사용하여 매우 정교하고 선적인 스타일을 구사했다.[14]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이드는 초상화와 누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화풍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큰 돼지털 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두껍게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살의 질감과 색상 표현에 집중하면서 점차 살의 표현은 더욱 화려하고 다양해졌으며, 배경 등 살이 아닌 부분의 색상은 상대적으로 톤 다운되었다.
프로이드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실적이면서도 그만의 강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작품들은 종종 고독하고 날카로우며 세심한 형태로 표현된다. 그가 가장 즐겨 다룬 주제는 인물이었지만, 간간히 그린 도시 풍경이나 정물 등은 그가 회화 매체를 다루는 뛰어난 숙련도를 보여준다. 그의 초상화 모델은 대부분 친구, 가족, 동료 화가, 애인, 아이들 등 주변 인물들이었다.
특히 그의 무정하고 비전통적인 누드 작품들은 때때로 충격적일 정도로 정직하게 육체의 추함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탐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이드 자신은 작품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얼굴만 그렸었는데 마치 얼굴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것들의 팔다리가 되고 싶은 것처럼...
작품에는 인물 외에도 동물, 특히 개나 말도 자주 등장하며,[20][21] 때로는 시들어가는 실내 식물이나[22]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지붕 풍경[24] 등이 세심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붓을 닦는 데 사용한 린넨 헝겊 더미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23]
3. 1. 주요 기법
루시언 프로이드의 초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람, 식물, 동물 등을 독특하게 병치하여 묘사하는 경향을 보인다.[15] 이 시기에는 물감을 비교적 얇게 펴 바르고, 작은 담비털 붓을 사용하여 초기 네덜란드 회화를 연상시키는 매우 정교하고 선적인 스타일을 구사했다.[14] 대표적인 예로는 ''세드릭 모리스''(1940, 웨일스 국립 박물관), 자화상인 ''가시가 있는 남자''(1946, 테이트)[14], 그리고 첫 부인 키티 가먼을 그린 ''고양이 새끼와 소녀''(1947, 테이트) 등이 있다.[15]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이드는 초상화와 누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의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부터 그는 큰 돼지털 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두껍게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살의 질감과 색상 표현에 집중하면서, 그는 한 번 붓질을 할 때마다 붓을 닦아 색이 계속해서 미묘하게 변하도록 했다. 초기에는 색감이 부드럽고 채도가 낮았으나, 점차 살의 표현은 더욱 화려하고 다양해졌으며, 배경 등 살이 아닌 부분의 색상은 상대적으로 톤 다운되었다. ''''(1951–1952)는 이러한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전 스타일의 꼼꼼한 붓놀림과 이후 스타일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노년에는 높은 의자를 사용했다.
프로이드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실적이면서도 그만의 강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고독하고 날카로우며 세심한 형태로 표현된다. 인물 외에도 간간히 그리는 도시 풍경이나 정물은 그가 회화 매체를 다루는 뛰어난 숙련도를 보여준다. 그의 누드 작품들은 때때로 충격적일 정도로 정직하고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육체의 추함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탐구한다. 프로이드 자신은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얼굴과 몸을 통한 감정 표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모델을 실제 눈앞에 두고 작업했으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모델과 매우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07년에 완성된 누드 초상화 ''리아, 누드 초상 2007''은 16개월 동안 거의 매일, 하루 평균 5시간씩 총 약 2,400시간에 걸쳐 작업되었다.[27] 그는 초상화의 배경을 작업할 때조차 모델이 자리에 있기를 요구했으며,[27] 모델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7]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하는 낮 세션과 인공 조명을 사용하는 밤 세션으로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두 조명 조건은 절대 혼합되지 않았다.[28] 그림을 시작할 때는 캔버스에 숯으로 먼저 드로잉을 하고, 이후 작은 영역부터 물감을 칠하며 점차 바깥으로 확장해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새로운 모델의 경우,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머리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몸 전체를 그린 뒤 다시 머리로 돌아와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27] 그는 그림을 완성하는 시점에 대해 "자신이 다른 사람의 그림을 작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라고 설명했다.[27] 말년에는 초상화를 완성한 후 동일한 모델을 다른 포즈로 직접 판에 드로잉하여 에칭 작업을 하기도 했다.[17]
3. 2. 주요 작품
루시언 프로이드의 초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람, 식물, 동물 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병치하여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다.[15] 이 시기에는 비교적 물감을 얇게 펴 바르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옅은 색상의 정교한 선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는 웨일스 국립 박물관에 소장된 ''세드릭 모리스''(1940)나 테이트에 있는 자화상 ''가시가 있는 남자''(1946)[14], 그리고 그의 첫 번째 부인 키티 가먼을 그린 ''고양이 새끼와 소녀''(1947) 등이 있다.[15] 이 그림들은 작은 담비털 붓으로 그려져 초기 네덜란드 회화를 연상시킨다.[14] 그는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입장이었다.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이드는 초상화, 특히 누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전신 누드는 1966년까지 그려지지 않았다[16]). 이 시기부터 그는 큰 돼지털 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두껍게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발전시켰고, 이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살의 질감과 색상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으며, 한 번의 붓 터치 후에도 붓을 씻어내 색상이 계속 변화하도록 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색감은 대체로 부드럽고 채도가 낮으며, 초상화는 주로 앉아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했다. 1951년에 그린 <패딩턴 실내(Interior at Paddington)>로 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얀 개와 소녀''(1951–1952, 테이트)는 이러한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또한 이 시기부터 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노년이 되어서야 높은 의자를 사용했다.
프로이드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실적이면서도 그만의 강박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종종 고독하고 밝지 않은 색감 속에서 날카롭고 세심한 형태로 표현되어 표현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인간의 얼굴과 몸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때로는 육체적인 추함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초상화 모델들은 대부분 친구, 가족, 동료 화가(프랭크 아우어바흐,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등), 애인, 아이들 등 주변 인물들이었다. 그는 "주제는 자전적이며, 희망과 기억, 관능, 그리고 참여에 관한 모든 것이다."[25]라고 언급했다. 모델들은 매우 긴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야 했으며, 프로이드는 배경 작업을 할 때조차 모델이 함께 있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2007년에 완성된 누드 ''리아, 누드 초상 2007''은 모델 리아 커비가 16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밤 포즈를 취해 약 2,400시간이 소요되었다.[27] 그는 모델과의 라포 형성을 중시했으며, 작업 중에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모방가였다고 전해진다.[27] 그림은 자연광으로 그린 낮 그림과 인공 조명으로 그린 밤 그림으로 구분하여 작업했다.[28]
프로이드의 작품에는 인물 외에도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개와 말을 좋아했다. ''가이와 스펙''(1980–81), ''엘리와 데이비드''(2005–06), ''이중 초상''(1985–86) 등에서는 애완동물과 주인이 함께 그려졌으며,[20] 말만을 그린 ''회색 거세마''(2003), ''얼룩 암말''(2004) 등의 작품도 있다. 때로는 시든 실내 식물이나[22]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지붕 풍경[24] 등이 세심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붓을 닦는 데 사용한 린넨 헝겊 더미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23]
프로이드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실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1차 시장 가격이 약 30억원~150억원에 달하고, 60~70년대 작품들은 사적인 거래에서 약 200억원 정도에 거래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경매에서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는데, 2005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의자에 앉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Red Haired Man on a Chair, 1962~63년작)가 415.00000000000006만파운드에, 같은 해 같은 경매에서 케이트 모스의 임신 당시를 그린 누드화 ''나체 초상화 2002''(entitled-naked Portrait 2002)가 392만파운드에 팔렸다. 199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넓은 실내 W11(와토를 따라서)''(Large Interior W11(After Watteau))가 583만달러에 낙찰되었다. 특히 1995년 작 ''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은 수 틸리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2008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360만달러에 판매되어 당시 생존 예술가 작품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30][31]
그의 그림 ''세잔 이후''(After Cézanne, 1999–2000)는 특이한 형태로 주목할 만하며,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에서 740만호주 달러에 구입했다. 이 그림의 왼쪽 상단 부분은 아래쪽 메인 부분에 '접목'되었으며,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부분이 연결된 수평선이 보인다.[35] 프로이드는 1989년 터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33][34] 테이트 브리튼(2002), 코레르 박물관(2005), 현대 미술관(2007)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200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4. 주요 전시
1988년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BBC ''옴니버스'' 프로그램의 주제가 되었으며, 이 프로그램에서 프로이트와의 인터뷰가 드물게 기록되었다.[42]
1996년, 켄달의 애벗 홀 미술관은 프로이트의 주요 작품을 모은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27점의 회화와 13점의 에칭을 선보였다. 이듬해인 1997년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는 "루시안 프로이트: 초기 작품"을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제작된 약 30점의 드로잉과 회화로 구성되었다.[36]
2000년 9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에서는 작가가 독일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의 회화, 드로잉, 에칭 50점을 모은 대규모 종합 전시회를 열었다.[38] 모든 판화 매체는 누드 모델 수 틸리를 묘사한 프로이트의 그림 ''사자 카펫 옆에서 잠들다''(1995-1996)의 모티프를 사용했다.[39] 일부 주요 여성 누드 초상화 외에도, 1992년의 대형 그림 ''다리를 올린 누드 (리 보어리)''도 프랑크푸르트에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1993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전시회에서는 철거되었던 작품이다.[40] 프랑크푸르트 전시는 큐레이터 롤프 라우터와 루시안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프로이트가 독일 미술관과 직접 협력하여 승인한 유일한 프로젝트였다.[41]
2002년에는 테이트 브리튼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2005년, 프로이트의 작품 회고전이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정에 맞춰 베네치아의 코레르 박물관에서 열렸다. 2007년 말에는 현대 미술관(MoMA)에서 그의 에칭 컬렉션이 전시되었다.[44]
아래는 루시언 프로이트의 주요 전시 목록이다.
| 연도 | 장소 |
|---|---|
| 1994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 2000 | 현대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
| 2003 | 로스앤젤레스 현대 미술관 |
| 2004 |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에든버러 |
| 2005 | 코레르 박물관, 베니스 |
| 2006 | 아쿠아벨라 갤러리, 뉴욕 |
| 2007 | 아일랜드 현대 미술관, 더블린 |
| 2008 | 현대 미술관(MoMA), 뉴욕 |
| 2008 | 헤이그 시립 미술관, 헤이그 |
| 2010 |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
| 2012 | 국립 초상화 미술관, 런던 |
| 2012 | 포트워스 현대 미술관, 포트워스 |
| 2013 | 빈 미술사 박물관 |
| 2016–2021 | 아일랜드 현대 미술관, 더블린 |
| 2019 | 왕립 미술원 |
| 2022 | 내셔널 갤러리, 런던 |
5. 평가 및 영향
초기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람, 식물, 가구 등을 독특하게 배치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비교적 얇게 칠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상화와 누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물감을 두껍게 쌓아 올리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러한 방식은 한 번의 붓질 후에도 붓을 씻어야 할 정도로 세심한 과정을 요구했으며, 이 시기 작품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채도가 낮은 색감을 특징으로 한다.
루시언 프로이드는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를 통해 사실주의적이면서도 강박적일 정도의 독특한 묘사로 다른 사실주의 화가들과 차별화되는 개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고독한 분위기를 풍기며, 밝지 않은 색감 속에서 날카롭고 세심하게 형태를 표현하는 표현주의적 경향도 나타난다. 인물 외에 간간이 그린 도시 풍경이나 정물에서도 그의 뛰어난 회화적 숙련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초상화 모델은 주로 친구, 가족, 동료 화가, 연인, 아이들 등 주변 인물이었으며, 프랭크 아우어바흐,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와 같은 유명 화가들도 그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그의 비전통적이고 때로는 무정한 시선으로 그려진 누드 작품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일부는 전시 중 미성년자 관람이 금지되기도 했다. 인간의 육체적 측면, 때로는 추함까지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탐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이드 자신은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얼굴만 그렸었는데 마치 얼굴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것들의 팔다리가 되고 싶은 것처럼..."라고 언급하며 인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1951년 작 <패딩턴 실내(Interior at Paddington)>로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실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인정받아, 생존 작가로서 기록적인 작품 가격을 형성했다. 비교적 최근 작품들은 1차 시장에서 약 30억원에서 150억원 사이에 거래되며, 1960~70년대 작품들은 개인 간 거래에서 약 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이드 작품의 경매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의자에 앉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Red Haired Man on a Chair)>(1962~63년작):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5.00000000000006만파운드 (당시 약 77억원)에 판매.
- <나체 초상화 2002(entitled-naked Portrait 2002)> (케이트 모스의 임신 누드화):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392만파운드 (당시 약 76억원)에 낙찰.
- <넓은 실내 W11(와토를 따라서)Large Interior W11(After Watteau)>: 1998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583만달러 (당시 약 58억원)에 판매.
- <잠자는 직업안정소 관리 직원(Benefits Supervisor Sleeping)>: 2008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360만달러 (당시 약 35억 3천만 엔)에 낙찰되어, 당시 생존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6. 사생활
프로이트는 1922년 12월 8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아버지 에른스트 L. 프로이트와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루시 브라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넷째 아들이었다.[4] 그는 세 아들 중 둘째로, 형은 스테판 가브리엘 프로이트, 동생은 방송인이자 작가, 정치인이었던 클레멘트 프로이트이다. (따라서 엠마와 매튜 프로이트의 삼촌이 된다.)
가족은 나치즘의 부상을 피해 1933년 런던의 세인트존스 우드로 이주했다. 프로이트는 데번주 토트네스의 다팅턴 홀 학교와 브라이언스턴 학교에 다녔으나[6][7] 문제 행동으로 퇴학당했으며, 1939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성씨 표기도 영어식 발음인 '프로이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4][5][8]
1940년대에는 동료 예술가 애드리안 라이언, 존 민턴과 동성애 관계를 맺기도 했다.[50] 로르나 가먼과의 관계 이후, 1948년 키티 가먼과 결혼했다. 키티는 조각가 제이콥 엡스타인과 사교계 명사 캐슬린 가먼의 조카였다.[51][52]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아나벨 프로이트와 시인 애니 프로이트가 태어났으나, 1952년 이혼했다.[53] (키티는 이후 1955년 경제학자 윈 고들리와 재혼하여 키티 고들리로 알려졌으며, 2011년 사망했다.[54])
1952년 말, 프로이트는 기네스 가문의 상속녀이자 작가인 레이디 캐롤라인 블랙우드와 파리로 가서 1953년 결혼했으나 1959년 이혼했다.[53]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는 동료 화가 셀리아 폴과 관계를 가졌다.[55]
프로이트는 총 14명의 자녀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첫 결혼에서 얻은 두 딸 외에 여러 연인 관계를 통해 12명의 자녀를 두었다.[56] 작가 에스터 프로이트와 패션 디자이너 벨라 프로이트는 버나딘 커버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이다.
그의 초상화 모델은 주로 가족, 친구, 동료 화가, 연인, 자녀 등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프랭크 아우어바흐,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등 동료 예술가들도 그의 모델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2011년 사망할 때까지 런던 켄싱턴의 켄싱턴 처치 스트리트 138번지에 있는 집에서 거주하며 작업실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1736-1737년에 지어졌으며 현재 2등급 지정 건물이다.[57] 프로이트는 사진 촬영을 극도로 꺼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적인 저녁 식사 후 자신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를 발로 찬 일화도 있다.[58]
2011년 7월 20일, 런던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59]
7. 서훈
- 1983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
- 1993년 오더 오브 메리트 (Order of Merit, OM)
참조
[1]
뉴스
Lucian Freud, OM
https://www.telegrap[...]
2020-03-08
[2]
웹사이트
Lucian Freud 1922–2011
http://www.tate.org.[...]
2016-10
[3]
뉴스
Lucian Freud Stripped Bare
https://www.nytimes.[...]
2011-07-22
[4]
뉴스
Portrait of the artist as a happy man
https://www.independ[...]
2010-06-19
[5]
간행물
London Gazette
1939-10-13
[6]
웹사이트
London Exhibition Showcases the Best of Bryanston Art and Design
https://web.archive.[...]
Bryanston School
2011-07-25
[7]
웹사이트
Lucian Freud (P '40) "Painted Life"
https://web.archive.[...]
Bryanston School
2012-02-20
[8]
뉴스
Obituary: Lucian Freud, OM
https://www.telegrap[...]
2012-02-20
[9]
서적
The Lives of Lucian Freud, Vol.1
Bloomsbury
[10]
웹사이트
John Craxton Guardian Obituary
https://www.theguard[...]
[11]
웹사이트
Freud: Prophet of Discomfort
https://academics.ec[...]
[12]
웹사이트
Art term: The School of London
https://www.tate.org[...]
tate.org
2019-07-16
[13]
문서
Kitaj's essay in the catalogue for The Human Clay exhibition
Hayward Gallery
1976
[14]
웹사이트
Tate, Man with a Thistle
https://www.tate.org[...]
[15]
웹사이트
Tate, Girl with a Kitten
https://www.tate.org[...]
[16]
문서
NPG, II
[17]
문서
NPG, "Etchings"
[18]
웹사이트
Naked Man With Rat
http://images.artnet[...]
2019-02-09
[19]
문서
'Freudian Egypt'
The London Magazine
2006-04
[20]
웹사이트
UBS Art Collection: A-Z
https://web.archive.[...]
2016-11-19
[21]
간행물
Freud's Animals
http://apollo-magazi[...]
Apollo
2009-06-05
[22]
웹사이트
Tate, Two Plants 1977–80
http://www.tate.org.[...]
[23]
웹사이트
Tate, Standing by the Rags, 1988-9
http://www.tate.org.[...]
[24]
문서
NPG, IV & 25
[25]
웹사이트
Lucian Freud
http://collection.br[...]
British Council
2010-12-18
[26]
웹사이트
Is Lucian Freud's Relationship with Mother Odd, or Is It Art?
http://www.people.co[...]
2011-07-22
[27]
뉴스
Gayford, Martin. Lucian Freud: marathon man
https://www.telegrap[...]
2011-07-22
[28]
문서
NPG, V
[29]
웹사이트
Etching, Tate
http://www.tate.org.[...]
[30]
뉴스
Freud work sets new world record
http://news.bbc.co.u[...]
BBC News
2008-05-14
[31]
웹사이트
Lucian Freud: From "Ingres of Existentialism" to Impasto Master
http://www.blouinart[...]
BLOUINARTINFO.COM
[32]
뉴스
Lucian Freud's final work to be shown in 2012 National Portrait Gallery show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2-01-29
[33]
웹사이트
Turner Prize 1989 – Exhibition at Tate Britain – Tate
http://www.tate.org.[...]
2016-11-19
[34]
웹사이트
Turner Prize 1985 artists: Terry Atkinson – Tate
http://www.tate.org.[...]
2016-11-19
[35]
서적
Lucian Freud: After Cézanne,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 2001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36]
서적
Lucian Freud: Early Works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37]
서적
Lucian Freud
Siegen
[38]
문서
[39]
웹사이트
Lucian Freud, naked portraits
https://collections.[...]
2001
[40]
서적
Lucian Freud: Naked Portraits. Werke der 40er bis 90er Jahre
Museum für Moderne Kunst
[41]
문서
[42]
웹사이트
Omnibus – Lucian Freud
https://www.bbc.co.u[...]
[43]
뉴스
Freud royal portrait divides critics
http://news.bbc.co.u[...]
BBC News
2001-12-21
[44]
웹사이트
Curator's Voice: Starr Figura on Lucian Freud's Etchings
http://www.blouinart[...]
BLOUINARTINFO
2008-04-23
[45]
간행물
Freud, Lucian Michael (1922–2011)
2015-01
[46]
웹사이트
Lucian Freud (1922–2011), Benefits Supervisor Resting
https://www.christie[...]
2019-02-09
[47]
뉴스
Freud's Lounging Naked Civil Servant Sells for $56.2 Million
https://www.bloomber[...]
Bloomberg Business
2015-05-14
[48]
웹사이트
Sotheby's October 2011 Evening Sales of 20th Century Italian Art and Contemporary Art Total £39.5/$62/€45 Million
http://files.shareho[...]
[49]
웹사이트
Lucian Freud portrait of Camilla's ex-husband sells for nearly $35m
https://www.theguard[...]
2015-11-11
[50]
뉴스
Exhibition brings to light young Freud's love triangle
2021-07-10
[51]
서적
Lucian Freud: Eyes Wide Open
Houghton Mifflin Harcourt
[52]
서적
Dangerous Muse: The Life of Lady Caroline Blackwood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53]
뉴스
Face to face with Freud
http://www.timesonli[...]
The Sunday Times
2005-05-22
[54]
간행물
Freud, Interrupted
2012-02
[55]
웹사이트
‘I Am No Longer Anyone’s Model’: Celia Paul on Why She Chose Art Over Love
https://news.artnet.[...]
2024-03-09
[56]
간행물
Freud, Interrupted
2012-02
[57]
웹사이트
138 Kensington Church Street, Non Civil Parish - 1239852
https://historicengl[...]
Historic England
2024-12-16
[58]
서적
The Lives of Lucian Freud: Fame: 1968-2011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59]
뉴스
英国の現代画家ルシアン・フロイド氏が死去、88歳
https://www.afpbb.co[...]
ロイター・ジャパン
2011-07-22
[60]
웹사이트
Lucian Freud, Standing by the Rags, 1988–89
http://smarthistory.[...]
Smarthistory at Khan Academy
2013-09-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