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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데 공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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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데 공고라는 17세기 스페인의 시인으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직자로 활동하며 궁정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쿨테라니스모"로 불리는 매우 세련된 시 스타일을 추구했으며, 소네트, 송시, 발라드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창작했다. 공고라는 동시대 시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 오랜 기간 불화를 겪으며 서로를 비판하는 시를 주고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사후에 출판되어 27세대를 비롯한 후대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 "고독" 등이 있다.

2. 생애

루이스 데 공고라는 코르도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데 아르고테는 치안 판사였다.[1] 기독교 혈통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이 중요했던 스페인 시대에, 그는 어머니의 성인 공고라를 사용했다.[1] 그의 삼촌 돈 프란시스코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고, 조카를 위해 사임하여 공고라가 1586년에 부제 서품을 받도록 했다.[1]

공고라는 대성당 관련 직책으로 나바라, 안달루시아, 카스티야 등 여러 지역을 방문했다.[1] 마드리드, 살라망카, 그라나다, 하엔, 톨레도 등이 그가 방문한 도시였다.[1] 1605년경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후 바야돌리드마드리드에서 살았다.[2] 마드리드에서는 1616년부터 1626년 사이에 세바스티안 프란시스코 데 메드라노가 설립한 메드라노 아카데미(마드리드 시 아카데미)에 다녔다.[2]

1617년 레르마 공작의 도움으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명예 채플린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그 직을 유지하지는 못했다.[3] 그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 오랫동안 불화를 겪었다.[4] 두 시인은 서로를 비난하는 많은 풍자적인 작품을 썼으며, 케베도는 공고라의 아첨, 큰 코, 도박에 대한 열정을 비판했다.[4] 케베도는 심지어 공고라를 소돔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4]

이 갈등은 케베도가 공고라를 쫓아내기 위해 그가 살던 집을 사면서 비참하게 끝났다.[5] 1626년, 공고라는 심각한 질병으로 기억력을 잃고 코르도바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사망했다.[5] 그는 지위를 얻고 친척들을 위한 소송에 몰두하다 파산했다.[5] 그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메스키타 구역에 묻혔다.

그의 시집은 사후 거의 즉시 후안 로페스 데 비쿠냐에 의해 출판되었고, 1633년에는 호세의 판본이 자주 재인쇄되었다. 이 시집은 수많은 소네트, 송시, 발라드, 기타를 위한 노래, 그리고 폴리페모와 갈라테아 이야기(1612)와 같은 대규모 시를 포함하며, 이는 "culteranismo" 또는 "Gongorismo"라고 불리는 매우 세련된 스타일의 대표작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파르나소스 여행''에서 공고라를 좋은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라이벌 케베도의 수많은 문서, 소송 및 풍자는 그를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수다스러운 사람으로 묘사하며, 카드 게임과 스페인식 투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의 주교는 그가 성가대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참석해도 열렬히 기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공고라의 카드 놀이에 대한 열정은 결국 그의 몰락에 기여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루이스 데 공고라는 코르도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데 아르고테는 치안 판사였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교육이나 공직 임명을 얻기 위해 기독교 혈통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성인 공고라를 사용했다. 그의 삼촌 돈 프란시스코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는데, 조카를 위해 사임했고, 공고라는 1586년에 부제로 서품받았다.[1]

그는 대성당과 관련된 캐논으로서 나바라, 안달루시아, 카스티야 등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가 방문한 도시에는 마드리드, 살라망카, 그라나다, 하엔, 톨레도 등이 있었다.[1]

2. 2. 성직 활동과 문학적 여정

루이스 데 공고라는 코르도바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기독교 혈통의 순수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대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1] 그의 삼촌 돈 프란시스코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는데, 조카를 위해 사임하여 공고라가 1586년에 부제 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1]

공고라는 코르도바 대성당과 관련된 캐논으로서 나바라, 안달루시아, 카스티야 등지로 여러 임무를 수행하며 마드리드, 살라망카, 그라나다, 하엔, 톨레도 등 다양한 도시를 방문했다.[2] 1605년경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바야돌리드마드리드에서 거주했다.[2] 마드리드에서는 1616년부터 1626년까지 세바스티안 프란시스코 데 메드라노가 설립한 메드라노 아카데미(마드리드 시 아카데미)에 참여하기도 했다.[2]

1617년, 레르마 공작의 도움으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명예 채플린으로 임명되었으나, 이 영예를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3]

그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 오랫동안 불화를 겪었는데, 서로를 비난하는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4] 케베도는 공고라의 아첨, 큰 코, 도박에 대한 열정을 비판했으며, 심지어 그를 소돔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4] 이러한 갈등은 케베도가 공고라를 쫓아내기 위해 그가 살던 집을 구매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5]

1626년, 공고라는 심각한 질병으로 기억력을 잃고 코르도바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사망했다.[5] 그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메스키타 구역에 묻혔다.[5]

2. 3. 궁정 시인과 몰락

레르마 공작의 영향으로 1617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명예 채플린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영예를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1]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 오랫동안 불화를 겪었는데, 재능과 재치로 자신의 영향력에 맞서려 했던 케베도는 공고라의 아첨, 큰 코, 도박에 대한 열정을 비판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많은 비통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썼다.[1] 케베도는 심지어 공고라를 소돔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17세기 스페인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1] 공고라의 코는 케베도의 "A una nariz"라는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1]

이 격렬한 불화는 케베도가 공고라를 쫓아낼 목적으로 그가 살던 집을 사면서 비참하게 끝났다.[1] 1626년 시인의 기억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코르도바로 돌아가야 했고, 이듬해 사망했다.[1] 그는 지위를 얻고 모든 친척을 위해 소송에서 이기려고 노력하다가 파산했다.[1]

2. 4.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의 불화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재능과 재치로 공고라의 영향력에 맞서려 했으며, 둘은 오랫동안 불화를 겪었다.[3] 두 시인은 서로를 비난하는 많은 신랄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썼다.[3] 케베도는 공고라의 아첨, 큰 코, 도박에 대한 열정을 비판했다.[3] 케베도는 심지어 그를 소돔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17세기 스페인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3] 케베도는 "Contra el mismo (Góngora)"에서 공고라에 대해 "제단은 없고, 도박장이 있습니다. /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는 아주 심한 도박꾼이고, 성직자는 아니고, 확실히 하피입니다."라고 썼다.[3] 공고라의 코는 케베도의 "A una nariz"의 주제였으며, "옛날 옛적에 코에 달라붙은 남자가 있었는데, /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이상한 코였고, / 그것은 거의 살아있는 튜브의 그물이였고, / 그것은 끔찍한 수염을 가진 황새치였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3]

이 격렬한 불화는 케베도가 공고라를 쫓아낼 목적으로 그가 살던 집을 사면서 비참하게 끝났다.[4]

2. 5. 말년과 죽음

1626년 시인의 기억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그는 코르도바로 돌아가야 했고, 이듬해 사망했다. 그 무렵 그는 지위를 얻고 모든 친척을 위해 소송에서 이기려고 노력하다가 파산했다. 그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메스키타 구역의 한 옆 예배당에 묻혔으며, 그곳에서 그의 장례 기념비를 볼 수 있다.

3. 작품 세계

루이스 데 공고라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 즉 쿨테라니스모(Culteranismo)라는 독특한 시적 스타일과 주요 작품들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1623년에 시도했으나 실패) 사후 필사본, 노래집, 선집 등을 통해 널리 퍼졌다. 1627년 후안 로페스 비쿠냐가 "스페인 호메로스의 시 작품"을 출판하여 공고라 작품을 집대성하려 했으나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압수되었고, 1633년 곤살로 데 호제스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출판되었다.

3. 1. 쿨테라니스모(Culteranismo)

개념주의(conceptismo)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쿨테라니스모(Culteranismo)는 바로크 시대의 또 다른 문학 운동이었다. 개념주의는 재치 있는 스타일, 언어 유희, 단순한 어휘를 사용하고, 가능한 한 적은 단어로 여러 의미를 전달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러나 "개념주의"의 모든 요소는 이미 곤고라의 만년 작품에도 나타났다. 스페인 개념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루이스 데 곤고라와 지속적으로 불화를 겪으며 서로의 글과 사생활을 비판했다.

쿨테라니스모라는 단어는 ''culto''("세련된")와 루터교(luteranismo)를 섞은 것으로, 반대자들이 이 운동을 "진정한" 시의 이단으로 폄하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운동은 거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거나 의미를 숨기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 학자는 "곤고라의 시는 배타적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이며, 문자 그대로 신조어의 형태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통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평가했다.[7]

곤고라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신조어를 매우 선호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이를 조롱했다. 케베도는 곤고라의 어휘에서 단어를 나열한 소네트 "Aguja de navegar cultos"를 써서 그의 라이벌을 풍자했다. "그는 단 하루 만에 쿨토 시인이 되고 싶어하며, 다음 전문 용어를 배워야 한다: / ''Fulgores, arrogar, joven, presiente / candor, construye, métrica, armonía...''"[8] 케베도는 "Sulquivagante, pretensor de Estolo"를 포함한 여러 소네트에서 곤고라의 스타일을 조롱했다.[9] 이 반(反) 곤고라주의 소네트는 쿨테라니스모의 난해함과 ''sulquivagante''(명확한 목적지 없이 여행하는 사람), ''speluncas''("동굴"), ''surculos''(싹, 접수)를 포함한 화려한 신조어의 광범위한 사용을 비판했다.[9] 그는 또한 흑인의 말투를 모방한 시를 처음으로 쓴 사람이었다.[10] 곤고라는 구문의 흐름을 뚜렷하게 끊는 것을 선호했으며, 구문의 제약을 뒤집어 도치법을 그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만들었다.[11]

곤고라는 "의심할 여지없는 천재성과 거의 무한한 교양을 가진 사람, 거대한 펜의 광대한 힘, 아름다움 및 범위를 가지고 자신의 언어를 풍부하게 한 개척자"라고 불렸다.[12] 페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는 후안 데 에스피노사 메드라노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는 곤고라의 시를 비판으로부터 옹호하는 글인 ''Apologético en favor de Don Luis de Góngora, Príncipe de los poetas lyricos de España: contra Manuel de Faria y Sousa, Cavallero portugués''(1662)를 썼다.[13]

다마소 알론소가 지적했듯이, 곤고라가 스페인어에 기여한 바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당시에는 모호하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단어들을 골라 그의 시에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부활시키거나 대중화시켰다. 이러한 단어들 중 많은 수가 오늘날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데, ''adolescente'', ''asunto'', ''brillante'', ''construir'', ''eclipse'', ''emular'', ''erigir'', ''fragmento'', ''frustrar'', ''joven'', ''meta'', 그리고 ''porción'' 등이 있다.[14]

3. 2. 주요 작품

공고라의 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와 ''고독''(1613)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자 가장 많이 연구된 작품이다.[15] ''우화''는 8행 연시(octavas reales)로 쓰여졌고, ''고독''은 다양한 운율과 연으로 쓰여졌지만, 주로 연시와 합창이 곁들여진 실바로 쓰여졌다.[16]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1612)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키클롭스 폴리페모스가 요정 갈라테아를 사랑하지만 거절당하는 신화적 이야기를 다룬다. 시의 마지막에 갈라테아와 사랑에 빠진 아키스는 강으로 변한다.[17]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우화''(''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우화) (1618)는 수다스럽고 탐욕스러운 여성을 조롱하는 복잡한 시이다. 공고라는 또한 애정, 풍자, 도덕, 철학, 종교, 논쟁, 찬양, 장례 등 다양한 주제의 소네트를 썼다. 소네트는 일반적인 주제(카르페 디엠 등) 외에도 작가의 쇠퇴와 노령화 같은 자전적 요소를 포함한다. 또한 공고라는 가장 야심 찬 작품 중 하나인 ''엘 파네히리코 알 두케 데 레르마''(1617)를 썼는데, 79개의 8행 연시로 이루어진 시이다. 세르반테스는 "엘 파네히리코"를 읽고 "그가 쓴 것 중 가장 존경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18]

그는 "트로이의 파괴", "이사벨라의 견고함", 미완성작인 "닥터 카를리노"와 같은 연극도 썼다.[19]

공고라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았지만(1623년에 시도했음), 필사본이 유포되었고 노래집(cancioneros)과 그의 허락 유무에 관계없이 출판된 선집에 수집되었다. 1627년, 후안 로페스 비쿠냐는 "스페인 호메로스의 시 작품"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공고라의 작품집을 확립하는 데 매우 신뢰할 만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쿠냐의 작품은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압수되었고, 나중에는 1633년 곤살로 데 호제스에 의해 출판된 판본에 의해 능가되었다.

3. 3. 작품 출판과 후대의 평가

공고라의 시는 대략 두 개의 연속적인 시적 단계에 해당하는 두 개의 블록으로 분류된다. 그의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와 ''고독''(1613)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자 가장 많이 연구된 작품이다.[15] ''우화''는 8행 연시로 쓰여졌고, ''고독''은 다양한 운율과 연으로 쓰여졌지만, 주로 연시와 합창이 곁들여진 실바로 쓰여졌다.[16]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1612)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묘사된 신화적 에피소드를 서술한다. 키클롭스 중 하나인 폴리페모스가 그를 거절하는 요정 갈라테아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갈라테아와 사랑에 빠진 아키스는 강으로 변한다.[17]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우화''(''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우화) (1618)는 수다스럽고 탐욕스러운 여성을 조롱하는 복잡한 시이다. 공고라는 또한 애정적, 풍자적,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논쟁적, 찬양적, 장례적 성격을 띤 다양한 주제에 관한 소네트를 썼다. 일반적인 주제 (''카르페 디엠'' 등)뿐만 아니라, 소네트는 작가의 쇠퇴와 노령화에 대해 묘사하는 자전적 요소를 포함한다. 또한 공고라는 가장 야심 찬 작품 중 하나인 ''엘 파네히리코 알 두케 데 레르마'' (1617)를 썼으며, 79개의 8행 연시로 이루어진 시이다. 세르반테스는 "엘 파네히리코"를 읽고 나서 "그가 쓴 것 중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18]

그는 "트로이의 파괴", "이사벨라의 견고함", 미완성작인 "닥터 카를리노"와 같은 연극도 썼다.[19]

공고라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았지만(1623년에 시도했음), 필사본이 유포되었고 노래집과 그의 허락 유무에 관계없이 출판된 선집에 수집되었다. 1627년, 후안 로페스 비쿠냐는 "스페인 호메로스의 시 작품"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 또한 공고라의 작품집을 확립하는 데 매우 신뢰할 만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쿠냐의 작품은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압수되었고, 나중에는 1633년 곤살로 데 호제스에 의해 출판된 판본에 의해 능가되었다.

4. 27세대와 공고라

27세대는 1927년, 공고라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이 기념일은 공식 학계에서는 무시되었지만, 낭독회, 아방가르드 행사,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비평판 출판과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그의 작품의 여러 측면에 대한 책과 기사를 내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기념되었다.[20]

27세대는 바로크 문학을 자각적으로 부활시키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11] 다마소 알론소는 공고라의 복잡한 언어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한다고 썼다.[11] 그는 공고라를 "단어의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을 철저히 탐구했다.[21] 알론소는 공고라가 초기와 후기로 연대기적으로 나뉘는 "단순"시와 "어려운" 시의 두 가지 별개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없앴다. 그는 공고라의 더 복잡한 시가 시인으로서 공고라의 초기 경력에서 창조된 스타일적 장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공고라의 초기 시 중 일부의 겉보기 단순함은 종종 기만적이라고 주장했다.[22]

라파엘 알베르티는 자신만의 ''Soledad tercera'' (''Paráfrasis incompleta'')를 추가했다.[23] 1961년 알베르티는 "나는 공고라에서 가르시아 로르카에 이르기까지 안달루시아 출신의 모든 시인과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시인이다."라고 선언했다.[24]

가르시아 로르카는 1927년 세비야의 아테네오에서 "돈 루이스 데 공고라의 시적 이미지"라는 강연을 했다.[25] 이 강연에서 가르시아 로르카는 영화 감독인 장 엡스타인을 이미지에 대한 권위자로 칭하며 공고라와 비교했다.[26]

5. 철학과 소설 속의 공고라

바뤼흐 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1677)에서 육체가 움직임을 멈추기 전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병을 앓았던 한 스페인 시인을 예시로 들었다. 그는 회복되었지만, 과거의 삶을 너무 잊어버려 자신이 쓴 이야기와 비극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27] 역사가 카를 게브하르트는 "이 사람은 아마도 스피노자가 소유하고 있던, 죽기 1년 전에 기억을 잃은 공고라였을 것이다"라고 썼다.[28]

알라트리스테 시리즈의 화자는 이야기 속에서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친구로, 공고라와 케베도의 갈등을 보여준다.

지아니나 브라스키의 이중 언어 소설 ''요요 보잉!''(1998)에서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은 공고라와 케베도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스페인 제국을 정의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음악 그룹 데드 캔 댄스는 1990년 앨범 아이온에 수록된 "Fortune Presents Gifts Not According to the Book"의 가사로 공고라의 시 "Da bienes Fortuna"의 영어 번역본을 사용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2666'' (2004년 사후 출판)의 두 번째 부분인 "아말피타노에 관한 부분"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은 공고라의 시구를 인용한다.

존 크롤리의 소설 "The Solitudes" (별칭 "Aegypt", 1987)는 공고라의 시 "Soledades"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인용한다.

루이스 데 공고라의 초상화는 2018년 비디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이스터 에그로 등장한다.

6. 한국 문학과의 관계 (추가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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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Enciclopedia universal ilustrada europeo-americana J. Espasa 1907
[2] 웹사이트 Asociación Cultural Nueva Acrópolis en Gandía. GÓNGORA Y GARIBALDI http://www.nueva-acr[...] 2009-12-28
[3] 서적 An Anthology of Spanish Poetry 1500–1700. Part II Pergamon Press 1968
[4] 웹사이트 Quevedo http://centros5.pnti[...] 2008-02-17
[5] 웹사이트 Francisco de Quevedo, A un hombre de gran nariz http://sonnets.spani[...] 2001-03-09
[6] 서적 The Spanish Character: Attitudes and Mentalities from the Six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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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La lengua poética de Góngora Revista de Filología Española 1950
[9] 웹사이트 Las sátiras de Quevedo. El soneto de Quevedo: «Sulquivagante, pretensor de Estolo»: ensayo de interpretación http://cvc.cervantes[...]
[10] 서적 Celestina's Brood: Continuities of the Baroque in Spanish and Latin American Literature Duke University Press 1993
[11] 서적 Celestina's Brood: Continuities of the Baroque in Spanish and Latin American Literature Duke University Press 1993
[12] 서적 The Epic of Latin Ameri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13] 웹사이트 Biografia de Juan de Espinosa Medrano http://www.biografia[...]
[14] 서적 La lengua poética de Góngora Revista de Filología Española 1950
[15] 웹사이트 Personas que escriben bonito http://www.conevyt.o[...] 2006-09-02
[16] 웹사이트 Personas que escriben bonito http://www.conevyt.o[...] 2006-09-02
[17] 웹사이트 Personas que escriben bonito http://www.conevyt.o[...] 2006-09-02
[18] 웹사이트 El Panegírico al duque de Lerma. Trascendencia de un modelo gongorino (1617-1705) http://www.upf.edu/t[...]
[19] 웹사이트 Personas que escriben bonito http://www.conevyt.o[...] 2006-09-02
[20] 서적 From Modernism to Neobaroque: Joyce and Lezama Lima Bucknell University Press 2001
[21] 웹사이트 Personas que escriben bonito http://www.conevyt.o[...] 2006-09-02
[22] 서적 An Anthology of Spanish Poetry 1500–1700. Part II Pergamon Press 1968
[23] 웹사이트 Argos 16/ Ensayo/ Guadalupe Mercado http://argos.cucsh.u[...]
[24] 서적 This Loving Darkness: The Cinema and Spanish Writers 1920–1936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25] 웹사이트 Garcia Lorca, Federico – CanalSocial – Enciclopedia GER http://www.canalsoci[...] 2011-07-16
[26] 서적 This Loving Darkness: The Cinema and Spanish Writers 1920–1936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27] 서적 Spinoza 1985
[28] 서적 Spinoza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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