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드 몽팡시에 공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 드 몽팡시에 공작은 부르봉 가문의 일원으로, 프랑스 왕족이었다. 그는 자클린 드 롱위와 로렌의 카트린과 결혼했으며, 프랑수아 2세와 샤를 9세 치세 동안 요직을 맡았다. 그는 앙부아즈 음모 진압에 참여하고, 돔브 공으로 임명되었으며, 1차, 2차, 3차 종교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생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 찬동하고, 브르타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앙리 3세 치세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와의 결혼 협상에 관여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물랭 출신 - 앙투안 메이예
프랑스의 언어학자 앙투안 메이예는 역사 언어학과 인도유럽어족 비교 연구에 기여하고 문법화 개념을 정립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비교언어학 강사로 활동하며 호메로스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국제 보조어 연구에도 참여했고, 『인도유럽어 연구 입문』, 『라틴어 어원 사전』 등의 주요 저서를 남겼다. - 몽팡시에 공작 -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은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아들로, 루이 15세의 섭정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하며 재정,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경제적,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 몽팡시에 공작 - 앙리 도를레앙 (1933년)
앙리 도를레앙은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자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으로, 작가와 화가로도 활동하며 왕립 동맹을 지지했다. - 부르봉몽팡시에가 -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족으로, 형 루이 13세 치세에 반란과 음모를 일으키며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고, 루이 13세 사후에는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으며,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를 두었고 조카 루이 14세 치세에는 '르 그랑 몽시외'로 불렸다. - 부르봉몽팡시에가 -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은 프랑스 공주이자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첫 번째 배우자로,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과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나 '발루아 양'으로 불렸으며 사촌인 사보이 공작과의 결혼으로 사보이 공작부인이 되었으나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여 토리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루이 드 몽팡시에 공작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루이 드 부르봉 |
출생일 | 1513년 6월 10일 |
출생지 | 물랭 |
사망일 | 1582년 9월 23일 |
사망지 | 샹피니 |
종교 | 가톨릭교 |
작위 | |
작위 | 몽팡시에 공작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루이, 라로슈쉬르용 공작 |
어머니 | 루이즈 드 부르봉 |
배우자 | 자클린 드 롱위 카트린 드 로렌 |
자녀 | 프랑수아즈, 부용 공작 부인 안, 네베르 공작 부인 프랑수아, 몽팡시에 공작 샤를로트, 오랑주 공비 |
2. 초기 생애와 가문
루이는 부르봉 가문의 일원으로, 라 로슈 쉬르 용 공 루이와 몽팡시에 여공 루이즈 드 부르봉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반역죄로 영지를 몰수당했던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군사 경력을 쌓아, 1536년에는 앤 드 몽모랑시의 지휘 아래 카를 5세의 군대로부터 프로방스와 아르투아 지역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1538년, 프랑수아 1세 국왕의 사생 여동생 앙굴렘의 잔의 딸인 자클린 드 롱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계기로 프랑수아 1세는 루이의 할아버지 질베르가 소유했던 몽팡시에 백작령(이때 공작령으로 승격됨), 포레 백작령 등을 루이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1543년에는 오베르뉴의 도팽령도 획득했다.
루이는 이후에도 카를 5세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참여했으며,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는 전투 중 말을 잃고 포로가 되기도 했다.
2. 1. 가계와 결혼
루이는 부르봉 라 로슈 쉬르 용 공 루이와 몽팡시에 여공 루이즈 드 부르봉의 아들이었다. 어머니 루이즈는 몽팡시에 백작 길베르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또한 루이는 어머니를 통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적대하다 반역죄로 영지를 몰수당한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부르봉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는 왕족에 속했다.1538년, 루이는 바르 쉬르 센 여백작 자클린 드 롱위와 결혼했다. 자클린은 파니 남작 장 4세 드 롱위와 프랑수아 1세의 사생 여동생인 앙굴렘의 잔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이 결혼을 기념하여 프랑수아 1세는 루이의 할아버지 몽팡시에 백작 길베르의 소유였던 몽팡시에 백작령(이때 공작령으로 승격됨), 포레 백작령, 뵈주 백작령, 그리고 돔브를 루이의 어머니 루이즈에게 돌려주었다. 이 결혼에서 자클린은 60,000 리브르의 지참금을 가져왔다.
1561년 아내 자클린과 어머니 루이즈가 사망한 후, 루이는 1570년 2월 4일 로렌의 카트린과 재혼했다. 그녀는 기즈 공작 앙리 1세와 마옌 공작 샤를 드 로렌의 누이였다. 두 번째 결혼에서는 200,000 리브르의 지참금이 오갔다.
루이와 첫 번째 아내 자클린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태어났다.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및 주요 사항 |
---|---|---|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 1539–1587 | 1559년 부용 공작이자 세당 공자인 앙리 로베르 드 라 마르크와 결혼 |
안 드 부르봉 | 1540–1572 | 1561년 네베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네베르 공작 프랑수아 2세 드 클레브와 결혼 |
잔 드 부르봉 | 1541–1620 | 주아르 수녀원장 |
프랑수아 드 부르봉 | 1542–1592 | 몽팡시에 공작 |
샤를로트 드 부르봉 | 1547–1582 | 주아르 수녀원장, 1571년 오라녜 공 빌럼 1세와 결혼 |
루이즈 드 부르봉 | 1548–1586 | 파레무티에 수녀원장 |
2. 2. 자녀
루이는 첫 부인 자클린 드 롱위와의 사이에서 다음 자녀를 두었다.이름 | 생몰년 | 비고 |
---|---|---|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 1539–1587 | 1559년 부용 공작이자 세당 공작인 앙리 로베르 드 라 마르크와 결혼 |
안 드 부르봉 | 1540–1572 | 1561년 네베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결혼 |
잔 드 부르봉 | 1541–1620 | 푸아티에 수녀원장(1570년), 주아르 수녀원장(1573년) |
프랑수아 | 1542–1592 | 몽팡시에 공작 |
샤를로트 | 1547–1582 | 주아르 수녀원장, 1575년 오라녜 공작 빌럼 1세와 결혼 |
루이즈 드 부르봉 | 1548–1586 | 파르무티에 및 주아르 수녀원장 |
1560년 여름, 루이는 투렌, 앙주 및 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같은 해 8월에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란 진압을 지휘했으며[2], 12월에는 프랑수아 2세로부터 돔브 공(prince souverains de Dombesfra)으로 임명되었다.
3. 프랑수아 2세 치세
3. 1. 앙부아즈 음모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정부는 기즈 가문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기즈 가문은 그들의 권력 상승에 여러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러한 반대는 왕을 납치하고 기즈 형제를 살해하려는 시도였던 앙부아즈 음모로 뭉쳐졌다. 위기 동안 앙부아즈 성에서 앙부아즈 칙령이 발표되어 특정 조건하에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사면을 제공했는데, 이는 왕실이 취한 관용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다.
앙부아즈 성에 대한 시도 직후, 여러 군사 지도자 아래 비행 부대가 파견되어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하위 봉기를 진압했다. 몽팡시에 공작은 군대와 함께 앙제에 파견되어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기즈 가문은 콩데 공이 음모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했고, 수개월 동안 프랑스가 계속 불안정해지자 그를 다른 왕족인 사촌 몽팡시에 공작과 라 로슈 쉬르 욘 공작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두 왕자를 위해 두 개의 초(超) 총독직이 만들어졌다. 몽팡시에 공작의 경우 앙주 공국을 중심으로 투렌, 메인 백국, 페르슈 백국, 방돔 백작령, 블루아 백국, 앙부아즈를 포함하는 총독직을 받았다. 한편 그의 형제는 오를레앙 공국을 중심으로 한 총독직을 받았다. 이 초총독직 관리를 돕기 위해 사비니 영주가 이 지역의 중장으로 위임되었다.
3. 2. 초총독직 임명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수아 2세의 정부는 기즈 가문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이는 여러 세력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러한 반대는 앙부아즈 음모로 이어져 왕을 납치하고 기즈 형제를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벌어졌다. 이 위기 속에서 앙부아즈 칙령이 발표되어 특정 조건 하에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사면을 제공했는데, 이는 왕실이 관용 정책을 향해 나아간 첫걸음이었다.
앙부아즈 성에 대한 공격 시도 직후, 여러 군사 지도자들이 이끄는 부대가 파견되어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소규모 봉기를 진압했다. 몽팡시에 공작 역시 군대를 이끌고 앙제로 파견되어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기즈 가문은 콩데 공이 앙부아즈 음모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프랑스 내 불안정이 수개월간 지속되자, 기즈 가문은 콩데 공을 다른 왕족인 그의 사촌 몽팡시에 공작과 라 로슈 쉬르 욘 공작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기즈 가문은 두 왕자를 위한 특별 총독직, 즉 '초총독직'(super-governorships)을 신설했다. 1560년 여름, 몽팡시에 공작은 투렌, 앙주, 멘의 총독이 되었으며[1], 그의 초총독직은 이 지역들과 더불어 페르슈, 방돔, 블루아, 앙부아즈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형제인 라 로슈 쉬르 욘 공작은 오를레앙 공국을 중심으로 한 초총독직을 받았다. 이 넓은 지역의 관리를 돕기 위해 사비니 영주(Lord of Savigny)가 해당 지역의 중장(lieutenant-general)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8월, 몽팡시에 공작은 이 새로운 직책 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반란 진압을 지휘했다[2].
4. 샤를 9세 치세
1560년 12월, 프랑수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동생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기즈 가문이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반면,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은 카트린 드 메디치가 이끄는 섭정 정부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4. 1. 개신교와의 갈등
프랑수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1560년 12월 그의 동생인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기즈 가문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반면,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은 섭정을 맡은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해 중용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이미 1560년 8월, 루이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란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2]。1561년 7월, 몽팡시에 공작 루이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투렌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많은 이들이 공공연하게 개신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시농에서 100명 이상의 개신교 신자들을 투옥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수천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그의 저택 중 한 곳을 포위하자, 결국 굴복하여 투옥했던 이들을 석방해야 했다. 이 일로 그는 궁정으로 소환되어 질책을 받았다. 자신의 영지에서조차 권위가 서지 않는 상황에 좌절한 그는 궁정에 영지로 은퇴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기도 했다.
점차 왕실의 관용 정책에 반감을 가지게 된 루이는 1561년 기즈 공작 프랑수아, 안 드 몽모랑시와 손을 잡고 '이단'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삼두 동맹에 합류했다. 이는 그의 종교적 강경 노선을 명확히 보여주는 행보였다.
루이의 아내 자클린 드 롱위는 개신교에 비교적 동정적인 입장이었으나, 1561년 그녀가 사망하자 루이는 더욱 극단적인 반개신교 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위그노에 대한 가장 강경한 반대자가 되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 박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무자비한 행동은 부하들로부터도 미움을 살 정도였다.
이후 루이는 개신교 세력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63년에는 앙굴렘과 코냑을 점령했으며, 1569년에는 자르나크 전투에 참전한 공로로 브르타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지지했으며, 1575년에는 푸아투에서 개신교도들을 상대로 잔혹한 탄압을 이어갔다.
4. 2. 제1차 종교 전쟁
1560년 여름, 루이는 투렌, 앙주, 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같은 해 8월에는 프로테스탄트 반란 진압을 지휘했다[2]。 1561년 아내 자클린 드 롱위가 사망하고, 같은 해 어머니 루이즈도 사망하여 몽팡시에 공작위를 계승했다. 이후 루이는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가장 강경한 반대자가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 박해했다. 그의 무자비한 행동은 부하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프랑스 종교 전쟁의 첫 번째 전쟁(1562-1563) 동안, 그는 총독으로서 반란을 일으킨 앙제 시를 진압하는 책임을 맡았다. 몽팡시에 공작은 도시를 다시 점령한 후 그곳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를 살해했다. 그는 도시 지도자들에게 다시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프로테스탄트를 공직에서 배제하라고 조언했다. 1562년 7월 이후 반란의 기세가 약해지자, 몽팡시에 공작과 자크 달봉은 루아르와 푸아투 지역에 대한 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동 부대를 이끌고 파견되었다. 1563년에는 앙굴렘과 코냑을 제압했다. 1564년에는 앙제 시 당국이 도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성과를 칭찬했다.
4. 3. 가톨릭 강경파와의 연대
1560년 여름,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에 대한 아내 자클린 드 롱위의 영향력을 이용해 투렌, 앙주, 멘의 총독이 되었다.[1] 같은 해 8월에는 프로테스탄트 반란 진압을 지휘했으며[2], 12월에는 프랑수아 2세로부터 돔브 공(prince souverains de Dombes)으로 임명되었다.1561년, 프로테스탄트에 동정적이던 아내 자클린이 사망하자, 루이는 위그노에 대한 가장 강경한 적대자로 변모하여 자신의 자녀들까지 박해했다. 그의 무자비함은 부하들에게도 미움을 살 정도였다.
1563년, 앙부아즈 칙령으로 제1차 종교 전쟁이 종결되자, 왕실은 파리 고등법원이 과거 관용 칙령처럼 이번 칙령의 등록을 거부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를 확실히 관철시키기 위해 루이는 추기경 부르봉과 함께 법원에 칙령을 제출하는 역할을 맡았다. 법원은 항의에도 불구하고 칙령을 등록했다. 같은 해, 그는 앙굴렘과 코냑을 탈환했다.
1560년대 내내 루이는 사적 평의회의 주요 인물로서 극단적인 가톨릭 파와 입장을 같이했다. 한편, 1563년 오를레앙 공방전 중 발생한 기즈 공작 암살 사건에 대해 기즈 가문은 콜리니 제독을 배후로 지목하고 복수를 꾀했다. 루이는 기즈 가문과 동맹을 맺고 국왕에게 콜리니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을 지지했으나, 국왕은 이를 거절했다. 1565년, 법적 해결에 실패한 기즈 가문이 복수를 위한 귀족들의 '리그' 결성을 모색했을 때, 루이는 샤비니, 장 4세 드 브로스 등과 함께 지지자로 참여했으나 이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극단적인 가톨릭 성향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도인 부용 공작과의 친족 관계를 이유로 그가 노르망디 총독으로 복직하도록 도왔고, 부용 공작은 결국 직위를 되찾았다.
앙주 지사로서 앙부아즈 칙령 시행을 둘러싸고 잔 다르브레와 충돌했다. 방돔에서 프로테스탄트 부사령관이 살해된 사건 이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잔 다르브레가 용의자들을 체포하자 루이는 석방을 요구했지만, 국왕은 잔 다르브레의 편을 들었다. 이 일로 좌절한 루이는 결국 총독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아들에게 직위를 넘겨주는 것은 허락받았다. 같은 해 그의 형제가 사망하자 그는 라 로슈 쉬르 용의 도피네 총독직을 맡았지만, 앙주 총독직을 사임한 것처럼 아들을 위해 2년 만에 사임했다.
1569년 자르나크 전투에 참여했으며, 브르타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지지했으며, 1575년에는 푸아투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며 학정을 가했다.
4. 4. 제2차 종교 전쟁
1563년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되자, 몽팡시에는 기즈 가문과 손을 잡고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콜리니 제독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그는 국왕에게 콜리니에 대한 정의를 실현할 권리를 요구하는 기즈 가문의 청원을 지지했으나, 국왕은 이러한 움직임에 관심이 없어 이를 거절했다. 법적 수단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 기즈 가문은 1565년, 복수를 위한 귀족들의 '리그' 결성을 추진했다. 샤비니, 장 4세 드 브로스, 몽팡시에 등이 지지자로 나섰지만, 이 계획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같은 시기, 앙주 지사였던 몽팡시에는 앙부아즈 칙령의 시행을 둘러싸고 잔 다르브레와 충돌했다. 특히 방돔에서 프로테스탄트 부사령관이 살해된 사건 이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잔 다르브레가 용의자들을 체포하자 몽팡시에는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은 잔 다르브레의 손을 들어주었고, 몽팡시에는 결국 앙주 지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아들에게 총독직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사임할 수 있었다. 같은 해 형제가 사망하여 라 로슈 쉬르 용의 도피네 총독직을 이어받았으나, 이 역시 2년 만에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1567년, 위그노 측이 국왕을 사로잡으려 했던 모(Meaux)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종교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제2차 종교 전쟁). 콩데 공이 파리를 포위하여 빠른 승리를 거두려 하자, 몽팡시에 공작은 마르티그와 협력하여 콩데 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프로방스에서 파견된 지원군을 격파하는 등 왕당파 군대에 기여했다. 이후 생드니 전투에서 왕당파 군 총사령관인 몽모렌시가 전사하자, 왕실은 강력한 귀족 대신 국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아직 어린 앙주 공작을 보좌하기 위해 아르튀 드 코세-브리사크, 네무르 공 자크와 함께 몽팡시에 공작이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몽팡시에는 앙주 공작의 군대가 파리에서 이동하여 독일 국경으로 후퇴하는 콩데 공의 군대를 추격할 때 선봉을 이끌었다.
4. 5. 제3차 종교 전쟁과 브르타뉴 총독 임명
두 번째 종교 전쟁 이후의 짧은 평화가 끝나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콩데 공은 궁정을 떠나 서부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몽팡시에 공작은 콩데 공을 지지하며 봉기한 푸아티에를 기습 공격했으며, 앙주 공작도 왕실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남부 프랑스의 자작들이 콩데 공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몽팡시에 공작은 1568년 10월 25일 페리고르에서 코세 원수와 협력하여 이 증원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의 전선이 너무 넓어져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공격에 시달렸고, 결국 1568년 11월 샤텔로에서 앙주 공작의 주력 부대에 합류할 때까지 추격을 받았다.1569년, 몽팡시에 공작은 프로테스탄트 반군으로부터 뮈시당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군대가 주민들을 학살하도록 방치했다. 같은 해 자르나크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생장당젤리 포위 공격 중 마르티그 총독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브르타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75년에는 그가 사망할 경우 그의 손자가 자동으로 총독직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합의되었다.
1570년에는 앙리 1세 드 기즈와 샤를 드 마옌의 누이인 카트린 드 기즈와 재혼했다. 그는 가톨릭 강경파로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도 찬동했으며, 1575년에는 푸아투에서 프로테스탄트와 싸우며 잔혹한 학대를 가했다.
4. 6. 생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생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이 파리에서 벌어졌을 때, 일부 귀족들은 이 혼란을 이용해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학살을 퍼뜨리려 했다. 몽팡시에 공작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했다. 그는 낭트 시장에게 편지를 보내, 샤를 9세가 파리에서의 '본보기'를 따라 낭트의 개신교도들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암시를 전달했다. 하지만 낭트 시장은 신중하게 대처하여, 국왕으로부터 학살을 원치 않는다는 명확한 지시를 받을 때까지 이 편지를 공개하지 않고 개신교도들을 보호했다.한편, 소뮈르와 앙제에서는 몽팡시에 공작의 대리인인 퓌가이아르(Puygaillard)가 학살을 직접 실행하려 했다. 그는 몽소로(Monsoreau)를 보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을 살해하게 했다. 이러한 행위는 군중들을 자극하여 학살에 동참하도록 부추겼으나, 몇 시간 뒤 지방 당국이 개입하여 겨우 질서를 회복했다. 루이 드 몽팡시에 공작은 생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자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며, 이후 1575년에는 푸아투 지방에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며 박해를 이어갔다.
5. 앙리 3세 치세
앙리 3세가 즉위한 시기는 프랑스 위그노 전쟁이 계속되던 혼란기였다. 이 시기 루이 드 몽팡시에 공작은 가톨릭 진영의 주요 인물로서 국왕을 지지하며 군사 및 정치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제5차 종교 전쟁을 비롯한 여러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가톨릭 동맹이 세력을 키우는 등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그의 입장도 변화를 보였다. 초기 강경 노선에서 벗어나 점차 관용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오랜 경쟁 상대였던 기즈 가문과의 갈등 속에서도 왕실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또한 잉글랜드와의 외교 협상 등 국가적 현안에도 참여하며 앙리 3세 치세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활동했다.
5. 1. 제5차 종교 전쟁과 말썽꾼 사건
프랑스 내전의 양상은 점차 종교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복잡해지고 있었다. 콩데 공작과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를 탈옥시키려는 음모가 발생했을 때, 담빌을 비롯한 여러 가톨릭 귀족들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몽팡시에는 질서 회복을 위해 푸아투 지역으로 파견되었다.말썽꾼의 음모 이후 프랑스는 다시 내전 상태(제5차 종교 전쟁)로 빠져들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막 돌아온 앙리 3세는 기즈 공작, 몽팡시에 등과 함께 여러 부대를 동원하여 반대 세력에 대항했다. 1575년 1월, 몽팡시에는 왕권에 저항하는 주요 거점인 라 로셸 주변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인근의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후 몽팡시에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푸아투로 이동했다.
하지만 왕당파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알랑송 공작이 궁정을 이탈하면서 결국 말썽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보리외 칙령)이 체결되었다. 이 무렵 몽팡시에는 서부 지역에서의 전투를 중단하고 국왕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서부 지역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그동안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푸아투에 머무는 동안 몽팡시에는 뤼시냥과 퐁트네르콩트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이 시기 몽팡시에는 기즈 공작과 고등법원 내에서의 서열(우선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세력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가톨릭 '리그'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앙리 3세는 브르타뉴 총독이었던 몽팡시에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관할 지역에서 리그에 가담한 이들을 질책하며 불만을 표했다. 또한 앙리 3세는 몽팡시에에게 가톨릭 리그의 결성 움직임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5. 2. 가톨릭 동맹과 갈등
말썽꾼의 음모 이후, 프랑스는 다시 한번 내전에 휩싸였다. 앙리 3세는 최근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돌아와 기즈, 몽팡시에, 그리고 자신이 지휘하는 여러 군대를 준비하여 반대 세력에 맞섰다. 1575년 1월 몽팡시에는 라 로셸 주변에서 작전을 펼치며 왕권에 저항하는 주요 중심지 주변의 중요한 부속 도시들을 점령했다. 몽팡시에는 국왕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푸아투로 이끌었다.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알랑송이 궁정을 떠나면서 결국 말썽꾼들에게 유리한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몽팡시에는 이 시점에 서부에서의 전투를 중단하고 국왕에게 지원군을 보냈는데, 이로 인해 서부에서 그가 거둔 성과들은 새로운 반란으로 인해 무효가 되었다. 푸아투에 있는 동안 그는 뤼시냥과 퐁트네르콩트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시기에 몽팡시에는 기즈와 고등법원에서의 우선권을 놓고 특권 다툼을 벌였다.
평화가 정착되자, 가톨릭 동맹이 평화 조약의 조건에 반대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앙리 3세는 브르타뉴의 총독 자격으로 몽팡시에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그의 영토에서 동맹에 가담한 사람들을 꾸짖는 편지를 썼다. 앙리 3세는 몽팡시에에게 이러한 동맹 결성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5. 3. 정치적 변화와 외교 활동
몽팡시에는 한때 반란을 일으켰던 담빌 공작과 나바르의 앙리 4세 사이의 협상에서 국왕의 입장을 대변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국왕이 소집한 신분회 앞에서 전쟁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며, 왕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라도 관용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초기 종교 전쟁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강경한 입장과는 눈에 띄는 정치적 변화였다.이러한 열정적인 연설에도 불구하고 다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전쟁 재개에 반대하는 24명의 귀족과 함께 국왕에게 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국왕 앙리 3세는 그의 충심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다수의 의견과 신분회의 결정을 따라 전쟁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다행히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고, 몇 달 뒤인 1577년 9월 베르제라크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관용적인 입장으로의 변화는 오랜 경쟁 상대였던 기즈 가문과의 서열 다툼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여, 공식 석상에서 기즈 가문보다 앞서는 지위를 인정받는 결과를 낳았다.
1579년, 프랑스 남부 지역은 수십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의 무장한 농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때로는 귀족에 맞서기 위해 봉기하기도 했다. 이에 국왕 앙리 3세는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남부 지역의 평화와 질서 회복 임무를 맡겼고, 몽팡시에 공작은 부르봉 추기경과 함께 카트린을 보좌하여 남부로 파견되었다.
5. 4. 잉글랜드와의 결혼 협상
1581년, 몽팡시에 공작은 다시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알랑송 공작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이의 결혼 협상을 위해 잉글랜드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심각한 병을 앓고 있어 계획된 대표단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 프랑수아가 대신 대표단을 이끌었다.잉글랜드와의 결혼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왕위를 원했던 알랑송 공작은 네덜란드로 눈을 돌렸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상태였다. 오라녜 공 빌럼은 새로 독립한 국가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알랑송 공작이 네덜란드의 군주가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1582년 알랑송 공작은 네덜란드의 군주로 즉위했으나, 스페인과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그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알랑송 공작이 네덜란드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도록 돕기 위해 비롱 남작과 몽팡시에 공작의 아들 프랑수아가 지원군으로 파견되어 12월 1일에 도착했다.
같은 해 몽팡시에 공작이 사망하자, 그의 손자가 브르타뉴 총독직을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앙리 3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즈 가문의 동맹인 메르쾨르 공작에게 총독직을 수여했다.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es gouverneurs de province
Éd. Christian
2003
[2]
서적
La conjuration d'Amboise
19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