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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야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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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크야루크는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빛"을 뜻하는 튀르크어로, 셀주크 제국의 5대 술탄이었다. 그는 1081년 이스파한에서 태어나 1094년 바그다드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 테르켄 하툰과 이복 동생 마흐무드 1세와의 권력 다툼, 시리아의 왕 투투쉬, 숙부 아르슬란 아르군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1104년에는 동생 무함마드 타파르와 제국을 분할하는 조약을 맺었다. 베르크야루크는 1104년 보루제르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멜리크샤 2세가 뒤를 이었으나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술탄 자리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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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야루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루큰 알딘 아부알무자파르 베르크야루크 이븐 말리크샤
베르크야루크 그림
14세기 책 자미 알-타와리크에 나오는 베르크야루크의 즉위 장면
통치 정보
직함술탄
샤한샤
왕조셀주크 왕조
선대 군주마흐무드 1세
후대 군주말리크샤 2세
재위 기간1094년 ~ 1105년
개인 정보
출생일1079년/1080년
출생지이스파한
사망일1105년 (25세)
사망지보루제르드
아버지말리크샤 1세
어머니주바이데 하툰
자녀말리크샤 2세
주바이데 하툰
종교수니 이슬람

2. 이름

'베르크야루크'는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빛"을 의미하는 튀르크어 단어이다. 가즈나 왕조의 선대 통치자들이 페르시아어를 선호하여 튀르크 계승을 거의 포기한 것과는 반대로, 셀주크는 그들의 기원을 유지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베르크야루크, 아르슬란 아르구 또는 산자르와 같은 튀르크 이름을 사용했다.

3. 생애

셀주크 제국의 제5대 술탄. 아버지는 제3대 술탄 말리크 샤 1세이며 어머니는 그의 사촌이자 셀주크 공주인 주베이다 하툰이다.[3] 베르크야루크는 1081년 6월[7][8] (다른 기록에는 1079년 또는 1080년[3])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1092년 11월 아버지 말리크 샤 1세가 사망했을 때, 베르크야루크는 11세[3] 또는 13세에 불과했다. 셀주크 제국은 후계자 문제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계모 테르켄 하툰은 자신의 네 살 된 아들 마흐무드를 술탄으로 내세웠으나,[4] 사망한 재상 니잠 알물크의 지지 세력(니자미야)은 베르크야루크를 지지하며 그를 레이에서 술탄으로 추대했다.[4] 이로 인해 셀주크 제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베르크야루크는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1093년 보루제르드 전투에서 마흐무드 측 군대를 격파했고,[7] 1094년 마흐무드와 테르켄 하툰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단독 술탄이 되었다.[4]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외삼촌 이스마일 이븐 야쿠티를 진압하고 처형했으며,[7][9] 시리아에서 제위를 주장하던 숙부 투투쉬 1세는 1095년 라이 근처 전투에서 베르크야루크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4][10][11] 또한 호라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삼촌 아르슬란 아르군도 1097년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제거되었다.[12] 1094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크타디로부터 '''뤼큰엣딘'''(Rükneddin|뤼큰엣딘tr, ركن الدين|Rukn al-Dīnar, '신앙의 기둥')이라는 존칭과 함께 정식 술탄으로 책봉받았다.[7]

그러나 제국의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1100년경부터 이복동생 무함마드 타파르가 간자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4] 베르크야루크와 무함마드 타파르는 5년 동안 다섯 차례의 큰 전투를 치르는 등 치열한 내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4] 계속된 내전으로 제국의 국력은 소모되었고, 결국 1104년 1월 두 사람은 제국을 분할하는 조약을 맺었다. 베르크야루크는 명목상 술탄 지위를 유지하며 이란 중앙부와 바그다드를, 무함마드 타파르는 왕(말리크)으로서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북부, 시리아 등을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이로 인해 술탄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3][4][5]

조약 체결 후 약 11개월 뒤인 1104년 12월 22일, 베르크야루크는 이스파한으로 돌아가던 중 보루제르드 인근에서 결핵으로 병사했다.[7][4]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4] 그는 죽기 전 다섯 살 된 아들 말리크 샤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7] 베르크야루크 사후 무함마드 타파르가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말리크 샤 2세를 폐위시켰다(일부 기록에는 살해했다고도 한다[4]). 이후 무함마드 타파르는 단독 술탄으로 즉위했다.[14][4] 베르크야루크의 유해는 이스파한으로 옮겨져 셀주크 왕가의 무덤에 안치되었다.[7]

3. 1. 초기 생애와 권력 투쟁

베르크야루크는 1081년 6월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3대 술탄 말리크 샤 1세였고, 어머니는 셀주크 왕족인 아미르 야쿠티의 딸 주베이다 하툰이었다.[3] 베르크야루크는 말리크 샤의 장남이었으나, 말리크 샤에게는 카라한 칸국 공주 출신 테르켄 하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다우드와 아부 슈자라는 아들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092년 10월 14일, 제국의 유능한 재상 니잠 알물크가 암살당했다.[7][8] 이는 자신의 어린 아들 마흐무드를 후계자로 삼으려던 테르켄 하툰의 야심에 니잠 알물크가 마흐무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니잠 알물크의 죽음으로 테르켄 하툰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해 11월, 말리크 샤 1세마저 열병으로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에 빠졌다. 당시 베르크야루크는 11세[3] 또는 13세였고, 이복 동생 무함마드 타파르는 11세, 테르켄 하툰의 아들 마흐무드는 고작 4세였다. 말리크 샤의 형제 중 유일한 성인이었던 시리아의 투투쉬 1세도 왕위를 주장했지만, 투르크계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테르켄 하툰은 재상 타지 알-물크와 손잡고 바그다드에서 네 살배기 아들 마흐무드를 술탄으로 즉위시켰다.[4] 그녀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스타지르를 설득하여 마흐무드의 이름으로 후트바(금요 예배 설교)를 읽게 하고, 아미르 키르부카 휘하의 군대를 보내 이스파한에 있던 베르크야루크를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니잠 알물크를 따르던 세력("니자미야")은 투르크 노예 병사 에르-구쉬의 지휘 아래 베르크야루크를 지지했다.[4] 이들은 베르크야루크를 이스파한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타베그(후견인) 구무쉬티긴에게 보냈고, 구무쉬티긴은 그를 레이에서 술탄으로 추대했다.

1093년 1월 17일, 베르크야루크의 군대와 테르켄 하툰의 군대는 라리스탄의 보루제르드 근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베르크야루크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7] 베르크야루크 군대는 하마단으로 입성했고, 결국 양측은 조약을 맺어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흐무드는 이스파한과 파르스를 포함한 서부 지역을, 베르크야루크는 나머지 동부 지역을 통치하기로 했다.[7]

하지만 테르켄 하툰은 포기하지 않고, 베르크야루크의 외삼촌이자 아제르바이잔의 통치자였던 이스마일 이븐 야쿠티에게 자신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베르크야루크를 공격하도록 제안했다. 이스마일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아제르바이잔과 아란 지방의 튀르크멘 군대를 모아 베르크야루크를 공격했으나, 하마단과 이스파한 사이의 카라지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베르크야루크의 아타베그 귀무쉬 테긴에 의해 처형당했다.[7][9] 이후 테르켄 하툰은 시리아의 투투쉬와 접촉하려 했으나 1094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한 달 뒤 아들 마흐무드도 병으로 요절했다.[7][9][4]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베르크야루크는 바그다드로 진군했다. 1094년 2월 3일, 칼리프 알무스타지르는 베르크야루크를 정식 술탄으로 책봉하고 '''뤼큰엣딘'''(Rükneddintr, ركن الدين|Rukn al-Dīn|l2=faar, '신앙의 기둥'이라는 의미)이라는 존칭을 내렸다.[7] 이로써 베르크야루크는 '''위대한 술탄, 세계와 신앙의 기둥, 알무자파르의 아버지, 베르크야루크, 신도들의 사령관의 오른팔'''(سلطان الأعظم ركن الدولة و الدين بركيارق يمين امير المؤمنين|Sulṭān al-A`ẓam Rukn al-Dawla wa al-Dīn Abu al-Muẓaffar Barkiyāruq Yamīn Amīr al-Mu'minīnar)이라는 공식 칭호를 얻게 되었다.[7]

그러나 베르크야루크의 권력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시리아를 통치하던 숙부 투투쉬 1세가 강력한 경쟁자로 남아 있었다. 투투쉬는 말리크 샤 사망 직후부터 제위를 노리고 모술, 누사이빈, 안타키야, 알레포, 하란, 라카 등 주요 도시를 장악했으며, 칼리프에게 자신을 셀주크 제국 전체의 술탄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알레포의 태수 아크순쿠르 알하지브나 우르파의 태수 보잔 등 베르크야루크 지지를 선언했던 아미르들은 투투쉬에게 살해당했다.[7][10] 테르켄 하툰이 사망했음에도 투투쉬는 이란 고원을 향해 진군했다.

1095년 2월 26일, 베르크야루크와 투투쉬의 군대는 라이 인근에서 격돌했다. 전투 중 투투쉬의 병사들이 말리크 샤의 깃발을 보고 베르크야루크에게 투항하기 시작했고, 결국 투투쉬는 전투 중에 숭구르자라는 아미르의 칼에 전사했다.[10][11][4] 베르크야루크는 전투 후 투투쉬의 측근들을 용서하고, 투투쉬의 영지는 그의 아들들인 르드완과 두카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승리로 베르크야루크는 최소한 이란이라크 지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10][11]

또 다른 위협은 호라산을 다스리던 삼촌 아르슬란 아르군이었다. 그는 차으르 베이와 같은 후라산의 왕 지위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베르크야루크는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를 명목상의 지휘관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했다. 아르슬란 아르군은 1097년 자신의 노예에게 살해당했고, 베르크야루크는 산자르를 호라산의 왕으로 임명했다.[12] 아흐마드 산자르는 이후 약 60년간 호라산을 통치하게 된다.

아르슬란 아르군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베르크야루크는 명목상 제국 전체의 군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는 간자호라산의 왕으로 각각 동생 무함메드 타파르와 아흐마드 산자르를 임명했다. 알레포다마스쿠스는 투투쉬의 아들들인 르드완과 두카크에게, 아나톨리아 지역은 클르츠 아르슬란 1세에게, 케르만 지역은 투란 샤에게 맡겨졌다.[10] 이로써 초기 권력 투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러한 영토 분할은 셀주크 제국의 쇠퇴와 분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3. 2. 술탄 즉위와 통치

1092년 11월 아버지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이었던 베르크야루크[3] 대신 계모 테르켄 하툰의 책략으로 네 살배기 이복동생 마흐무드 1세이스파한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4] 하지만 당시 재상이었던 고 니잠 알물크의 지지자들(니자미야)은 이에 반발하여 이스파한에 있던 베르크야루크를 라이로 데려가 술탄으로 추대했다.[4] 니자미야 세력은 마흐무드 1세의 재상 타즈 알물크 아불가나임이 니잠 알물크 암살의 배후라고 여겨 복수를 원했다.[7][8]

1093년 1월, 테르켄 하툰의 군대와 베르크야루크의 군대는 라리스탄의 보루제르드 근처에서 격돌했다. 베르크야루크 군대가 승리하여 하마단으로 입성했으며, 패배한 마흐무드 측의 재상 타즈 알물크는 사로잡혔다. 베르크야루크는 타즈 알물크의 능력을 인정하여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니자미야 세력의 복수 요구에 따라 1093년 2월 12일 그를 처형했다. 이후 두 세력은 조약을 맺어 마흐무드는 이스파한과 파르스를 포함한 제국 서부를, 베르크야루크는 나머지 동부 지역을 통치하기로 합의했다.[7]

그러나 테르켄 하툰은 포기하지 않고 베르크야루크의 외삼촌이자 아제르바이잔의 왕 이스마일 이븐 야쿠티에게 접근하여, 베르크야루크를 공격하면 그와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스마일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베르크야루크를 공격했으나, 하마단과 이스파한 사이의 카라지 평원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테르켄 하툰은 투투쉬 1세와 접촉하려 했으나 1094년에 급사했고, 한 달 뒤 아들 마흐무드 1세도 사망했다.[7][9][4] 이로써 베르크야루크는 단독 술탄이 되었다.

베르크야루크는 바그다드로 진군했고, 칼리프 알무크타디는 그에게 '''뤼큰엣딘'''(Rükneddin|뤼큰엣딘tr, ركن الدين|Rukn al-Dīnar, '신앙의 기둥')이라는 존칭을 내리며 술탄으로 공식 책봉했다. 1094년 2월 3일, 베르크야루크의 이름으로 후트바(설교)가 진행되었다.[7]

하지만 베르크야루크의 통치는 계속된 도전에 직면했다. 첫 번째 위협은 시리아의 왕이었던 숙부 투투쉬 1세였다. 그는 멜리크샤 사후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지라, 모술, 안티오키아, 알레포 등을 장악하고 스스로 셀주크 제국 전체의 술탄임을 주장했다. 베르크야루크 지지를 표명했던 아크순쿠르 알하지브나 보잔 등은 투투쉬에게 살해당했다. 투투쉬는 이란 고원을 향해 진군했으나,[7][10] 1095년 2월 26일 라이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베르크야루크 군대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4] 이 승리로 베르크야루크는 이란과 이라크 지역에서 권위를 확립했다.[10][11]

또 다른 위협은 후라산을 다스리던 삼촌 아르슬란 아르군이었다. 그는 후라산의 왕으로 책봉되기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베르크야루크는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를 명목상 지휘관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했으나, 아르슬란 아르군은 1097년 자신의 노예에게 살해당했다. 베르크야루크는 산자르를 후라산의 왕으로 임명했고, 산자르는 이후 약 60년간 후라산을 통치하게 된다.[12] 베르크야루크는 이후 트란스옥시아나까지 진군하여 카라한 칸국 통치자들을 봉신으로 확정하고, 호라즘의 총독으로 쿠트브 알딘 무함마드를 임명하여 호라즘 왕조의 시작을 열었다.[7]

아르슬란 아르군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베르크야루크는 제국 전체의 군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는 간자와 후라산의 왕으로 각각 동생 무함메드 타파르와 아흐마드 산자르를 임명했다.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투투쉬의 아들들인 르드완과 두카크에게, 아나톨리아는 클르츠 아르슬란 1세에게, 키르만은 투란 샤에게 맡겨졌다.[10]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베르크야루크의 재상이었던 니잠 알물크의 아들 무아이드 알물크가 해임된 후, 이복동생 무함메드 타파르의 재상이 되어 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1100년).[4] 당시 17세였던 타파르는 라이를 점령하고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1099년 11월 4일 칼리프 알무스타지르로부터 술탄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5년간 베르크야루크와 타파르는 다섯 차례나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4] 결국 1104년 1월, 두 사람은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베르크야루크는 명목상 술탄 지위를 유지하며 바그다드와 이란 중앙부를 다스리고, 타파르는 왕(말리크)으로서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북부, 아르메니아, 디야르 바크르, 모술, 시리아 등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술탄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3][4][5]

호라산트란스옥시아나 지도


이러한 내분 속에서 베르크야루크는 1097년 시리아에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포위하고 마라트 알누만을 약탈했지만, 베르크야루크는 내부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했고, 서로 싸우며 분열된 시리아의 셀주크 왕공들을 도울 여력이나 이유가 부족했다.

1104년 말, 베르크야루크는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하던 중 병에 걸렸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다섯 살 된 아들 멜리크샤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아야즈를 아타베그(후견인)로 임명했다. 그는 아미르들과 아들을 바그다드로 보내고 자신은 이스파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1104년 12월 22일 보루제르드 인근에서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의 유해는 이스파한으로 옮겨져 셀주크 왕가의 무덤에 안치되었다.[7]

베르크야루크 사후, 아들 멜리크샤 2세는 1105년 1월 12일 바그다드에서 잠시 술탄으로 책봉되었으나, 베르크야루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무함메드 타파르가 즉시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1105년 2월 13일 술탄으로 즉위했다. 멜리크샤 2세와 아타베그 아야즈는 술탄위 주장을 포기했다.[14][4]

3. 3. 무함마드 타파르와의 내전

베르크야루크가 아르슬란 아르군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 전체의 군주로 인정받은 후에도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베르크야루크의 재상으로 봉직하다가 해임된 니잠 알물크의 아들 무아이드 알물크는 베르크야루크의 이복동생인 무함마드 타파르의 재상으로 임명된 후, 그를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13] 당시 17세였던 무함마드 타파르의 어린 나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경쟁자들에게 복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니자미야 세력과 이스파한의 유력 가문들도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합류하여 베르크야루크가 이스파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반란은 1098년 또는 1099년에 시작되었으며, 무함마드 타파르가 1093년 베르크야루크로부터 이크타(토지 할당)로 받은 아란의 간자를 근거지로 삼았다. 무함마드 타파르의 군대는 곧 라이를 점령하고 바그다드까지 진군했다. 바그다드의 시흐나(군사 행정관) 사드 알 다울라 가와하라인도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합류했다. 1099년 11월 4일, 무함마드 타파르는 바그다드에서 칼리프 알무스타지르를 압박하여 술탄으로 인정받았다.[13]

이후 무함마드 타파르와 베르크야루크는 5년 동안 전쟁을 벌였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바그다드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베르크야루크를 경멸했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가 호라산에서 무함마드 타파르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타파르는 베르크야루크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계속된 내전으로 베르크야루크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재정도 고갈되었다. 결국 1104년, 재정이 고갈된 베르크야루크는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104년 1월, 양측은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하는 조약을 맺었다. 베르크야루크는 명목상 술탄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무함마드 타파르는 왕으로서 베르크야루크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무함마드 타파르는 이라크 남부, 이란 북부, 디야르바크르, 모술, 시리아를 다스리기로 했고, 베르크야루크는 바그다드이스파한을 포함한 나머지 이란 지역을 다스리기로 하였다.[13][4] 그러나 이 조약은 실제 권력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듬해 이슬람 중앙 지역에서는 베르크야루크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이 주조되지 않았다.

조약 체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크야루크는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하던 중 병에 걸렸고, 1104년 12월 22일, 보루제르드 인근에서 결핵으로 2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7][4] 그의 사후 어린 아들 말리크 샤 2세가 잠시 술탄으로 옹립되었으나, 베르크야루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무함마드 타파르는 즉각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1105년 2월 13일, 말리크 샤 2세를 폐위시키고(일부 기록에는 살해했다고도 한다[4]) 단독 술탄으로 즉위하여 내전은 무함마드 타파르의 승리로 끝났다.[14]

3. 4. 죽음

1104년, 동생 무함메드 타파르와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하면서 명목상 제국 전체의 술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3][4] 그러나 같은 해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하던 중 병을 얻었다.[7]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베르크야루크는 휘하의 아미르들을 불러 모아 다섯 살 된 아들 멜리크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아야즈를 아타베그로 임명했다.[7]

이후 아미르들과 아들을 바그다드로 보낸 뒤, 자신은 이스파한으로 돌아가던 길에 , 보루제르드 인근에서 2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7][4] 그의 유해는 이스파한으로 보내져 셀주크 왕가의 무덤에 안치되었다.[7] 베르크야루크가 사망하자 그의 사후 멜리크샤 2세가 잠시 술탄으로 즉위했으나[14], 곧이어 무함메드 타파르가 바그다드로 진군하여 술탄 자리를 차지했다.[14][4]

참조

[1] 문서 1080年説もある。
[2] Harv 即位・在位に関しては異母弟のマフムード1世と並立していたとされる
[3] Harvnb
[4] Harvnb
[5] Harv 内紛に明け暮れたため、同時期に開始された十字軍に対抗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6] 웹인용 Barkīāroq http://www.iranicaon[...] 2019-06-06
[7] 웹인용 Berkyaruk https://islamansiklo[...] 2019-06-06
[8] 웹인용 Malekšāh http://www.iranicaon[...] 2019-06-06
[9]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 5: The Saljuq and Mongol Perio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10] 웹인용 Tutuş https://islamansiklo[...] 2019-06-09
[11] 서적 The Great Seljuk Empi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12] 서적 The Great Seljuk Empi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13] 서적 The Great Seljuk Empi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14] 웹인용 Muhammed Tapar https://islamansiklo[...] 201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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