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초 자유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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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초 자유군단은 1813년 프로이센 왕국의 장교 뤼초가 조직한 군사 조직으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했다. 학생, 학자뿐 아니라 장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테오도어 쾨르너, 프리드리히 프뢰벨 등이 참여했다. 검은색 제복과 붉은색 안단, 금색 단추의 조합은 공화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독일 국기의 기원이 되었다. 뤼초 자유군단은 여러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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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초 자유군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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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초 자유군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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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813년–1815년 |
국가 | 프로이센 |
종류 | 보병 |
규모 | ~3,600명 |
별칭 | 검은 사냥꾼 (Schwarze Jäger) |
상징색 | 검정-빨강-금색 |
해체 | 1815년 |
주요 지휘관 | 루트비히 아돌프 빌헬름 폰 뤼초 |
2. 기원
1813년 2월, 뤼초 자유군단은 프로이센 왕립 자유군단으로 공식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페르디난트 폰 실 휘하 장교였던 아돌프 폰 뤼초가 창설을 주도했으며, 프로이센 참모총장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의 허가를 받아 조직되었다.[1] 이들은 프랑스 제1제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맞서기 위해 독일 전역(오스트리아 제국 포함)에서 지원병을 모집했다. 뤼초 자유군단의 목표는 소규모 독일 국가들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하도록 돕는 것이었다.[1]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이어진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이 참담한 결과를 낳자, 프로이센 왕국은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파기할 움직임을 보였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과 프리드리히 프리젠은 재상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에게 모든 독일 제후국에서 참전한 지원병이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한 의용군을 모집하도록 촉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13년 1월 29일, 얀과 프리젠은 브레슬라우의 집합 장소에 도착하여 지원병 모집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뤼초 부대는 1813년 2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공식 승인을 받아 "왕립 프로이센 의용 부대"(Königlich Preußisches Freikorps)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뤼초 부대의 통칭인 "뤼초어"나 "검은 엽병"은 1813년 2월 3일의 최고 내각령에 따른 의용 엽병 부대 설립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실제 엽병의 수는 적었다.
2. 1. 지원병 구성
뤼초 자유군단은 학생, 학자뿐만 아니라 장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는데, 실제로는 장인과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했다. 테오도어 쾨르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프리드리히 프리젠,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 등 저명인사들도 이 군단에 합류했다. 유치원 개념을 발전시킨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프뢰벨도 뤼초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1]엘레오노레 프로하스카와 안나 뤼링 같은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뤼초 자유군단에 참전하기도 했다.[1] 1813년 여름 휴전 이후에는, 안드레아스 호퍼와 함께 티롤 해방을 위해 싸웠던 야코프 리들과 요제프 엔네모저 등 티롤 출신 병사들이 뤼초 자유군단에 합류했다.[1]
3. 장비 및 복장
프로이센 왕국은 정규군 지원에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뤼초 자유군단 지원병들은 스스로 장비와 물품을 조달해야 했다. 민간 복장, 낡은 제복, 심지어 노획한 적군 제복까지 염색하여 사용했다. 즉석에서 조달한 의류를 염색하기 위해 검정색이 프로이센 블루 대신 사용되었다. 다른 색상을 사용했다면 의복의 원래 색상이 드러나 군단 전체에 통일성을 해쳤을 것이다. 재료의 품질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2]
경제적인 이유로 보병과 소총 부대는 '리테브카'(Litewka) 또는 폴란드식 프록 코트라 불리는 민간 스타일 트렌치코트(더블 브레스티드, 꼬리 구멍 없음)를 제복으로 채택했고, 이후 포병까지 확대되었다. 튜닉과 바지는 검은색이었고, 깃, 소맷단, 에폴렛, 튜닉 앞 가장자리는 빨간색 장식으로 꾸며졌다. 장교 제복은 깃과 소맷단에 벨벳 장식이 있었고, 튜닉 앞면에 8개의 엠보싱 황동 단추가 2열로 배열되었다.[3]
이후 부대가 사열 보병에 편입되면서, 처음에는 검은색 제복 착용이 계속되었지만, 전후에는 규정대로 감청색으로 변경되었다.
3. 1. 특수 부대 복장
특별한 기술을 가진 지원병들은 고유 제복을 착용하고 특수 부대로 전출되었다. 후사르와 창기병(울란)은 이전 부대에서 가져온 돌만 재킷을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착용했다. 후사르와 창기병은 빨간색을 제외하고 검은색과 흰색만 착용했으며, 장교 제복은 은색 끈과 검은색 모피 장식으로 꾸며졌다. 뤼초 자유군단은 검은색 후사르 제복을 입었다.[3] 티롤 출신 엽병은 녹색 외장이 달린 회색 제복을 유지하였다.[4]
3. 2. 머리 장식
자유군단의 머리 장식은 즉석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다양했다. 보병은 검은색 샤코에 걸쇠, 옆면 끈, 술이 달린 모자를 썼다. 기병은 펠트 샤코를 썼는데, 일부는 판지로 만들어졌지만 검은색과 노란색 장식술이 달려 있었고, 검은색 유포를 씌워 날씨로부터 보호했다. 행진할 때 기병은 검은 말털 술과 검은 끈을 맸다. 티롤 출신들은 고향 지역의 접어 올린 깃털 달린 모자를 계속 썼다.일부 지원병들은 챙 모자나 큰 베레를 쓰기도 했다. 종종 명령에 반하여 시민 또는 학생 단체의 상징을 부착하기도 했다. 뤼초와 일부 군인들은 왕명에 의해 금지되기 전까지 머리 장식에 두개골을 사용했다.[1]
4. 부대 구성
뤼초 자유군단은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된 지원병 군단이었다. 이들은 프로이센이나 호엔촐레른가보다는 독일 전체에 대한 충성심을 가졌다. 많은 병사들이 프랑스군을 독일에서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1]
군단의 평균 규모는 보병 2,900명, 기병 600명, 포병 120명 정도였으며, 전쟁 기간 동안 변동했다.[1]
4. 1. 부대 편성 (1814년 기준)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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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총 2,900명) | 3개 대대 (각 대대는 4개의 사총병중대 및 1개의 엽병 부대), 제2대대는 티롤 출신 저격병 중대 배치 |
기병 (총 600명) | 5개 중대 (대부분 울란, 제4, 5 중대는 후사르), 초기에는 제2 중대가 기마엽병(독일어: Jäger zu Pferde) 부대로 편성 |
포병 (총 120명) | 보병 포병과 기마 포병으로 구성 |
5. 전투
뤼초 자유군단은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용기와 활약을 보였으며, 프랑스군에게 지속적인 골칫거리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군대 후방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대프랑스 동맹의 정규 부대로 편입되어 전투를 수행했다. 군단의 평균 규모는 보병 2,900명, 기병 600명, 포병 120명 정도였다.[1]
나폴레옹은 뤼초 자유군단을 "복수 부대의 단장이자 도적"이라고 부르며 몹시 적대시했다. 1813년 6월 휴전 협정 중, 프랑스의 프랑수아 푸르니에-사를로베즈 장군은 "모두에게 휴전, 당신들을 제외하고!"라고 말하며 뤼초 자유군단을 기습 공격했다. (\키첸 전투).[1]
1814년 파리 조약 이후 뤼초 자유군단은 해산되었다. 보병은 제25보병연대로, 기병은 제6울란연대로 재편되어 프로이센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나폴레옹의 엘바 섬 귀환 이후 벌어진 백일천하 기간 동안 리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다.[1]
5. 1. 주요 인물
- 아돌프 폰 뤼초: 뤼초 자유군단의 지휘관이다. 1813년 1월 29일,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과 프리드리히 프리젠이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의 집합 장소에 도착하여 지원병 모집 및 준비를 마친 후, 뤼초는 2월에 공식 승인을 받아 자유군단을 창설했다.[1] 1815년 리니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1]
- 테오도어 쾨르너: 시인이자 극작가로, 뤼초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군가를 작곡하는 등 사기를 고취시켰다.[1]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와 시를 기고했다.[1] 그의 시들은 아버지에 의해 ''Leyer und Schwerdt''(현대 ''Leier und Schwert,'' “리라와 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 1813년 8월 26일, 가데부쉬 근처 로제노프 숲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1]
-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 '체조의 아버지'로 불리는 체육 교육가이다.[1] 프리드리히 프리젠과 함께 재상 하르덴베르크에게 의용군 모집을 촉구했다.[1]
- 프리드리히 프리젠: 체조 교육가이자 독일 동맹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1]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과 함께 의용군 모집을 촉구했다.[1] 1814년 3월 아르덴에서 사망했다.[1]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다.[1]
- 프리드리히 프뢰벨: 유치원 개념을 창시한 교육자이다.[1]
- 엘레오노레 프로하스카: 남장을 하고 뤼초 자유군단에 몰래 참가한 여성이다.[1]
- 안나 뤼링: 남장을 하고 뤼초 자유군단에 몰래 참가한 여성이다.[1]
6. 유산
뤼초 자유군단은 규모가 작고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독일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유일한 군부대였기 때문에 전쟁 이후 유명해졌다.[2]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뤼초 자유군단을 크게 칭송하며 영웅적인 신화를 만들었다.[2]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에는 많은 뤼초 자유군단 참전 용사들이 참여하여 독일 통일과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이 사용한 검은색 천, 붉은색 안단, 금색 단추 조합의 흑적금 삼색 도안은 이후 독일 공화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2] 1832년 함바흐 축제와 1848년 독일 혁명에서 이 색깔의 깃발이 사용되었으며, 1919년과 1949년에는 독일의 국기의 공식 색상으로 선정되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뤼초 자유군단 관련 전설은 극단주의 단체들에 의해 민족주의에 더 중점을 두고 소환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뤼초 자유군단"(Freikorps Lützow)이라는 이름의 준군사조직이 등장하기도 했다.[2]
뤼초 자유군단의 제복 색깔은 해방 전쟁 후에도 전설이 되었다. 살아남은 원대원들 중 많은 수가 예나 대학교에 복학해서도 이 제복을 계속 입었으며, 1815년에는 이 제복을 입고 범독일적인 연합체인 고대 부르셴샤프트(Urburschenschaft|de)를 창설했다. 이와 같이 검은색, 빨간색, 금색은 1815년 이후 부르셴샤프트 운동의 상징 색깔이 되었고, 통일 염원의 상징으로 대학교에서 대학교로 퍼져나갔다.[6]
6. 1. 영화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German Struggle for Liberty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1896
[2]
웹사이트
Freikorps Lützow
http://www.axishisto[...]
[3]
간행물
Großer Brockhaus
1894
[4]
서적
Entlarvte Geschichte
Berlin
1933
[5]
뉴스
Lützows stille, verlegene Jagd
http://pdf.zeit.de/1[...]
ツァイト
1971-04-09
[6]
서적
dtv-Lexikon politischer Symbole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München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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