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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촐레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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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엔촐레른가는 11세기 슈바벤 지역의 촐레른 백작에서 시작되어, 뉘른베르크 성백을 거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독일 제국 황제를 배출한 유럽의 유서 깊은 가문이다. 프랑켄계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가문으로 이어져 독일 제국을 통치했으며,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몰락했다. 슈바벤계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을 통해 루마니아 왕가를 배출했으나, 현재는 분가들이 존재하며,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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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촐레른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
가문명호엔촐레른 가문
독일어 명칭Haus Hohenzollern (하우스 호엔촐레른)
루마니아어 명칭Casa de Hohenzollern (카사 데 호엔촐레른)
어원호엔촐레른 성
창시자부르크하르트 1세, 촐레른 영주
마지막 통치자독일 및 프로이센: 빌헬름 2세 (1888년–1918년)
루마니아: 미하이 1세 (1927년–1930년, 1940년–1947년)
현재 수장독일 및 프로이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공자 (1994년–현재)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카를 프리드리히 공자 (2010년–현재)
설립 연도1061년 이전
폐지독일 및 프로이센: 1918년 빌헬름 2세의 퇴위
루마니아: 1947년 미하이 1세의 강제 퇴위
관련 국가독일, 루마니아
민족독일인
가문
모가문해당 사항 없음
분가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분가
슈바벤 분가
루마니아 분가
작위
보유 작위독일 황제
촐레른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프로이센 공작
뉘른베르크 성백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로이센 국왕
프로이센 내의 왕
루마니아 국왕
튜턴 기사단 총장
호엔촐레른-헤힝겐 공자 (1869년 이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자 (1869년 이전)
호엔촐레른 공자 (1869년 이후)
뇌샤텔 공자 (1707년–1807년, 1814년–1857년)
루마니아 공자
주요 인물
주요 인물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
빌헬름 1세
빌헬름 2세
기타
영지독일, 프로이센, 루마니아, 러시아

2. 역사

1191년 촐레른의 백작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이후 그의 영지는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에 따라 호엔촐레른가는 프랑켄계(호엔촐레른 본가)와 슈바벤계(지크마링겐 가)로 나뉘었다.

프랑켄계 콘라트는 뉘른베르크, 바이로이트, 안스바흐 등을 통치했다. 1415년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충성하고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공으로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위를 획득하고,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 황제도 겸했다.

슈바벤계는 독일 남서부의 작은 공국들을 통치했다. 1849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칭겐 두 공국은 프로이센에 흡수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루마니아 왕국 국왕이 되었다. 이 왕조는 1947년 루마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존속했다. 호엔촐레른헤칭겐 가문은 1869년 단절되었다.

2011년 5월 11일,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와 모든 왕조적, 역사적 관계를 끊고 가문 이름을 "로므니아 왕가(Familia Regală a României)"로 바꾸었으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모든 작위를 포기했다.[19][20]

2. 1. 기원과 초기 역사 (11세기 - 15세기)

호엔촐레른 가문은 1061년 베르톨트 폰 라이헤나우의 연대기에 처음 등장하며, 슈바벤 지역을 다스리는 촐레른 백작이었다.[7] 1095년, 촐레른의 아달베르트 백작은 검은 숲에 성 베네딕토회 소속 알피르스바흐 수도원(Alpirsbach Abbey)을 세웠다.

1095년 호엔촐레른 가문에 의해 세워진 알피르스바흐 수도원


1111년 호엔촐레른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로부터 백작(Graf) 칭호를 받았다. 119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는 프리드리히 1세 (뉘른베르크 성백)를 뉘른베르크 성백으로 임명하여,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218년(또는 1214년) 영지 분할로 장남 콘라트 1세 (뉘른베르크 성백)는 프랑켄계(호엔촐레른 본가)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 프리드리히 2세 (뉘른베르크 성백)는 슈바벤계(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슈바벤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충실한 봉신이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은 영토를 상당히 확장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부르크그라프 프리드리히 1세(Frederick I, Burgrave of Nuremberg)는 1180년 황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사자공 하인리히에 대항했고, 1192년 황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로부터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프령을 받았다.[6] 1185년경, 그는 뉘른베르크의 부르크그라프 라이프스 콘라트 2세의 딸인 라프스 안 데어 타야 성의 소피아와 결혼했다.[6] 콘라트 2세가 남성 상속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부르크그라프 프리드리히 1세로서 뉘른베르크를 받았다.

1218년, 부르크그라프령은 프리드리히의 장남 뉘른베르크의 콘라트 1세에게 넘어갔고, 그는 1415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획득한 프랑켄 호엔촐레른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6]

14세기부터 호엔촐레른 백작들은 경제적 문제와 내부 갈등으로 이웃 뷔르템베르크 백작들과 슈바벤 동맹 도시들의 압박을 받았다. 1423년 슈바벤 동맹 군대는 호엔촐레른 성을 포위하여 파괴했다. 그럼에도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사촌들과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을 받아 영지를 유지했다. 1535년, 호엔촐레른 백작 카를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서 지크마링겐과 페링겐 백작령을 받았다.[6]

1576년, 호엔촐레른 백작 카를 1세가 사망하면서 백작령은 세 개의 슈바벤 분가로 분할되었다. 아이텔 프리드리히 4세는 호엔촐레른-헤힝겐 칭호와 함께 호엔촐레른 성을 차지했고, 카를 2세는 지크마링겐과 페링겐을, 크리스토프는 하이거로흐를 차지했다. 크리스토프의 가문은 1634년에 대가 끊겼다.

호엔촐레른 성은 헤힝겐 근처에 있으며, 11세기 초 성의 잔해 위에 19세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건설했다.

2. 2.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 (15세기 - 20세기)

호엔촐레른가의 프랑켄 분가는 콘라트 1세(1186–1261)에 의해 창설되었다.[3]

이 가문은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호엔슈타우펜가합스부르크가신성 로마 제국 통치자들을 지지했고, 그 대가로 여러 영토를 하사받았다. 16세기부터 이 가문은 개신교로 개종하여 결혼과 주변 토지 매입을 통해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3]

이 가문은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처음에는 독일의 프랑켄 지역에서 여러 소규모 영토를 획득했다.

연도지역
1331년안스바흐[4]
1340년쿨름바흐[4]



이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지역, 그리고 현재의 폴란드에서 대규모 영토를 획득하며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을 통해 프랑켄 호엔촐레른가는 독일의 작은 군주 가문에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 중 하나로 변모했다.[5]

1701년 1월 8일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칭호는 프로이센 "안"의 왕 칭호에, 1772년 9월 13일부터는 프로이센 "의" 왕 칭호에 부속되었다.[6]

142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뉘른베르크 제국 자유 도시에 뉘른베르크 성과 부르크그라프로서의 권리를 매각했다.[10]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영토는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비아의 일부였으며 가족 소유로 남았다.[10]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프 시절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


뉘른베르크, 안스바흐, 쿨름바흐, 바이로이트 지역(프랑코니아)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프'''

재위 기간이름
1192년–1200년/1204년프리드리히 1세(촐레른 백작(Frederick III))
1204년–1218년프리드리히 2세(아들, 또한 촐레른 백작(Frederick IV))
1218년–1261년/1262년콘라트 1세/3세(형제, 또한 촐레른 백작)
1262년–1297년프리드리히 3세(–1297), 아들
1297년–1300년요한 1세(1279년경–1300년), 아들
1300년–1332년프리드리히 4세(1287년–1332년), 형제
1332년–1357년요한 2세(1309년경–1357년), 아들
1357년–1397년프리드리히 5세(1333년 이전–1398년), 아들



1398년 1월 21일 프리드리히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두 아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재위 기간이름
1397년–1420년요한 3세/1세(아들, 또한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1397년–1427년프리드리히 6세/1세/1세(형제, 또한 선제후 및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또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및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요한 3세/1세가 1420년 6월 11일에 사망한 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국은 프리드리히 6세/1세/1세 아래에서 잠시 재결합되었다. 그는 1398년 이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을 통치했다. 1420년부터 그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변경백이 되었다. 1411년부터 프리드리히 6세는 브란덴부르크의 총독이 되었고, 나중에는 프리드리히 1세로서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이자 변경백이 되었다. 1440년 9월 21일 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 알브레히트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 요한 2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2. 2. 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15세기 - 18세기)

1415년, 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2] 1618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2] 1640년~16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대선제후) 통치 하에 30년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2]

호엔촐레른가의 프랑켄 분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호엔슈타우펜가합스부르크가신성 로마 제국 통치자들을 지지했고, 그 대가로 여러 영토를 하사받았다. 16세기부터 이 가문은 개신교로 개종하여 결혼과 주변 토지 매입을 통해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3]

이 가문은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처음에는 독일의 프랑켄 지역에서 여러 소규모 영토를 획득했다.

연도지역
1331년안스바흐[4]
1340년쿨름바흐[4]



이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지역, 그리고 현재의 폴란드에서 대규모 영토를 획득하며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을 통해 프랑켄 호엔촐레른가는 독일의 작은 군주 가문에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 중 하나로 변모했다.[5]

142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뉘른베르크 제국 자유 도시에 뉘른베르크 성과 부르크그라프로서의 권리를 매각했다.[10]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영토는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비아의 일부였으며 가족의 소유로 남았다.[10]

1701년 1월 8일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칭호는 프로이센 "안"의 왕의 칭호에, 1772년 9월 13일부터는 프로이센 "의" 왕의 칭호에 부속되었다.[6]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5세기 - 18세기)

재위 기간이름
1415년~1440년프리드리히 1세[7]
1440년~1470년프리드리히 2세[7]
1470년~1486년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7]
1486년~1499년요한 치체로[7]
1499년~1535년요아힘 1세 네스토르[7]
1535년~1571년요아힘 2세 헥토어[7]
1571년~1598년요한 게오르크[7]
1598년~1608년요아힘 3세 프리드리히[7]
1608년~1619년요한 지기스문트[7]
1619년-1640년게오르크 빌헬름[7]


2. 2. 2. 프로이센 왕국 (18세기 - 19세기)

1688년부터 프로이센 공작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16571713헤세-카셀의 엘리자베트 헨리에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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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아들1713–174016881740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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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대왕아들1740–1772
1772년부터 프로이센의 왕17121786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1701년, 프리드리히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한 대가로 "프로이센의 왕" 칭호를 얻으며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했다. 당시 절대 왕정 시대의 대부분 군주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8세기 중엽, 프리드리히 2세(대왕)는 계몽 전제군주로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볼테르와 친교가 깊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절대 왕정 하에서 프로이센을 강화하여 "대왕"이라고 불렸다.

18세기 후반, 프리드리히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을 주도했다. (이는 한국의 역사적 관점에서 강대국의 횡포로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2. 2. 3. 독일 제국 (19세기 - 20세기)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로이센 왕국의 수상으로 임명된 후, 빌헬름 1세 (독일 황제) 치하에서 프로이센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통일을 완수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했다.[9] 1871년,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면서 프로이센 왕이 독일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9]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이 짧았다. 이후 빌헬름 2세는 영국 해군에 도전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해군을 건설하려 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사건들을 촉발시켰다. 전쟁의 결과, 독일 제국은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독일 통치는 막을 내렸다.[9]

초상이름왕조적 지위재위 기간출생사망결혼
]]빌헬름 1세1871–1888
]]프리드리히 3세1888
]]빌헬름 2세1888–1918


2. 2. 4. 독일 제국 붕괴 이후

1918년 독일 제국이 붕괴된 이후, 빌헬름 2세의 후손들은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현재 당주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다. 1949년 제정된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은 공화정을 보장하며, 호엔촐레른 가문의 제국 또는 왕실 특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 재통일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예술품 컬렉션과 이전 궁전 내부 일부에 대한 반환을 법적으로 청구하고 있으나, 협상은 아직 진행 중이다. 베를린 궁전은 독일 군주들의 거처였으며 2020년에 재건되었다. 베를린 궁전과 훔볼트 포럼은 베를린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은 명목상 프로이센 국왕이자 독일 황제이며, 역사적으로 오렌지 공의 칭호에 대한 주장도 가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프로이센 공자라고 칭한다.

현재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2011년 8월 27일 이자부르크의 조피 공녀와 결혼했다. 2013년 1월 20일, 그녀는 쌍둥이 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 프란츠 알렉산더와 루이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를 낳았다. 두 아들 중 장남인 카를 프리드리히가 황위 계승자이다.[11]

이름명목상 재위 기간선임자에 대한 관계
빌헬름 2세1918–1941황위 요구자로서 스스로를 계승
황태자 빌헬름1941–1951아들
루이 페르디난트1951–1994아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1994년–현재손자
카를 프리드리히, 프로이센 공자아들 (황위 계승자)


2. 3. 슈바벤계 호엔촐레른 가문 (16세기 - 현재)

1576년, 호엔촐레른의 카를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백작령은 세 개의 슈바벤 분가로 나뉘었다. 아이텔 프리드리히 4세는 호엔촐레른 성과 함께 호엔촐레른-헤힝겐을, 카를 2세는 지크마링겐과 페링겐을, 크리스토프는 하이거로흐를 상속받았다.[6] 이들은 각각 헤힝겐, 지크마링겐, 하이거로흐를 근거지로 삼아 독일 남서부의 작은 영방 국가들을 통치했다. 슈바벤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1695년, 남은 두 개의 슈바벤 분가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협정을 맺어 두 분가 모두 대가 끊길 경우 공국이 브란덴부르크에 귀속되도록 했다. 1848년 혁명의 여파로 호엔촐레른-헤힝겐의 콘스탄틴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카를 안톤은 1849년 12월에 퇴위하고, 이들의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에 흡수되었다.[6] 헤힝겐 분가는 1869년 콘스탄틴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카를 안톤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카를은 1866년 루마니아 공국의 공으로 추대되었고,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947년 미하이 1세 (루마니아 국왕)가 퇴위하면서 루마니아 왕국은 붕괴되었고, 이후 루마니아 왕가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성을 포기했다.

현재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당주는 카를 프리드리히이다.

3. 분가

4. 주요 인물



1061년 베르톨트 폰 라이헤나우의 연대기에 조렐른가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며, 이들은 슈바벤의 일부를 지배했다.

1191년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하인리히 6세에 의해 프리드리히 1세가 뉘른베르크 성백으로 임명되어 프랑켄 지방의 영지를 얻었다. 1218년 (또는 1214년) 영지 분할로 장남 콘라트 1세는 프랑켄 영지와 뉘른베르크 성백 지위를, 차남 프리드리히 2세는 헤힝겐 근교 조렐른 성과 슈바벤 영지, 조렐른 백작 지위를 얻어 각각 프랑켄 계열과 슈바벤 계열의 조상이 되었다.

슈바벤계의 지류에는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과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가문이 있다.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은 슈바벤의 본래 영지를 계속 통치하며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마지막 당주 콘스탄틴은 1849년 후작령을 프로이센 왕국에 양도하고 영방 군주 지위를 포기했으며, 1869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가문이 단절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가문 역시 같은 시기까지 영방 군주 가문으로 이어졌다. 카를 안톤이 1849년 후작령을 양도했지만, 이후 1858년부터 1862년까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카를 안톤의 아들 카롤 1세는 1866년 루마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1881년 루마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1947년 왕정 폐지까지 카를 안톤의 자손이 루마니아 왕가를 이었다. 마지막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와 그 자손은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성을 포기했다.

4. 1. 프랑켄계



1191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동향인 하인리히 6세에 의해 프리드리히 1세가 뉘른베르크 성백으로 임명되었고, 프랑켄 지방의 영지를 얻었다. 1218년 (또는 1214년)에 영지 분할을 실시하여 장남 콘라트 1세가 프랑켄의 영지와 뉘른베르크 성백의 지위를 얻어 프랑켄 계열의 조상이 되었고, 차남 프리드리히 2세는 헤힝겐 근교의 조렐른 성과 슈바벤의 영지, 조렐른 백작의 지위를 얻어 슈바벤 계열의 조상이 되었다.

프랑켄 계열은 프리드리히 1세 시대인 1415년부터 선제후로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다스리게 된다. 1525년에 일족의 방계 알브레히트가 독일 기사단국을 폐지하고 프로이센 공국을 세워 초대 프로이센 공이 되었으며, 그 후손이 끊어지자 1618년에는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을 계승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성립했다. 30년 전쟁 당시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이 지도했다. 1660년올리바 조약으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협력한 대가로 "프로이센의 왕"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1701년에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여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한다.

볼테르와 친교가 깊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전제군주로 군림하며, 절대 왕정 하에서 프로이센을 강화하여 "대왕"이라고 불렸다.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착실하게 영토를 넓혀갔다.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러시아 ·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을 실시했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재상이 되자, 빌헬름 1세 치하에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통일을 달성하여 독일 제국 (정식 국명은 도이체스 라이히)이 탄생하여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 황제빌헬름 2세가 망명하면서 호엔촐레른가의 독일 지배는 막을 내렸다. 빌헬름 2세의 후손은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현재 당주는 빌헬름의 현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이다.

1398년 1월 21일 프리드리히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두 아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요한 3세/1세가 1420년 6월 11일에 사망한 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국은 프리드리히 6세/1세/1세 아래에서 잠시 재결합되었다. 그는 1398년 이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을 통치했다. 1420년부터 그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변경백이 되었다. 1411년부터 프리드리히 6세는 브란덴부르크의 총독이 되었고, 나중에는 프리드리히 1세로서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이자 변경백이 되었다. 1440년 9월 21일 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142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뉘른베르크 제국 자유 도시에 뉘른베르크 성과 부르크그라프로서의 권리를 매각했다.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영토는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비아의 일부였으며 가족의 소유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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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12월 2일, 카를 알렉산더는 자신의 후국의 주권을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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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게른도르프 공국(크르노프)은 1523년에 매입되었다.

예게른도르프 공국은 1622년 페르디난트 3세 황제에 의해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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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부터 왕조의 분가로 인정받았지만,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령은 선제후에게 종속되었으며 독립적인 공국이 된 적은 없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성장, 1600–1795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국왕의 봉토로 설립되었다.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는 튜턴 기사단의 마지막 튜턴 기사단 대총장이자 프로이센의 초대 공작이었다. 그는 안스바흐 가문 출신이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프로테스탄티즘을 공식적인 국교로 채택했다.

1701년부터 프로이센 공작의 칭호는 프로이센의 국왕 칭호에 부착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의 쾨니히스베르크 대관식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의 작위가 수여되었는데, 폴란드 내에서 프로이센 공국이 왕국으로 격상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방의 최고 주권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1701년부터 프로이센 공작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작위는 항상 프로이센 왕의 작위에 부속되었다. 프로이센 공작은 프리드리히 1세로서 왕의 칭호를 채택하여, 그의 왕국 영토가 신성 로마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군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는데, 이는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동의를 얻은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영토의 일부가 폴란드 왕국종주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왕"이 될 수 없었다. 제국 내 브란덴부르크와 다른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지에서 그는 법적으로 황제의 궁극적인 주권 아래 있는 선제후였다. 그러나 이 무렵, 황제의 권위는 황제의 직계 세습 영지 외의 다른 독일 제후들에 대해 형식적인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여전히 법적으로 제국의 일부였고, 프로이센과 인신 연합으로 통치되었지만, 두 국가는 "사실상" 하나로 취급되었다. 왕은 1806년 제국 해체까지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었다. 절대 왕정 시대에 대부분의 군주들은 사치스러운 베르사유 궁전을 가진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모방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1772년, 프로이센 공국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초상이름왕조 지위재위 기간출생사망결혼
프리드리히 1세아들1701–171316571713헤세-카셀의 엘리자베트 헨리에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아들1713–174016881740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프리드리히 2세아들1740–177217121786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4. 2. 슈바벤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Hohenzollern-Sigmaringen)의 통합 문장 (1849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인 슈바벤[12] 가문은 프리드리히 4세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가문은 헤힝겐, 지크마링겐, 하이거로흐에 근거지를 둔 세 영토를 통치했으며, 1623년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슈바벤 방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14세기부터 호엔촐레른 백작들은 경제적 문제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이웃 뷔르템베르크 백작들과 슈바벤 동맹 도시들의 압박을 받았다. 1423년에는 이들의 군대가 호엔촐레른 성을 포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사촌들과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으로 영지를 지켜냈다. 1535년, 호엔촐레른의 카를 1세 (1512–1576)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서 지크마링겐과 페링겐 백작령을 받았다.[6]

1576년 호엔촐레른의 카를 1세 사후 백작령은 세 개의 슈바벤 분가로 나뉘었다. 아이텔 프리드리히 4세는 호엔촐레른-헤힝겐과 호엔촐레른 성을, 카를 2세는 지크마링겐과 페링겐을, 크리스토프는 하이거로흐를 상속받았다. 크리스토프의 가문은 1634년에 대가 끊겼다.

1695년, 남은 두 슈바벤 분가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협정을 맺어 두 분가 모두 대가 끊길 경우 공국이 브란덴부르크에 귀속되도록 했다. 1848년 혁명으로 호엔촐레른-헤힝겐의 콘스탄틴 공작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카를 안톤 공작은 1849년 12월에 퇴위했다. 이후 이 공국들은 프로이센 왕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헤힝겐과 지크마링겐 분가는 프로이센 왕가의 방계 가문으로 공식적인 대우를 받았다.

호엔촐레른-헤힝겐 분가는 1869년에 대가 끊겼다. 이 분가의 후손은 조피 초테크 백작 부인이었고, 그녀는 오스트리아-로트링겐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귀천상혼하였다.

1061년 베르톨트 폰 라이헤나우의 연대기에 조렐른가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며, 이들은 슈바벤의 일부를 지배했다.

1191년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하인리히 6세에 의해 프리드리히 1세가 뉘른베르크 성백으로 임명되어 프랑켄 지방의 영지를 얻었다. 1218년 (또는 1214년) 영지 분할로 장남 콘라트 1세는 프랑켄 영지와 뉘른베르크 성백 지위를, 차남 프리드리히 2세는 헤힝겐 근교 조렐른 성과 슈바벤 영지, 조렐른 백작 지위를 얻어 각각 프랑켄 계열과 슈바벤 계열의 조상이 되었다.

슈바벤계의 지류에는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과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가문이 있다.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은 슈바벤의 본래 영지를 계속 통치하며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마지막 당주 콘스탄틴은 1849년 후작령을 프로이센 왕국에 양도하고 영방 군주 지위를 포기했으며, 1869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가문이 단절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가문 역시 같은 시기까지 영방 군주 가문으로 이어졌다. 카를 안톤이 1849년 후작령을 양도했지만, 이후 1858년부터 1862년까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카를 안톤의 아들 카롤 1세는 1866년 루마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1881년 루마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1947년 왕정 폐지까지 카를 안톤의 자손이 루마니아 왕가를 이었다. 마지막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와 그 자손은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성을 포기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사전 Hohenzollern 2019-05-18
[2] 웹사이트 Hohenzollern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5-18
[3] Dictionary Hohenzollern https://web.archive.[...] Oxford University Press
[4] 사전 Hohenzollern 2019-05-18
[5] 웹사이트 Encyclopædia Britannica. Hohenzollern Dynasty https://www.britanni[...]
[6] 간행물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C.A. Starke Verlag
[7] 서적 Jeep, John. Medieval Germany: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8] 서적 Geschichte der Grafen von Zollern-Hohenberg https://archive.org/[...] Gebrüder Scheitlin 2013-02-01
[9] 서적 The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 Penguin
[10] 논문 Confessional policy and the limits of state action: Frederick William III and the Prussian Church Union 1817–40
[11] 웹사이트 Official Website of the House of Hohenzollern: Prinz Georg Friedrich von Preußen http://www.preussen.[...] 2014-02-07
[12] 간행물 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
[13] 서적 L'Allemagne Dynastique, Tome V – Hohenzollern-Waldeck Laballery
[14] 뉴스 Romania's former King Michael ends ties with German Hohenzollern dynasty https://www.google.c[...] The Canadian Press 2011-05-11
[15] 웹사이트 "King Michael I broke ties with historical and dynastic House of Hohenzollern" in Adevarul – News Bucharest, 10 May 2011 https://translate.go[...]
[16] 뉴스 Long live the ex-king; The former King Michael is received warmly in parliament https://www.economis[...] economist.com 2011-10-25
[17] 뉴스 The fall of the House of Hohenzollern https://www.irishtim[...] 2019-07-25
[18] 뉴스 Kaiser's descendant loses court battle to regain 13th-century castle https://www.theguard[...] 2019-06-25
[19] 뉴스 King Michael I anounces the severance of all historical and dynastic ties to the House of Hohenzollern http://www.adevarul.[...] Adevarul 2011-05-11
[20] 뉴스 The history of the conflicts between the Royal House of Romania and the Princely House of Hohenzollern http://www.adevarul.[...] Adevarul 201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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