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염
1. 개요
류염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문신이다. 1378년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1383년 과거에 급제했다. 고려 창왕 때 서연시독을 지냈으나, 우왕과 창왕이 폐위될 때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공양왕 때 사면되었다. 조선 건국 후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판한성부사, 판진주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등을 거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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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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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 -
박성빈 (조선)
박성빈은 1871년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으며, 아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
음서 -
신기질
신기질은 남송의 장군이자 시인으로, 금나라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 후 남송에 귀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북벌 정책으로 인해 주류 세력과 갈등하며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만년에는 은거하며 호방하고 비장미 넘치는 가사풍의 시를 썼으며 소식과 함께 "소신"으로 불린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고려 말 생애
1388년 (창왕 즉위년) 권근, 정도전과 함께 서연시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저와 변안열의 옥사로 우왕과 창왕이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장인 이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 공양왕의 어머니 국대비 왕씨의 생일을 맞아 사면되었다.
2.1. 관직 생활
1378년 음보(蔭補)로 천거되어 판관(判官)을 지내다가, 1383년 우왕 9년에 병과(丙科) 2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1388년 창왕 즉위년에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있었는데, 같은 해 즉위한 창왕이 서연(書筵)을 개설하자 좌대언(左代言) 권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도전과 함께 서연시독(書筵侍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저(金佇)와 변안열의 옥사로 우왕과 창왕 부자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을 때, 장인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 공양왕 3년에 공양왕의 어머니인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의 생일을 맞아 사면되었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 1402년 태종 2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제도가 복구되자 전라도(全羅道)의 도관찰출척사에 임명되었다.
1417년 태종 17년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로 재임 중 사헌부(司憲府)로부터 군인을 함부로 뽑고 기생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는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그와 동년(同年)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관직이 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2.2. 유배 생활
1389년 김저와 변안열의 옥사로 우왕과 창왕 부자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을 때, 장인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 공양왕의 어머니인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의 생일을 맞아 사면되었다.
3. 조선 초 생애
1378년 음보(蔭補)로 천거되어 판관(判官)을 지냈다. 1383년 우왕 9년 병과(丙科) 2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1388년 창왕 즉위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이었다. 같은 해 창왕이 서연(書筵)을 개설하자 좌대언(左代言) 권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도전과 함께 서연시독(書筵侍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김저(金佇)와 변안열의 옥사로 우왕과 창왕 부자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을 때, 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 공양왕 3년, 공양왕의 어머니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의 생일을 맞아 사면되었다.
이후 조선 건국 초기에는 관직 임명 기록이 상세히 나타나지 않다가, 1402년 도관찰출척사 제도가 복구되면서 등용되기 시작한다.
3.1. 관직 생활
1402년 (태종 2) 도관찰출척사 제도가 복구되자 전라도 도관찰출척사에 임명되었다.
1417년(태종 17)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판진주목사로 재임 중 사헌부로부터 군인을 함부로 뽑고 기생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는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그와 동년(同年)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3.2. 청백리 선정
관직이 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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